Lim Myungmuk'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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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비극 2편이 올라왔네요. 트럼프의 JCPOA 파기부터 오늘까지 어떤 파국이 펼쳐졌나를 써보았습니다.
"이러한 요인들이 중첩하며 2018년 미국은 협정 공동 당사국인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의 반발을 아랑곳하지 않고 JCPOA를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이란으로서는 끝나지 않는 인고의 계절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애당초 이란은 트럼프 대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란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JCPOA를 준수하고, 핵 문제가 끝나면 그다음 문제로 또 다른 협상을 하는 식의 단계적 접근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단번에 모든 문제에서 이란이 일방적 양보를 먼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거리 미사일 전력도 제한하고, 우라늄 농축을 전면 금지하고, 저항의 축도 모두 포기해야 했다. 이는 주권 국가로서 이란이 받아들이기 매우 어려운 선택이었다."
"이러한 모순이 누적되는 가운데, SNS에서는 ‘테헤란의 부잣집 아이들’이라는 해시태그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혁명수비대와 성직자 고위 간부의 자제들이 테헤란 북부 부촌에서 스포츠카를 몰고, 히잡도 쓰지 않은 채 수영장에서 고급 양주를 마시며 파티를 즐기는 사진들이 잇따라 공개된 것이다.
이 이미지들은 정권의 위선을 고발하는 상징이 되었고, 전 사회적 분노를 부르기에 충분했다. 2019년 유류비 인상 시위에 대한 유혈 진압과, 이어진 솔레이마니 피살 직후의 민항기 격추 사건(우크라이나 항공 752편 사건)이 연달아 알려지면서, 이란 사회에 누적돼 있던 불만은 폭발 직전까지 치솟았다."
"미-이란 관계사는 비극(tragedy)이다. 미 제국주의나 하메네이 같은 사악한 악당이 선량한 이란 국민을 학대하고, 그 결과 악이 승리하는 결말로 끝난다는 의미의 비극이 아니다. 주인공이 한계를 극복하고 운명을 넘어서고자 발버둥 치지만, 인간의 미욱함과 신의 농간,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결국에는 좌절하고 마는 그런 종류의 비극이다. 그중에서도 주인공을 꼽자면 역시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개혁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1979년 혁명의 대의에 헌신했고, 그 혁명 국가가 국민을 억압하는 모습에 깊은 상처를 받았고, 이란이 국제사회에 복귀하도록 노력했다. 또한 경제 발전으로 중산층이 성장해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더 보장하고, 그러면서도 이슬람 공화국의 정신을 지키는 좁은 길을 찾고자 분투했다. 모하마드 하타미, 하산 로하니, 자바드 자리프로 대표되는 정치인들이 그러했고, 압둘카림 소루쉬로 대표되는 지식인들이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은 네오콘의 냉랭한 시선, 솔레이마니의 무거운 침묵, 하메네이의 길어지는 장고 속에 고통받았다. 오바마가 핵 협상을 받아주었을 때 빛이 찾아드는 듯했으나, 누구도 예상치 못한 트럼프의 당선은 그들을 다시 구렁텅이로 몰았다. 2025년이 되었을 때, 이란에서도 이란 바깥에서도 누구도 더는 개혁파를 찾지 않았다. 보수파들은 그들을 미국에 투항한 자유주의자들이라고 비난했고, 청년층은 그들이 결정적인 순간에는 정권의 시민 학살에 눈을 감는 위선자들이라며 저주했다."
테헤란의 안개: 개혁이 늘 비극으로 끝나는 이유
입력 2026.01.26
- 트럼프의 배신: 찢겨진 핵 합의서와 중산층의 추락
- 돌아온 솔레이마니: '저항의 축'이 자초한 고립무원
- 테헤란의 부잣집 아이들: 위선에 분노한 'MZ 이란'
- 비극의 피날레: 개혁파는 죽었고, 안개만이 남았다
1부가 이란이 쥔 '희망의 끈'을 이야기했다면, 2부는 그 끈이 끊어지는 소리로 시작한다. 2016년 트럼프의 당선은 이란의 운명을 송두리째 뒤흔든 '데우스 엑스 마키나(갑작스러운 개입)'였다. 어렵게 맺은 핵 합의는 휴지 조각이 되었고, 국제사회 복귀를 꿈꾸던 이란 중산층은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비극의 원인이 외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2부는 외부의 압박과 맞물려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 이란 내부의 모순을 파고든다. '테헤란의 부잣집 아이들'로 대변되는 정권의 위선, 히잡을 벗어 던진 청년 세대의 분노, 그리고 이 모든 혼란을 막아보려다 양쪽 모두에게 버림받은 개혁파 정치인들의 쓸쓸한 퇴장까지.
필자는 묻는다. 하타미와 로하니가 꿈꿨던 '제3의 길'은 왜 실패했는가? 2026년 오늘, 테헤란 거리를 메운 시신 가방은 단순한 진압의 결과가 아니라, 40년간 누적된 이란 현대사가 빚어낸 예정된 파국임을 증명한다. 안개 속에 갇힌 이란의 내일을 가늠해보는 서늘한 비극의 2막이다.[편집자주]
이란 국기의 모습 // 사진=Freepik
비극의 세 번째 뿌리: 트럼프 당선
핵 협상의 성공으로 이란 중산층들은 가뭄의 단비를 맞이했다. 혁명수비대 고위 간부들이 통제하는 국영 수출기업들 이외에 수많은 민간 기업이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창출하려고 세계 각지를 뛰어다녔다. 경제 성장에 힘입어 국민은 중산층으로 계층 이동이 활발해졌으며, 국내 소비도 크게 진작되었다. 솔레이마니 장군이 백척간두에 놓인 시아파 세계를 구한 군사 영웅이었다면 로하니 대통령과 자리프 외무장관은 외교를 바탕으로 민생을 살찌운 내치와 외교의 영웅이었다. 국내 여론에서 개혁파 지지세가 빠르게 뛰었다.
이 시기 JCPOA(포괄적 공동 행동계획)를 바탕으로 이란은 IAEA(국제원자력기구) 시찰을 받기 시작했다. 이란은 이제 중국, 러시아뿐 아니라 미국, 독일, 프랑스, 한국과도 가까이 지내며 국제사회의 ‘정상 국가’임을 과시했다. 우리나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테헤란에 방문해 히잡(루사리)을 착용하고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와 만났던 때가 바로 이 무렵, 2016년 5월이었다.
그러나 미국 정가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흘렀다. 2016년 11월, 소위 ‘러스트벨트의 반란’으로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처참히 깨지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공화당의 아웃사이더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란 핵 협상이 오바마의 ‘퍼주기’이자 ‘항복’이었다고 주장한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은 이란에 불길한 먹구름을 드리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대로, 트럼프는 당선된 후 JCPOA를 파기했다. 트럼프가 갑자기 JCPOA를 파기한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자신을 오바마와 비교하기 좋아했던 그의 성격이 있다. ‘거래와 협상’에 능하다며 자신을 포장한 트럼프는 자신이 오바마보다 ‘더 나은 거래’를 이란과 만들 수 있다며 소매를 걷어 올렸다.
둘째로 미국 정가의 여론이 애초부터 핵 협상에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공화당은 물론이고 네오콘과 세계관을 상당 부분 공유하는 민주당 매파, 예컨대 로버트 케이건과 빅토리아 눌런드 같은 인물들도 핵 협상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니키 헤일리, 존 볼턴, 딕 체니는 말할 것도 없었다.
셋째로 어쩌면 가장 중요하게도, 이란을 견제하고자 했던 경쟁국들의 압박이 작용했다.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오바마가 미국의 전통적 우방국인 자신들을 배신하고 이란에 붙었다며 분개했다. ‘저항의 축’ 세력은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어 이란의 중동 패권 야심을 뒷받침하는데, 미국은 그냥 중동을 떠나면 그만일지 몰라도 이란의 위협에 일상적으로 대면해야 하는 지역 국가들에 너무 무책임하다는 게 분노의 요체였다.
이전 협상에서 오바마는 이들을 미국과 단절할 수 없는 ‘잡은 고기’라고 생각했고, 이란은 이들을 미국의 ‘속국’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기에 사우디와 이스라엘은 소외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자, 복수의 칼을 간 사우디와 이스라엘은 공화당에 막대한 자금으로 로비를 진행했다. 이러한 요인들이 중첩하며 2018년 미국은 협정 공동 당사국인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의 반발을 아랑곳하지 않고 JCPOA를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이란으로서는 끝나지 않는 인고의 계절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애당초 이란은 트럼프 대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란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JCPOA를 준수하고, 핵 문제가 끝나면 그다음 문제로 또 다른 협상을 하는 식의 단계적 접근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단번에 모든 문제에서 이란이 일방적 양보를 먼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거리 미사일 전력도 제한하고, 우라늄 농축을 전면 금지하고, 저항의 축도 모두 포기해야 했다. 이는 주권 국가로서 이란이 받아들이기 매우 어려운 선택이었다.
저항의 축은 물론 문제가 있었지만, 사실 아랍의 봄 직후에 중동의 모든 주요 국가가 대리 세력을 활용한 쟁투를 벌였다. 게다가 인도, 파키스탄, 러시아, (비공식이지만) 이스라엘이라는 핵보유국에 둘러싸인 이란이 미사일 전력이라는 억지력마저 해체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이는 국내 정치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반미, 반제국주의 혁명을 신조로 삼는 혁명수비대 강경파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민족적 굴욕이었다.
이런 일방적 파기와 강압적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이란은 고통스럽게 경제 제재 구조로 복귀했다. 하메네이는 2011년에 핵 문제로 제재가 본격화할 때 처음 언급한 개념인 ‘저항 경제’를 다시 꺼내 들었다. 사실상 이제 자력갱생과 고난의 행군이 다시 시작된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이란 중산층들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국제사회와 재연결되고, 중산층이 성장하고, 개혁파 정치인들이 힘을 얻어서 이슬람 공화국의 답답한 구조를 바꾸는 긍정적 선순환을 기대했건만 그 모든 희망이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정치적 실망보다 더 가혹한 것이 ‘최대 압박 정책’이 초래한 경제적 파탄이었다. 제재가 해제되며 작동했던 무역, 물류, 투자 네트워크는 산산조각 났다.
이란은 사실상 미국 제재를 우회하면서 자국 에너지를 소화해 주는 국가인 중국을 거의 유일한 생명줄로 삼으며 고난을 견뎌야만 했다. 그런 중국도 제재, 물류 안전, 보험 등 각종 위험을 언급하며, 계산기를 열심히 두드려 이란산 석유 가격을 최대한 깎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민간 경제는 위축되고, 중산층에 올라선 가계는 다시 하층으로 굴러떨어졌다. 좌절이 이란 사회를 감도는 상황에서, 이란-이라크 전쟁의 기억이 생생한 혁명 세대는 “이 정도 고난은 견뎌낼 수 있다. 우리는 더욱 가혹한 조건에서도 혁명에 승리했다”라고 외치며 ‘임전 태세’에 나섰다.
이제 전설적 장군 솔레이마니가 전장에 귀환했다. 솔레이마니는 자신과 쿠드스군 간부층이 공들여 육성한 대리 세력들을 총동원해서 이라크와 시리아의 미군기지,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유산업단지를 괴롭혔고, 중동 각지에서 그림자 전쟁에 나섰다. 훈련된 고속정 함대를 가진 혁명수비대 해군이 페르시아만에 출몰해서 호르무즈 위기를 지속적으로 일으켰다.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규모의 첨단 무기를 구매해 정예병을 꾸렸다고 자신만만했던 사우디군은 솔레이마니가 배후 지휘하는 예멘 후티에게 주요 전투에서 굴욕적으로 패배했다. 이란은 드론과 미사일을 섞어서 주요 감시 네트워크를 우회하고, 종말단계에서 방공망을 압도하는 현대적인 공습 전술을 실전에서 실험하며 사우디를 사실상 압도했다.
적군에게는 저승사자나 다름없는 솔레이마니의 등장에 미국은 다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2019년 연말에 솔레이마니는 미국과 사우디가 이라크 내의 반이란 여론을 활용하려는 시도를 막아내고 미군 기지를 흔드는 작전을 지휘하고 있었다. 결국에 미국은 바그다드 공항에서 기습적인 암살 작전을 벌여 솔레이마니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란인 중 혁명을 지지하는 이들은 모두 거리에 나와 그를 추모하며 미국에 대한 복수를 다시 한번 맹세했다.
그러나 전장에서의 승리가 평범한 이란 국민의 번영을 보장해 줄 수는 없었다. 사우디는 이란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었고 무함마드 빈 살만은 굴욕을 겪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권력 경쟁자들을 숙청하였고, 아람코가 벌어들인 자본을 바탕으로 국가 개조 프로젝트에 나섰다. 인접한 카타르의 도하,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 아부다비 같은 곳은 석유 자본을 쏟아부은 초현대 도시로 거듭났고, 중상류층 이상의 이란인들은 정체되고 답답한 이란 사회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페르시아만 건너편에서 소비사회의 다디단 공기를 음미할 수 있었다.
굳이 걸프에 가지 않더라도 SNS를 통해 전 세계와 연결된 이란 청년층은 K-POP 아이돌, 미국 드라마, 일본 애니메이션을 소비하고 각종 밈을 공유하며 새로운 종류의 정치적 주체로 변모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시아파 이슬람마저도 지긋지긋하다는 이란의 90년대생과 00년대생들이 아버지 세대가 열광하는 시아파 성지 수호, 군복을 입은 전사들이 외치는 ‘저항의 축’ 정신에 공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더욱이 트럼프의 최대 압박 정책으로, 정치적으로 정부를 지지하던 이란 사회의 하층까지도 심대한 타격을 입으며 정치 불안도 커져만 갔다. 2017년에는 물가 상승과 생활고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본격적으로 폭발해 정부를 뒤흔들었고, 유사한 시위는 2018년에도, 2019년에도 발생하며 계속되었다. 2009년 녹색 운동이 교육받은 중산층 청년 위주로 전개된 자유주의 운동이었다면, 2017~2019년을 강타한 생활고 시위는 아랍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랍의 봄과 훨씬 더 유사했다. 이슬람 공화국 입장에서는 훨씬 더 불길한 신호나 다름없었다.
그동안 이란의 정부는 자유주의적 중산층에 ‘반혁명적’이라는 낙인을 씌우고, 정부 보조금 의존도가 높은 하층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비교적 수월하게 저항을 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피억압자의 혁명’을 기치로 내세워 탄생한 정권이, 하층민의 민생고에서 비롯된 반란에 동일한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
지난 13일 디트로이트를 방문한 트럼프 대통령 // 사진=백악관 홈페이지
테헤란의 두 얼굴: ‘저항 경제’의 그늘과 금수저들의 파티
이러한 모순이 누적되는 가운데, SNS에서는 ‘테헤란의 부잣집 아이들’이라는 해시태그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혁명수비대와 성직자 고위 간부의 자제들이 테헤란 북부 부촌에서 스포츠카를 몰고, 히잡도 쓰지 않은 채 수영장에서 고급 양주를 마시며 파티를 즐기는 사진들이 잇따라 공개된 것이다.
이 이미지들은 정권의 위선을 고발하는 상징이 되었고, 전 사회적 분노를 부르기에 충분했다. 2019년 유류비 인상 시위에 대한 유혈 진압과, 이어진 솔레이마니 피살 직후의 민항기 격추 사건(우크라이나 항공 752편 사건)이 연달아 알려지면서, 이란 사회에 누적돼 있던 불만은 폭발 직전까지 치솟았다.
정통성 위기가 점차 가시화되는 가운데 하메네이가 택할 수 있는 수단은 많지 않았다. 대화가 사실상 불가능한 트럼프 행정부와 여전히 대결 구도를 취하면서, 중국·러시아와 연대를 강화하고, 농업, 제조업, IT, 전자상거래 등 사회 제 영역에서 박차를 가했다. 역설적으로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국제 무역에서 사실상 배제되는 가운데 이란은 혁명기에 건설한 뛰어난 공교육 인프라를 바탕으로 계속해서 엔지니어를 배출했고, 이들은 석유와 천연가스 수출 대신에 산업 기반을 국내화하는 데 투입되었다. 이에 따라 이란의 독자 기술력은 다른 중동 국가들을 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여전히 거대한 자금이 투자되는 국방 연구의 외부효과로 기초과학과 응용 기술의 발전도 잇따랐다.
이란은 크림반도 병합 이후 미국과 대결 구도에 나선 러시아, 트럼프 행정부와 무역전쟁에 나선 중국 등의 국가와 암호화폐와 바터무역을 통해 제한적이나마 접속할 수 있었다. 이란은 이렇게 카스피해, 중앙아시아, 페르시아만을 생명선으로 삼아 상황이 호전되기까지 기다렸다. 오바마와 이룬 합의가 트럼프에 의해 쓰레기통에 갔다면, 다시 민주당 정부가 돌아와서 조심스럽게 관계 정상화를 모색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때까지만 버틴다면 다시 국민에게 풍요를 돌려줄 수 있으리라.
더는 회복될 수 없다. 달라진 시대
2020년 11월, 미국 대선은 다시금 민주당을 이끄는 조 바이든의 손을 들어주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인 가운데 일어난 사건이었다. 팬데믹은 다른 나라도 물론이지만, 이란에게는 특히 더 심각한 피해를 주었다. 제재 국면에서 보건, 의료 장비를 제대로 수입할 수 없었고, 힘겹게 자급에 의존해야만 했다. 그나마 핵물리학자인 모센 파크리자데가 지휘하는 과학계가 진단 키트를 자체적으로 개발하는 등 이란의 과학 기반이 없었다면 고통은 더 가중되었을 것이었다.
게다가 이란은 팬데믹 발원지였던 중국과 긴밀하게 교류한 탓에 이탈리아, 한국과 함께 거의 최초부터 대규모 감염이 시작된 국가 중 하나였다. 여전히 공동체 문화가 강하고 야외 문화가 발달한 이란에서 봉쇄와 개인화된 삶의 강제는 특히 더 사회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하고 민주당이 이란과의 핵 협상을 복원할 수 있다는 의사를 내비치자, 이란 사회에는 다시금 기대가 감돌았다. 그러나 2021년 대선에서 보수파 성향의 에브라힘 라이시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미·이란 양국 행정부 사이에는 다시 불협화음이 발생했다.
로하니는 2017년까지 핵 협상 성공으로 민생을 살린 대통령으로 평가받았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최대 압박 정책이 시작되자 경제적 곤경을 피할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군과 경찰이 사회 불안을 가차 없이 진압하게 되며 그 정치적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다. 개혁파와 자유주의 성향 유권자들이 대거 투표를 포기한, 역대급 저조한 투표율 속에서 애초부터 로하니 노선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해 온 보수파가 우세를 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물론 라이시 역시 핵 협상의 필요성 자체는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회의 동의를 거쳐야만 완화가 가능한 미국의 제재 체계, 그리고 한 차례 일방적인 합의 파기를 겪은 뒤 훨씬 더 신중해진 이란 보수파의 태도는, 향후 협상이 JCPOA 시기보다 훨씬 험난한 과정을 거치게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JCPOA 파기에 결정적 역할을 한 미국의 역내 우방국,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견제도 다시금 넘어야 할 산이었다.
2022년에는 불운하게도 협상 재개의 문을 다시 닫아버리는 사건이 재차 발생했다. 2022년 2월 24일에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지정학적 긴장이 극에 달했다. 미국과 유럽연합의 모든 관심이 우크라이나 방어로 쏠리는 가운데 중동에서 복잡한 외교적 과제를 해결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란은 최대 압박 정책 이후 국가 생존에 갈수록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러시아를 지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란은 자국이 자랑하는 ‘샤헤드 드론’을 러시아에 대규모로 지원했고, 러시아는 샤헤드를 ‘게란 드론’으로 개조해서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서방 국가들이 이란의 샤헤드 드론 공여를 규탄하면서, 이란과 국제사회 관계 개선의 장애물에는 러시아 문제라는 장벽도 추가되었다.

- 트럼프의 배신: 찢겨진 핵 합의서와 중산층의 추락
- 돌아온 솔레이마니: '저항의 축'이 자초한 고립무원
- 테헤란의 부잣집 아이들: 위선에 분노한 'MZ 이란'
- 비극의 피날레: 개혁파는 죽었고, 안개만이 남았다
1부가 이란이 쥔 '희망의 끈'을 이야기했다면, 2부는 그 끈이 끊어지는 소리로 시작한다. 2016년 트럼프의 당선은 이란의 운명을 송두리째 뒤흔든 '데우스 엑스 마키나(갑작스러운 개입)'였다. 어렵게 맺은 핵 합의는 휴지 조각이 되었고, 국제사회 복귀를 꿈꾸던 이란 중산층은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비극의 원인이 외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2부는 외부의 압박과 맞물려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 이란 내부의 모순을 파고든다. '테헤란의 부잣집 아이들'로 대변되는 정권의 위선, 히잡을 벗어 던진 청년 세대의 분노, 그리고 이 모든 혼란을 막아보려다 양쪽 모두에게 버림받은 개혁파 정치인들의 쓸쓸한 퇴장까지.
필자는 묻는다. 하타미와 로하니가 꿈꿨던 '제3의 길'은 왜 실패했는가? 2026년 오늘, 테헤란 거리를 메운 시신 가방은 단순한 진압의 결과가 아니라, 40년간 누적된 이란 현대사가 빚어낸 예정된 파국임을 증명한다. 안개 속에 갇힌 이란의 내일을 가늠해보는 서늘한 비극의 2막이다.[편집자주]
이란 국기의 모습 // 사진=Freepik비극의 세 번째 뿌리: 트럼프 당선
핵 협상의 성공으로 이란 중산층들은 가뭄의 단비를 맞이했다. 혁명수비대 고위 간부들이 통제하는 국영 수출기업들 이외에 수많은 민간 기업이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창출하려고 세계 각지를 뛰어다녔다. 경제 성장에 힘입어 국민은 중산층으로 계층 이동이 활발해졌으며, 국내 소비도 크게 진작되었다. 솔레이마니 장군이 백척간두에 놓인 시아파 세계를 구한 군사 영웅이었다면 로하니 대통령과 자리프 외무장관은 외교를 바탕으로 민생을 살찌운 내치와 외교의 영웅이었다. 국내 여론에서 개혁파 지지세가 빠르게 뛰었다.
이 시기 JCPOA(포괄적 공동 행동계획)를 바탕으로 이란은 IAEA(국제원자력기구) 시찰을 받기 시작했다. 이란은 이제 중국, 러시아뿐 아니라 미국, 독일, 프랑스, 한국과도 가까이 지내며 국제사회의 ‘정상 국가’임을 과시했다. 우리나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테헤란에 방문해 히잡(루사리)을 착용하고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와 만났던 때가 바로 이 무렵, 2016년 5월이었다.
그러나 미국 정가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흘렀다. 2016년 11월, 소위 ‘러스트벨트의 반란’으로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처참히 깨지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공화당의 아웃사이더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란 핵 협상이 오바마의 ‘퍼주기’이자 ‘항복’이었다고 주장한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은 이란에 불길한 먹구름을 드리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대로, 트럼프는 당선된 후 JCPOA를 파기했다. 트럼프가 갑자기 JCPOA를 파기한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자신을 오바마와 비교하기 좋아했던 그의 성격이 있다. ‘거래와 협상’에 능하다며 자신을 포장한 트럼프는 자신이 오바마보다 ‘더 나은 거래’를 이란과 만들 수 있다며 소매를 걷어 올렸다.
둘째로 미국 정가의 여론이 애초부터 핵 협상에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공화당은 물론이고 네오콘과 세계관을 상당 부분 공유하는 민주당 매파, 예컨대 로버트 케이건과 빅토리아 눌런드 같은 인물들도 핵 협상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니키 헤일리, 존 볼턴, 딕 체니는 말할 것도 없었다.
셋째로 어쩌면 가장 중요하게도, 이란을 견제하고자 했던 경쟁국들의 압박이 작용했다.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오바마가 미국의 전통적 우방국인 자신들을 배신하고 이란에 붙었다며 분개했다. ‘저항의 축’ 세력은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어 이란의 중동 패권 야심을 뒷받침하는데, 미국은 그냥 중동을 떠나면 그만일지 몰라도 이란의 위협에 일상적으로 대면해야 하는 지역 국가들에 너무 무책임하다는 게 분노의 요체였다.
이전 협상에서 오바마는 이들을 미국과 단절할 수 없는 ‘잡은 고기’라고 생각했고, 이란은 이들을 미국의 ‘속국’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기에 사우디와 이스라엘은 소외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자, 복수의 칼을 간 사우디와 이스라엘은 공화당에 막대한 자금으로 로비를 진행했다. 이러한 요인들이 중첩하며 2018년 미국은 협정 공동 당사국인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의 반발을 아랑곳하지 않고 JCPOA를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이란으로서는 끝나지 않는 인고의 계절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애당초 이란은 트럼프 대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란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JCPOA를 준수하고, 핵 문제가 끝나면 그다음 문제로 또 다른 협상을 하는 식의 단계적 접근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단번에 모든 문제에서 이란이 일방적 양보를 먼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거리 미사일 전력도 제한하고, 우라늄 농축을 전면 금지하고, 저항의 축도 모두 포기해야 했다. 이는 주권 국가로서 이란이 받아들이기 매우 어려운 선택이었다.
저항의 축은 물론 문제가 있었지만, 사실 아랍의 봄 직후에 중동의 모든 주요 국가가 대리 세력을 활용한 쟁투를 벌였다. 게다가 인도, 파키스탄, 러시아, (비공식이지만) 이스라엘이라는 핵보유국에 둘러싸인 이란이 미사일 전력이라는 억지력마저 해체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이는 국내 정치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반미, 반제국주의 혁명을 신조로 삼는 혁명수비대 강경파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민족적 굴욕이었다.
이런 일방적 파기와 강압적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이란은 고통스럽게 경제 제재 구조로 복귀했다. 하메네이는 2011년에 핵 문제로 제재가 본격화할 때 처음 언급한 개념인 ‘저항 경제’를 다시 꺼내 들었다. 사실상 이제 자력갱생과 고난의 행군이 다시 시작된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이란 중산층들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국제사회와 재연결되고, 중산층이 성장하고, 개혁파 정치인들이 힘을 얻어서 이슬람 공화국의 답답한 구조를 바꾸는 긍정적 선순환을 기대했건만 그 모든 희망이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정치적 실망보다 더 가혹한 것이 ‘최대 압박 정책’이 초래한 경제적 파탄이었다. 제재가 해제되며 작동했던 무역, 물류, 투자 네트워크는 산산조각 났다.
이란은 사실상 미국 제재를 우회하면서 자국 에너지를 소화해 주는 국가인 중국을 거의 유일한 생명줄로 삼으며 고난을 견뎌야만 했다. 그런 중국도 제재, 물류 안전, 보험 등 각종 위험을 언급하며, 계산기를 열심히 두드려 이란산 석유 가격을 최대한 깎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민간 경제는 위축되고, 중산층에 올라선 가계는 다시 하층으로 굴러떨어졌다. 좌절이 이란 사회를 감도는 상황에서, 이란-이라크 전쟁의 기억이 생생한 혁명 세대는 “이 정도 고난은 견뎌낼 수 있다. 우리는 더욱 가혹한 조건에서도 혁명에 승리했다”라고 외치며 ‘임전 태세’에 나섰다.
이제 전설적 장군 솔레이마니가 전장에 귀환했다. 솔레이마니는 자신과 쿠드스군 간부층이 공들여 육성한 대리 세력들을 총동원해서 이라크와 시리아의 미군기지,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유산업단지를 괴롭혔고, 중동 각지에서 그림자 전쟁에 나섰다. 훈련된 고속정 함대를 가진 혁명수비대 해군이 페르시아만에 출몰해서 호르무즈 위기를 지속적으로 일으켰다.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규모의 첨단 무기를 구매해 정예병을 꾸렸다고 자신만만했던 사우디군은 솔레이마니가 배후 지휘하는 예멘 후티에게 주요 전투에서 굴욕적으로 패배했다. 이란은 드론과 미사일을 섞어서 주요 감시 네트워크를 우회하고, 종말단계에서 방공망을 압도하는 현대적인 공습 전술을 실전에서 실험하며 사우디를 사실상 압도했다.
적군에게는 저승사자나 다름없는 솔레이마니의 등장에 미국은 다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2019년 연말에 솔레이마니는 미국과 사우디가 이라크 내의 반이란 여론을 활용하려는 시도를 막아내고 미군 기지를 흔드는 작전을 지휘하고 있었다. 결국에 미국은 바그다드 공항에서 기습적인 암살 작전을 벌여 솔레이마니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란인 중 혁명을 지지하는 이들은 모두 거리에 나와 그를 추모하며 미국에 대한 복수를 다시 한번 맹세했다.
그러나 전장에서의 승리가 평범한 이란 국민의 번영을 보장해 줄 수는 없었다. 사우디는 이란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었고 무함마드 빈 살만은 굴욕을 겪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권력 경쟁자들을 숙청하였고, 아람코가 벌어들인 자본을 바탕으로 국가 개조 프로젝트에 나섰다. 인접한 카타르의 도하,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 아부다비 같은 곳은 석유 자본을 쏟아부은 초현대 도시로 거듭났고, 중상류층 이상의 이란인들은 정체되고 답답한 이란 사회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페르시아만 건너편에서 소비사회의 다디단 공기를 음미할 수 있었다.
굳이 걸프에 가지 않더라도 SNS를 통해 전 세계와 연결된 이란 청년층은 K-POP 아이돌, 미국 드라마, 일본 애니메이션을 소비하고 각종 밈을 공유하며 새로운 종류의 정치적 주체로 변모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시아파 이슬람마저도 지긋지긋하다는 이란의 90년대생과 00년대생들이 아버지 세대가 열광하는 시아파 성지 수호, 군복을 입은 전사들이 외치는 ‘저항의 축’ 정신에 공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더욱이 트럼프의 최대 압박 정책으로, 정치적으로 정부를 지지하던 이란 사회의 하층까지도 심대한 타격을 입으며 정치 불안도 커져만 갔다. 2017년에는 물가 상승과 생활고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본격적으로 폭발해 정부를 뒤흔들었고, 유사한 시위는 2018년에도, 2019년에도 발생하며 계속되었다. 2009년 녹색 운동이 교육받은 중산층 청년 위주로 전개된 자유주의 운동이었다면, 2017~2019년을 강타한 생활고 시위는 아랍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아랍의 봄과 훨씬 더 유사했다. 이슬람 공화국 입장에서는 훨씬 더 불길한 신호나 다름없었다.
그동안 이란의 정부는 자유주의적 중산층에 ‘반혁명적’이라는 낙인을 씌우고, 정부 보조금 의존도가 높은 하층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비교적 수월하게 저항을 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피억압자의 혁명’을 기치로 내세워 탄생한 정권이, 하층민의 민생고에서 비롯된 반란에 동일한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
지난 13일 디트로이트를 방문한 트럼프 대통령 // 사진=백악관 홈페이지테헤란의 두 얼굴: ‘저항 경제’의 그늘과 금수저들의 파티
이러한 모순이 누적되는 가운데, SNS에서는 ‘테헤란의 부잣집 아이들’이라는 해시태그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혁명수비대와 성직자 고위 간부의 자제들이 테헤란 북부 부촌에서 스포츠카를 몰고, 히잡도 쓰지 않은 채 수영장에서 고급 양주를 마시며 파티를 즐기는 사진들이 잇따라 공개된 것이다.
이 이미지들은 정권의 위선을 고발하는 상징이 되었고, 전 사회적 분노를 부르기에 충분했다. 2019년 유류비 인상 시위에 대한 유혈 진압과, 이어진 솔레이마니 피살 직후의 민항기 격추 사건(우크라이나 항공 752편 사건)이 연달아 알려지면서, 이란 사회에 누적돼 있던 불만은 폭발 직전까지 치솟았다.
정통성 위기가 점차 가시화되는 가운데 하메네이가 택할 수 있는 수단은 많지 않았다. 대화가 사실상 불가능한 트럼프 행정부와 여전히 대결 구도를 취하면서, 중국·러시아와 연대를 강화하고, 농업, 제조업, IT, 전자상거래 등 사회 제 영역에서 박차를 가했다. 역설적으로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국제 무역에서 사실상 배제되는 가운데 이란은 혁명기에 건설한 뛰어난 공교육 인프라를 바탕으로 계속해서 엔지니어를 배출했고, 이들은 석유와 천연가스 수출 대신에 산업 기반을 국내화하는 데 투입되었다. 이에 따라 이란의 독자 기술력은 다른 중동 국가들을 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여전히 거대한 자금이 투자되는 국방 연구의 외부효과로 기초과학과 응용 기술의 발전도 잇따랐다.
이란은 크림반도 병합 이후 미국과 대결 구도에 나선 러시아, 트럼프 행정부와 무역전쟁에 나선 중국 등의 국가와 암호화폐와 바터무역을 통해 제한적이나마 접속할 수 있었다. 이란은 이렇게 카스피해, 중앙아시아, 페르시아만을 생명선으로 삼아 상황이 호전되기까지 기다렸다. 오바마와 이룬 합의가 트럼프에 의해 쓰레기통에 갔다면, 다시 민주당 정부가 돌아와서 조심스럽게 관계 정상화를 모색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때까지만 버틴다면 다시 국민에게 풍요를 돌려줄 수 있으리라.
더는 회복될 수 없다. 달라진 시대
2020년 11월, 미국 대선은 다시금 민주당을 이끄는 조 바이든의 손을 들어주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인 가운데 일어난 사건이었다. 팬데믹은 다른 나라도 물론이지만, 이란에게는 특히 더 심각한 피해를 주었다. 제재 국면에서 보건, 의료 장비를 제대로 수입할 수 없었고, 힘겹게 자급에 의존해야만 했다. 그나마 핵물리학자인 모센 파크리자데가 지휘하는 과학계가 진단 키트를 자체적으로 개발하는 등 이란의 과학 기반이 없었다면 고통은 더 가중되었을 것이었다.
게다가 이란은 팬데믹 발원지였던 중국과 긴밀하게 교류한 탓에 이탈리아, 한국과 함께 거의 최초부터 대규모 감염이 시작된 국가 중 하나였다. 여전히 공동체 문화가 강하고 야외 문화가 발달한 이란에서 봉쇄와 개인화된 삶의 강제는 특히 더 사회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하고 민주당이 이란과의 핵 협상을 복원할 수 있다는 의사를 내비치자, 이란 사회에는 다시금 기대가 감돌았다. 그러나 2021년 대선에서 보수파 성향의 에브라힘 라이시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미·이란 양국 행정부 사이에는 다시 불협화음이 발생했다.
로하니는 2017년까지 핵 협상 성공으로 민생을 살린 대통령으로 평가받았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최대 압박 정책이 시작되자 경제적 곤경을 피할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군과 경찰이 사회 불안을 가차 없이 진압하게 되며 그 정치적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다. 개혁파와 자유주의 성향 유권자들이 대거 투표를 포기한, 역대급 저조한 투표율 속에서 애초부터 로하니 노선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해 온 보수파가 우세를 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물론 라이시 역시 핵 협상의 필요성 자체는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회의 동의를 거쳐야만 완화가 가능한 미국의 제재 체계, 그리고 한 차례 일방적인 합의 파기를 겪은 뒤 훨씬 더 신중해진 이란 보수파의 태도는, 향후 협상이 JCPOA 시기보다 훨씬 험난한 과정을 거치게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JCPOA 파기에 결정적 역할을 한 미국의 역내 우방국,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견제도 다시금 넘어야 할 산이었다.
2022년에는 불운하게도 협상 재개의 문을 다시 닫아버리는 사건이 재차 발생했다. 2022년 2월 24일에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지정학적 긴장이 극에 달했다. 미국과 유럽연합의 모든 관심이 우크라이나 방어로 쏠리는 가운데 중동에서 복잡한 외교적 과제를 해결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란은 최대 압박 정책 이후 국가 생존에 갈수록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러시아를 지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란은 자국이 자랑하는 ‘샤헤드 드론’을 러시아에 대규모로 지원했고, 러시아는 샤헤드를 ‘게란 드론’으로 개조해서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서방 국가들이 이란의 샤헤드 드론 공여를 규탄하면서, 이란과 국제사회 관계 개선의 장애물에는 러시아 문제라는 장벽도 추가되었다.

2022년 9월 14일부터 마흐사 아므니 사망 사건에 대한 반발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 사진=Unsplash
출구 없는 터널: 우크라이나 드론과 히잡 시위
게다가 같은 해 9월에는 쿠르드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히잡 착용 단속 과정에서 도덕 경찰에 심문받던 중 사망하여 ‘여성, 삶, 자유’라 불리는 전국적 시위가 촉발되기도 했다. 시위의 물결이 지난 뒤에 이란 정부는 거리에서의 히잡 단속을 사실상 멈추었으나, 시위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엄청난 사망자는 국제사회의 규탄을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중산층 여성을 중심으로 한 청년층은 이제 체제를 신뢰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체제에 반감을 갖기 시작했다. 가혹한 시위 진압과 러시아 지원이 맞물리며 서방에서 이란은 러시아, 중국과 연대하는 유라시아의 전체주의 정권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하타미 대통령이 ‘문명 간 대화’를 주창한 지 20여 년 만의 일이었다.
어느 편에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은 역사가 다시 한번 가속하기 시작한 운명의 날, 2023년 10월 7일에 더 심각해졌다. 이날은 하마스가 ‘알아크사 홍수 작전’을 통해 이스라엘을 전격 기습하면서 참혹한 가자 전쟁이 시작된 날이었다. 하마스의 공격 배경에는 간접적으로 이란이 연관되어 있었다.
물론 공격 자체를 이란이 지시하거나 지휘한 것은 아니었다. 하마스가 각종 물적, 인적 지원을 이란으로부터 받고 있었지만, 다른 저항의 축처럼 이란의 강한 통제하에 있는 조직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이란의 지정학적 영향력이 강화된 데에 따른 걸프 국가들과 이스라엘의 조심스러운 관계 정상화 모색이, 하마스의 공격 결정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12일 전쟁: 애국주의의 불꽃, 그리고 타버린 잿더미
트럼프는 JCPOA를 폐기하고, 이란의 보복 공세를 억제하기 위해서 이스라엘과 바레인, UAE의 수교 안인 아브라함 협정을 중재했다. 공화당 전략가들이 보기에 이란의 위협에 그동안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은 이란과 경쟁하는 두 주요 국가인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가 팔레스타인 문제로 인하여 서로 수교, 협력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UAE와 바레인을 시작으로,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이스라엘과 협조 체계에 끌어들인다면 이란은 그저 고립된 채 고사할 것이 틀림없었다. 바이든 행정부도 구미가 당기는 이 구상을 거부할 리는 없었다. 새로운 국가 현대화를 위해 발전된 기술과 자본이 필요했던 사우디의 무함마드 빈 살만 입장에서도, 국민 여론을 잠재우고 팔레스타인 문제를 잠시 이면에 치워둘 수 있다면 이스라엘과의 수교도 분명 매력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사우디가 이스라엘과 수교하는 순간 아랍 무슬림 세계로부터 영구히 버려질 수도 있다는 하마스의 공포를 자극했다. 이란에 대응하기 위한 이스라엘-사우디의 접근이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알 아크사 홍수 작전’을 유도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국민이 하마스에 의해 인질로 끌려간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총리는 가자 지구에 가혹한 보복성 작전을 벌임과 동시에, 이번 기회에 이란의 위협을 근절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 사실 부패 혐의로 재판을 앞두고 있고, 하마스의 기습을 허용했다는 정치적 책임 공방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 네타냐후가 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수는 대(對) 이란 강경책이었다.
가자 지구를 무차별 포격하는 동시에 네타냐후는 계속해서 ‘본체인 이란을 무너뜨리겠다’라는 메시지를 발신했다. 2024년 4월 1일 다마스쿠스의 이란 영사관 공격을 시작으로, 7월 31일에는 하마스 수장 이스마일 하니야가 테헤란에 방문했을 때 그를 암살했고, 9월 27일에는 헤즈볼라에 대규모 공세를 개시해 30년간 헤즈볼라를 지도한 하산 나스랄라를 비롯한 최고위 간부를 몰살시켰다.
대외적인 군사 투쟁 노선과 경제 파탄에 지쳐 정권 지지가 갈수록 낮아지는 상황에서, 강적인 이스라엘과의 갈등을 꺼린 하메네이는 매우 절제된 보복을 승인하면서 다소 간의 굴욕을 감내하기로 했다.

출구 없는 터널: 우크라이나 드론과 히잡 시위
게다가 같은 해 9월에는 쿠르드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히잡 착용 단속 과정에서 도덕 경찰에 심문받던 중 사망하여 ‘여성, 삶, 자유’라 불리는 전국적 시위가 촉발되기도 했다. 시위의 물결이 지난 뒤에 이란 정부는 거리에서의 히잡 단속을 사실상 멈추었으나, 시위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엄청난 사망자는 국제사회의 규탄을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중산층 여성을 중심으로 한 청년층은 이제 체제를 신뢰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체제에 반감을 갖기 시작했다. 가혹한 시위 진압과 러시아 지원이 맞물리며 서방에서 이란은 러시아, 중국과 연대하는 유라시아의 전체주의 정권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하타미 대통령이 ‘문명 간 대화’를 주창한 지 20여 년 만의 일이었다.
어느 편에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은 역사가 다시 한번 가속하기 시작한 운명의 날, 2023년 10월 7일에 더 심각해졌다. 이날은 하마스가 ‘알아크사 홍수 작전’을 통해 이스라엘을 전격 기습하면서 참혹한 가자 전쟁이 시작된 날이었다. 하마스의 공격 배경에는 간접적으로 이란이 연관되어 있었다.
물론 공격 자체를 이란이 지시하거나 지휘한 것은 아니었다. 하마스가 각종 물적, 인적 지원을 이란으로부터 받고 있었지만, 다른 저항의 축처럼 이란의 강한 통제하에 있는 조직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이란의 지정학적 영향력이 강화된 데에 따른 걸프 국가들과 이스라엘의 조심스러운 관계 정상화 모색이, 하마스의 공격 결정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12일 전쟁: 애국주의의 불꽃, 그리고 타버린 잿더미
트럼프는 JCPOA를 폐기하고, 이란의 보복 공세를 억제하기 위해서 이스라엘과 바레인, UAE의 수교 안인 아브라함 협정을 중재했다. 공화당 전략가들이 보기에 이란의 위협에 그동안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은 이란과 경쟁하는 두 주요 국가인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가 팔레스타인 문제로 인하여 서로 수교, 협력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UAE와 바레인을 시작으로,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이스라엘과 협조 체계에 끌어들인다면 이란은 그저 고립된 채 고사할 것이 틀림없었다. 바이든 행정부도 구미가 당기는 이 구상을 거부할 리는 없었다. 새로운 국가 현대화를 위해 발전된 기술과 자본이 필요했던 사우디의 무함마드 빈 살만 입장에서도, 국민 여론을 잠재우고 팔레스타인 문제를 잠시 이면에 치워둘 수 있다면 이스라엘과의 수교도 분명 매력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사우디가 이스라엘과 수교하는 순간 아랍 무슬림 세계로부터 영구히 버려질 수도 있다는 하마스의 공포를 자극했다. 이란에 대응하기 위한 이스라엘-사우디의 접근이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알 아크사 홍수 작전’을 유도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국민이 하마스에 의해 인질로 끌려간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총리는 가자 지구에 가혹한 보복성 작전을 벌임과 동시에, 이번 기회에 이란의 위협을 근절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 사실 부패 혐의로 재판을 앞두고 있고, 하마스의 기습을 허용했다는 정치적 책임 공방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 네타냐후가 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수는 대(對) 이란 강경책이었다.
가자 지구를 무차별 포격하는 동시에 네타냐후는 계속해서 ‘본체인 이란을 무너뜨리겠다’라는 메시지를 발신했다. 2024년 4월 1일 다마스쿠스의 이란 영사관 공격을 시작으로, 7월 31일에는 하마스 수장 이스마일 하니야가 테헤란에 방문했을 때 그를 암살했고, 9월 27일에는 헤즈볼라에 대규모 공세를 개시해 30년간 헤즈볼라를 지도한 하산 나스랄라를 비롯한 최고위 간부를 몰살시켰다.
대외적인 군사 투쟁 노선과 경제 파탄에 지쳐 정권 지지가 갈수록 낮아지는 상황에서, 강적인 이스라엘과의 갈등을 꺼린 하메네이는 매우 절제된 보복을 승인하면서 다소 간의 굴욕을 감내하기로 했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가자지구 // 사진=Unsplash
중국이 중재한 사우디-이란 데탕트
이스라엘과 본격적인 충돌이 빚어지며 미국과 재협상도 어려워지는 상황 속에서 이란은 우회적인 방안으로 국가 경제에 숨통을 트이고자 노력했다. 가장 빛나는 성과는 2023년 중국의 중재 하에 사우디아라비아와 재수교에 성공한 것이었다. 사우디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언론인 카슈크지를 살해한 사건으로 바이든 행정부가 자신을 비판하자, 대미 관계 일변도 외교 노선을 재고하고 최대 석유 수입국인 중국과 관계를 더 진전시켰다.
이 와중에 솔레이마니 사망 이후 기세가 꺾인 이란 대리 세력은 사우디가 이란의 위협을 덜 경계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우디와 이란 양 측에게 석유를 구매하는 중국도, 그리고 이라크도 중재에 나섰다. 시아파 형제국으로 이란의 우방국이 된 이라크였지만, 혁명수비대가 연관된 이란 기업들이 이라크의 각종 이권을 독식한다는 국민적 불만이 표출되고 있었다.
이라크는 이란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아랍 정체성을 내세워 사우디에 접근했다. 2021년부터 이라크가 먼저 대화 테이블을 만들었고, 최종적이고 거시적인 합의는 2023년 중국 베이징에서 이루는 방식으로 마침내 이란-사우디 데탕트가 타결되었다.
이는 아랍의 봄이 만들어낸 소위 ‘중동 냉전’이 종결되는 순간이었다. 이란은 사우디를 포함한 걸프 국가들이 미국으로부터 전략적 자율성을 얻어나가는 것을 희망했다. 그렇다면, 언제 풀릴지 알 수도 없고, 풀려도 장기 지속될지 믿을 수 없는 제재 해제가 아닌, 비서구 국가들이 주도하는 다극화 세계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세계의 대세로 보자면 타당한 노선일 수도 있었다. 문제는 최대 압박 정책 이후 기반이 허물어지는 이란의 경제가 장기간의 항전을 더 감내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는 데 있었다. 1989년부터 이란을 지도해온, 80대 후반인 하메네이의 수명도 문제였다. 미로처럼 꼬인 이란 최고위 권력 네트워크에서 안정적인 승계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 것인지, 차기 지도자를 혁명수비대를 비롯한 다른 정권 엘리트들이 새로운 지도자를 승인할지, 아니 애초에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라는 정체(政體)가 유지될 수 있을지도 불투명했다.
제재가 초래한 복잡한 외환 거래와 무역 구조는, 제재 우회 통로에 접근할 수 있는 권력 엘리트와 그 주변인들에게 부당한 특혜를 주면서 부익부 빈익빈이 심해졌다. 교육받은 청년층은 해외 이주를 꿈꾸거나, 디아스포라 미디어가 방영하는 팔레비 시대 영상을 보며, 갑갑한 현실과 대비되는 화려한 과거에 일종의 향수를 느꼈다. 조금만 더 버티면 고난이 끝난다더니 대체 그 조금만은 언제까지 이어지는 것인가, 왜 우리는 혁명이라는 단어에 짓눌리며 다른 나라 청년들이 누리는 삶을 박탈당해야만 하는가, 이러한 불만이 치솟아 올랐다.
그런 와중에 2025년은 여러 의미에서 이란에 ‘최악의 해’가 되었다. 2024년 12월에는 시리아의 아사드 정부가 무너지며, 이란이 국제적 비난을 듣고 피를 흘려가며 지켰던 교두보가 사라졌다.
위기가 깊어지는 가운데 하메네이는 트럼프 행정부 2기가 핵 협상을 재개하겠다고 말하자 대화를 다시 시도했다. 그가 아들처럼 생각했던 솔레이마니를 죽인 트럼프였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협상에 진전이 있을 것처럼 보이자, 가자 전쟁의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 ‘이란 때리기’의 명분이 사라질 것을 우려한 네타냐후가 2025년 6월 13일에 전격 기습을 가했다. 이란-이스라엘 전쟁, 혹은 ‘12일 전쟁’이 시작됐다.
이 전쟁은 이란에 전혀 예상치 못한 효과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동안 아랍 세계에서 전쟁에 전혀 무지하던 청년층들이 ‘안보 위협’과 ‘전쟁’이 무엇인지를 비극적이게도 체감하면서 애국주의 물결이 일었기 때문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히잡을 쓰지 않은 청년 여성들도 거리로 나와서 수염을 기른 성직자와 차도르를 뒤집어쓴 할머니와 함께 이스라엘을 규탄하고 항전을 외쳤다.
정부도 청년층이 보내준 지지에 화답해 문화 통제를 점차 완화할 조짐을 보였다. 휴전 이후 테헤란에 새로 개통된, 아르메니아 정교회 성당 인근의 ‘성모 마리아 지하철역’, 혁명 광장에 새로 세워진, 이슬람 이전 사산조 제국의 황제 샤푸르 1세 동상이 대표적 예시였다. 요컨대 더는 공감을 사기 어려운 시아파 이슬람과 1979년 혁명을 넘어서, 정부 비판적인 청년층에게서 더 넓은 지지 기반을 확보하겠다는 전향적 문화 정책 실험이었다.
그러나 문화 통제의 부분적 완화로는 물질적 곤경을 극복할 수 없었다. 또한 이미 균열이 간 체제 신뢰를 회복하기도 어려웠다. 이스라엘과의 전쟁 직후 이란은 역대급 가뭄을 맞이해 단수·단전이 전국적으로 필수화가 되었고, 테헤란에서도 물 공급이 사실상 말라가며 시민들의 불편이 가중되었다.
기후변화도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근대화를 추구한 혁명 정권이 자력갱생을 이유로 무리하게 수력 인프라를 확장하고, 식량 자급을 달성하기 위해 지하수까지 꺼내쓰면서 농경지 개간을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발생한 반대급부인 면도 컸다. 그런 와중에 지속되는 전쟁 위협으로 이란 경제에는 견디기 힘든 강도의 타격이 계속해서 누적되고 있었다.
정권이 드러낸 이 모든 무력감 속에서 사회가 느끼는 ‘출구가 없다’라는 좌절감은 2025년 12월 말에 테헤란 바자르 상인들의 시위로 폭발했고, 그 시위는 점입가경으로 악화한 미-이란 관계의 맥락에서 정치적 이슈로 해석되어, 1월 8일 정부에 의한 유혈 강경 진압을 낳았다.
2001년 하타미 정부, 2015년 로하니 정부 때 손에 잡힐 듯 보였던 미-이란 관계의 정상화와 이란의 국제사회 복귀는 이렇게 양국의 상호 불신, 누적된 갈등, 우연과 불운이 겹치며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이란은 ‘국가 해체를 노리는 외국 간첩과 테러리스트’를 색출하려는 정부 및 친정부 대중, 그리고 ‘국민을 살해한 범죄 정권’에는 용서가 없다며 분개하고, 또 슬픔과 좌절 속에서 숨죽여 지내야만 하는 반정부 대중의 극한 대립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중국이 중재한 사우디-이란 데탕트
이스라엘과 본격적인 충돌이 빚어지며 미국과 재협상도 어려워지는 상황 속에서 이란은 우회적인 방안으로 국가 경제에 숨통을 트이고자 노력했다. 가장 빛나는 성과는 2023년 중국의 중재 하에 사우디아라비아와 재수교에 성공한 것이었다. 사우디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언론인 카슈크지를 살해한 사건으로 바이든 행정부가 자신을 비판하자, 대미 관계 일변도 외교 노선을 재고하고 최대 석유 수입국인 중국과 관계를 더 진전시켰다.
이 와중에 솔레이마니 사망 이후 기세가 꺾인 이란 대리 세력은 사우디가 이란의 위협을 덜 경계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우디와 이란 양 측에게 석유를 구매하는 중국도, 그리고 이라크도 중재에 나섰다. 시아파 형제국으로 이란의 우방국이 된 이라크였지만, 혁명수비대가 연관된 이란 기업들이 이라크의 각종 이권을 독식한다는 국민적 불만이 표출되고 있었다.
이라크는 이란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아랍 정체성을 내세워 사우디에 접근했다. 2021년부터 이라크가 먼저 대화 테이블을 만들었고, 최종적이고 거시적인 합의는 2023년 중국 베이징에서 이루는 방식으로 마침내 이란-사우디 데탕트가 타결되었다.
이는 아랍의 봄이 만들어낸 소위 ‘중동 냉전’이 종결되는 순간이었다. 이란은 사우디를 포함한 걸프 국가들이 미국으로부터 전략적 자율성을 얻어나가는 것을 희망했다. 그렇다면, 언제 풀릴지 알 수도 없고, 풀려도 장기 지속될지 믿을 수 없는 제재 해제가 아닌, 비서구 국가들이 주도하는 다극화 세계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세계의 대세로 보자면 타당한 노선일 수도 있었다. 문제는 최대 압박 정책 이후 기반이 허물어지는 이란의 경제가 장기간의 항전을 더 감내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는 데 있었다. 1989년부터 이란을 지도해온, 80대 후반인 하메네이의 수명도 문제였다. 미로처럼 꼬인 이란 최고위 권력 네트워크에서 안정적인 승계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 것인지, 차기 지도자를 혁명수비대를 비롯한 다른 정권 엘리트들이 새로운 지도자를 승인할지, 아니 애초에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라는 정체(政體)가 유지될 수 있을지도 불투명했다.
제재가 초래한 복잡한 외환 거래와 무역 구조는, 제재 우회 통로에 접근할 수 있는 권력 엘리트와 그 주변인들에게 부당한 특혜를 주면서 부익부 빈익빈이 심해졌다. 교육받은 청년층은 해외 이주를 꿈꾸거나, 디아스포라 미디어가 방영하는 팔레비 시대 영상을 보며, 갑갑한 현실과 대비되는 화려한 과거에 일종의 향수를 느꼈다. 조금만 더 버티면 고난이 끝난다더니 대체 그 조금만은 언제까지 이어지는 것인가, 왜 우리는 혁명이라는 단어에 짓눌리며 다른 나라 청년들이 누리는 삶을 박탈당해야만 하는가, 이러한 불만이 치솟아 올랐다.
그런 와중에 2025년은 여러 의미에서 이란에 ‘최악의 해’가 되었다. 2024년 12월에는 시리아의 아사드 정부가 무너지며, 이란이 국제적 비난을 듣고 피를 흘려가며 지켰던 교두보가 사라졌다.
위기가 깊어지는 가운데 하메네이는 트럼프 행정부 2기가 핵 협상을 재개하겠다고 말하자 대화를 다시 시도했다. 그가 아들처럼 생각했던 솔레이마니를 죽인 트럼프였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협상에 진전이 있을 것처럼 보이자, 가자 전쟁의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 ‘이란 때리기’의 명분이 사라질 것을 우려한 네타냐후가 2025년 6월 13일에 전격 기습을 가했다. 이란-이스라엘 전쟁, 혹은 ‘12일 전쟁’이 시작됐다.
이 전쟁은 이란에 전혀 예상치 못한 효과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동안 아랍 세계에서 전쟁에 전혀 무지하던 청년층들이 ‘안보 위협’과 ‘전쟁’이 무엇인지를 비극적이게도 체감하면서 애국주의 물결이 일었기 때문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히잡을 쓰지 않은 청년 여성들도 거리로 나와서 수염을 기른 성직자와 차도르를 뒤집어쓴 할머니와 함께 이스라엘을 규탄하고 항전을 외쳤다.
정부도 청년층이 보내준 지지에 화답해 문화 통제를 점차 완화할 조짐을 보였다. 휴전 이후 테헤란에 새로 개통된, 아르메니아 정교회 성당 인근의 ‘성모 마리아 지하철역’, 혁명 광장에 새로 세워진, 이슬람 이전 사산조 제국의 황제 샤푸르 1세 동상이 대표적 예시였다. 요컨대 더는 공감을 사기 어려운 시아파 이슬람과 1979년 혁명을 넘어서, 정부 비판적인 청년층에게서 더 넓은 지지 기반을 확보하겠다는 전향적 문화 정책 실험이었다.
그러나 문화 통제의 부분적 완화로는 물질적 곤경을 극복할 수 없었다. 또한 이미 균열이 간 체제 신뢰를 회복하기도 어려웠다. 이스라엘과의 전쟁 직후 이란은 역대급 가뭄을 맞이해 단수·단전이 전국적으로 필수화가 되었고, 테헤란에서도 물 공급이 사실상 말라가며 시민들의 불편이 가중되었다.
기후변화도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근대화를 추구한 혁명 정권이 자력갱생을 이유로 무리하게 수력 인프라를 확장하고, 식량 자급을 달성하기 위해 지하수까지 꺼내쓰면서 농경지 개간을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발생한 반대급부인 면도 컸다. 그런 와중에 지속되는 전쟁 위협으로 이란 경제에는 견디기 힘든 강도의 타격이 계속해서 누적되고 있었다.
정권이 드러낸 이 모든 무력감 속에서 사회가 느끼는 ‘출구가 없다’라는 좌절감은 2025년 12월 말에 테헤란 바자르 상인들의 시위로 폭발했고, 그 시위는 점입가경으로 악화한 미-이란 관계의 맥락에서 정치적 이슈로 해석되어, 1월 8일 정부에 의한 유혈 강경 진압을 낳았다.
2001년 하타미 정부, 2015년 로하니 정부 때 손에 잡힐 듯 보였던 미-이란 관계의 정상화와 이란의 국제사회 복귀는 이렇게 양국의 상호 불신, 누적된 갈등, 우연과 불운이 겹치며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이란은 ‘국가 해체를 노리는 외국 간첩과 테러리스트’를 색출하려는 정부 및 친정부 대중, 그리고 ‘국민을 살해한 범죄 정권’에는 용서가 없다며 분개하고, 또 슬픔과 좌절 속에서 숨죽여 지내야만 하는 반정부 대중의 극한 대립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테헤란 외곽 법의학 시설인 카흐리자크 법의학 센터 마당에 쌓인 시신 가방들 // 사진=연합뉴스
개혁파는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나
미-이란 관계사는 비극(tragedy)이다. 미 제국주의나 하메네이 같은 사악한 악당이 선량한 이란 국민을 학대하고, 그 결과 악이 승리하는 결말로 끝난다는 의미의 비극이 아니다. 주인공이 한계를 극복하고 운명을 넘어서고자 발버둥 치지만, 인간의 미욱함과 신의 농간,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결국에는 좌절하고 마는 그런 종류의 비극이다. 그중에서도 주인공을 꼽자면 역시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개혁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1979년 혁명의 대의에 헌신했고, 그 혁명 국가가 국민을 억압하는 모습에 깊은 상처를 받았고, 이란이 국제사회에 복귀하도록 노력했다. 또한 경제 발전으로 중산층이 성장해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더 보장하고, 그러면서도 이슬람 공화국의 정신을 지키는 좁은 길을 찾고자 분투했다. 모하마드 하타미, 하산 로하니, 자바드 자리프로 대표되는 정치인들이 그러했고, 압둘카림 소루쉬로 대표되는 지식인들이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은 네오콘의 냉랭한 시선, 솔레이마니의 무거운 침묵, 하메네이의 길어지는 장고 속에 고통받았다. 오바마가 핵 협상을 받아주었을 때 빛이 찾아드는 듯했으나, 누구도 예상치 못한 트럼프의 당선은 그들을 다시 구렁텅이로 몰았다. 2025년이 되었을 때, 이란에서도 이란 바깥에서도 누구도 더는 개혁파를 찾지 않았다. 보수파들은 그들을 미국에 투항한 자유주의자들이라고 비난했고, 청년층은 그들이 결정적인 순간에는 정권의 시민 학살에 눈을 감는 위선자들이라며 저주했다.
둘로 갈려 위태로운 이란 이슬람 공화국을 하나로 묶어내고자 했던 개혁파들의 시도가 무산되면서 개혁파들 역시 비극의 주인공처럼 스러질 날이 다가오고 있다. 정부의 유혈 진압 명령이 떨어진 뒤에 하산 로하니와 자바드 자리프가 가택 연금 내지는 체포되었다는 미확인 뉴스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도 이러한 맥락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개혁파가 사라진 자리에서, 봉합할 수 없는 상처를 지닌 이란은 어디로 갈 것인가? 북한과 같은 고도 통제 감시 사회로의 전환인가? 아니면 지지를 회복하지 못한 채 정부가 무너져 내전으로 가고야 말 것인가?
이란의 미래는 안개 속에 잠겨 있고 사람들은 숨을 쉬기 어려워하는 상황이다. 마치 미세먼지가 자욱한 테헤란의 공기와 같다. 확실한 것은 그 안개 속에서는 섣불리 움직이며 누군가를 비난하기보다는, 이 비극이 어쩌다 펼쳐지게 되었는지 그 조건과 전개 과정을 찬찬히 뜯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쓸모없어 보일지라도, 역사는 여전히 중요하기에.
필자 임명묵은 서울대학교 아시아언어문명학부에서 서아시아 지역을 전공했다. 동대학원에서 '아제르바이잔에서의 러시아 혁명'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는 이란 현대사를 주제로 한 책을 집필 중이다.
개혁파는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나
미-이란 관계사는 비극(tragedy)이다. 미 제국주의나 하메네이 같은 사악한 악당이 선량한 이란 국민을 학대하고, 그 결과 악이 승리하는 결말로 끝난다는 의미의 비극이 아니다. 주인공이 한계를 극복하고 운명을 넘어서고자 발버둥 치지만, 인간의 미욱함과 신의 농간,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결국에는 좌절하고 마는 그런 종류의 비극이다. 그중에서도 주인공을 꼽자면 역시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개혁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1979년 혁명의 대의에 헌신했고, 그 혁명 국가가 국민을 억압하는 모습에 깊은 상처를 받았고, 이란이 국제사회에 복귀하도록 노력했다. 또한 경제 발전으로 중산층이 성장해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더 보장하고, 그러면서도 이슬람 공화국의 정신을 지키는 좁은 길을 찾고자 분투했다. 모하마드 하타미, 하산 로하니, 자바드 자리프로 대표되는 정치인들이 그러했고, 압둘카림 소루쉬로 대표되는 지식인들이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은 네오콘의 냉랭한 시선, 솔레이마니의 무거운 침묵, 하메네이의 길어지는 장고 속에 고통받았다. 오바마가 핵 협상을 받아주었을 때 빛이 찾아드는 듯했으나, 누구도 예상치 못한 트럼프의 당선은 그들을 다시 구렁텅이로 몰았다. 2025년이 되었을 때, 이란에서도 이란 바깥에서도 누구도 더는 개혁파를 찾지 않았다. 보수파들은 그들을 미국에 투항한 자유주의자들이라고 비난했고, 청년층은 그들이 결정적인 순간에는 정권의 시민 학살에 눈을 감는 위선자들이라며 저주했다.
둘로 갈려 위태로운 이란 이슬람 공화국을 하나로 묶어내고자 했던 개혁파들의 시도가 무산되면서 개혁파들 역시 비극의 주인공처럼 스러질 날이 다가오고 있다. 정부의 유혈 진압 명령이 떨어진 뒤에 하산 로하니와 자바드 자리프가 가택 연금 내지는 체포되었다는 미확인 뉴스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도 이러한 맥락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개혁파가 사라진 자리에서, 봉합할 수 없는 상처를 지닌 이란은 어디로 갈 것인가? 북한과 같은 고도 통제 감시 사회로의 전환인가? 아니면 지지를 회복하지 못한 채 정부가 무너져 내전으로 가고야 말 것인가?
이란의 미래는 안개 속에 잠겨 있고 사람들은 숨을 쉬기 어려워하는 상황이다. 마치 미세먼지가 자욱한 테헤란의 공기와 같다. 확실한 것은 그 안개 속에서는 섣불리 움직이며 누군가를 비난하기보다는, 이 비극이 어쩌다 펼쳐지게 되었는지 그 조건과 전개 과정을 찬찬히 뜯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쓸모없어 보일지라도, 역사는 여전히 중요하기에.
필자 임명묵은 서울대학교 아시아언어문명학부에서 서아시아 지역을 전공했다. 동대학원에서 '아제르바이잔에서의 러시아 혁명'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는 이란 현대사를 주제로 한 책을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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