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유대주의(反猶太主義, 히브리어:אנטישמיות, 영어:antisemitism, Jew-hatred)는 유대인들을 향한 차별과 증오를 말한다.
유럽 언어에서 대체로 "반셈족주의"로 불리나, 명칭과 조금 다르게 셈족 전체에 대한 혐오보다는 오직 유대인들만을 대상으로 한 혐오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쓰인다.[1]
개요
반유대주의는 여러 형태가 있다. 개인적인 증오에서 홀로코스트와 포그롬 등 폭력적인 박해까지 여러 예가 있다. 긴 역사로 가장 오래된 증오라고 불리기도 한다.[2]
유럽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을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고 여기고, 고대교회 교부들은 유대인들을 위선자라고 부른 종교적 편견[3][4]이나 유대인들을 열등한 인종으로 보는 인종 차별이 반유대주의의 발단이 될 수 있다. 시온주의와 이스라엘을 반대하는 극우파, 근대 유럽의 사회주의[5]와 이슬람 급진주의에서도 반유대주의를 찾을 수 있다.
반유대주의의 첫 발생은 확실하지 않다. 베를린 자유대학교페터 셰퍼(de) 교수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고대 이집트의 이야기를 다시 이야기 할 때 널리 퍼졌다고 주장했고 반유대주의는 이집트에서만 일어났다고 주장한다.[6] 가장 오래된 반유대주의의 흔적은 Agatharchides의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원전 2세기당시 고대그리스의 역사가였던 그는 유대인들의 풍습은 어리석다고 조롱했고 안식일을 지내서 예루살렘이 침략받았다고 비꼰적 있다.[7] 독일의 프리드리히 니체의 주장에 의하면 유대인은 고대 시절부터 대부분 민족으로부터 노예로 태어난 민족이라 여겨졌으나 노력을 통하여 노예의 도덕이 승리하게 했다고 한다.
또한 구약성서인 《마카베오기 제1권》에도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을 점령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반유대주의정책이 언급되어 있다.[8]
서유럽의 유대인 박해
서유럽에서의 기독교 강제개종
유대인에 대한 핍박과 추방은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등 기독교 국가를 중심으로 끊이지 않았다. 스페인은 유대인들에게 기독교로의 강제 개종 칙령을 내려 탄압하고 영구적으로 추방했고, 14세기 중엽부터 16세기까지 대부분의 독일 도시에서 유대인들은 공식적으로 추방되었다. 이러한 추방 외에도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표방한 서유럽의 유대인에 대한 대표적 박해 양상은 의식살인(de)유언비어[9], 성찬모독 비난, 탈무드 소각, 종교적 논쟁의 네 가지 형태로 일어났다. 이러한 박해로 인하여 자연히 기독교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대감은 깊어만 갔다.
동유럽으로의 이주
스페인의 유대인 박해는 전유럽에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서유럽에서조차 유대인들은 발붙일 곳을 얻지못했지만, 폴란드를 중심한 동유럽은 비교적 유대인들에게 관대하여 유대인들을 위한 새로운 보금자리 구실을 하였다. 18세기 중엽 전세계의 유대인 인구는 약 300만 가량이었고 이들 중 대부분은 동유럽에 편중되어 살게 되었다. 폴란드에는 주후 18세기 말 약 15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살았는데 폴란드가 붕괴되면서 이들은 러시아와 프로이센 그리고 오스트리아로 편입되었다.[10]
십자군 원정과 유대인
유대인들에 대한 통속적인 종교적 증오심을 교회가 공식적으로 주입하게 된 계기는 십자군 원정이었다. 1096년에 가톨릭 교회는 십자군 전쟁을 시작했다. 교황 우르반 2세는 무슬림 침략자들로부터 성지를 회복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군사들을 모집했다. 그런데 그들이 성지로 가는 도중에 만나는 유대인들을 무슬림처럼 취급하였다. 그러나, 십자군의 유대인 학살에 대하여 유대 공동체는 금욕적이고 냉정한 태도를 보였다. 유대인들은 십자군이 칼을 대고 제시하는 세례를 거부하면서 세례 받기보다는 율법대로 죽음을 감수하거나 아니면 집단 자살을 택했다. 십자군의 유대인들에 대한 만행은 십자군이 회복하고자 했던 성지 예루살렘에서 자행되었다. 십자군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칼은 무슬림들은 물론 유대인들을 죽인 피로 물들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여, 우리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회당에 불을 질러 안에 있던 유대인들이 산 채로 불에 타 죽게 하였다.[11]
루터의 반유대주의
동정적인 입장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의 유대적 배경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그것은 유대인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라고 지적했다. 선교적인 관점에서 교회가 같은 뿌리의 종교를 가진 유대인 형제들에게 너무도 악한 모습을 보이고, 오히려 그들을 핍박함으로 유대인들이 교회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고 반성하였다.
1523년 루터는 《예수는 유대인으로 나셨다 Dass Jesus Christus ein geborener Jude sei 》라는 도발적인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하여 기독교인들의 사악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또한 유대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만일 내가 유대인이었다면 이런 둔하고 버릇 없는 자들이 기독교 신앙을 규제하고 가르치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기독교인이 되기 보다는 차라리 암퇘지가 되기를 더 좋아했을 것이다. 우리는 몇몇 유대인들을 그들 조상이 가졌던 참 신앙으로 이끌어 줌으로써 그들을 돕기를 원한다.”[12]
그러나 루터는 1543년 1월 반유대주의로 급선회하는 《유대인들과 그들의 거짓말에 관하여 Von den Jüden und jren Lügen》를 발표했다. 그는 이 저술에서 "유대인의 회당을 불지르고, 그들을 죽이고, 매장하고 회당을 무너뜨리고, 탈무드를 빼앗으라"고 주장하며 유대인 탄압을 선동했다. 루터의 이런 주장은 묻혀 있다가 19세기 초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독일에서 기독사회당 (Christlich-soziale Partei) 대표인 아돌프 슈퇴커(Adolf Stoecker 1835-1909) 에 의해 널리 퍼졌고 나찌에게 파급되었다.[13]
반유대주의가 최고조에 이르러 사회문제로 표출된 사건은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 때였다. 1894년 드레퓌스는 증거가 없는데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간첩으로 몰려 무기징역에 처해져 악마섬(Île du Diable)에 유배되었다. 반유대주의는 가톨릭 교회와 가톨릭 언론, 군부등을 중심으로 급속히 퍼졌다. 이에 에밀 졸라를 비롯한 지식인들의 격렬한 항의는 유럽에서 반유대주의의 심각성을 일깨웠고 이는 곧 오스트리아의 언론출신 유대인 테오도어 헤르츨의 시온주의 주창으로 연결됐다.[14]
인종 학살극인 홀로코스트의 충격으로 유럽과 미국에서는 극소수의 극우 이외에는 반유대주의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아직도 반유대주의가 강하게 남아있으며, 특히 이스라엘 국가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서 크게 나타난다. 또 아마디네자드 이란 전 대통령이 이스라엘에 핵 미사일을 날리겠다고 공언할 만큼 특히 이슬람 종파 중 시아파에서는 극심한 반유대주의가 나타나고 있다. 미국에서도 그록 등이 반유대주의 데이터들을 학습해 논란이 발생한 적이 있다.[15][16][17]
"Antisemitism has never anywhere been concerned with anyone but Jews." 루이스, 버나드. "Semites and Antisemites"보관됨 2011-05-14 - 웨이백 머신, Islam in History: Ideas, Men and Events in the Middle East, The Library Press, 1973.
근대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유대인들을 부르주아 계급으로 이해하여 반대하였다. 물론 모든 유대인들이 자본가였던 것은 아니었다. 살림지식총서《유대인》/정성호 지음/살림
Schafer, Peter. Judeophobia, Harvard University Press, 1997, p 208.
Flannery, Edward H. The Anguish of the Jews: Twenty-Three Centuries of Antisemitism. Paulist Press, first published in 1985; this edition 2004, pp. 11-12.
마카베오상 1:44-50.....(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왕은 또 사신들을 예루살렘과 유다의 여러 도시에 보내어 다음과 같은 칙령을 내렸다."유다인들은 이교도들의 관습을 따를 것. 성소 안에서 번제를 드리거나 희생제물을 드리거나, 술을 봉헌하는 따위의 예식을 하지 말 것. 안식일과 기타 축제일을 지키지 말 것. 성소와 성직자들을 모독할 것. 이교의 제단과 성전과 신당을 세울 것. 돼지와 부정한 동물들을 희생제물로 잡아 바칠 것. 사내아이들에게 할례를 주지 말 것. 온갖 종류의 음란과 모독의 행위로 스스로를 더럽힐 것. 이렇게 하여 율법을 저버리고 모든 규칙을 바꿀 것. 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반유대주의(은행 유대주)란유대인및유대교에 대한 적의, 증오, 박해, 편견을 말한다[4]. 또한 종교적·경제적·인종적 이유로 유대인을 차별·배척하려는사상[5].
19세기 이후의인종설에 근거한 입장을반샘주의(한샘 섭기) 또는안티세미티즘(영:antisemitism)이라고 부르고[4][6], 근대인종차별주의이전유대인증오(영:judeophobia]와는 구별하여 인종론적 반셈주의라고도 한다[8]. 셈이란셈어를 말하는셈족을 가리키며 아랍인과 유대인을 포함한다. 19세기에에르네스트 루난이나 빌헬름 마르 등에 의해 셈족과아리아족이대비되어, 반유대주의를 '반셈주의'로 하는 용어도 정착했다[주1].
본래 유대인에 대한 차별적인 공격을 가리키며 이스라엘의 정책에 대한 비판은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에는팔레스타인 문제등 이스라엘 정책에 대한 비판을 건전으로 한 반유대주의가 있다고[11]국제 홀로코스트 기억연맹(IHRA) 은2016년 “ 국제 홀로코스트 기억연맹에의한반유태주의 잠정정의(영문판)'에서 '유대인의 집단으로 포착된이스라엘 국가를 표적으로 하는 행위'를 '반유대주의'로 정했다[12](자세한 내용은후술). 동시에 “다른 나라에 대한 것과 같은 이스라엘 비판은 반유대주의가 아니다”고 했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비난을 널리 반유대주의가 될 수 있다고 정의한 내용이었다.
IHRA 정의 자체는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이스라엘과 구미를 중심으로, 반유대주의 규제의사실상의 기준으로서 이용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국내 인권 단체가 테러 조직 지정되거나[13], 구미에서는 부모 팔레스타인 시위가 규제되고 있다[14][15].
실제로는고대 로마이전에 민족간의 일반적인 학대와 혹사와 후세의 의미에서 반유대주의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다.유럽국가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나서는 명확하게 반유대주의라고 부르는 사태가 생겨나갔다.이슬람세계에서 유대인은아웃사이더로 간주되었다.과학혁명과산업혁명이후 근대사회에서는인종에 근거한 반유대주의(반셈주의)가 주창되어제2차 세계대전중나치 독일에 의한 유대인대량학살을가져왔다. 1948년이스라엘건국 이후에는중동에서도 반유대주의가 휩쓸리게 되었다.
이하에서는, 반유대주의의 역사 뿐만 아니라, 반유태주의가 태어난 배경으로서, 유대인을 둘러싸는 시대마다의 상황, 각국 각 사회에 있어서의 유태인의 취급외, 유태 측의 반응 등의 역사를 말한다.
기원전 2세기,세레우코스 아침시리아의 왕안티오코스 4세는이집트의프톨레마이오스아침을 타도해 당지의 유대인을 지배했다.기원전 167년에 유대인의 반란마카바이 전쟁이일어났을 때, 안티오코스 4세는 탄압 정책을 개시했지만, 거기에는 유대종은 다른 백성과 우호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적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끊을 의도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주3].
유대전쟁 후 유대교는 존재를 용서받았지만 예루살렘의 성전체제는 붕괴하였고,파리새파는야브네의 땅을 거점으로 했다[29]. 10만 가까운 유대인 포로는, 전 로마 제국에 은화 한 장으로 노예로서 팔렸다[17]. 유대전쟁 당시 기독교인들은 반란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교도는 기독교인들을 적시하게 되었다[27].
70년대에팔레스타인과소아시아에서 성립한 기독교복음서[주 4]에서는 예루살렘 공위전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유대교 집단의바리새파가위선자로 비판되었다[1][31].요한복음서에서 유대인은 '악마에서 나온 자'이며 '그는 처음부터 인살하고 진리에 서는 사람이 아니다'[32]와유대인을 그리스도 죽이고 악마의 아들과 비난하며 기독교의 반유대주의에 신학적 표현을 주었다[25.복음서에 기록된이스카리오테의 유다에 대해, 폴리아코프는 유다의 이름은 우연이라고 하는 것보다 의도가 일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33].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요안네스 크루소스토모스는 유대인은 도적, 야수로 “자신의 배를 위해서만 살아 있다”고 매도하고[33]“만약 유대교의 제식이 신성하고 소중한 것이라면, 우리의 구원의 길이 잘못되었을것입니다.“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걸고 성령의 도움을 받았다면, 회당은 악마의 거처”라고 말했다[25].
이후비잔틴 제국에서 반유대주의의 전통이 형성되어 천년 후모스크바 대공국에서 유대인 공포를 가져왔다[33]. 골드하겐은 요안네스의 사례가 서양 근대에도 연결되어 기독교인에게 있어서의 유대교도는 유해하고 해충이며, 기독교인이라는 것 그 자체가 유대인에 대한 적의를 낳고 유대인을 악의 권화, 악마로 간주해 갔다고 한다[37]. 요안네스의 '유대인에 대한 설교(Adversus Judaeos)'는나치 독일에서 자주 인용되었다[38].
동 로마제국 황제테오도시우스 2세(재위 408-50)는 유태인을 공직 추방했고, 이 포고는 유럽에서 계승되어 18세기까지 효력을 가졌다[25].
기독교인들에게 유대인은 예수의 계시를 부인함과 함께 예수를 살해한 특별한 민족이며, 유대인은 하나님의 모독자이자 세계 도덕질서의 파괴자이며, 이것은 기독교 문화의 원리가 되었다[37]. 4세기에 기독교 교회가 승리를 거두고 나서 중세를 통해 반유대주의는 단절되지 않았다[37][41].
589년의 제3회톨레도 공회의에서고트 왕국은아리우스파로부터 카톨릭으로 개종한 것 외에 유대인이 기독교인의노예나 아내를 가지는 것이 금지되었다[42].612년시세부트왕이 유대인에게 기독교세례를 강제한 데다 제4회 톨레도 공의회에서는 개종한 유대인에게 소송을 금지했다[42]. 제6회 톨레도 공회의(639년)에서 유대교 의례를 금지하는 서약서를 제출되는 킨티라왕의 정책을 추인하고[42], 제8회 회의(653년)에서 서고트 법전에서 유대교 종교 의례를 금지했다[42].680년제12회 톨레도 공의회에서 엘릭왕의 반유대법이 승인되어 유대인의 강제개종이 법적으로 정해져 위반자는 추방, 노예와 재산의 몰수가 부과되었다[42].
693년, 에기카왕이 전왕의 세력의 음모에 대하여 제16회 톨레도 공회의에서 음모에 가담한 대주교나 귀족의 재산 몰수를 명함과 동시에,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는 유대인의 재산 몰수를 명하고, 서고트 법전에도 기록되었다[42]. 제17회 톨레도 공회의(694년)에서 에기카왕은 유대인에 의한 왕국 전복 계획이 발각되었다고 고발하고, 주교들은 “히스패니아의 유대인을 전원노예로 한다”고 의결했다[42].
프랭크 왕국
프랭크 왕국의 시대별 영토
프랭크 왕국에서는 6세기에 왕의 어용 상인 유대교도 플리스크스 등의 유대 상인이 지중해 교역에서 활약했다[43][44].
칼로링 아침에도 유대인 대상인이 활약하고[45], 칼로링 시대에는 '유대인'과 '상인'은 동의어였다[17]. 왕실의 비호를 받은 유대인은 기독교 공동체에 대하여 개종 활동을 전개했지만, 이에 기독교 성직자는 반발했다[45].
8세기 초,우마이야 아침이 서쪽 고트 왕국을 멸망시키고 프랭크 왕국을 정복하려고 했을 때, 유대교도가 이슬람에 손을 빌렸다고 기독교 측의 기록에 기록되어 있다[44].
732년에 멜로빙 아침 프랭크 왕국의미야자카 칼 마르텔에 의해 우마이야 아침의 진격이 막히게 된 후,포와티에에서의 정주가 유대인에게 허가되어 동방교역에 종사했다[44].
759년에살라센인에게 점령되어 있던 남프랑스의나르본느를 탈회한피핀 3세는무기를 원조한 유대인에게 나르본느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영지에 거주하거나 유대 공동체의 대표가 '유대인의 왕'을 자칭하게 했다[17][44].
『살리카 법전』의8세기사본의 서문에서는, 게르만계의프랭크족 에대해「하나님 스스로 만들어진 이미 고명한 인종, 군사에 강하고, 결속에 느긋하고, 사려깊고, 흐릿한 아름다움과 하얀색을 가져, 고귀하고 건강한 신체를 가지며, 용감하고썼다.
칼 대제(재위:768년-814년)는 기독교로의 개종을 국민에게 강제했지만, 유대인은 '성경의 백성'이기 때문에 신앙이 허용되었다[17]. 또한 유대인은 자유 통상 무역을 허가받았고 유대 공동체 내에서의 재판권도 허가되었다[17]. 칼 대제는797년에 아버스 아침에 유대인 이츠하쿠를 파견했다[주 6]. 칼은 이탈리아에서 유대인 상인을 불러라인 강·모젤 강유역에 살게 되어, 슈바이어,볼무스,마인츠에 3대 유대 공동체가 성립해,본이나쾰른에도 유태 식민지가 쌓였다[44]. 또한 칼은 바빌로니아의 마힐을 나르본느에게 불러 '유대의 왕' 칭호를 자칭하거나예시버를 개설하도록 허락했다[44].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경계가 확정된 이후, 기독교 세계에 있어서 동방과의 교역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유대인 상인이 동방교역에 나서 페르시아, 인도, 중국까지 진출했다[17].
9세기전반의리옹에서는 유대인이 궁전에 출입하거나 징세관이 되거나 노예를 소유하기도 했다[44].황제 루드비히 1세(루이 1세)는 유대교도에게 개종운동을 허가하고839년에 궁정조제보드(Bodo)가 유대교로 개종했다. 리옹 대주교 아고바르(778-840년)는 루이 1세에 유대인에 의한 개종운동의 금지를 호소했지만, 왕은 유대 행정관 에블라를 파견하여 유대인의 특권유지를 선언하고, 추방된 아고바르는 유태인의 세력 확대를 한탄했다[4].
유대인이 프랭크 왕국의 궁정과 무역에서 활약하는 한편, 반유대주의도 전개해 갔다.843년의베르단 조약에서 왕국이 3분할된 후,848년에바이킹의데인인이서프랭크 왕국의보르도를 습격했을 때에는 유대인이 배반했다고 여겨졌다[44]. 860년경 리옹 대주교 아모론은 유대교의 '감염'에서 기독교도를 지키기 위해 유대인의 음식과 음료를 입에 넣는 것을 금하고[45],876년에는선수의 유대교도 수녀와 관계를 가진 것으로 추방되었다[44].
마디나에서무함마드는 유대교도에 의한 하나님의 가르침의 곡해를 바로잡기 위해 하나님이 아랍어로 무함마드에게계시했다고 선언했다[47]. 또한메카와의 전쟁 중 무함마드는 유대교인 카이누카우족(카이누카족)과 나디르족을 추방했고, 메카 측에 붙은 유대교도의 클라이자족의 남자는 모두 살해되어 여자는 노예로팔렸다(클라이자족학살사건).
628년에 하이발의 나디르족이 항복했을 때, 다른 오아시스의 유대교도 항복했다[47]. 이후 유대교도는진마의 백성(진미)으로 되어, 반이슬람적 행동을 취하지 않고,지즈야세(인두세)를 지불해, 이슬람의 공권력에 따르거나 전비 부담을 조건으로 신앙이나 재산은 인정되었다[48][49][50].
크루안에서는 유대교도와 기독교인을 '계전의 백성'이라고 부르며 다신교도와 이교도들과 구별하여 인정했지만[50], 많은 곳에서 유대교도가 계시를 개조했다고 비판된다[50][51]. 또 “금지된 이자를 취하고 사람들의 재산을 어리석은 것에 낭비했다” 유대교도는 불신심자이며 “우리는 통렬한 징벌을 마련해 놓았다”고 비난받는다[52]. 한편, 이슬람교에서는 종교의 강제적 포기나 개종은 강요할 수 없다고도 한다[50][53].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왕조무와히드 아침(1130년~1269년)에서도 기독교인과 유대교가 박해되었다.
중세
이슬람으로 파괴된 후 재건된 성분묘 교회
카페 아침프랑스 왕국에서는992년리모주에서 르망으로기독교로 개종한 세호크가 유대 공동체에서 추방된 복치에 밀랍 인형을 회당의 성대에 숨기고 유대인은 기독교인에게 저주 의식을 하고있다고고발했다.996년유그 카페가 죽은 곳이 '쥬이'였기 때문에 유대인이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44]. 1007년경로베일 2세 경건왕이 유대교도에게 개종을 강제하고 순종하지 않는 자는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유대교도 예크티엘의 직소를 받은 교황은 프랑스 왕에게 철회시켰다[44].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국가에서1009년파티마아침에 의한성분묘 교회파괴에 대해 유대인이 교회의 파괴를 부추겼다는 소문이 유포되어 국지적으로 강제 개종이나 추방이 이루어졌다[45][54]. 수도사 라울 그라베르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땅과 마을에서 모든 유대교도를 추방한다는 점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적고 있다[44].
이 이후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가 기독교세계의 복멸을 공모하고 있다는 견해가 일반적인 것이 되었고,부활제에는 유대 공동체의 장이편하게받는 관습이 시작되었다[54]. 툴루즈에서는성금요일에 대성당 앞에서 유대교도에 대한 기수가 시작되어 12세기까지 이어졌다[44].베지에에서는가지의 주일에 유대거주구에의 습격이 주교에 의해 용서되었다(1161년에 금지)[44].
1010년에 루앙, 오를레앙, 리모주에서, 1012년에는 마인츠나 라인강 유역의 도시, 그리고 로마 등에서 유대인이 강제 개종이나 학살, 추방의 대상이 되었다[45].
1096년중세 유럽에서성지예루살렘을이슬람국가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한십자군의 파견이 시작되면 기독교의 적으로서 이슬람교와 유대교가 간청되어 반유대주의가 강해져 각지에서 유대인에 대한 습격이 발생해 갔다[54].
민중 십자군을 조직했다고 전해지는은자 피에르는 쓸데없는 폭력을 조심하고 유대인에게는 물자와 자금을 조달시켰음에 그쳤다[55]. 민중 십자군으로부터의 공격에 대해 유대교도는 인수에 의하여 흘러내렸을 수도 있었다[54].루앙의 십자군 참가자는 동쪽에 있는 하나님의 적을 물리치러 가고 싶지만, 가까이서도 하나님의 적인 유대인이 있는데 이것은 본말 전도라고 말하고 실제로 루앙을 비롯해 프랑스 전역 및 유럽 각지에서 유대인이 방어되었다[25][55].
라인란트지방에서는 라이닝겐의 에미효 백작의 군단이라인 협곡을내려가면서 유대인 마을에 대해 “세례나 죽느냐”고 두 자택일을 다가가 습격했다[55].1096년5월 3일, 에미효 후군은슈파이어에서는 유대인 11명을 살해하고, 5월 18일부터 25일에 걸쳐볼무스에서 유대인 800명을 살해 또는집단 자결에 몰아넣고[56], 5월 27일(28일[17])에는마인츠에서 마찬가지로 유대인 700명에서 1014명[57]을 살해 또는 자결로 몰았다[55].
이 밖에,7월 8일에쾰른,7월 14일에 노이스, 그 외에트리어,바이에른의레겐스부르크와밤베르크,메츠,프라하등에서 습격이 일어났다[17][55]. 각지의 영주와 주교는 때때로 스스로의 목숨을 걸어 유대인을 지키려고 했지만, 최하층민은 십자군 병사에 의한 학살에 합류했다[55]. 작센의 연대기작가는 이런 십자군 병사에 대해 '인류의 적', '가짜 형제'라고 꾸짖고 있다[58]. 엑스의 알베르는민중십자군이룸셀주크 아침에 대패패한 것은 하나님의 징벌이며 유대인 학살에 대한 정당한 보답으로 했다[58].
신성 로마 황제하인리히 4세는개종을 강제된 유대인에게 원래의 믿음으로 돌아가게 했다[55]. 이것이 신성 로마 황제와 그 신민 유대인이라는 특수한 관계가 태어난 계기가 되었다[55]. 한편, 교황 클레멘스 3세는 강제 개종의 취소에 강하게 분노했다[55].
1146년에데사 백령의 상실을 받아 로마 교황 에우게니우스 3세가제2회 십자군을 호소했다.클루니 수도원장피에르는 "마호메트교도의 천배나 죄 깊다" 유대인이 가까이 있는데 왜 원정하는가를 외치고 독일의 수도승 루돌프도 "지금 여기 우리와 교제하여 살고 있는 적을 토벌"해야 한다고 말했다[55]. 이때 쾰른, 슈파이어, 마인츠, 뷔르츠부르크, 프랑스의 카란탄, 람룽토, 슐리에서 유대인이 습격되었다[55].볼무스에서도 습격이 있었다[56].
십자군의 시대에는 독일과 영국, 프랑스를 비롯하여 유럽 각지에서 유대인에 의한 의식 살인(meurtre rituel)이 고발되었다[55]. 이것은혈액의 비방이라고합니다.
1144년잉글랜드의노리지에서 유대인이 의식을 위해 소년 윌리엄을 고문한 후 몸에서 피를 뽑아 그 피를유월절빵에 섞었다는 의식 살인이 고발되었지만, 이것이 최초의 고발이었다[25][58]. 고발자 케임브리지의 수도승 씨 아볼드는 방금 기독교 세례를 받은 개종 유대인이었다[58]. 유대인 명사가 일문 없는 기사에게 살해되는 사건도 일어났다[58]. 영국에서는1168년에 글로스터,1181년에는 베리-세인트 에드몬스에서 의식 살인 고발이 이루어져 유대인이 희생되었다[25].
1147년, 독일의 뷔르츠부르크에서 유대인 몇명이 의식 살인으로 고발되어 몇명이 살해되었다[58].
1150년, 쾰른에서 개종 유대인 소년이 교회에서성떡(호스티아)을 배령하자, 급하게 집에 돌아와 성떡을 흙에 묻었다[58]. 승려가 구멍을 내딛을 때, 아이의 시신이 있고, 빛이 내려가고, 아이는 하늘에 올랐다는 이야기가 있었다[58].
유대인이 금융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기독교수도원과교회관구(슈티프트)가 운영하고 있으며, 처음에는 곤란한 사람들의 지원으로 시작된 금융은 곧 수도원 금융업으로서 대대적으로 발전해 갔다[61].프란시스코 수도원에서는연리4~10%를 받을 정도였다[62]. 이에 대해 13세기수도원 개혁으로 기독교인간의 이자를 수반하는 돈의 대출이 엄격히 금지되었다[61].
12세기에 교회는 유대인의 토지취득에 따른 충분한 일세의 보전을 요구했기 때문에 유대인은 토지를 놓아두게 되었고, 또 도시동업조직은 기독교 형제단의 성격도 있어 수공업은 유대공동체 내부에 머물렀다[54].
이를 배경으로 유대인은 금융에 특화되어 갔다[54]. 이자와 관련된 금융을 가톨릭에서는 금지하고 있으며, 유대교에서도 "당신이 나의 백성의 가난한 자들에게 돈을 빌릴 때, 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 이자를취하지말아야한다.”54].
유대금융의 이자는 30%에서 40%에 이르기 때문에 많은 채무자들은 담보물건을 잃었다[54]. 이렇게 유대인 금융업에 대한 적의가 증대해 갔다[54]. 제2회 십자군을 권진해 돌았던크렐보의 베르나르도스는, 금대업업은 유대인의 본업(유다이차레)이라고 했다[61].
프랑스 왕필립 2세(재위: 1180년 - 1223년)는1180년에 프랑스 왕국의 유대인을 체포하고, 몸값으로 교환하여 석방하고, 그리스도교도의 빚을 폐기하고, 부채액의 20%를 국고에 담았다[59]. 다음1181년에는 유대인의 채권의 5분의 1을 왕의 것으로 하고, 나머지를 파기시키고[63],1182년세금을 지불할 수 없는 유태인을 왕령으로부터 추방하고, 유럽에서 행해진 최초의 조직적인 유태인 추방이 되었다[59]. 그러나1196년에는 유대인을 왕령으로 불렀다[54][63][주9].
루이 9세(재위: 1226년 - 1270년)는 증문 작성과 임차기록 제시를 의무화 등 유태 금융업을 규제하고, 1254년에 십자군으로부터 귀환하면 유태인을 금융업으로부터 추방하는 칙령을 내놓았다[59]. 1235년 노르망디에서 유태인 금융업이 금지되어 유럽 최초의 행정권에 의한 유태인 금융업 금지령이 되었다[59].필립 4세(재위: 1285년 - 1314년)도 유태 금융을 규제했다[54].12세기말부터13세기초에는 프랑스 영주가 유대인을 서로 반환하는 약정을 하고 있었다[54].
헨리 2세(재위: 1154년 - 1189년)의 영국에는 1096년의 십자군에 의한 유럽에서의 방축에서 벗어나 온 유대인 이민들이 많이 거주하며 고리대, 의사, 금세공사, 병사, 상인 등의 직업을 맡았다[25]. 유대인 상인은 재무 대리인, 국왕 대리인으로서 영국 왕에게 끊임없이 대출을 실시했지만, 유대인 상인의 사후, 그 재산은 영국 왕실 귀속이 되었다[25]. 이와 같이 영국에서는 유대인 상인은 '왕의 동산'이며, 또 유대인은 자치상의 특권과 교환하여 특별세를 상납했다[25]. 유대인 대출이자는 연 44.33%라는 고율이었기 때문에 채무자에게서는 원한적이 되었다[25].
12세기 말 영국 재무법원에 유대 재무국(Exchequer of the Jews)이 만들어져 유태인 금융업이 법규제 하에 놓여 거래서류는 왕실관고립회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63]. 잉글랜드의 유대인은 금융업을 운영하고 왕후의 부인으로서 특수한 봉신이 되어 있었다[63].
그러나 1210년,존 결지왕재위: 1199년 - 1216년)는 유대인에게 법외의 납세액을 청구하고, 지불할 수 없었던 브리스톨의 유대 상인을 유폐하고, 이를 빼고 처형했다[63]. 존 결지왕은 유대인을 비호했으나 재정이 악화되면 유대인에게 1만마크의 벌금을 부과하고 완제할 때까지 발치되거나 눈을 끌어당기거나 했다[25].마그나 카르타의 10.11조에서는 유대인에게 채무를 지는 자의 사후 변제에 배려되었고, 유대인 고리대출에는 불리한 것이었다[25].
이처럼 높은이자에 의해 유대인 금대업은 영업되고 있었지만, 이윽고 세상에서는 유대인의 집에는 폭리를 드러내는 착취에 의해 부정한 재산이 있어, 그것은 되돌려도 좋다고 하는 유대인 재산 약탈의 사상이 형성되어 갔다[61].1247년에는 유대인으로부터 제후와 성직자가 재산이나 금품을 부당하게 빼앗는다는 호소가 있었다[61]. 중세부터 19세기까지 독일에서 유대지구로의 약탈은 이러한 고리대출업상을 근원으로 하고 있다[61].
1188년,제3회 십자군에 있어서 영국의 런던, 요크, 노리지, 린에서 유대인 대학살이 발생했다[55].1189년리처드 1세(재위: 1189년 - 1199년)가 십자군 출진식장에 유대인 입장을 금지한 것을 유대인 박해의 칙허로 본 군중이 유대인 집으로 방화하거나 30명의 유대인이살해되는폭동이일어났다.세 사람이 처형되었지만, 유대인과 실수로 기독교인의 집에 방화하거나 강탈한 염에 의한 것이었다[25]. 댄스터블에서는 유대인 전원이 기독교로 강제 개종되었다[25].1190년요크에서는 유대인 고리대출에 대한 부채를 폐지하기 위해바론(귀족)들이 유대인에게 착취된 재산을 되찾기 위해 유대인을 습격했다[25]. 성의 탑에 갇힌 유대인은집단 자결했다[25]. 몇 명 있었던 생존자도 개종을 맹세했지만 살해되어 채무증서는 소각처분되었다. 유대인 희생자는 150명이 되었고, 주민 측은 벌금을 부과된 만큼 머물렀다[25].
1191년, 브레슈르=세느에서 의식 살인으로 고발된 유대인 약 100명이 지형에 처했다[58].
1201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폭력이나 고문으로 기독교의 가르침으로 이끌어진 것이라도, 기독교의 각인을 받은 것에는 변함이 없고, 서고트왕 시세부트의 치하에서와 같이 , 하나님의 비밀과의 연결이 확립되어 버린 이상, 강제에 의해 받아들인 신앙에 그 후에도 충실해야 한다고 교서에서 말하고 한 번 개종한 유대인은 기교할 수 없다고했다55].
그때까지 가톨릭교회는 유대인에 대한 폭력에 의한 개종을 금지하고 있었지만,1215년네번째 라테라노 회의 에서 유대인이 기독교인과 성적 관계를갖지 않도록 의복에 식별 휘장 을 붙이고또법외이자의 취급 등 유태 금융업을 규제했다[54].제4라테라노 회의에서는 기독교인에게 고리대출업을 금지하고, 유대인을 공직으로부터 추방하고[68], 유대인은 길드로부터도 밀려났다[61].
유대인을배지(후장)로 식별하는 정책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고, 유대장은 노란색으로 여겨졌다[67]. 이후 위반자에게는 벌금이 부과되어 필립 4세는 유대장을 유료로 하여 재원으로 했다[67]. 유대인의 복장은1179년의제3라테랑 공의회에서도 규정되었지만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 교황의 사절은 독일 각지의 교회에 대해, 기독교인은 유대인과의 동석음식의 금지, 유대인의 결혼식이나 제의에의 참가의 금지, 유대인이 기독교인의 공중 목욕탕이나 술집에의 입점 금지, 유태인 상점에서 고기나 음식을 사는 것을 금지한다고 엄격히 명령했다[61].
나치 독일의 옐로우 배지
영국에서는헨리 3세(재위: 1216년 - 1272년) 통치하에서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상거래와 교제가 금지되어 유태인은옐로 배지의 착용을 명령받았다[25]. 20세기의나치 독일도 옐로우 배지를 강제했지만, 이들은 그 선구자였다[25]. 또한 영국에서는 두 장의 천을 가슴에 꿰매는 것이 의무화되었다[67].
세금을 체납하고 갚지 않는 유대인의 재산은 왕실에 몰수되어 유대 싫었던 수도승과 카올인 고리 대여조차도 유대인의 가혹한 취급을 자비했다[69]. 헨리 3세는1232년에 도무스 콘웰솜(개종자의 집)을 건설하고 유태인에게 개종을 촉구했다[70].
독일에서는 신원이 두건과 원뿔 모양의 노란색과 빨간색 모자로 이루어졌으며 폴란드에서도 녹색 모자로 확인되었습니다[67].1225년의 '작센 법감'에서는 유태인은 아직 자유인이며 무기의 휴대도 허가되고 있었지만, 1275년의 '슈바벤 법감'에서는 유대인은 엄격히 제한되었다[63].
계속되는성왕 루이 9세(재위: 1226년 - 1270년)는 유대인의 개종 정책을 실시했다[54].1230년의 무란의 칙령에서는 유대인의 차용증서는 법적 가치를 갖지 않는다고 하고, 유대인의 대출업자는 농민이나 장인 등의 서민에 한정되게 되었다[63]. 대구의 거래는롬바르디아인이나카올인이하게 되었다[63][72].
1232년, 교황그레고리우스 9세는프랑스 왕에게 유대인 학살의 수모자의 처형과 약탈한 재산의 반환을 요구했다[59]. 한편,칙서에서 교황직속의 이단심문법정을 설치하고, 지방의 주교와 세속권력은 도미니코회와 프란체스코회사의 심문관에 협력할 것을 명하였다[64]. 자백 또는 두 명의 증언만으로 유죄판결이 가능하고고문이 공인되어밀고가장려되었다[64]. 이 칙서와 알비조아 십자군에서 루이 8세가 남프랑스를 제압한1229년의 툴루즈 교회 회의에 의해 이단 심문 제도가 확립되었다[64].
그 후 프랑스에서는1361년에는장 2세가유대장을 빨강과 흰색의 2색으로 변경하고, 또 여행 중에는 배지를 착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약간 완화되었다[67].
유대 서적의 焚書과 '황제 노예'
1234년, 프랑스 몽펠리에와 파리에서 마이모니데스를 이단으로 하는 유대교 랍비의 슈로모 벤 아브라함의 요청에 의해마이모니데스의 저작이 편지되었다[67].
1236년,제6회 십자군에서 프랑스, 영국, 스페인에서 유대인 학살이 일어났다[55]. 이 해 독일에서 의식 살인 사건이 몇 건 발생했다[58]. 신성 로마 황제프리드리히 2세(재위: 1220년 - 1250년)는 개종 유대인에 의한 자문위원회에 의식 살인의 규명을 명하면 유대교에서 인간의 피를 의식으로 사용하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고, 오히려 유대교에서는 인간의피를].
1236년 7월, 프리드리히 2세는금인 칙서에서 유대인을 '황제 노예'로피의 중상으로부터 지켰다[58][63].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독일의 유태인이 황제의 국고(카이사리헤 캄머)에 속한다고 선언한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17].
1240년프랑스 전역에서탈무드가압수되어 焚書되었다[54][67]. 개종 유대인 니콜라 도난이 탈무드를 배덕적이라고 고발하고, 교황의 요청으로 프랑스의 세인트 루이왕(루이 9세)이 탈무드에 대한 공개 논쟁이 벌어진 결과였다[67].
1246년, 베지어 공의회에서 유대인 의사에게 걸리는 것이 금지되었다[주 13]. 일설에서는 샤를루 대왕, 유그 카페, 샤를마뉴 황제도 유대인 의사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73]. 한편, 유대인 의사는 인기를 얻고 있으며, 교황의 알렉산드르 3세와 16세기 교황 파울루스 3세까지 전통적으로 기독교 지도자의 주치의이기도 했다[73]. 또, 포와티에 백 알폰스도 베지에 공회의를 지지하는 한편, 유대인 의사에게 걸렸다[73].
1261년, 신학자토마스 아퀴나스는 유대인은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임을 거부하기 위해 재난을 당하는 것이라 유대인을 영원한 예속에 두는 것은 법에 비추어 옳다고 했다[74][75]. 또한 국왕은 유대인을 소유물(재산)으로 보유할수 있고, 또한 후후는 유대인의 재산을 국가에 귀속하는 것으로 간주할수있다.
1267년교황 클레멘스 4세는 칙서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자를 유대교도로 회귀시키려는 유대인, 탈무드 소지자에게도 이단 심문관의 손이 미치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이단 심문소의 대상은 기독교인에게 한정되어 있었다[59]. 같은 해 비엔나 공의회와 브레스라우 공의회에서 유대인들이 은밀하게 독을 담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유대인 가게에서 식량을 사는 것이 기독교인에게 금지되었다[76].
1268년뷔르츠부르크의 음유시인 콘라트(콘라트-폰-뷔르츠부르크) '에서 탈무드에 의해 어리석게 되었다고 노래하고, 또 지크프리트 헬프링은 탈무드는 '거짓말하고 엿보기'에서 焚書로 할 수 있으면 틀림없다고 노래했다.67].
1274년-1276년의 슈바벤 법서에서는 기독교인과 유대인과의 성교는 불 넘치는 형에 의해 처벌된다고 하고[61], 유대인은 '영원한 예속'에 있다고 쓰였다[63][주 14].
유럽 각지에서 유대인 추방
반유대 칼리카츄어「악마의 아들 아론(Aaron, Son of the Devil)」(1277년, 에섹스)
에드워드 1세(재위 1272년 - 1307년) 시대의 영국에서는 영국화(노르만과 색슨의 융합) 가진행되면 유대인은 더욱 고립되어 유태인의 아이도 과세되어 교회는 유태인에게 식품 판매를 금지했기 때문에아사자였다.유대인 의사에 의한 의료행위도 금지되어 유태인에 의한 고리대여 독점을 방해하기 위해 교황은 카올인 등 남프랑스인, 북이탈리아의 금융업체를 런던에 진출시켰다.
또한1275년유대법(Statute of the Jewry)에 의해 고리대출은 금지되었다[69]. 유대인이 생활고에 의해 화폐변조를 한 것이 발각되면서 유대인 전원이 투옥되어 그 중 263명이 교수형 후네 찢어진 형에 처해졌다. 또한 개종시설에 가기를 거부한 유대인은 재산 몰수를 거쳐 국외로 추방되었다[69].1290년잉글랜드에서 롬바르디아 상인이 세력을 늘리자 유대인의 특권은 상실되고 유대인 상인은 방어되었다[63].
필립 4세단 여왕(재위: 1285년 - 1314년) 시대 프랑스에서는1288년트로와에서 이단 심문재판에서 13명의 유대인이 의식 살인으로 화형에 처해졌다. 트로와에서 희생된 이츠하크 샤틀란을 칭찬한 시에서는 “복수의 신이요, 질투심이 깊은 신이여, 이 부실한 배에 복수하라”고 쓰여졌다[63].
1290년비엣가 사건이 발생했다. 파리에서 요나타스라는 유대인 채권자가 채무자 기독교인에게 산메리 교회(4구)에서 성떡(호스티아)을 훔치면 빚을 갚는다고 해서 성떡을 얻었다[79]. 귀가하고 성떡을 칼로 찌르자 피가 흘러 온수에 넣어도 피가 계속 흘렀다. 요나타스는 옆 기독교인의 집으로 도망쳐 죄를 고백했고, 성떡은 산장 앙 그레브 교회 사제의 손에 건너 요나타스는 화형이 되었다[주 15].
1306년재정궁핍으로 고통받은 필립 4세는 유태인과 롬바르도인(이탈리아) 상인의 재산을 몰수한 뒤 국외 추방했고, 그 일부는 남프랑스로 이주했다[54][59][80]. 이 이전에도 필립 2세, 세인트 루이왕 등도 유대인 추방을 계획한 적이 있었지만, 이것이 프랑스 사상 최초의 유대인 추방이 되었다[81].
추방령에 대해 연대기에서는, 신성 로마 황제알브레흐트 1세가「황제 노예」인 유태인의 반환을 요구했기 때문에 프랑스 왕은 이것에 응했다고 여겨진다[63][주 16]. 프랑스의 서민은 기독교인의 대출업체보다 친절한 유대인 대출업자를 그리웠다는 기록도 있다[63].
1298년4월, 레팅겐에서 성떡(호스티아) 사건. 성떡을 모독한 것으로, 명사 린트프라이슈가 복수를 외치고, 유대인 마을을 습격해, 살해했다[76]. 린트프라이슈가 이끄는 폭도 집단은 프랑켄 지방, 바이에른 지방에서 '유대의 살육자'를 자칭하고, 유대인 마을을 습격하고, 세례를받아들인 사람 이외 를 9월까지의 수개월간에 학살을 계속해, 유대인의 희생자는 수천명에서 10만.1298년, 뷔르츠부르크에서도 박해가 일어났다[17].
1309년- 십자군 계획이 계획 쓰러졌을 때, 독일의 쾰른, 네덜란드, 바라반에서 유대인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55].
중세 유대인 학자의 저작에서는 십자군 시대의 박해의 기억에서 '그리스도'를 '구원할 수 없는 남자', '추방자의 아들', '교회'를 '부정의 집', '바람', '십자가'를 '나쁜 표' 등으로 바꿨다[63]. 슈로모 벤 시메온은 '죄 깊은 로마 교황'이라고 부르거나 박해자 에미효의 뼈를 저주한 뒤에 '복수의 신이여,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이웃에게 불을 7배로 돌려준 라고 써, 엘리에젤 벤 나탄은 기독교인들에게"그들에게 슬픔과 고통을 가져왔어.63].
나프마니데스 (Nahmanides 1194-1270)은이사야서2-4 절에서 “그는 모든 나라들 사이에서 심판을 행하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중재에 섰다. , 나라는 나라를 향해 덩굴을 주지 않고 그들은 더 이상 싸움을 배우지 않는다.83].
13세기말, 경건자 예후다(예후다-에하시드)의 '경건한 자의 책'에서 유대교도는 비유대교도와 둘이 되어서는 안 된다. 토교의 음악으로 아이를 자지 말아야 한다. 또 도둑질을 하면 유대인이 도둑이자 사기꾼이라고 하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된다는 등 교훈이 전해졌다.63].
중세의 유대인 랍비는 예수님을 사기꾼으로 보거나 경건한 유대교도였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을 성인으로 삼아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고 보았다[84]. 이처럼 유대교에서도 기독교에 대한 증오가 드러났다[85].
1315년부터1317년에 이르는유럽 대기근에서는 파리나 앤트워프에서는 수백명의 시체가 가로에 산란했다[76]. 굶주림을 위해, 각지에서인식(카니발리즘)이 행해졌다[76].루이 10세는필립 4세의 유대 추방령(1306)이 왕국의 경제에 타격이 되었기 때문에 1315년에 고액 부과와 교환하여 유태인에게 2년의 귀환을 허가했다[54][59]. 그러나 대기근의 발생에 의해 1317년에는시논에서 유대 거주구가 습격되었고, 1319년에는뤼넬에서 유대인이 의식 살인으로 고발되었다[59].
1320년빈궁을 견디지 못한 프랑스 북부의 농민과 수도승은 목적지 없는 행진을 시작했다[76]. 한 어린 목자들이 기적의 새가 생딸로 모습을 바꾸고 불신심자를 치러 가라고 촉구했다[76]. 이에 따라 목자 십자군(파스투로 십자군, 목동 십자군)이 시작되어 프랑스 남서부, 보르도, 툴루즈, 알비, 또한 스페인에서 유대인이 습격되는 대규모포글롬이 발생했다[55]. 유대인은 습격에 저항했지만, 이윽고 집단 자결을 선택했고, 베르단-슈르-가론느에서는 500명이 자결했고, 목자 십자군에 의해 140개의 유대 거주지가 멸종되었다[76]. 습격하는 유대인이 없어지자 목자 십자군은 성직자에게 모순을 향해 갔기 때문에 교황 요한 22세는 목자 십자군을 곁들여 연말에는 필립 5세가 프랑스군을 출동하여 제압했다[76].
이듬해1321년, 아키텐에서 유대인이 기독교도를 죽이기 위해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소문이 흘러 실제로 우물에 독이 흘렀다[76]. 파르투네의병환자가 유대인으로부터 사례를 받아 우물에 그리스도의 성체(성떡)와 섞어 독을 넣었다고 고백했다는 사건이 일어났다[76]. 필립 5세는 조사를 명령하여 프랑스 전역에서 유대인이 체포, 고발되어 샴페인 지방의 비토리 -=르=프랑수아에서는 40명의 유태인이 옥중에서 자살했고, 툴레느지방시논에서는 160명의 유태인이 처형에 처했다.1322년프랑스 왕국에서 다시 유대 추방령이 내려졌다[54]. 폴리아코프는 유대인이 면밀한 음모로 기독교인의 멸망을 도모한다는 죄의 짓밟기가 행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또 왕권이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하기 위해 갔다고 설명할 수도 있지만 나치가 '잠재적인 복수자'로유대인76]. 이 이후 1361년까지 40년간 프랑스의 자료, 연대기에서 프랑스 왕국의 유대인의 존재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프랑스의 유대인은 거의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81].
1336년, 알자스, 슈바벤에서 유대인 학살[76]. 그 직후, 바이에른의 데켄도르프, 오스트리아의 부르카에서 성체 모독 사건이 발생[76].
1343년,신성 로마 황제바이에른 공루트비히 4세는 12세 이상의 유대인에게 인두세를 부과했다[81]. 루드비히 4세는 뉘른베르크의 유대인들에 대해 유대인은 그 신체와 재산은 황제가 보유한다고 선언했다[81].
1345년보헤미아 왕요한 폰 룩셈부르크는 레그니차, 브로츠와프에서 유대인의 묘지를 부수고 그 묘석으로 마을의 성벽을 보수하라고 명령했다[87].
페스트
1347년(1348년)부터1350년(1349년)에 이르는 흑사병(페스트) 대유행에서는 유럽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피해가 되었지만, 그스케이프 고트로서 유대인 박해가 각지에서 발생했다[54][88][89]. 프랑스 왕국에서는 유태인에 의한 독 살포 소문이 퍼져 최대 규모의 포글롬이 일어나 프랑스 왕국의 유대인 공동체는 거의 소멸했다[54]. 개종하지 않았던 유대인 가족은 화형대의 불이 보이면 모두 노래하고 노래하면서 불에 뛰어들어갔다고 하며, 이러한 일의 배경에는 집단 자살의 계약, 또순교자로서의 굳은 결의가 있었다고 한다[90][주 18].
1348년제네바에서페스트의 원인으로 유대인이 박해된다[88]. 9월, 교황은 유대인도 페스트의 피해에 있다고 발포했지만, 유대인에게의 습격은 멈추지 않았다[92].1349년베른에서페스트의 원인으로 유대인이 박해되어[88],스트라스부르에서는 폭도에 의한 내란상태가 3개월간 계속되고, 시 당국이 유대인에게 페스트의 죄가 없다고 발표하면, 시정부는 전복되어 새로운 시정부가 2000명의 유태인을 체포1349년2월 14일에 모두를화형에 처하고 유대인의 재산을 기독교인 주민에게 분배했다[92]. 친숙한 사건이 볼무스, 오펜하임에서도 발생하여 유대인이 집단 자결을 했고, 프랑크푸르트, 에르푸르트, 쾰른, 하노버에서 유대인이 학살되거나 추방되었다[92]. 영국과 프랑스에서의 전염병에 의한 박해로 인해 유대인은동유럽으로 도망쳤다[93].
채찍 고행자.
또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고행과 개회를 위해 공중의 면전에서 자신을 채찍질하는 '채타고행자'가 나타났다[92][94]. 1261년 채찍 고행은 이단으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페스트 시대에 대규모로 전개되었다[94]. 채찍 고행자는 자신들의 의례와 노래가 교회 성직자보다 아름답고 위엄이 있다고 주장했다[92]. 이 채찍 고행자의 통과 후에 병사나 질병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역병은 유대인이 기독교 세계에 독을 넘어가게 하기 위해 유행시켰다고 믿어져, 유대인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92]. 유대인이 전혀 없었던 튜튼기사 수도회의 지방에서는 유대 기원을 의심받은 기독교인이 학살되었다[92].
유대인에 대한 과세 및 보호 정책
신성 로마 황제는 유대인에 대한 징세권을 담보로 하여 다양한 거래를 했다.1308년룩셈부르크 가문의황제하인리히 7세는마인츠 대주교에게 황제 선거에서 당선되면 유대인세를 증여하겠다고 약속했다[17].루드비히 4세는“여의 등은 몸도 소지품도 모두 우리의 것이 된다. 우리는 바라는대로, 마음대로 여의들을 처우한다”고 유대인을 황제의 재산이라고 말했다.봉건제하에서 수봉이나 증여에 의해 황제의 수입이 줄어들수록 유대인으로부터의 세수입은 중시되었지만, 황제권이 동요하자 유대인에 대한 징세권은 점차 제후나 주교, 도시의 손으로 옮겨갔다[17]. 유대인은 공동체로 지불하는 세, 개인으로 지불하는 세, 체재허가, 결혼허가세 등 30종류의 납세의무를 지고 있었다[17].
14세기 중반에는 각지에서 유대인 보호 정책이 취해졌다.1352년독일의 슈파이어에서는 유대인을 불러오는 것이 외쳤고, '마이센 법서'에서는 유대인의 회당과 묘지가 보호되었다[92]. 1369년부터 1394년 사이에는 마인츠, 프랑크푸르트 등에서 유대인 의사가 두려워하고 있었다[73].
작센의 루돌프(Ludolf von Sachsen, 1295-1378)의 'Vita Christi(그리스도 전)'는이그나티오 데 로욜라에 영향을 주었다[95][96]
칼트지오회수도사 작센의 루돌프의 『그리스도전』(1374년)에서는 유대인 공동체에서 추방된 자에게 침을 뱉는 것이 유대의 습관이지만, 예수님도 침을 뱉고, 수염과 머리카락을 뺀다. 붙잡혀 '악마의 아들'인 유대 백성은굳형을 요구했다고 해설하고 유대인은 하나님의 보상으로 세계 각지에 흩어져 예속 상태에 놓여 있다고 설교했다.96].
1378년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에 의해 비개종 유대인이 규탄되게 되면 1380년대 프랑스에서 다시 대규모 유태습격이 일어나[81],1380년, 1382년 파리와 일 =드=프랑스에서 폭동이 다발되었고.샤를 6세는유대인 보호에 성공하지만 유대인에 대한 과세가 무거워지면서 유대인의 특권도 확대해 나갔다[81].
독일에서도 유대인 보호 정책이 계속되고 있었지만,1384년에는아우크스부르크와 뉘른베르크에서 유대인이 수감되어 막대한 몸값으로 석방되었다[81].1385년에는 독일 38개 도시 대표가울름회의에서 유대인의 채권을 전면적으로 파기하고 기독교인 채무자를 해방했다[81].1388년에는스트라스부르크에서 유대인이 추방되었다[81].
프랑스 왕국의 유대 추방령
1389년2월 프랑스 왕국칙령에서 기독교인과 유대인 간의 분쟁은 '유대 호위관'이 담당하고, 또 유대인에게는 채무자를 수감할 권리가 인정되었다[81]. 그러나 왕국에서는 반유대 세력이 강해져 갔기 때문에샤를 6세는유대교의 '속죄의 날(욜키풀)'과 같은 날인1394년9월 17일프랑스 왕국에서 최종적인 유대 추방령을 발령했다[54][81]. 이 유대 추방령은 1615년에도 갱신되었다[97].
다만, 프랑스 왕국 이외의 교황령이나 프로방스 백령에서는 유대 공동체가 존속했다[54]. 그러나프로방스 백령에서도1420년대부터 포글롬이 발생했다[54].르네·단주-프로방스 백은 유대 재력을 이용하기 위해 유대인을 보호했지만, 1473년 이후 교회와 민중의 유대에 대한 반감은 어려워졌다[54]. 던주-사후1481년에 프로방스 백령은 프랑스 왕국에 합병되었기 때문에 유대인은 이산했다[54].
1394년프랑스에서의 유대 추방령 이후는 유대인은 영토가 세분화하고 있던신성 로마 제국으로 옮겨갔지만, 거기에서도 또 추방이 계속되었다[81].
중세 종교극의신비극, 성사극, 기적극 등에서는 유대인이 악인으로 그려져, 『성떡의 성사극』에서는 유대인 고리 대출이 기독교인의 여자를 망치고 성떡을 훔쳐 시킨 후 성떡을 돌로 짓밟거나 해서도 성떡은 피를 흘리는 것만으로 이 기적에 의해 유대인은 개종하지만 유죄 판결이 되어 焚刑에 처된다는 근거였다.98].독일 성사극의 '알스펠트의 수난극'에서는 악마가 예수의 모살을 14명의 유대인에게 맡기고, 유대인 집단은 박수 갈채하면서 예수를 매도하면서예수 치형을 했지만, 못 박기나 밧줄 묶기 등이 원문으로 700행 이상 지출되고, 또 무대상에서는 붉은 액체가 이용되어 박진한 연기가 행해졌다99]. 프랑스의 주안 미슐레의 수난극에서는 유대인이 예수를 고문하고, 예수의 머리카락과 수염이 고기마다 뽑히고, 예수의 몸에 담당마다 투타가 가해졌다[100]. 영국의 성사극,성체 공휴일에 행해진 코퍼스 크리스티 축제극에서는 「노아의 방주」를 선목공 길드 「마지막 만찬」을 빵 장인 길드, 등 각 길드(미스터리)가 분담했다[69]. 그리스도 수난은 못사 길드에 의해 담당되어 잔인한 장면에서 연기의 못사가 실신하거나 관객에게는 발광하는 것도 있었다[69]이런 성사극에서는 유대인은 흑포를 입은 피에 굶주린 사디스트로서 그로테스크에 그려졌다[69].
14세기 말에는 이탈리아 회화에서 유대인이 전갈에 비유되었다[101].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는 암컷 돼지에 자란 유태인이라는 도안이 교회 비석에 새겨져 레겐스부르크 교회와 비텐베르크 교회에서는 돼지 우유를 마시는 유태인의 벽면 조각이 장식되었다[101][102]. 비텐베르크 교회의 돼지 우유를 마시는 유대인의 벽면 조각에 대해서는루터가 유대를 공격했을 때 묘사되었다[101]. 또한 14세기 이후에는 머리에 모퉁이를 낳은 유대인이 오쉬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베로네세의 그리스도 수난 등으로 등장했다[101].
1378년, 피렌체의 작가 조반니 피오렌티노는 '조망자(일 페콜로네)는 '인육 1파운드'를 저당으로 하는 유대인 고리 대출을 등장시켜,셰익스피어가 '베니스의 상인'의 저본으로 했다[103].
1386년제프리초서 의 '캔터베리 이야기' 아마데라 사장의 이야기에서 '링컨의 휴'라는 소년이 유대인들에 의해 죽여 비참하게 쏟아졌다고 한다[69][104]. 이것은 1255년의 의식 살인에 관한 「휴전, 혹은 유대인의 딸」이라고 하는 14세기에 유포한 발라드로부터의 영향으로 여겨진다[103]. 초서는 또한 소아시아의 유태인 게토를 "바쁘게 하는 돈 빌려주고나 길 없는 돈벌이를 위한 구획"이라고 묘사했다[69].
스페인을 비롯해중세 말기에 기존 유대인 거주지가게토로 변화했다[106].1432년독일의프랑크푸르트에서 교회나 시민의 요망으로 번화가에 살던 유태인을 도시 성벽 밖으로 격리할 계획이 시작되어1462년황제프리드리히 3세명으로시가 건설한 프랑크푸르트 게토가완성 되어 유태인이 강제이주되었다.게토에는 문이 설치되어 유태인은 낮 동안만 기독교인의 가구에 출입하는 것이 허락되고, 저녁이 되면 게토의 문은 야경에 의해 잠겼다[61][106]. 또,일요일이나 기독교제일도 겟토에서 기독교인의 가구로의 외출은 금지되어 외출이 가능한 날이라도 유대인이라고 식별하는 유대복을 착의해야 하고, 또 2명 이상 도당을 짜서 걷는 것은 금지되었다[61].
각지의 게토의 유대인 주민은 엄밀히 규정된 질소로 경건한 생활을 보냈다[106]. 게토의 삶은 기독교 수도원의 삶과 비슷했고, 주위에서 격절되어 하나님을 섬기고, 경건과 자기 희생, 지적 작업에 염색되었다[106].
1420년, 오스트리아, 마인츠에서는 마인츠 대주교에 의해, 유대인 추방령이 내려졌다[81]. 같은 해 알자스의 릭빌에서는 영주의 허락 없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유대인을 납치하고 살해하거나 추방했다[81].1424년에는 프라이부르크와 취리히, 쾰른으로부터 고리 대출의 취급을 이유로, 유대인이 추방되었다[81]. 프라이부르크에서는1401년부터 유대인은 기독교인의 피에 굶주리고 있기 때문에 추방 청원운동이 이루어져 왔다[81]. 이후,1432년의 작센,1439년의 아우크스부르크,1453년의 뷔르츠부르크,1454년의 브레스라우와 독일 각지에서 유태인이 추방되어 갔다[81].1434년바젤 공의회에서는 대학에서의 연구에 유대인이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고, 또한 유대인을 개종시키기 위해서 강제설교(predica coattiva)의 필요가 정해졌다[103].
시에나의 베르나르디노(Bernardino of Siena, 1380-1444)프란시스코 회수도사 카피스트라노의 세인트 조반니도미니코 회 수도사 지로라모 사보나로라.훌라 발트로메오작
시에나의 베르날디노는 1427년오르비에토에서의 설교 등으로 유대인이 돈 빌려와 의학에 의해 기독교에 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단절했다[73]. 이것은 아비뇽의 유대인 의사가 평생을 통해 독약을 약으로 건네주고 수천명의 기독교도를 살해해 온 것은 기쁨이었다는 자백에 근거한 것이었다[73].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전도활동한프란시스코회수도사 카피스트라노의 조반니[107]는 유대인을 보호하고 있는 영주에게 하나님의 분노가 쏟아진다고 위협하고,1453년부터1454년에걸쳐 슈레지엔의 의식 살인재판을 연출, 폴란드의유다.
도미니코 회 수도사로피렌체 공화국의 정치 고문사보나로라[주 21]는 유대인을 추방하고 공영의 전당포를 개설했다[73]. 그러나 교황을 비판했기 때문에1497년에 파문되어 1498년에 처형되었다.
1470년독일 바이에른의 엔딩겐에서 의식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58]. 다음1471년마인츠 대주교가 다시 유대인 추방령이 내려졌다[81]. 마인츠에서는 추방령이 내려진 뒤 철회되거나 다시 추방령이 내려지는 등[81].1476년에는 레겐스부르크에서도 의식 살인을 이유로 유대인이 추방되었으나, 신성 로마 황제로부터 신뢰받고 있던 레겐스부르크의 유대인 공동체의 밀사가 궁정에 탄원하고 한번 취소에 성공했지만,1519년에는 레겐스부르크1에서.1477년에는 알자스 여러 도시에서스위스 동맹병사가 유대인을 습격하기 때문에, 미리 유대인을 추방하도록 청원했다[81].
15세기말 독일은 경제적으로 번영했고,바이에른 공국의아우크스부르크에서는 광산·금융업의 부자후거가, 금융업의 부호버저가, 임호프가(Imhoff), 호호슈테터가(Hochstetter) 등이 거만한 부를 쌓았다[118]. 그러한 경제의 거물에 대해 서민은 “크리스토=유데(유대인과 같은 기독교도)”라고 불렀다[118]. 세바스티안 브란트는 '아릉선'(1494년 )에서“유대의 고리 대출은 아직 좋지만, 그래도마을에는머무르지않는다.
1508년'유대인의 감'에서 개종 유대인도미니코회수도사요한네스 푸페퍼 코른이 유대인의 편굴의 원인은탈무드에 있다고 고발했다[118]. 푸페퍼 코른에 의한 제안으로 신성 로마 황제막시밀리안 1세는1509년의칙령으로 탈무드 폐기를 명령했다[118]. 유대인으로부터 청원된 마인츠 대주교 겐민겐의 제안으로, 푸페퍼 코른 등에 의한 서적 몰수를 조사하는 탈무드 조사위원회가 설립되어 위원에는 독일 유일의 히브리 학자였던요하네스 로이히린등이 취임했다[118][120]. 로이힐린이 탈무드와 카발러를 옹호하자 1511년 양자는 논쟁을 시작했고,엘라스무스인문주의자는 로이힐린을 지지하고, 파리 대학 신학부는 푸페퍼 코른을 지지하는 등 논쟁은 국제적인 것이 되었다[118].
다만 로이힐린 측도 반유대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로이힐린은 논쟁 직전에 쓴1505년 의 '회장'에서 유대인은 날마다예수 의 몸에서하나님 을 모욕하고 모독하고예수를 죄인, 마술사,수매인이라고 부르며 기독교인을 어리석은 이교도로 내려다1논쟁에서도 푸페퍼 코른에 대해 “그는 조상인 유대인의 정신의 본연의 자세를 그대로, 기쁘게 불경의 복수에 쳤다”고 말하고 있다[118]. 또 로이힐린 지지자로 가톨릭교회를 비판한 인문주의자인푸텐도 푸페퍼 코른이 독일인이 아니었다는 것은 불행한 행운으로 “부모님은 유대인이었다. 그 자신, 아무리 그 치욕의 육체를 그리스도의 세례수에 담그면, 여전히 유대인임에 변함이 없다”고 비판하고, 마찬가지로엘라스무스도 “푸페퍼 코른 는 진정한 유대인이었고, 확실히 그 종에 어울리는 모습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공헌은, 모두가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고 위선적으로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배신해 보이는 것이다」라고 비판했다[118].
알자스의 인문학자 베아투스 레나누스[122]는 “유대인만큼 타인을 미워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혐오를 개최하는 백성은 별로 없다”고 말했다[118]. 독일 인문학자 콘라트 체르테스[123]는 유대인은 "인류의 사회를 침범하고 혼란에 초대한다"고 말했다[118].
독일의 수도원장야콥 트리테미우스는고리대여유대인에게는 격렬한 분노를 기억하는 그 불법적인 착취로부터 지키기 위한 법적 조치가 필요하며 “이국의 백성이 우리 땅에서 권세를 흔드는 등이라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 것일까?”라고 카일러4] 는“유대인은 벌써 손을 더럽히고 노동을 원하지않는다.
한편, 프팔츠 영방궁 중부 프리드리히 1세의 하이델베르크 궁정에 있던 인문주의자 야콥 빔펠링[125]는 "침기해야 할 것은 유대인과 유대인보다 더 질이 나쁜 일부 기독교인이 손을 염색하고 있는 고리대여인 것"이라고 기독교인 고리대여도 비난했다[118][126].
유대인의 노래자 로스하임의 요젤[127]은1520년이후 신성 로마 황제·스페인 국왕의칼 5세(재위: 1519년 - 1556년)에 관우되어 '제국 유대인 지휘관 및 통치자'의 칭호를 받았으며 ,독일 유다[3]요젤은 유대인이 법외에 높은 금리를 요구하지 않는 것, 이자에게 분식을 덜 끼치지 않는 것, 기독교인에게 지불을 피하고자 하는 유대인 채무자를 파문으로 추방하는 등 유대인 상인이 상업 모랄을 준수하도록 요구했다[3].
요젤의 논적은 개종 유대인 안토니우스 마가리타였다. 라비의 아들인 마가리타는 레겐스부르크의 유대 공동체를 공권력에 고발하고,1522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푸페퍼 코른을 모범으로 한 유대교 비판을 했다[3]. 아우크스부르크 국회에서 요젤이 "유대교의 배교자에 의한 유대교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면 마가리타는 유죄로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추방되었다[3]. 또 이 영향으로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유대 추방령은 폐안이 되고 있다[3]. 마가리타의 저서는 루터가 최대의 전거의 하나로 하는 등 그 후에도 영향력을 가졌다[3].
1517년에종교개혁을시작한마르틴 루터는 반유대주의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128][129]. 초기 루터는 유대교도를 반교황 운동의 원군으로 간주했다. 볼름스 국회 기간 동안 유대인과 토론한 루터는1523년에 '예수는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등의 소책자를 저술하고, 바보와 으스로의 당나귀의 교황당들이 유대인에게 심한 행동을 해 왔기 때문에 옳은 그리스도인 유대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거나 유대인은 주님과 동족 혈통이기 때문에 유대인은 메시아인 예수께 경의를 표명하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도록 개종을권했다128][130]. 한편, 교황이 독일인을 이용하여 제2의 로마 제국을 세웠지만, 그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은 독일인이며, 하나님은 이 제국이 독일 기독교인의 왕에 의해 통치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131], 1521년에 “나는 독일인을 위해 태어났다”고말한다.][133]. 게다가기사전쟁이나 루터파의뮌처에 의한농민전쟁이 일어나면, 루터는 반란세력을 비판하고, 그 이후 루터는 인간세계의 느낌과 정치적 책임을 강하게 느끼도록 가 되어 인간의 내적 자유롭게 하나님이 가져온 지상의 사물의 질서가 대치되어 복종의 의무를 주창하고 기독교도는 순종하고 충실한 신하가 되어야 한다고 설교하게 되었다.128]. 그 동안 루터는 유대인의 원인을 유대인이 이루는 일로 간주하게 된다[128]. 유대인의 개종자는 극히 미미하며 개종한 자도 대부분이 시간을 두지 않고 유대교로 회귀했기 때문인지,1532년 에는 “그 어두운 연중은 개종한다고 해서 우리와 우리의 종교를 조금 놀려고 하는 정도밖에 생각하지 않는다”고말했다. 같은 해 「독일만큼 경멸되고 있는 민족은 없다」로서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은 독일을 비웃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132].1538년, 로스하임의 요젤에 대해 루터는, 나의 마음은 지금도 유대인에게의 선의로 넘치고 있지만, 그것은 유대인이 개종하기 위해 발휘된다고 말했다[128]. 그 후 곧 보헤미아의 개혁파가 유대인의 교사하에 유대교로 개종하고할례를받고 샤바트를 축하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루터는1539년12월 31일에는 “나는 유태인을 개종시킬 수 있어 우리가 주님, 예수 그리스도조차 거기에는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128].
루터는 “유대인은 우리의 금전과 재물을 손에 들고 있다. 노동에 종사하지 않았고, 독일인도 유대인에게 증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에 의한 물건의 소유를 금지해, 그들의 재산은 독일에 반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28]. 유대인은 독일에 있어서의 재앙, 악역, 흉사이며, 아무도 유대인에 있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제공하고 음식도 용서하고 있지만, 유대인의 아이를 드러내거나 죽이지는 않거나, 그들의 분수에 독을 뿌리거나, 그들의 피로 인후의 갈증을 치유하려고 하지 않았던, 독일인은 유태인의 격렬한 분노, 질투, 증오할만한 것은 무엇인가?128]. 루터는 대악마를 따로 하면 그리스도(기독교도)가 “두려워해야 하는 적은 단 한 사람, 진정으로 유대적이라고 할 의지를 가진 진정한 유대인이다”라며 유대인을 집으로 맞이 악마의 후예에 손을 빌려주는 사람은 “마지막 심판의 날, 그 행위에 대해 그리스도는 지옥의 업화로 응답해 주실 것이다.128]. 몇 달 후의 책자 "Siem Hammeforus"[134]에서 유대인의 개종은 악마로 개종시키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며, 유대인의 복음서 외전은 사복음서가 정통인 것에 대해 위서이며, 악마의 사용의 유대인은 '악마의 무리보다 더 악마'로 '신이여 한편, 필사적인 생각으로, 이 정도까지의 부끄러움과 함께 당신의 신성한 영원한 위엄을 말해야 합니다」라고 논하고, 마지막으로 「나는 더 이상, 유대인과의 관계를 갖고 싶지 않고, 그들에 대해, 그들에게 저항하고, 뭔가를 쓸 생각도 전혀 없다」라고 닫았다[128]. 루터는 죽음 4일 전인 2월 18일의 마지막 설교에서는 독일 전역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128]. 또 만년의 루터는 무적의 상비군을 가진 통일 독일 제국을 꿈꾸고 있었다[132].
루터 만년의 유대 공격에 대해서는 루터의 협력자멜란히튼, 스위스츠빙그리의 후계자브링거, 유대인 로스하임의 요젤 등이 비판했다[128]. "그리스도는 음란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거나 교황에 대해서는 유대인 공격 때보다 더 더러운 말을 사용하여 격렬한 말을 받았다[128]. 루터의 반유대주의는 탈수스의 바울(성 바울)과 무함마드와 유사한 전기를 거쳐 유대에 대한 깊은 증오가 되었다[128]. 루터의 반유대 문서는 루터 사후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지만, 히틀러 정권이 되어 일반용의 재판매가 나와 잘 읽혀졌다[128].
1614년 8월 22일 프랑크푸르트 페트 밀히의 약탈(Fettmilch-Aufstand). 유대인이 거주하는프랑크푸르트 게토가 습격당했다.프랑크푸르트를 떠나는 유대인
1614년8월 22일,프랑크푸르트의 돼지고기상 페트 밀히들 장인층이 유태인의게토를 습격하고, 폭도는 금품을 강탈하고, 차용 증서와 톨러를 태우기 위해 불을 냈다[3]. 유대인 주민은 생명의 희생은 면했지만, 재산을 빼앗겨 또 다른 땅으로 옮겨갔다[3]. 몇 달 후 볼름스에서도 유대인 게토가 비슷한 습격 사건이 일어났다[3]. 지방정부도 제국정부도 화해에 힘썼지만 폭동의 수모자는 열렬한 환호에 휩싸였다[3]. 독일의 대학법학부는 “이번 습격은 주간의 습격이었지만 마츠아키를 가지고 행해지고 있어 법범주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죄과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3]. 그 후, 신성 로마 황제마티아스에 의해 유대인은 신성 로마 제국군의 엄중한 호위하에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왔다[3]. 이 프랑크푸르트 소동 후, 국가 권력에 의해 유대인은 보호되었고, 독일에서의 반 유대인의 실력 행사는 끊어졌다[3]. 그 후 수세기, 반유대주의를 주장하는 많은 작가, 사상가가 등장했지만, 독일의 유대인에게는 일정한 평화가 방문했다[3].
17세기유대인 학살 사건은 적지만 프랑크푸르트시에서는 유대인 식별장의 착용이 의무화되어 기독교인 하인의 고용금지, 명확한 목적 없이 가로를 통 행하는 금지, 기독교 축제일이나 군주의 체재 기간 중 외출 금지, 시장에서는 기독교인이 쇼핑을 마친 후가 아니면 쇼핑은 할 수 없었던 등, 제한되어 있었다[3]. 유대인은 프랑크푸르트의 '시민'이 아니라 '피보호자' 또는 '신민'으로 규정되었으며, 이것은 나치 독일 시대도 채용한 구분이었다[3].
마라노
16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 출신의 개종 유대인(마라노)이 네덜란드, 이탈리아의 금융시장, 대서양무역, 동방무역의 개척자가 되었다[3]. 스페인 지배하의암스테르담은 대서양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70].
마라노가 권세를 자랑하는 한편, 독일의 유대인은 생활의 기반을 잃고 고통 받고 있었기 때문에, 마라노를 「순수 유태인이 아니다」라고 하는 상황이 되었다[3].1531년, 알자스의 유대인 로스하임의 요젤은 부유한 마라노의 정착지가 뿌리를 둔 앤트워프에 대해 여기에는 유대인이 없다고 썼다[3].
프랑스 왕국
1614년,프란시스코회수도사 장 부쉐는 유대인을 “한때 축복의 대상이 되면서, 지금은 저주의 대상이 되고 있는 종” “세계의 사방을 비참하게 방황 걷는 종"으로, 터키인은 유대에 대한 증오의 결과로,골고다의 교회 광장에서 유대인을 보았던 기독교인은 유대인을 죽여도 죄에 묻지 않았으며, 다야인이 1291년에 영국에서, 프랑스에서 1182년에필립 2세 존엄왕, 1306년에필립 4세 미려왕, 1322년에필립 5세장 하왕에 의해 스페인에서1492년에페르디난도 2세에 의해 추방된 것은 유대인이 기독교인들에게 불경의 태도를 나타내며 칭찬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136][137].
전후 프랑스가중앙집권적절대왕정을 확립한 데 반해, 신성로마제국이 명목적 존재가 된 독일에서는 지방분권적인영방국가체제가 확립됨으로써국민주의적통일이 늦었다[141][주27].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제후들이 자신들을 영방을 대표하는 '국민' 라고 의식하고 있었지만, 제후의 공통언어는프랑스어이며, 민족보다 신분이 중시되는 등,국민국가의 형성은 방해되고 있으며, 이러한 영방국가체제에 대한 반발이 근대의 계몽과 합리주의의 영향으로 18세기 이후 독일에 있어서의국민주의(내셔널리즘2)를 형성하고있다.
1627년, 시인 말렐루브는 최후의 해에 유대교는요르단 강의해안에 머무르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유대교도는 세느 강 유역까지 세력을 넓히고 있다고 “나는 어디에 있어도 하나님을 부탁으로 싸운다”고 썼다[137][145].
1652년8월 15일, 프론드의 혼란 중, 장 부르주아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토넬리의 헌 옷 상집단에 대해 장부르조아 청년이 '시나고그의 전방련의 거리야'라고 놀랐는데, 헌 옷 상집단은 청년을 모창과 마스켓총으로 멸종 치게 한 데다 배상금도 지불했다[147]. 청년은 대관에게 고발했지만, 헌 옷 상집단은 청년을 뛰어넘어 고문 끝에 살해했다. 이러한 소규모 국지전은 당시 몇 가지 발생하고 있었다[147]. 이 사건 후 유대인에 의해 부패가 흩어져 왔다고 비난하는 문서나 헌 옷 상집단을 변호하는 문서가 나타나 유태 문제가 여론에서 싸워졌다. 『유대인에 대한 분노』라는 문서에서는 유대인에게 식별하기 위한 표시를 붙여야 한다고 주장되고 『시나고그에 대한 판결문』이라는 문서에서는 유대인 전원을거세해야 한다고 주장되었다[147]. 이러한 문서의 가로수에 의해 헌 옷상은 숨겨진 유대교도(마라노)인가라고 의심되었지만, 사건에 있어서의 헌 옷상 집단은 피해자도 가해자도 가톨릭·기독교도였다[147].
마자란 몰후1661년에 23세의루이 14세 태양왕이친정을 시작했다. 궁정설 교사로오라토리오회수도사의보슈에[주 28]는왕권신수설과 프랑스교회의 로마로부터의 독립(갈리카니즘)을 제창하고, 로마교황보다 프랑스 국왕의 권력을 강화해절대 군주제확립에 공헌하는 한편, 유대인을 “누구로부터도 불쌍하게 , 그 비참한 가운데서 일종의 저주에 의해 가장 추악한 사람들로부터도 비웃음으로 여겨지던 백성”이라며 유대인의 가장 큰 죄는 예수의 처형이 아니라 처형 후에 회개하지 않는 자세라고 비난했다.148]. 루이 14세는 '유일한 왕, 유일한 법, 유일한 종교'를 방침으로 '최대의 기독교인의 왕'을 자부하고 이단의장세니스트[주 29]와유그노를 억압했다[150]. 한편, 잔세니스트 철학자블레즈 파스칼은 유고 '판세'에서 “영예에 맞서 순일하며, 그 때문에 죽어가는 유대인”이라고 유대인을 칭찬했다[151].
1670년에 메스에서 의식 살인사건과 재판이 펼쳐져 유대인이 처형되었다[주30]. 또한 파리에서 행방불명이 된 젊은이들에 대해 유대인이 연행했다는 소문이 흘렀다[147]. 이에 대해 성서학자 리샤르 시몬[153]이 메스의식 살인재판에 대해 익명으로 유대인을 옹호하고[152], 1674년에는 비네티아의 랍비, 레온 다 모데나의 저작을 번역하고, 그 서문에서 “신약 성경을 쓴 것은 유대인이었다”고 주장하고, 또 유대교도의 신앙심의 어리석음을 칭찬했다[151][154]. 그러나1684년이 되자 시몬은 편지에서 모데나 번역서의 서문에 대해 호의적인 것을 너무 많이 썼다고 반성하여 “유대인이 구원할 수 없는 백성이라는 것을 저는 그 후 그들 중 일부와 사귀고 처음으로이해했다.시몬은 1678년 근대성경문헌학의 근원이 되는 '구약성경의 비판적 역사'를 저작했지만, 궁정설교사 보슈에의 격렬한 분노를 사고 1687년에 발금처분에 이르고 죽을 때까지 주위로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151][155][155].
1671년, 아드리안 암바르는카테키즘으로 성체를 배령하는 것은 모든 죄 가운데 가장 무거운 죄이며, 그로 인해 “유다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과 피에 대한 죄를 범하게 된다”고 했다[137][157].
예수회사오라토리오회수도원설 교사불달루[158]는스테파노를 돌로 철살한 유대인은 '신비의 돌'인 스테파노를 때리며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사랑의 불꽃을 흩뜨렸다고 하는 '죄 속에 죽는 것'을8.
님 주교 에스프리 프레시에
님 주교 프레시에[159]는, 불신심자의 유대인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 세상이 끝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잔해를 모을 때까지 모든 백성으로부터 눈썹을 찌푸릴 수 있는 존재라고 계속 설교했다[148].
클로드 플루리 신부(1640-1723)는카테키즘'역사 공교요리'로, 예수의 적은 육적인 유대인, 유대인은 예수를 죽음으로 이끌어 냈기 때문에 예속 상태가 되어 이산되었다고 해설했다[137][160].
궁정 설교자 장 바티스트 마시용(Jean Baptiste Massillon, 1663-1742)
클레르몬 주교에서 베르사유 궁정 설교자 마시용은 '피의 죄의 각인'을 받고 '견경을 잃은 백성'의 유대인은 '맹목적인 적 우심'으로 분노 미친 '예수의 피가 미즈카 라토미즈로부터의 후예의 머리 위에 쏟아지고 싶다", 유대인은 "세계의 치욕으로 간주된 채, 방황하고, 도망치고, 경모되어 계속되고 있다"고 설교했다[148].
그러나 16세기에서는 반유대적인 폭동은 보이지 않는다[148]. 그것은 종교 개혁과 그 뒤에 오는 종교 전쟁에서 개신교 측이 유대인에게 가까운 입장에 서서 증오가 향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148]. 카톨릭파는 개혁파의 비밀집회를 멸시하고 악의가 가득한 이야기에 꼬리 지느러미를 붙여 돌았다[161].
궁정 유대인과 유대인 강도 도단
1670년, 신성 로마 황제레오포르토 1세(재위 1658년 - 1705년)는 비엔나로부터 유태인을 추방했지만,1673년, 같은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포르토 1세가, 하이델베르크의 유태인 사무엘오펜하이머를 제국군의 보급1683년터키군의비엔나 포위와 프랑스와의 전쟁 등을 통해 식량, 무기, 운송용 우마를 제공하여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3]. 당시에는 외교거래에궁정 유대인이활약했고, 하노버 레프만 베렌츠는 루이 14세와 하노버공 사이를 잡았다[3][주31]. 할버슈타트의 궁정 유대인 베렌트 레이먼[162]은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를 폴란드 왕위에 붙였지만, 아들은 작센에서 추방되었다[3].요제프 주스 오펜하이머는 뷔르템베르크 공칼 알렉산더의 궁정 유대인으로서 재정과 행정을 재건하여 권세를 자랑했지만, 마지막은 교수형에 처해졌다[3]. 궁정 유대인은 호세한 가옥을 짓고 뮌헨의 은행가 볼프 벨트 해머가 열린 사냥 경기회에서는 영국 대사와 귀족이 참가했다[3][주 32]. 궁궐 유대인의 대부분은 유대교를 준수하고 있었지만, 슈타드란(돌보기역)으로서 체재금지명령을 추방령을 해제시키거나 유대인 공동체를 통할하여 유대인의 적대분자를 감옥으로 연결시켰다[3].
요즘오스트리아의설교자아브라함 어 잔타 클라라는1683년터키군에 의한 비엔나 포위에 터키인은"탐욕스러운 호랑이, 저주받은 세계 파괴자", 유 다야인은 “부끄럽지 않고, 죄 깊고, 양심을 가지지 않고, 악랄하고, 경률적이고, 비열하고 헛된 배, 악당”으로서,페스트는 유대인, 무덤 파는 사람, 마녀에 의해 야기되었다고 설교하고[164][165]또 “예수를 사직하게 팔아준 그 유대인의 후손은 그 후 영복의 벌을 받아야 한다”고 설교했다[166][167].
브란덴부르크 왕가는 17세기 중반에는 무기·화폐 주조 상인 이스라엘·아론에게 귀족위를 주거나 오스트리아로부터 추방된 부유 유대인을 보호했다[168].프로이센 왕국에서는 신체 보증금을 조건으로 유대인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이 인정되었다[168]. 프로이센 왕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재위 1713 - 1740)은 유대인 대표단의 속견에 있어서 “주를 십자가에 걸린 악당”과는 면회하지 않는다고 거절했지만, 시종이 유대인으로부터 고가의 선물이 있다고 들었을 때, 왕은 “주가 십자가에 걸렸을 때는 그들이 그 자리에 없었던것”이기때문에
한편, 유대인 강도단도 있어, 1499년의 「방랑자들의 책」의 도적 동료 은어집에는 히브리어 기원이 많이를 차지하고 있어 17세기 이후에는, 조직적 유태인 강도단의 기록이 있다[3]. 18세기 독일에는 강도단 수령 도미안 헤셀이 사형이 되었다[3]. 그러나 궁정 유대인도 유대인 강도단도 예외의 부류이며, 대다수의 유대인은 중세적인 풍습을 고집해, 흔들림을 충실하게 지키면서 살았다[3].
잉글랜드
잉글랜드에서는 1290년에 유대인이 추방되었기 때문에 영국에 오는 유대인 상인은 왕립의 개종자 수용 시설 '도무스 컨웰서엄(Domus Conversorum)'(1234년 창건)에 머물렀다[169]. 14세기, 15세기에는 미개종 유대인도 개종 유대인을 거짓으로 묵었다[169].
1492년스페인으로부터의 추방으로 유대인이 '스페인인'으로서 영국에도 왔다[70]. 그러나 헨리 7세가 아들과 아라곤 공주 카자린과의 결혼에 있어서 유대인의 출입을 금지했다[169]. 그러나이 금지령은 부분적으로만 지켜졌다[169].
헨리 8세(재위: 1509년 - 1547년) 통치하인1540년, 런던에 37가족의마라노에 의한 식민지가 형성되었지만,1542년에 해산되었다[169]. 또한 헨리 8세는 망형 웨일즈 공에 신부한아라곤 공주 카자린과 결혼하고 있었지만, 카자린과의 이혼의 근거를 찾기 위해 이탈리아의랍비에 문의하고 있다[주 33].
엘리자베스 1세시대(1558년 - 1603년)에는 유대인 집회도 공공연히 행해지게 되었고, 유대인 무역상인 엑토르 누네스는 유럽 대륙의 기밀 정보를 영국 정부에 전했다[70]. 한편 반유대주의도 높아져 극작가크리스토퍼 마로우의 '몰타섬 유대인'(1590)에서는 재산을 몰수된 유대인이 복수한다[70]. 다만 이것에는 무신론자였던 말로우가 유대인의 악마가 토하는 대사에 의해 기독교 체제의 위선을 비판했다는 견해도 있다[70].1594년에는 유대인 의사 로델리고 로페즈가 엘리자베스 여왕 독살의 목격으로 재판에 처형되는 사건이 일어났다[70]. 같은 시기,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1596)에서는 고리대여 유대인 샤이록이 환불하지 않는 안토니오에 대해 육편을 요구하지만 재판으로 반대로 재산을 몰수되어 기독교로 개종되어 버린다.
제임스 1세시대(1603-1625년)에는 유대인 동지의 내분으로 '유대교도'라는 혐의를 받은 포르투갈계 유대 상인이 국외 추방되었다[70].
1649년의청교도혁명에서는 시민계급의 청교도가 “이스라엘여, 여의들의 성막으로 돌아가라!”를 말로 했다[169]. 청교도 혁명은 왕실과 유착한 교회에 대한 공격이기도 했고, 크롬웰은 유대교도와 비국교파를 보호했다[170]. 또한 행복천년설이 유행하여 유대인을 해방하고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이 메시아 강림의 조건으로 간주되게 되었다[170].청교도의 지복천년파는 유대인의 개종을 위해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169]. 이러한 점에서 크롬웰의 출자는 유대인이 아닌가 하고 속삭이고, 또 크롬웰은 세인트 폴 대성당을 80만 파운드로 유대인에게 매각하려 한다는 소문이 흘렀다[169].
한편,비국교회의 분리파는 영국의 내란은 과거의 유대인 박해에 대한 천벌인 것으로 간주했다[170]. 분리파에 격려된 암스테르담의라비마나세 벤 이스라엘 은 유대인의 영국 입국을 청원했다[170]. 마나세는 ‘이스라엘의 희망’(1650년)에서 종말의 도래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유대인의 확산을 완전한 것으로 하여 세계의 말단인 잉글랜드(앵글 드 라 테일지의 뿔)를 유대인의 식민지로 해야한다고주장했다[169].배경에는1648년폴란드에서의 코삭 반란에 의한 유대인 난민의 존재가 있었다[170]. 마나세는 저서를 영국 의회에 헌정하고 유대인을 맞이하면 무역이 번성하고 번영한다고 역설했다[170]. 크롬웰은 기독교를 부정하는 자에게 관용을 관철하는 것은 본말 전도이지만, 영국 상업의 보호와 발전을 위해 유대인 국제 네트워크를 이용하는 것의 장점에 이해를 나타내[170],또스페인의 식민지를 탈취하기 위한 협력을 유대인 마라노.메나세는 ‘비물어드(Humble Address)’에서 회당 건설 허가와 반유대법의 개정을 청구하고 유대인의 상재와 고결한 혈통을 강조, 기독교 유아의 살해는 중상이라고 부정했다[170]. 11월 크롬웰은 이 청원을 의회에 걸었지만왕당파는 “왕을 죽인 자가 구세주를 죽인 자와 손을 잡았다”고 비난했다[170]. 귀족 맘모스 백은 회당 건설안에 불쾌감을 나타내고 또 런던에서는 상흔 군인이 “우리들 모두 전원 유대인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소문해, 상인은 무서운 경쟁 상대와 경계하고, 성직자는 사회 전복의 위험을 보았다[169]. 팜플렛 작가로왕당파의 정치가윌리엄 푸딩은1634년연극 관객은 “악마, 불경의 괴물, 무신론적 유다의 화신이다. 원한 왕비헨리에타 마리아 오브 프랑스에 대한 비방 중상과 명예훼손의 죄에 의해, 양귀를 절단되어 좌우의 뺨에 선동적 비방자(seditious) libeller)를 의미하는 "SL"의 낙인이 밀렸지만 민중의 절대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169].1655년에 푸딩은 므낫세와 잉글랜드 정부에 의한 유대인의 소환계획에 반대하여 '유대인의 잉글랜드 이입에 관한 간결한 이의제기'를 쓰고 일주일 만에 매진되었다[169]. 이 밖에 클레멘트 워커 '잉글랜드의 무정부 상태'와 알렉산더 로스 '유대인 종교' 등에서도 유대인 소환에 대한 반대가 주장되었다[169].
1655년12월 18일의 일반 공개 의장에서는 유대인 수용에 반대하는 자가 다수 채우고, 크롬웰은 자문 위원회의 해산을 선언하고, 또한 연설에서는 유대인의 개종은 성경에 예고되어 있으며, 그 때문에 유대인이 성지에 사는것이유일한수단이다.].
영서전쟁의 악화에 의해 1655년 가을에 재영 스페인인의 재산은 몰수되었다[170]. 재영 유대인의 대부분은 스페인 출신이며 법적으로 스페인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재산도 몰수되었다. 부유한 상인 로블레스는 자신은 포르투갈인으로 재산반환을 청원하고 이단심문의 가혹함을 주장하여 영국의 반스페인·반가톨릭 감정에 호소하고 재산몰수의 취소에 성공, 이로써 영국에서의마라노의 신분이 보장되는 결과가 되었다[1].
이후 영국에서는 공적인 입국허가는 없었지만, 비공식의 관용 정책에 의해 런던의 마라노 입식지에서는 회당도 건설되어 영국 국내의 사실상 소국가가 되어 갔다[169]. 1657년 영국 최초의 회당이 크리처치 레인에 건립되었다[173].
1659년왕정 복고로 복위한찰스 2세는부모 유태적이고 유대인의 권익을 보호했다[170]. 왕실의 비호를 받았기 때문에 유대인은 안정된 지위를 유지하고, 세팔디계 유태인이 18세기 초에 베비스마크에 회당을 건설, 아슈케나지계 유태인도 재입국이 인정되어 1690년에는 자파의 회당을건설했다.
덧붙여 1661에 성립한 기병의회에서는, 왕당파에 의해, 청교도의 소멸을 기도하는 클라렌돈 법전, 시정촌의 임원에게 국교도임을 의무화한 지방자치체령(Corporation Act), 비국교도 4명 이상의 회합을 금지한 컨벤티클 조례(Conventicle).
일기로 알려진 해군 비서사무엘 피프스는 1663년에 계피를 방문해, 거기서 본 심햇토라의 예배에서의 소란에 대해 혐오감을 쓰고 있다[173].
네덜란드의유태인 세팔딤계 철학자스피노자에게 유대교는 확실한 논거와 증명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유대 공동체로부터 멀어지는 원인 이 되어, 더욱 유대인의 남자에게단검으로 습격된 것으로 스피노자는 유대 공동체와 절연해, 한층더 파문되어 추방되었다.그 후, 스피노자는 익명으로1670년 에 '신학·정치론'을 썼으며, 히브리인 종교는 다른 민족과는 절대적으로 상반적인 것이고, 유대교에서 다른 민족에 대한 증오는 경신과 경건에서 생긴 신성한 것으로믿어지고있다고유대교2. 스피노자는 코레지안트파(소지니파, 멘노파)의 해석에 따라 유대교에서 이웃을 유대민족으로 한정했다[183]. 스피노자의 성경 비판은 기독교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반발을 불렀다[184].피에르 베일은 '역사 비평 사전'(1696년)에서 스피노자의 성서 비판을 소개하고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알려지게 된다[176], 스피노자에 의해 유대의 신은 증오의 신이라는 생각, 그리고 유대교는 미신에 불과하다는 견해가계몽 사상이나 영국 이신론, 독일의 철학자 칸트나 헤겔까지 퍼져 나갔다[175][183]. 골든과 폴리아코프는 스피노자는 현대의 반유대주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논의한다[175][주 34].
자유사상가에서이신론(합리주의)의 철학자존 토랜드는 '기독교는 비밀적이지 않다'(1696년)에서 교부들은 진정한 기독교를 타락시켜 왔다고 하여 “이에 적합하다”(합리적인) 교설 을 설교하고 기독교는원래유대교였다.토랜드는1714년'유대인 귀화론'에서 유대인을 옹호하고 유럽 대륙에서 유대인을 받아들이도록 주장했다[176]. 또 ‘나사렛인’(1718년)에서 토랜드는 ‘유대교도가 봉사하는 진정한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이교도들에 의해 압살되었고,교황제도는 기독교 를 왜곡하는 한편 유대교의 의식을 비난해 왔지만 이런 근거는성서에는 쓰여지지않았다.토랜드는 지금까지의 기독교 세계를 비판하는 한편 유대인을 옹호했다[176].
성공회의 비정통적 신학자토마스 울스턴은 1705년 저작 '유대인과 부활한 이방인에 대한 기독교 진실을 위한 오래된 변명' 이후의 저작과 팜플렛에서 유대인은 '소음과 악취의 근본'이며 '세계는 유태인의 독으로 가득하다'고7볼테르는 울스턴의 저작을 전거로 했다[176].
뉴턴의 추천으로루카스 교수직을맡은윌리엄 호이스턴은1722년'구약성경 재현시론'에서 유대인은 구약성경의 사본을 왜곡하고 고의로 개악했다고 논했다[176].돌백 백작에 영향을 미친 앤서니 콜린스는 '기독교 기초론'(1724)에서 유대교는 민족종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176][185]. 매튜 틴달의 『천지창조와 같은 낡음을 가진 기독교, 혹은 자연종교의 복음』(1730년)은 이신론의 바이블이라고 불렸지만, 유대인의 나쁜 영향력을 논한 것이기도 했다[176][186][187]. 토마스 모건은 “기독교인 이신론자 필레라테스와 기독교 유대인 테오파네스와의 대화 속 도덕철학자”(1737년)에서스피노자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의 신은 전의 신이며, 그 토지의 민족의 신에 불과하다.176][188]. 윌리엄 워버턴의 『모세의 성사절』(1737년-1741년)에서는 하나님이 가장 조야에서 비유한 민족을 선택했다는 것이계시의 근거라고 논했다[176][189].볼링 브룩은 유대인과 기독교 교부들은 기독교를 악질적인 것으로 바꿨다고 비난했다[176].
이러한 영국 이신론은 유대인들에게 찢어진 것처럼 비난했던 것은 아니었다[177]. 그러나 존 톨랜드를 유일한 예외로 대부분의 영국 이신론자가 전통적인 기독교적 반유대주의를 계속 유지하고 유대교와 기독교의 거북함과구약성서의배타주의를비판하고 문명이나 인류의 기원을이집트와 인도에 요구해 나가게 되었다.177]. 영국 이신론은 프랑스의볼테르와루소등 유럽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176][190].
인종학
이미 말했듯이 자민족을 고귀한 민족으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은 8세기의 『살리카 법전』에서도 볼 수 있지만,1434년바젤공의회에서 스웨덴의 라그발토슨 주교가 말한 "스웨덴 왕국은 가장 오래되고 고귀한 왕국이며, 스칸디나비아는 인류 발상의 땅이다"라는 발언에는 현대적인 인종주의적 내셔널리즘의모아가보인다.
16세기후반, 도미니코회의 철학자브루노는 인디언, 에티오피아인, 해왕성 동굴의 주민, 피그미, 거인은 인간과 같은 출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창조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192].
마라노의 아이작 라 페이레일은1655년의 '전 아담인'으로 성경은 유대사만을 다루고 있을 뿐, 아담 이전에 수백만의 전 아담인이 있고, 또 유대사는 “아담인가? 등 예수까지의 선택의 시대」와 「예수로부터 17세기까지의 배제의 시대」였다고 하고, 그 후에 유대인의 부활의 시대가 방문해, 유대인(아담인) 이외의 백성도 포함한 만명이 구제된다고 했다[193].
1689년철학자존 록은 '인간지성론'에서 아이가 인간의 관념을 형성할 때 주위의 백인의 피부색에서 백색이 인간이라는 복잡한 관념 중의 단순관념의 하나가 되기 때문에 흑색의 니그로는 인간이 아니라고 판단한다고 논했다[194][195].
라이프니츠는 '인간지성신론'에서 “동물의 습성이라고도 볼 수 있을 정도의 잔인함에 빠진 미국의 잠자리의 습관을 인정하려면 그들과 같이 어리석어야 한다”고 말했다[195][196]
볼테르는 니그로가 원숭이보다 낫다고 백인은 니그로보다 뛰어나다고 하며, 니그로는 원숭이와의 성교에서 태어난 괴물의 씨라고 했다[206]
칸트는1764년의 「미와 숭고와의 감정성에 관한 관찰」에서 「아프리카의 흑인은, 본성상, 아이 같음을 넘는 어떠한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하고, 또 동양의 주민은 잘못된 취미를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유럽인은아름다움과숭고의 올바른취미를만들어, 세계 시민(코스모207]. 칸트는1777년의 「다양한 인종에 대해」에서는 인간은 공통의 조상을 가진다고 했지만[208], 「자연 지리학」(1756-96년)에서 백색 인종에 의해 인류는 최대의 완전성에 도달한다고 했다[209].
1799년, 의사 찰스 화이트는 백색 유럽인은 인류의 가장 훌륭한 산물이며, 유럽인 이외에 이렇게 아름다운 머리 모양, 이렇게 큰 두뇌를 어디에서 찾아낼 수 있을까라고 썼다[199][210].
에드워드 롱은 인간 종을 유럽인, 니그로, 오랑우탄의 3개로 나누고, 백인과 니그로의 혼혈아도 니그로와 오랑우탄의 혼혈아도 생식 능력을 갖지 않는다고 했다[206].
크리스토프 마이너스[211]는 '아름다운 백인종'과 '추악한 흑인종'의 두 가지로 나뉘어 백인, 특히 켈트 민족만이 진정한 용기 등의 미덕을 가지고 있고, 흑인은 무정하고 무감각한 무서운 악덕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212].
폴란드의 유대인은 유대교국하자르 제국이나 비잔티움에서 왔다고 생각되고 있다[213]. 전승에서는 하루만 유대인이 폴란드의 왕위에 즉위했다고 하며, 중세 11세기, 12세기의 화폐에 히브리어로 '미에스코 대왕' '아브라함 드하스' 등의 명이 새겨져 있다[213].
폴란드에서는 유태인에 대한 우대 정책은 진행되고 있었다.1264년, 폴란드의 카리슈의 보레스와프 왕(1221-79)은 독일 제후와 같은 유태인 허허장을 내놓았다[213]. 그러나 1267년 브라슬라우 공의회는 12조에서 폴란드는 기독교인의 새로운 정착지이기 때문에 유대인의 미신이나 악습으로부터의 영향을 우려했다[213]. 1279년, 유대인 식별장이 계획되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213].1364년카디미에스 왕(1310-70)은 유대인을 귀족과 동등한 취급으로 유대인에게 해를 끼친 자를 벌했다[213]. 그러나 14세기 말 폴란드에서 성체 모독 사건과 의식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1454년, 카피스트라노의 조반니의 영향으로, 야기워 아침의 카지미에스 4세가 유태인의 특권을 일부 철회했다[213].1565년폴란드의 유대인은 추잡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토지를 소유하고, 의학, 점성술을 연구하고, 큰 부를 축적하고, 무기의 휴대도 인정되고 있다고 교황사절이 보고하고 있어 타국의 처지와의 분리가 있었다[213]. 당시 폴란드의 유태인은 상업, 행정, 삼림개척, 암염 채굴, 농업, 은행, 폴란드 귀족의 어용상인, 궁정 유대인 등 다방면에 걸쳐 침투하고 있어 유태인으로부터 이익을얻고 있던 폴란드 귀족은 유태인을비호했다.한편, 폴란드의 성직자는 유대인을 공격했고, 예수회의 스컬가[214]는 토렌트 시몬 소년 의식 살인 사건이나 성떡 모독 재판의 원고가 되었다[213]. 예수회의 신학생은 유대인에게의 포글롬을 반복했고, 또 폴란드의 농민은 농민이 벌은 돈으로 유대인은 배를 채운다고 '유대인, 독일인, 악마'의 3인 형제 중, 악마가 제일이라고 하는 속담도 있었다[213].
1648년, 가짜 메시아의샤브타이 츠비가터키의 스미르나에 나타났을 때, 유럽 각지의 랍비는 환영하고, 유태인은 재산을 팔아 콘스탄티노플에의 배를 타려고 했을 정도였다[3][213]. 그러나1666년, 투비는 오스만 제국에서 체포되어 이슬람교로 개종을 선택했다. 또한 카발러 학자는 1666년을 메시아 도래 때로 해석하고 있었다[213].
우크라이나의갈리치아의이스라엘 벤 엘리에젤(바알 씨엠 토브)은 기적의 치유와 악마를 행하면서 자연스럽게 거룩한 불꽃놀이로 편재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설득하여벌집운동을 일으켜 폴란드, 동유럽 각지에 퍼졌다[213]. 그러나 전통적인 유대교 랍비는 하시디즘을 이단으로 배척했다[213].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 (1658-1659), 바실리 보슈토시로는 부실한 유대인들이 폭행, 살인, 약탈을 날카롭게 범하고 기독교 여성을 침범하고 있다. "여는 기독교의 거룩한 믿음에 대한 열의에 달려 몇 명의 청렴의 사를끼리, 유대의 저주받은 백성을 근절시키는 결의를 굳혔다"고 선고했다213].
1772년, 제1차폴란드 분할전야에는, 폴란드의 폭도들이, 에카츄리나 대제의 황제 칙서를 휘두르고, 전 슬라브적 신앙을 기표로 하여, 유대인과 폴란드 영주에 대한 조직적인 멸종 작전을 전개했다[213]. 그러나 이 황제 칙서는 러시아 정교의 메르히세데브 신부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가짜 황제 칙서이며, 거기에는 폴란드인과 유대인이 전 슬라브적 신앙에 대해 경모하고 있어 모독자인 폴란드인과 유대인을 근절하게 하는것이목적이라고2
18세기에는 의식 살인사건이 다발했다[213]. 리투아니아의 랍비였던 개종 유대인 미하일 네오피트는 유대교에서는 의식 살인이 갓이고, 자신은 한때 기독교인의 아이를 죽였다고 자백했지만, 이 네오피트의 증언 기록은 폴란드나 러시아에서 반유태주의의 전거가 되었다[213].
1470년경 , 스할리야라는 남자가노브고로드 공국에서 유대교의 우위를 설교하고, 기독교 성직자도 유대교로 개종했지만, 포교 활동이 공공연히 행해지자 기록이 끊겼다[216].스할리야 유대교단은 예수께서는 모세와 같은자격이었고 아버지 신과 동격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이것은 4세기 동 로마 제국 안킬라의 마르켈로스 파(Markellos of Ankyra), 포티노스 파(Photinus)의 가르침과 같았다[216].이반 4세치세하인1540년, 교단의 지도자는 처형되었다[216]. 이 사건 이후 모스크바 대공국에서는 이방인은 특별거주구에 살게 되었고 유태인 격리정책도 이뤄졌다[216].
1550년이반 뇌제는 폴란드 왕으로부터 유대 상인의 모스크바에 들어가는 허가를 요구하자 독약을 반입하는 유대인을 입국시킬 수 없다고 거부했다[216].
1698년,러시아 제국의표토르 대제는 자유 사상의 소유자였지만, 암스테르담 시장으로부터 유태인 상인의 모스크바 체재의 허가를 요구받는다고 시기상조라고 거절했다[216].
엘리자베타 황제는 우크라이나, 러시아의 모든 유대인을 추방하고, 이후 입국도 금지했다[216].1743년에 원로원이 유대 상인의 시장 참여로 국고가 어떻게 촉촉해지는지를 보고해도, 여제는 그리스도의 적으로부터의 이익은 불필요하다고 인정하지 않았다[216].
파벨 1세로부터 폴란드의 유대인 조사를 명령받은 가브리나 델저빈은, 회당은 미신과 반기독교적 증오의 둥지, 유태인 자치기구 카할은 위험한 국가내 국가, 유태인은 이웃의 재산탈취를 목적으로 하고있다고보고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
신성 로마 황제칼 6세(재위: 1711년 - 1740년)의 비엔나에서는 유태인의 인구 증가를 막기 위해1726년의 법으로 정식으로 결혼할 수 있는 것은 장남만으로 여겨졌다[3]. 이 결혼 제한법은 보헤미아, 모라비아, 프로이센, 팔라티나, 알자스에도 적용되었다[3]. 그 결과 많은 유대인 청소년들이 폴란드와 헝가리로 유출되었다[3].
인쇄술의 발달에 의해, 18세기 초반에는 반유대적 저작은 매년과 같이 엄청난 양이 출판되게 되었다[주 37].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에서 유대인이 프로이센의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점에서1744년오스트리아대공마리아 테레지아가 보헤미아에서 유대 추방령을 내놓았다[3]. 그러나 볼프 벨트하이머는 유대인의 국제 연대 활동을 수행하고, 프랑크푸르트, 암스테르담, 런던, 베니스의 유태인 거주지는 경계 태세를 짓고, 로마 토토는 교황에게 일하도록 지시를 받았고, 궁정 유대인의 국제 네트워크의 힘으로 영국과 네덜란드가 마리아 테레지아에 항의하여 마리아 테레지아는 추방령을 해제했다.3]. 이 비엔나에서의 유대 추방령이 국가에 의한 대규모 추방 정책으로서는 마지막 것이 되었다[3].
볼테르, 칸트, 피히테 등계몽사상가중에서도 반유대주의는 많이 보였다[219]. 또한 그것은 독일의 계몽 사상,독일 관념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계몽 사상
1762년,루소는 '에밀'에서 유대인을 '가장 비굴한 백성'이라고 칭하고, 유대신은 분노, 질투, 복수, 불공평, 증오, 전쟁, 투쟁 쟁, 파괴, 위협의 신이며 “처음에 단 하나의 국민만을 선택하고 그 밖의 인류를 추방하는 신은 인간 공통의 아버지가 아니다”고했다221].
같은 1762년볼테르는 유대인 이자크 핀트에 대한 비판에 대해 “시보렛을 발음할 수 없었다고 해서 4만 2천명의 인간을 죽이거나, 미디안인 여자와 잠들었다고 해서 2만 4천명의 인간을 죽이거나 하는 것만은 하지 말아 주세요”라고“그리스도인[주 38].1764년의 '철학사전'에서는볼테르는 유대인은 '지상에서 가장 미워해야 하는 백성', '가장 바쁜 미신에 가장 악랄한 후각을 섞은 백성' 등으로 비난했다[224]. 그러나 볼테르는 계몽주의의 진전에 기여했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 측에서 엄격한 평가가 전해지지 않았다[225].
프리드리히 2세는프랑스 로코코 양식의산수시 궁전(무우궁)을 세우고, 볼테르와모펠투이를 초대하여 비호하며, 무신론자의 굴이기도 했다[230].아돌프 히틀러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프로이센의 영토를 확대시켜 가는 프리드리히 2세를 이상적인 인물이라고 부르고 관저에 이 초상화를 걸고 있었다[130].
계몽 전제 군주프리드리히 2세는1740년의 '반마카벨리론'에서 모세가 “신감을 받지 않으면 대극악인, 위선자, 작자가 곤란해 있을 때 극에 대단원을 가져다주는 기계 장치의 신을 이용하는 시인처럼, 신을 이용하고 있던 사기꾼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모세는 매우 치열하다 그러므로 유대인을 이끌기 위해 6주 만에 매우 다뤄질 길에 40년이나 걸렸다. 다야인의 선도자는 로마 제국의 건국자(로물루스), 페르시아 제국의 대왕, 그리스의 영웅들(테세우스)보다 훨씬 열등했다”고 말했다.168]. 프리드리히 2세는 모세, 그리스도, 무함마드를 사기꾼으로 하는 '삼사기사론' 등의무신론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231]. 다만,프리드리히 부왕은 유대인이 일반 직업에 착수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유대인 취급을 개선하고 있으며,로스바흐의 전승 기념(1757년)에 즈음하여모세스 멘델스존은 유태인 보호법 하에 건설된 베를린의 시나고그로 축하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1780년에 '독일 문학론'을 프랑스어로 저술하고[주 39]독일 문학의 참상의 원인으로 전쟁의 영향이 있고, 또 독일이 정치적인 통일국가를 만들 수 없는 것, 또한 독일어가 다종의 다른 방언을 가지는 미발달 언어이며2언어 가있다.클라인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지만, 복종이 국가의 핵심에 있었다고 말했고, 칸트는 일상의 직무에서는 자유를 제약받는다고 논하고 하만은 이를 비판했다[232].
프로이센 왕국 추밀 고문관 크리스티안 콘라트 빌헬름 돔[233]은 엘의 유대인 비난 문서에 자극되어 멘델스 존과 함께 유대인의 해방과 신교의 자유를 호소하고,1781년9월에 '유대인의 시민적 개선에 대해'를 발표하고, 유대인이 특별한 허가 없이는 결혼도 할 수 없고, 과세는 무겁고, 일이나 활동이 제한되고 있는 것을 비판했다[130][229][234]. 다만, 돔은 유대교의 기교를 해방의 조건으로 했다[235].
괴팅겐의 루터파 신학자 히브리 학자 요한 다피트 미하엘리스는 악덕하고 불성실한 인간인 유대인은 키가 낮고 군인으로서도 도움이 되지 않고 국가 공민이 되는 능력이 부족하다. 게다가, 그 신앙은 잘못된 종교인데, 돔은 직업 선택의 자유뿐만 아니라 유대인이 고유의 갓을 따를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고 돔을 비판하고 유대인 해방을 거부했다.229][236][237][238]. 미하엘리스는 성경과보편사를 비판한 것으로도 고명하지만, 모든 언어가 하나의 언어, 특히 히브리어였다고는 증명되지 않았다고 했다[239].
1782년, 오스트리아의 신성 로마 황제요제프 2세가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시민권을 개선하는 관용령을 공포했다[229].
유대인 공장 경영자이자 철학자였던모세스 멘델스존은 유대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시편과 모세 5서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유대인 자제의 교육에서는 기존의 율법중시를 다시 한번 세속적인 과목과 직업훈련을 호소하고유대인2.1770년에는 멘델스존은 가로를 걸으면 목소리를 받게 되는 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에 외출하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240].1782년멘델스존은메나세 벤 이스라엘의 『이스라엘의 희망』의 독일어 번역전서에서 국가가 종교에의 개입을 그만둔다는정교 분리 원칙을주장하면서 유대인 사회의 종교적 권위로부터 독자적인 재판권을 포기하도록 요구했다[229].
미라보 백작은 돔과 베를린의살롱에서 친교하고 영향을 받아프랑스 혁명으로 유대인 해방을 실현했다[130].1791년1월 28일프랑스 혁명중인 프랑스 에서는이베리아에서 이주한 포르투갈계 유태인과 아비뇽 교황령의세팔라디임의직업과 거주지가 보장되었다[244]. 반대자에 의해 국민의회는 분열 직전이 되었지만,1791년9월 27일에 유대인 해방령은 의결해, 11월에 발효했다[130]. 그러나 혁명의 동란으로 유대인이 해방되지 않고 유대인의 해방정책이 진전된 것은 나폴레옹 시대 이후의 것이었다[245].
프랑스의 패권이 확대되는 가운데 독일에서는 독일 지상주의·게르만주의가 대두함과 동시에 반프랑스주의와 반유대주의가 높아졌다. 독일의 교양시민은괴테를 예외로 프랑스 혁명을 '이성의 혁명'으로 열광적으로 처음에는 환영했지만, 혁명 후의공포 정치가 현출되면 혁명을 증오하게 되었다[246]. 시인크롭슈톡은 프랑스 혁명을 칭찬한 몇 년 후에 '우민의 피의 지배', '인류의 대역범'으로 프랑스를 규탄했다[246]. 당초 혁명을 칭찬한 프리드리히 겐츠는1790년에버크의 '프랑스 혁명의 성찰'을 독일어로 번역했다[246]. 프로이센에서는 베르나 종교령에 대한 반대자는 ‘자코반파(혁명파)’로 규탄되고, 슈레지엔에서는 혁명에 대해 말한 것만으로 체포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외국인 입국이 제한되었다[246]. 프랑스 이외의 나라가 반혁명국가가 된 요인으로는알토와 백등 프랑스의 망명귀족들의 활약이 있었다[246].알토와 백은 코브렌츠에 망명궁을 들고라인란트를거점으로 하여 반혁명운동을 책동했다[246].
나폴레옹은 정복한 땅에서나폴레옹 법전을 시행하고 유대인을 '해방'했다[251]. 이탈리아, 로마 교황령, 라인 지방의 유태인은 시민권을 수여되었다[245]. 한편, 이전의 신분제도에 만족하고 있던 암스테르담의세팔디는 시민권을 불필요하게 했지만 유대 공동체도 분열 상태가 되고 있다[245]. 각지의 유대인은 나폴레옹을 해방자로 환영하고[251], 프랑스는 유태인 해방자로서의 명성을 확립했다[245]. 그러나 나폴레옹은 유대인은 메뚜기의 무리 같은 비겁하고 비굴한 민족이라며 “유대인의 해방은 더 이상 타인에게 해악을 전파할 수 없는 상태에 두고 싶다. "유대인의 비유대교화를 바라며 유대인과 프랑스인과의 혼인을 진행하면 유대인의 피도 특수한 성질을 잃을 것이라고 유대인종 말소를 목표로 했다"245]. 또한 나폴레옹의 유대 정책의 작성 과정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편견이 있으므로 공문서에서 '유대인' 명칭을 쓸어내는 것이 제안된 것도 있고, 독일 제방에서는 행정에서 '모세인(Mosaiste)'이 장려되었지만 정착하지 않았다[226].
철학자이마뉘엘 칸트는 유대인이 기독교를 공개적으로 받아들이면 유대교는안락사할 수 있다고 말했다[252][253].요한 고트리프 피히테는 유대인의 해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서는 유대인 전원을 약속의 땅에 보내는 수밖에 없다고 논했다[253]. 또 나폴레옹 점령하 베를린에서 '독일 국민에게 고한다'(1807년-1808년)를 강연해 반향을 불러 독일 국민운동의 조가 되었다.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자기 안으로 밀려들어 무한한 고통에 있는 유대 민족에 대해, 게르만 민족은 객관적 진리와 자유를 연화시킨다고 논했다[253].
독일 관념론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모세스 멘델스존등 유태인 철학자와 교류하고 있었지만 저작에서는 반유대주의적인 견해를 반복해서 말하고 있어 ‘단지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1793년)에서 “유대교는 모든 인류를 그 공동체로부터 밀어내고 자신들만이 예호바에 선정된 백성이라고 하여 다른 모든 백성을 적시했고 그 보답에 다른 어떤 백성으로부터도 적시된 것이다”[253][254]]라고 말하고 또 만년의 '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1798년) 에서도“ 팔레스타인인(유대인)은 추방 이래 몸에 익힌 고리대출 정신 탓에 그들의 대부분이그렇지만 기만적이라는 근거가 없는 세평 을받았다.”『제학부의 싸움』에서는 유대인이 기독교를 공개적으로 받아들이면 유대교와 기독교의 구별이 소멸하고, 유대교는안락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252]. 칸트는 계몽 사상에 의한 유대인 해방을 외치면서 의례에 구속된 모세교(유대교)를 거부했다[256]. 다른모세스 멘델스존은 라파타-논쟁에서 기독교로의 개종을 거절하고 거부했다[257]. 또한 칸트는 프랑스 혁명을 찬양하면서도 교회나 압정 등의 '외계로부터의 자유'라는 프랑스 혁명의 자유관을 비판하고 자율적인 자기결정이라는 개념에 의하여 외계의 영향에 좌우되지 않는 '완전한 자유'관을 낳았다[258]. 칸트는 인간은 밖의 세계가 아니라 자기의 내세계, 자율적인 정신 속의 도덕률을 따를 때 자유롭다고 논했지만, 이러한 칸트의 철학이 정치에 적용되면 자율성과 자기결정으로 도덕에 따른 정치가 좋은 정치로 되어 자결권의 획득이정치목표가된다.이러한 칸트의 사상은 피히테에 의해 계승되었다.
원래 프랑스 혁명의 열성적인 지지자였던 독일 철학자요한 고트립 피히테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대중의 판단을 바로잡기 위한 기여"(1793년)에서 혁명을 이론적으로 근거로 함과 동시에 유대인이 독일에 가져오는 해에 대해 말했다[253][253]. 피히테는 “유대인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들을 위해 약속의 땅을 손에 넣어 주고, 모두를 거기로 보내야 한다”[260]“유대인이 이렇게 무서운 것은, 하나의 고립되고 굳게 결속한 국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 국가가 인류 전체에 대한 증오를 짊어져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라며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주어도 그들의 머리를 잘라내고 유대적 관념이 들어가지 않은 또다른머리]. 피히테는 세계는 유기적인 전체이며, 그 부분은 그 밖의 모든 존재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고 하고, 개인의 자유는 전체 안의 부분이며, 개인보다 높은 수준의 존재인국가는 개인에게 우선한다고 논하고, 개인은 국가와 일체가 되었을 때 처음으로 그 자유를 실현한다고 주장했다[258]. 이러한 피히테의 국가관은 쉘링, 뮐러, 슈라이엘 마하에 의해 지지되고[258]반면 20세기 초기시온주의자도 피히테를 국민으로서의 강한 자각으로 도덕성을 높이는 사상의 선구자로 여겨 반시오니스트의 유대계 철학자헬만코엔 도 피히테는 국민이 전체의 자유에 봉사한다는구약성서의 이상을 인정했다고 칭찬했다.
피히테와 마찬가지로 당시 아직 프랑스 혁명의 열심한 지지자였던프리드리히 슈레겔은 '공화주의의 개념에 관여하는 시론'(1793년)에서 민주적인 '세계 공화국'을 논하고 혁명적 민주주의에 의심을 표한 칸트의 '영원 평화를 위해'(1795년)을 극복하려고 했지만, 슈레겔도 나폴레옹 시대에는 독일 국민의식을 고무하는 역할을 했다[259].
1799년,자유주의 신학자젬라의 제자슈라이아마하는 종교론 제5강화에서 유대교는 성전이 간결하고 여호와와 그 백성과의 대화가 끝났을 때 죽었다고 말했다[262][263]. 또 1804년, 국가는 도덕적 권위이며 조국은 살기에 최고의 의미를 준다고 논했다[264].
헤겔은 유대인 해방을 지지했다[265]. 그러나 '종교철학강의'에서 유대인의 노예적 의식과 배타성에 대해 논의하고[266], '정신현상학'(1807년)에서 유대인은 '말씀드린 민족이며, 또 그러한 민족이었다'[267]1821년의 ‘법의 철학’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 안으로 밀려들어 무한한 고통에 있는 반면, 게르만 민족은 객관적 진리와 자유를 은혜로 만들었다고 했다[253][268]. '기독교의 정신과 그 운명'에서 유대인은 “자신의 신들에 의해 결국 버림받고, 자신의 신앙에서 부서져 부서져야 했다” “무한한 정신은 감옥과 동등한 유대인의 마음 속에는 살 수 없다”고 비판했다[253][269]. 또한 헤겔은 니그로가 모든 야만성을 가진 자연인이며, 그 성격 속에 인간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265]. 헤겔에 따르면 세계사는 아시아에서 시작하여 유럽으로 끝나지만 아프리카는 세계사 밖에 머무른다. 동양에서는 혼자만 자유롭고, 그리스 로마 세계는 몇몇이 자유인데 반해, 게르만 세계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다고 했다[265]. 게르만 민족은 순수한 내재성을 가졌기 때문에 정신이 해방되었다. 그러나 라틴 민족은 분열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혼이라는 정신의 전체성이 없기 때문에 자기의 가장 깊은 곳에서 자기에게 있어서 외적 존재라고 했다[265]. 또 헤겔은 어린 시절의 미간 논문에서 "기독교는 발하라를 녹슬게 하고, 신성은 고모리를 벌채하고, 민중의 공상을 부끄러운 미신, 악마적인 독으로 질식시켰다"고 썼다[265].
철학자쉘링은 백인종은 가장 고귀한 인종이며 “야페테의, 프로메테우스의, 코카서스의 인종의 조상만 이 그 행위에 의해 관념(이데이)의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다”라며, 다른 인종은 노예가 될지 멸망하는 운명에있다.또한 유대인은 민족을 갖지 않고 순수한 인류의 대표이며, 다른 사람보다 관념의 세계에 접근할 수 있다고 했다[265].
철학자쇼펜하우어는 백인종과 신약성경의 기원은인도라고 하며 “인도의 지혜에서 나온 기독교의 교리는 조잡한 유대교라는 완전히 이질적인 오래된 줄기를 뒀다” “인류는 아담에서 실수를 저질렀다. 죄, 타락, 고뇌, 죽음의 유대 속에 붙잡혀 있었지만, 구세주에 의해 죄를 낳았다. 이것이 기독교와 불교의 견해이다.265][270][271][주 40]. 쇼펜하우어에게는 회당이나 철학 강당도 본질적으로 큰 차이는 없지만, 유대인은 헤겔파보다 질이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271][272]. 쇼펜하우어는 “유대인은 그들의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이며, 하느님은그백성의하느님이다.또한 쇼펜하우어는 서유럽은 유대의 악취에 의해 질식되고 있으며, 유대 사상의 영향을 저주하고 "언젠가 유럽이 모든 유대 신화에서 순화된다. 아마 아시아 기원의 야페테계 사람들이 그들의 원단의 거룩한 종교를 다시 발견하는 세기가 다가오고 있다"고말했다.쇼펜하우어는 아리아주의와 셈주의의 이원적인 대조를 독일에서 보급시켰다[265].
1807년에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패배하자 오스트리아는 독력으로 모색하게 되었고,1808년에는 일반병역의무제도가 도입되어 정규군이 되어 민병제가 시행되었다[277][주45]. 오스트리아 외상 슈타디온 백작은 국내에서 애국주의 캠페인을 실시해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성찰'을 번역하고 있던 정론가 겐츠와프리드리히 슈레겔도 이 캠페인에 협력했다[277]. 그러나1809년,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 패해,쇤브룬의 화약으로 오스트리아는 잘츠부르크, 갈리치아, 티롤을 포기하고, 거액의 배상금을 부과되었다[277][주 46].
나폴레옹 점령지역에서는 반프랑스적 보도가 엄격히 탄압되었고, 바덴에서는 1810년에 신문 발행이 정지되고, 프로이센에서는 검열국이 만들어졌고, 라인란트 신문은 프랑스어와의 2언어 표기가 의무화되었다[142]. 뉘른베르크의 서점주 팔름은 '나락의 바닥에 있는 독일'이라는 빌라를 나눠서 1806년에 총살당했다[142][278]. 나폴레옹에 라인 좌안을 빼앗겨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어 40개의 독일영방이지배되어 신문과 출판의 통제가 진행되면서 독일인은 자신들의 약점을 자각하고 실망이 퍼지면서 반나폴레옹 운동은 독일 국가와 독일 민족 을복고시키는 독일국민운동이되었다.
한편, 전승국의 프랑스에서는,1807년에 유대 음모설이 취사되고, 그 후,프리메이슨 음모설과 교대해 취사되어 가고, 이것이 19세기 이후의 반유대주의의 조류와 합류해 갔다[279].
프로이센에서는 1810년부터 재상할덴베르크지도하에 개혁이 진행되었다[280]. 할덴베르크는 '리가 각서'에서 '불사조여, 재 속에서 부활하라'고 써 군주 정치에서의 민주적 원칙의 실현이 목표로 되었다[280]. 프로이센 개혁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자극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자유와 평등이 주장되었지만 '프랑스 혁명의 피투성이의 괴물들이 그 범죄의 은밀한 '자유와 평등''이 아니라 군주국의 현명한 방법에 의하면 설득되었다[280].
1812년에프로이센 왕국이 유대교도 해방 칙령을 낸다[281]. 전년인 1811년에 할덴베르크의 개혁으로 유대인의 토지 소유권이 인정되면, 프로이센 왕국의 귀족은 국가의 적인 유태인은 이윽고 나라의 토지를 매입하고, 프로이센은 유태인 국가가 되어 버린다고 항의했다[282]. 법학자사비니는1815년유대인 해방령을 비판하고 기존 유대인 예외조치를 부활하여 유대인을 게토에게 재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8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괴테도 유대인 해방은 독일인 가정의 윤리를 망칠 것으로 비판하고 유대인 해방 뒤에로스차일드 집을보고 있었다[284]. 또 괴테는 1811년에 간행한 『시와 진실』에 있어서,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게토에 대해서 「소년시대뿐만 아니라 청년이 되어도, 내 마음을 무겁게 한 무기미한 것」으로서 「좁고, 불결하고, 시끄럽고, 야한 말의 악센트, 그들이 하나가 되어, 어쨌든 불쾌한 인상을 받았다”고 썼지만, 유대인의 독일어를 학습하고 있다[285]. 1829년에 간행한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역시대'에서 괴테는 “인간은 피할 수 없는 것에 순응하는 것이 좋다”며 기독교는 그것을 조세하고 인내 “즉 , 그렇다면 소원하는 향락 대신에 가장 괴로운 고뇌가 져도, 존재가 더 아무리 귀한 은사인지를 느끼는 "감미로운 감정"을 낳고, 교육에 의해 어릴 때부터 기독교의 장점을 가르치고 마지막으로 지식을 주고, 시조 예수에 관한 보도는 신성한 것이지만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어떠한 유대인도 우리 동료에게 허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대인이 이 최고 문화의 기원과 유래를 부인하고 있는데 왜 우리는 유대인이 이 최고 문화에 관여하는 것을 용서할 수 있을까"라고 썼다.286].
독일에서의 유대인 해방은 유대인의 독일인으로의 동화와 기독교로의 개종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1822년에 창립된 '유대인·기독교 보급협회' 등이 개종을 뒷받침했다[287].
유대인 해방 시대의 독일 유태인은 이성을 사용하면 누구나 인간성을 높일 수 있다는 계몽사상과 독일사회에 융화하려고 독일의빌딩(교양에 의한 인간형성)을 새로운 신앙심으로 받아들였다[264]. 진취적 유대인 중 3만명은 기독교 사회에 동화하기 위해 솔선하여 기독교로 개종했다[251]. 베르네와 하이네는 독일인명으로 개명하고 개종했고, 유대인 법학자에두아르트 건스와 작곡가펠릭스 멘델스존도 개종했다[251].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은 독일의 신화와 감정의 세계를 물리 치기 쉽기 때문에 유대인은 독일의 민중에서 고립되어 갔다[264].
로맨파와 게르만주의
에른스트 아룬트는 자유롭고 성실한 게르만인의 피는 순수하다고 논했다.교육자로 독일 국민운동가인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얀(Friedrich Ludwig Jahn)은 원시 게르만인의 후예인 독일인과 고대 그리스인만이 거룩한 백성이라고 논했다. 1817년 발트부르크 축제의 주역이 되었다.
피히테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작가에른스트 모리츠 아룬트는농노제폐절운동을 한 뒤1806년저서 '시대의 정신'과1813년노래 '독일의 조국이란 무엇인가' 등으로나폴레옹의 독일 지배를 비판했다. 아룬트는 나폴레옹 비판 속에서 게르만 인종이선민이라고 논하고 자유롭고 성실한 게르만인의 피의 순수함의 근거로서타키투스와창세기를 끌어들여 주님의 분노인대홍수는 잡종화에 대한 것이었다고 한다[290]. 다만, 아룬트는 독일 인종에 대한 위협으로서는 주로 「프랑스 인종」을 보고 있어 유대인에 대해서는 유대계 폴란드인의 독일 수용에 반대했지만, 유대인은 개종하면 소멸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290]. 아룬트의 '게르만인의 피'의 사상은하인리히 폰크라이스트, 켈너, 애국시인의 맥스 폰 센켄도르프(Max von Schenkendorf)와 나란히 독일 국민에게 무기를 취하도록 촉구했지만, 다른 쪽 프랑스에서도 혁명 후의국가「라 마르세이에즈」의 가사에서는 「더러운 피」에 대해서 있는 등, 민족의 피를 우열로 보는 것에 양국에서 차이는 없었다[290].나폴레옹 전쟁에서의 패배가 독일인에게 굴욕적이었기 때문에, 게르만성에 대한 광신이 교과서에서도 실리게 되었다[290]. 교육가 콜라우시[291]의 교과서 「독일사」(1816년)에서는 독일인의 순결성이 유대인, 그리스인, 라틴인과는 호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여겨졌다[290].
정치경제학자인 아담 뮬러는에드먼드 버크를타키투스와 나란히 칭찬하고 또노바리스는게르만시의 정신으로 세계 를 정복하려고 했다고 칭찬하고 종교개혁과프랑스혁명에 의해 붕괴해 나가는 중세적 게르만적인 세계와 중세의 보편적인 단체.뮐러는 "언젠가 유럽 민족으로 구성된 일대 연방이 쌓이겠지만 그 색조는 여전히 독일적인 것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여 유럽 정체의 위대한 것은 모두 독일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했다[290]. 아담 뮬러는 나폴레옹 지배에 대해 독일 민중의 저항운동(헬만의 싸움)을 호소하고 또할덴베르크의 개혁을 비판했다[292]. 뮐러는1811년비엔나에 망명하여 메테르니히를 섬겼다.
1806년부터1815년에 걸쳐 작가인브렌타노,아르님, '독일 민중본'을 간행한 요한 폰 게레스,그림 형제들이 모여든하이델베르크에서 독일 민족주의의 '독일의 불'이 점화되었다[274]. 아르님과 브렌타노는 독일의 민요를 모아 '소년의 마법의 각휘'(1806-8)를 출판했다[293]. 게레스는 '독일의 몰락과 그 재생의 조건'(1810년)에서 예전의유대 왕국처럼 독일은 현재의 거룩한 땅이라고 했다[290][294].그림 형제는 민화를 모으고,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동화'(1812-1822), '독일의 전설'(1816-18)을 출판하고, '독일어 사전'(1852)에서는 유태인을 '이득 없고 폭리를 탐하고,불결하다'3.야콥 그림은1835년에 '독일 신화학'을 간행하고바그너에도 영향을 주고[295], 또1848년 혁명에서의 독일 헌법 동의에서는 독일 헌법은 독일 포르크의 신조여야 한다고 말했다[296].
1807년12월부터 다음 1808년에 걸쳐 프랑스군 점령하의 베를린 학사원 강당에 있어서, 철학자피히테는 「독일 국민에게 고한다」를 연속 강연해, 프랑스 문화에 대한다 독일 국민문화의 우수성을 설득하고, 또 독일 국민의 통일, 독일인의 내적 자유, 상업상의 독립을 주장하고, 독일 국민 정신을 발양해 독일 해방 전쟁을 준비하는 힘이 되었다[274]. 피히테는 이미 개인은 개인보다 높은 존재인 국가와 일체화함으로써 자유를 실현한다고 논하고 있었지만, '독일 국민에게 고한다'에서는 민족·국민(네이션)에 개인이 몰입함으로써 자유를 달성한다고 논해졌고 유일하게 정통한 통치형태는 국민에 의한 자치라고 주장했다[258]. 독일에서는출판의 자유가현저하게 제한되어 있었지만, 피히테의 강연이나 슈라이엘 마하의 설교는입소문으로 반향이 퍼졌다[142].
1808년베를린에서크라이스트가 '헬만의 싸움'을 쓰고 나폴레옹에 대한 증오와 독일 민족의 봉기를 맡기고 독일의 해방전쟁이 기대되었다[274].
진보주의적인 교육자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얀은 아룬트, 피히테, 슈라이어 마하와 함께 독일 국민운동의 유명한 조직자였다[297]. 얀은 1810년에비밀결사독일동맹(Deutscher Bund)을 결성해 독일 전역에 걸친 애국조직의 모범이 되었고, 또 트루넨이라는 독일 국민체육을 시작했다[297]. 얀은 1810년에 걸친 '독일의 국민성'에서 독일의 국민성에 근거한 전인교육을 목표로 체육을 제창하는 가운데 '혼혈의 백성은 국민재생산의 힘을 잃는다'며 프랑스의 영향력을 배제 제외하는 국민혁명을 목표로 독일어에서 외국 기원의 인명 말소, 민족 의상 착용 등 민족 정화를 호소하고 원시 게르만인의 후예인 독일인과 고대 그리스인만이 거룩한 백성이라고 논했다.298][299][300][301]. 얀에 앞서 교육학자요한 크리스토프 구츠 무츠가1793년루소의 영향하에 집필한 '청소년을 위한 체육'에서 원시 게르만인의 신체를 이상적인 목표로 칭찬했다[301]. 얀은 "독일을 구할 수 있는 것은 독일인뿐이다. 이방의 구주는 독일인을 파멸로 이끌 수밖에 없다"고 했다[302].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정전하면 요르크 군이 들어간동프로이센에서 북독 독일에서 프랑스의 지배로의 봉기에 이어가고,프로이센 왕국의 전 총리에서러시아 제국의 황제 고문 칼 슈타인이 러시아를 설득하고1813년2월 27일에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동맹했다[274]. 프로이센에서는 일반 병역의무가 포고되어 국군과의용군이조직되었다[274].3월 16일에 프랑스에 선전이 포고되어 다음날 프로이센에서는 국왕프리드리히 윌헬름 3세가'우리 국민에게'로 조국 해방을 위한 국민의 결기가 호소되었다[274].3월 25일의 칼리쉬 선언에서는 라인 동맹의 해산이 선언되어 “독일 국민의 본원적 정신으로부터 얻어지는 젊어지고 강력하고 통일된 독일 제국”의 재흥이 약속되었다[274]. 독일 해방전쟁의 중심에 있던 것은 슈타인이며 "조국은 단 하나 독일"이라고 하는 슈타인은 라인 동맹 제군주를 경멸하고 증오하고 라인 동맹 국가의 주권 박탈을 계획했다[274]. 애국 기자 아룬트는 슈타인과 함께 프랑스의 섬멸을 고취하고 전사한 시인 켈너는 독일의 성전을 노래했다[274]. 그리고 학생, 수공업자, 농민의 젊은이들이 신전을 끊고 무장하고, 지원병단이나 의용병단에 몸을 던져, 반나폴레옹 감정이 지금까지 없게 높아졌다[274].독일 해방전쟁에서 교육자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얀은 1813년류초소령과 항불조직류초 의용단을창설해체조등체육교육을 보급시켜 '체조의 아버지'로 독일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299]. 얀의 산하에는 학생 결사브루센 샤프트도 있었다[299]. 다만, 류초의용단에는 유대인의 참가자도 있어 유대인을 배척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299].
1813년6월에 영국이, 7월에스웨덴의베르나닷이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동맹에 참가해, 8월 11일, 오스트리아도 프랑스에 선전해,제6차대불대동맹이성립했다[274]. 10월의 최대 규모의 전투라이프치히의 싸움(제국민의 싸움)에서 36만의 대불연합군은그나이제나우의 지휘하에 19만의 프랑스군을 깨었다[274]. 메테르니히는 라인강에서 강화하려고 했지만, 아룬트는 라인강은 독일의 강으로, 국경이 아니라고 논하고, 게레스도 반나폴레옹의 논진을 치렀다[274].1814년에 메틀러 캄프와 공동으로함부르크 시민군을 창설한 프리드리히 크리스토프 페르테스(Friedrich Christoph Perthes)는 게레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독일인은 선택된 백성, 인류를 대표하는 백성이다”고 말했다[290]. 대불연합군은1814년3월 30일파리에입성했고, 나폴레옹은 엘바 섬으로 흘러 나와서 나폴레옹의 독일 지배는 타도되었다[274].
비엔나 체제(1815-1848) 시대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의비엔나 회의(1814-1815년)에서는 1792년 이전으로의 복귀와 세력 균형이 원칙으로 여겨졌다[303]. 또 각지의 나폴레옹 법전은 무효로 되어 유태인 정책은 각 국가의 자유재량이 되었다[251].
비엔나 회의 이후의 국제질서를비엔나 체제라고 부르며1848년 혁명으로 붕괴될 때까지의 시대를 가리킨다[304].나폴레옹 전쟁에 승리한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의 복고 세력은 혁명의 재발을 막기 위해 1815년에 기독교적 우애에 의한 평화를 제창하는신성 동맹을체결,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가 주도해1818년에영국과 체패한 프랑스를304]. 5국은 독일의 자유주의 운동을 탄압했다[304].
한편1830년프랑스7월 혁명에 맞서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이 1832년 10월에 구질서 유지를 재확인했지만 혁명 간섭을 기피한 영국과 프랑스가 진지협상을 맺은 것으로 비엔나 체제는 분열하여각국의1848년혁명.
독일
애국 학생운동(브루센 샤프트)과 자유주의
라이프치히의 '국제 전투 기념비'
비엔나 회의에서 승인된비엔나 의정서에 의해 출현한비엔나 체제에 의해,오스트리아 제국주도로 과거의신성 로마 제국의 영역에 거의 합치한독일 연방(Deutscher Bund)이 성립했다[142]. 그러나 독일 연방은 한때신성 로마 제국의 재흥과는 좋지만, 나폴레옹 통치하의배신화로소멸한 군소제방의 군후는 복위할 수 없었다[305]. 또 독일 국민에게 있어서의 신체제 독일연방은 종래의 영방국가체제와 변함없이 대나폴레옹 전쟁=독일 해방전쟁에서 일체가 되어 싸워 국민적인 국가를 기대하고 있던 독일 국민은 실망했다[142]. 라인 강 서해안 일대의라인란트는프로이센왕국에 할양되었고, 또한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 주도에 반발을 강화했다. 비엔나 체제는1848년 혁명으로 붕괴했다.
독일 해방전쟁에 지원병으로 참여한 학생들은 독일 국민의 통일국가를 기대했지만, 비엔나 체제에서는 독일의 군주국 국가들로의 분열이 고정화되었기 때문에 조국의 현황에 불만을 품고 학생 결사브루센 샤프트운동을 펼쳤다[306].1815년에 결성된 브루셴샤프트 주류파인 예나대학의 결사는 애국심의 풍양과 심신연마를 도모하고, 기센대학의 칼 포렌은 독일에 자유롭고 평등한 공화국을 목표로 했다[306].
1816년신칸트파에서자유주의의 철학자야콥 프리스는 '유대인을 통해서 가져오는 독일인의 부 및 국민성의 위기에 대해'에서 '유대인의 카스트를 뿌리내리고 멸종으로 쫓는 것'을 호소했다[307].
1817년10월 18일,루터가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아이제나하의발트부르크 성에서, 종교 개혁 300주년의 발트부르크 축제가 학생 결사브루셴샤프트에 의해 개최되었다[142][306][308]. 발트부르크 축제에는 전 독일에서 460명 이상의 부르셴샤프트의 학생 운동가가 결집해, 조국 독일에 대한 사랑과 독일 통일과 독일의 자유와 정의가 고창되었다[142][306]. 교육자로 독일 국민운동가의 얀은 철학자 야콥 플리스와 함께 이 발트부르크 축제의 주역이었다[299]. 축제에는 양털, 의학자 키저, 과학자 오켄, 법학자 슈바이처가 내빈으로 참석했다[308]. 프리스의 문하생 레이디거는 “조국을 위해 피를 흘릴 수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가장 평화로운 때 조국에 다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자유로운 하늘 아래 서서 진리와 정의를 목소리로 삼는다. 또 독일인이 거룩한 것과 진리를 말할 때 아무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그런 시대가 고맙다는 것에온것이다.308]. 이 제전에서는 반독일적이 된 책이焚書되어 유대계 작가 자울 아샤의 '게르만 광'도 구워져 나중에 나치독일의 焚書의 선구가 되었다[299][308]. 이렇게 독일의 대학을 온상으로 삼아 인종차별적인범 게르만주의가 태어났다[299]. 메테르니히는 이러한 과격화된 학생운동에 경계를 강화했다[306].
메테르니히에 의한 학생 운동의 탄압
1819년 프랑크푸르트의 헵헵 폭동.
1819년3월에는브루셴 샤프트의 자유주의와 애국사상을 잡지에서 조롱하고 있던 작가 아우구스트 폰 코체부(August von Kotzebue)가 러시아 스파이로서과격파의학생들에게암살되었다[142][299]이 사건 이후 메테르니히는1819년9월 20일칼스버트 결의에서 학생운동과 자유주의운동의 탄압을 결정하고, 출판법에 의한검열제도, 대학법, 수사법 등에 의한 혁명운동 단속을독일 연방전역에서 강화했다[142][306]. 마인츠에는 혁명적 음모와 선동적 결사운동을 감시하는 위원회가 놓여 있었다[306]. 양털과 아룬트, 베르가-형제 등 저명한 교수는 대학에서 추방되었고, 얀은대역죄로 유죄를 받았고, 슈타인과 그나이제나우 등 개혁파도 정계에서 추방되었다[299][306]. 1848년 3월 혁명까지 출판은 제한되어 신문이나 잡지의 발행부수는 격감했지만, 출판을 대신하여 축전이나 집회가 활발히 행해지게 되었다[142]. 또 급진파는 지하에 숨어, 1833년 4월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위생병습격 사건이 일어났다[306].
1820년, 작가아힘 폰 아르님은 소설 '세습 영주'로 세습 영주가 영락하는 가운데 골목에서 기어나온 강욕적인 유대인을 그렸다[315]. 아르님은 형제인 클레멘스브렌타노와 함께 베를린에서 '독일 기독교 만찬'을 개최했으며, 유대인은 개종자라도 입회 금지로 했다[315].
1820년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그리스가독립전쟁을 시작했다.그리스에서는 프랑스 혁명과 독일 로망주의의 영향으로 내셔널리즘이 대두하고 있었다. 당초 비엔나 체제 하의 유럽 국가들은정통주의에 의해 오스만 제국을 지지했지만, 러시아가 러시아 정교를 공격한 오스만 제국에 국교 단절을 통고하고, 1828년 러시아는노토 전쟁을 시작했다. 러시아의 영향 확대를 두려워한 영국이나 프랑스도 개입해,1830년에런던 의정서로 그리스의 독립이 승인되었다.
1820년대 후반 이후에는 출판을 대신하여 축전과 집회가 활발히 행해지게 되어,듀러300년 기념제(1829), 함바흐 축제(1832), 구텐베르크 축제(1837, 1840), 실러 기념제(1839) ), 독일 합창제(1845) 등이 개최되어 정부에 의한 단속을 피하고 독일 민족의 영웅이 칭찬되어 독일 통일과 국민연대를 요구할 수 있었다[142]. 또 1841년부터는 기념비가 만들어지는 운동이 높아져, 장 파울, 모차르트, 보니파티우스, 바흐, 괴테 등의 기념비가 만들어져 갔다[142].
1832년함바흐 축제. 3만명이 모여 1817년 발트부르크 축제의 규모를 넘는 성황이 되었다.
1818년에 공포된 바이에른 헌법에서는 출판의 자유도 명기되는 등 나폴레옹 법전에서 인정받았던 권리가 보증되었지만,1830년프랑스7월 혁명이후바이에른 왕국정부는 검열을 강화했다[318]. 저널리스트 야곱 지벤프 파이퍼와 게오르크 빌트는 독일의 재통일을 위해 자유로운 언론은 유일한 수단이라고 하는 '독일자유출판조국협회'를 결성했지만, 바이에른 외 프로이센이나 함부르크에서도 금지되었다[318]. 지벤프 파이퍼는 헌법기념제를 대신하는 '민족제전(Volksfest)'을 계획하고,5월 27일에 '독일 5월 축제'를 함바흐 성에서 개최하는 것을 선전했다[318]. 이 함바흐 축제는 '내적·외적인 폭력 폐지를 위한 축제'이며 '법률에 보장된 자유와 독일 국가로서의 존엄의 획득'을 목적으로 했다[318].라인바이에른 정부에서는 프랑스 점령 시대부터 집회는 금지되었지만, 축전(Festmahl)이나 민족제전(Volksfest)은 허가되고 있었다[318]. 그러나 제전을 금지하려는 라인 바이에른 정부에 대해 참사회가 반대하고 정부는 금지명령을 철회했지만 철회는 전대 미문이며 정부의 패배로 간주되었다[318].
이렇게1832년5월 27일부터6월 1일까지 바이에른의프팔츠에 3만여가 모인 '독일 5월 축제=함바흐 축제'가 개최되어 독일 통일과 제민족의 해방, 인민주권과 공화제의 수립 등이 외쳤다[318]. 참가자는 '독일 조국이란 무엇인가' '빛나는 소용돌이 속의 조국'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고, 의사 헵은 독일 통일과 독일의 자유에 의해 독일은 재생한다고 연설했다[318]. 함바흐 축제에는 독일의 자유의 수호신으로서 학생들로부터 환영받고 있던 유대계의루트비히 베르네가 파리로부터 참가했다[318]. 베르네는폴란드 러시아 전쟁에서 유대인 3만명이 폴란드 지원을 위해 걸어 폴란드라는 조국을 싸우려고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유대인을 심하게 경멸하고 있는 자랑스럽고 오만한 독일인에게는 조국이 아직 없다”고 말했다[318][319]. 또한프리츠 로이터도 참가했다.
지벤프 파이퍼는 연설에서 “국민이라 불리는 우지벌레는 땅을 괴롭히고 있다”고 말하며 조국의 통일을 바라는 것조차 범죄가 된다고 주장하며 34명의 독일 국가의 군주를 “국민의 학살자”라고 부르며 군주가 왕위를 떠나시민이된다.빌트는 조국의 자유를 위한 싸움에는 외국의 개입 없이 독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애국주의를 연설했다[318]. 그러나 그 후의 연설에서는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는 상인의 연설이 이뤄지는 한편 변호사 할아와는 겁쟁이 노예보다는 명예의 전사를 해야 한다고 호소하거나 브러시 장인 베커는 무장 시민만이 조국을 지킨다고 연설하는 등 의견이나뉘었다.축제 후, 지도자는 임시 정부 국민회의의 결성을 모색했지만, 결국, 조국 출판 협회명이 「독일 개혁 협회」로 바뀌는 것에 그쳤다[318].
파리에 있던하이네는 독일의 본질은 왕당주의이며, 독일은 공화국이 아니었고, 독일 혁명도 독일 공화국의 탄생도 그리 빨리 오지 않는다고 동정하면서 비판했다[318]. 하이네는 혁명을 전하는 베르네에 대해 '테러리스트적인 심정 고백'으로 비판했고, 베르네가 '최하층 사람들의데마고그'가 된 것은 '인생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남자의 자포자기적인 행동'이라고 비난했다[318][320]. 베르네도 하이네도 개종자이며 독일인명으로 개명하고 있었다[251].
함바흐 축제 후 독일 각지에서 창고나 시장이 과격파에 의해 습격되는 등 혼란이 퍼지고, 1832년 6월 24일 바이에른 정부군은계엄령을 발령했다[318]. 메테르니히는 혁명운동 확대를 두려워 탄압을 강화했고, 빌트와 지벤프 파이퍼 등 많은 활동가들이 체포 구금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318][321]. 1833년 4월에는 '출판조국협회' 과격파 50명이 프랑크푸르트에서 경찰을 습격하고 1800명이 체포됐다[321]. 그러나 그 후에도 독일 국민운동은 비정치적인 협회의 모습을 취해 지속되었고, 10만명 이상의 멤버를 가진 남성 합창협회는 독일어 민요를 보급시키고, 얀의 체조협회 등도 독일 국민의식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321].
청소년 독일파
유대인 화가 모리츠 오펜하임의회화'독일 해방 전쟁에서 귀가한 유대인 지원병'(1833-4). 로스차일드가를패트론으로 하고 있던 오펜하임은 이 그림에서 독일 역사상 처음으로 독일 애국심을 가진 유대인을 그렸다[322].
1834년하이네는 “그리스도교는 그 잔인한 게르만적 호전심을 다소 완화했지만 굳이 깨뜨릴 수 없었다 ” 며 칸트주의자, 피히테주의자 등의 철학자에게 조심하도록 경고해게르만주의자로부터 큰 분개를샀다.한편, 하이네는 같은 해, 우리 독일인은 가장 강하고 지적인 백성이며 유럽의 왕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우리 로스차일드는 세계의 모든 재원을 지배하고 있다고 썼다[265][324].
1835년프랑크푸르트 의회는구츠코, 하인리히 라우베, 문트[325], 빈벌크[326]나 유대계 작가인하이네와베르네등도 참가했던청년 독일파의 작품을 금서처분으로 했다[327]. 청년 독일파는 유대계 살롱의 주최자라엘 팔룬하겐-레비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327].청년독일파였지만 게르만주의자이기도 한 문예비평가 멘젤[328]은 독일인은 지구사상 가장 호전적인 민족이며, 로마제국을 해체하고 전유럽을 지배했다고 말하고[265],청년독일파를 '청년팔레스타인파'라고 고발했다[32.청년 독일의 H·라우베는 부모 유태적이었지만, 1847년에 유태계 작곡가 마이어베어로부터 표절의 혐의로 고소되고 나서 유대인을 싫어하게 되었다[329].
1835년, 작가티크는 유태인은 국가내 이분자이며 독일 문예를 독점해 버렸다고 말했다[330]. 작가 인마만의 '에피고넨'(1836년)에서는, 얀이 지정한 복장을 입고 있던 등장 인물이 박해되지만, 독일인으로 깨진 유태인의 쫓겨났다[330]. 이 작중에서 유대인은 “무언가를 손에 넣으려고 가끔은 당황스럽고, 매우 낮은 자세이지만, 일단 그것을 손에 넣으면 튼튼해진다”고 그려졌다[330].
1832년, 부르봉가의 전 국왕샤를 10세의 아들의 아내베리 공작부인마리 칼로린 드 부르봉이 개종 유대인 시몬 두즈의 밀고에 의해 루이 필립 정부에 인도되었다[338]. 이에 대해 작가프란소와 르네 드 샤토브리안은 "큰 배신자와 사탄에게 잡힌 이스카리오테 유다의 후예"라고 비난했다[338]. 또 작가빅토르 유고도 “비옥한 이교도, 변절한, 세계의 치욕, 쓰레기라고도 할 수 있는 배”인 “방황하는 유대인”이라고 말해 비난했다[338]. 유고는 또 '크롬웰'(1827) '마리 튜들'(1833)에서는 대량의 기독교인의 피가 흐르기를 바라는 유대인을 그려 '거짓말과 도둑질'이 유대인의 전부라는 세리프가 있었다[339]. 유고는 1882년의 「토르케마다」에서 이스라엘에게 사과했다[339].
'방황하는 유대인'의 전설은 근세로 거슬러 올라간다.1602년독일 크리스토프 크로이처가 '아하스웰스라는 이름의 유대인을 둘러싼 짧은 이야기'에서 유대인은 예수 견형의 증인으로 예수 재림(마지막 심판)까지 방황하는 걸음이라는 벌벌을 전해졌다는 '방황하는유다'. 이 전설의 배경에는1208년인노켄티우스 3세의 칙서에서 “예수의 피의 외침을 받지 못하는 유대인들은 기독교 백성이 하나님의 갓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결코 죽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유대인은 기독교인이 주님의 이름을 찾는 시대가 올 때까지 지상의 사소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설명이 있다.3].
'방황하는 유대인'이라는 주제는 16세기 이후의 전설로, 괴테, 슈발트, 슈레겔, 브렌타노, 샤미소, 구츠코, 바이런, 셰리, 워즈워 수들이 취급해, 1833년에는 공화당 좌파의 역사가 에드가르 키네가 「방황하는 유대인-어스 벨류스」로 노고에 굳은프로메테우스나파우스트의 상징을 원용했다340].1844년,슈는 「방황하는 유대인」을 연재했다[340]. 이렇게 유대인에 대한 신화적인 이미지는 배신자였던 ‘이스카리오테의 유다’에서 ‘방황하는 유대인’으로 바뀌어 갔다[340].
세기말에는 정신과 의사샤르코가 유태인은 방랑생활이라는신경질환에 걸리기 쉽다고 생각해 조수의 앙리메주[341]에 「방황하는 유태인」의 연구를 위탁해, 메주는 유태인의 방랑버릇 , 여행병은 인종적인신경질환 이라고2결론
다마스크스 사건
1840년2월, 시리아의다마스크스에서캡틴회수도사 토마 신부가 실종했다[343]. 프랑스 영사는 현지 유대교도들이 사건의 흑막으로 단정하고 유대교도들을 의식 살인 혐의로 고소했다[343]. 유대교도 2명이 오스트리아 국적이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영사는 유대인을 구원하려 했다[343]. 당시이집트·터키 전쟁(1831년~1840년)에서오스만 제국과 이집트가 대립하고 있어,동방 문제로서 유럽 각국의 외교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집트 터키 전쟁 강의 조약런던 조약에서 영국,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각국은오스만 제국을 지지하고 이집트의무하마드 앨리시리아 영유 포기와 이집트 총독 취임을 인정하는 한편, 프랑스의티에르정부는 이집트 총독무하마드 앨리를 지지하고 있어 다마스크스 사건의 대처에서도 대립했다[343]. 다마스크스 사건에 의해, 프랑스 국내에서는, 동방 유대에서는 지금도 의식 살인이라고 하는 미신을 유대교도의 의무로서 정하고 있어, 캡틴 신부는 유태인에게 먹혀진 등, 반유태주의와 애국주의가 유포했다[343]. 영국에서는 프랑스로의 반발도 있었고, 런던 시장이 유대인 몬테피오레 경(Moïse Montefiore), 프랑스의아돌프 클레뮤와 문크의 특사단을 파견했다[343][344]. 티에르의 해임으로 국제분쟁은 막막해졌다[343]. 이 해임에는 로스차일드가의 잼이 일했다는 견해도 있다[343].
1848년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 독일, 덴마크, 스위스 등 유럽 각지에서1848년 혁명이일어났다.
독일 3월혁명에서는독일연방의 국가통일과 헌법제정을 목표로 민족적 자유를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346]. 독일 혁명의 목표는 프랑스가 혁명으로 실현한 계급이나 종교에 관계없이 인민의 권리가 보장되는 공동체로서의 「국민」의 실현이었다[347].
선거 규칙이 없는 채로 있었지만, 선출된 의원에 의한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서는 4명의 유대교도의 의원이 있었다[281]. 프랑크푸르트 국민 의회 부의장이 된 유대인 가브리엘 리서는 유대인의 평등권이 실현되지 않은 것은 "법에 대한 모욕"이라고 비판한다[251]]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유대교도는 공정한 법률 하에서 점점 열렬하고 점점 애국적인 독일의 신봉자가 될 것'이라고 연설하고 만장의 박수로 맞이했다[281].
한편 유대교에서 루터파로 개종한 정치가 프리드리히 율리우스 스탈[348]은 유대인은 일반 독일인으로부터 격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유대인 해방에 반대하고겔라흐 형제와프러시아 보수당을 창설하는 등했다[349]. 또오토 폰 비스마르크의원(후재상)은 “나는유대교도의적이아니다. 1848년 9월 28일에는바덴 대공국발데른시에서 “유대교도의 해방은 단절하여 민족의 목소리가 아니고, 독일 민족은 독일 카톨릭교도와의 동권을 요구하고 있지 않다”고 청원이 내려졌다[281]. 또 같은 해 독일에서 반유대 폭동이 발생했다[310].
이듬해인1849년3월 28일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통일 독일 헌법을 채택했다. '독일 국민의 기본권'에서는 '어떤 사람도 종교의 여하에 따라 시민권, 독일 국민의 권리의 향유에 대해 조건이 붙어서는 안 된다'며 유대인(유대교도)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하게 되었다[251]. 또한 프로이센 외교관 라드비츠 지도의 초당파 조직 카톨릭 클럽은 헌법에 '교회의 자유'를 보장하도록 호소하고 실현했다[351].
동시에 신헌법에서는 프로이센왕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통일 독일 황제로 선출했지만, 왕은인민주권의 원칙을 가진 헌법을 '개 목걸이'로 싫어하고, 제관도 신헌법도 거부했다[352].
그 후, 독일 각방국에서 제국헌법의 승인을 요구하는 제국헌법투쟁이 전개되었다[352]. 4월 말 작센에서는 조국협회 등 혁명파가 헌법을 요구했지만 작센왕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는거부하고 의회를 해산시켰다[353]. 5월에바쿠닌이지휘한드레스덴 봉기가 일어났지만, 작센왕은 프로이센군을 파견해 진압했다[353]. 오스트리아의 압력으로 1849년 5월부터 6월에 걸쳐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해체했다.
1848년 혁명의 실패에 의해 '유대교도 해방'은 철회되었지만, 작센, 와이마르, 아이제나하 등에서는 유대교도가 대학 교수나 재판관에 취임하는 등 유대교도의 해방은 진전했다[281].
독일의 유대인이 전적으로 독일 국민이 되어 시민권이 인정된 것은 비스마르크에 의한 독일 통일에 의해 탄생한독일 제국에 있어서였다[251].
혁명을 통해 1850년대에는 유럽의 내셔널리즘은 코스모폴리탄적이고 관용적인 유토피아적인 것이었던 애국주의로부터 배외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것이 되었다[354].
영국
라이오넬 드 로스차일드월터 스콧찰스 디켄스
1828년비국교도를 제한하고 있던 심사율과 지방자치체령이 철폐되어 가톨릭교도가 해방되었다.1830년유대교도 가톨릭교도와 동등한 지위를 가지는 것이 청원되었지만 실패로 끝났다[173].
1830년경 유대인은 런던에서 점포를 열 수 없었고, 법조계에도 의원이나 대학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355]. 런던의 유대인의 절반은 중동유럽의 아슈케나지로, 산업계에서 조여지고 있었기 때문에 범죄에 달리기 쉽고, 사기나 도품 매매가 횡행했다[355].
또 유대인은 투표권도 있어 의원에게 입후보도 생겼지만 기독교도 선서를 말해야 했다. 이 때문에1847년에라이오넬 드 로스차일드남작은 당선했지만 착석할 수 없었다[173].1866년의 공공 선서령에 의해 유대교도의 의원 취임이 완전히 허가되었다[173].
작가월터 스콧의 '아이반호'(1820)에서는 유대인 아이작이 비굴한 문가로 희극적으로 묘사되지만, 그 딸은 레베카는 미인으로 여겨져 유대인 가족 사랑도 묘사되었다[355]. 스콧은 유대인이 돈벌이를 본직으로 하기 때문에 그들은 마음이 좁아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355]. 또 '의사의 딸'에서는 유대인 미들머스가 애인의 메니를 인도에서매각하려고 하지만 코끼리에 밟히게 된다고 그렸다[355].
작가찰스 디켄스는 '올리버 트위스트'(1838)에서 유대인 도둑의 두목 페이긴을 먹이로 하는 부육을 찾는 '불쌍한 파충류'라고 비유했다[355]. 이 소설에 항의한 유대인에 대해 디켄스는 “페이긴이 유대인인 것은 이야기의 배경이 된 시대에 불행히도 그 종류의 범죄자의 대부분이 실제로 유대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355]. 다만, 디켄스는 개정판에서 '유대인'을 '페이긴'으로 재작성했다[주 47]. 또1854년에 디켄스는 유대계의 학교에서의 강연에서 “유대인이 왜 나를 '반유대적'으로 간주할 수 있을지, 나에게는 눈에 띄지 않는다”고 말했다[355]. 그러나 만년의 '공통의 친구'(1865)에서 유대인 라이어는 기독교 고리 대출의 프런트 역으로서 이용되지만, 기독교인의 딸을 구하는 유대인을 묘사했다[355].
작가조지 엘리엇은 디즐레리의 '탱크 레드'에 반발하는 1848년의 편지로, 볼테르의 반유대 매도에 호응하고 싶은, 히브리의 시에는 훌륭한 것도 있지만 유대의 신화와 역사는 불쾌극적이라고 했다[356]. 그러나1866년에 유대인 학자 도이치와 둘러싸고 나서는, 유대인에게 가능한 한의 동정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다니엘 데론다』(1876)에서는 유태 민족의 부흥을 묘사해, 러시아에서는 히브리어 번역으로 유대인에게 읽혀져 시오니스트에영향을준다.
영국에서는 독일 사상에 익숙한 평론가칼라일과 교육가토마스 아놀드에 의해 게르만 지상주의가 퍼지고 있었다[357]. 아놀드는 그리스인, 로마인 뒤, 게르만인에 의해 기독교 유럽 문화는 도약했고, 색슨인과 튜튼인의 조상의 나라인 독일은 역사상 가장 도덕적이고, 비폭력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나라라고 했다[358].
브루어 리튼의 소설 '자노니'(1842)에서는 기독교 세계의 그리스인이 세계의 주인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것으로 여겨졌다[359].
의사로버트 녹스는가장 재능이 풍부한 것은 고트인과 슬라브인으로, 다음이 색슨인과 켈트인으로, 대극에 흑인이 놓여졌다[358]. 히브리인은 기생적이고 문화적으로 불모라고 했다[358].
이탈리아계세팔디무의 유대계 영국인의 정치가·소설가의벤자민·디즐레리는 1844년의로버트·필을 비판한 소설 '커닝스비'(1844)나 '시빌(여자 선지자) )』(1845) 등에서 유럽의 수도원이나 대학에는마라노 등 유태인이 북적이고, 유럽에서는 유대적 정신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있는것을 그려 게르만 지상주의의 반대를 찌른다357]. '커닝스비'에서 디즈레리는 “유대인이 크게 참가하지 않은 유럽에서 지적인 대운동은 없다. 첫 예수회 수도사들은 유태인이었다. 다야인에 의해 인도되고 있다. 현재 독일에서 준비되어 영국에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강력한 혁명은 제2의 보다 광대한 종교 개혁 운동이 될 것이다.358][365]. '탱크 레드'(1847)에서는 '상상에서 깨끗하고, 두드려보고 울리는 것만은 좋은 가죽 가방과 같은 코가 꽂힌프랭크인(게르만인)'을 야유하고, 셈적 정신(유대 정신)을 칭양하고, 셈적 정신이 광명을 가져오지 못하면 게르만 민족은 공식으로 멸망했다고 했다[357]. 이와 동시에 디즈레리는 모두로부터의 인종을 부끄러워한 유대인을 비판하고[357], 유대인은코카서스 인종이라고 생각했다[358].
1847년 하원에서의 국회 연설에서 디즈레리는 초기 기독교인은 유대인이었고, 기독교를 보급시킨 것은 엄청나게 유대인이었고, 강트나 나폴레옹도 유대인이며, 그것을 잊어 미신에 좌우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유럽과 영국이라고 연설해, 의회에서는 분노의 잔물결이 넘어갔다364].칼라일은 디즐레리의 연설에 분개하고, 로버트 녹스는 디즐레리가 꼽은 유대인 일람에는 한 사람도 유대적 특징을 보이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비판했다[364][366].
1848년 혁명에 대해 디즈레리는 이 전유럽적 폭동의 지도자는 유대인이라고 말했고, 그 목적은선민인유대인 종이 유럽의 모든 인종으로돌아가 모든 하천의 백성에게 손을 내밀고 은혜로운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3].디즐레리는 역사의 원동력에 대해 “모두는 인종이고 다른 진리는 없다”고 말하는 등 유대주의에 근거한 인종주의자이기도 했다[358].
디즐레리의 유대주의 역사관은 프랑스의 반유태주의자 무소와 드류몬에 의해 유대인의 비밀외교의 증거로 호의적으로 인용되었다[364]. 또, 나폴레옹을 싫어하고 있던 역사학자의미슐레도, 디즈레리의 나폴레옹 유대인설에 후입했다[364].
1858년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유대인 6세 소년에드가르드 몰타라가 이단 심문소 경찰에 의해 끌려가 가톨릭교도로 키워져 사제가 되었다[368]. 가톨릭인가정부가 극비에 세례를 받게 했기 때문이었다[368]. 유럽 전역의 유대인이 사건에 항의하고, 로마의 게토 대표와 교황이 협상했다[368]. 교황은 유대인을 자비하기 위해 이런 항의를 용서하겠다며 유대인 대표는 감동하고 1848년 혁명 때 로마의 유대인은 교황에충실했음을 확인하고 몰타라 사건으로 시끄럽게 하는 것은 정치적 정념을 충족시키는 하심일뿐이라고8화1864년에는 이와 비슷한 포르투나트 코헨 소년 세례 사건도 일어났다[368].
1870년,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재로마 프랑스군이 불러오고,세단의 전투에서 프랑스가 항복하자 이탈리아 왕국은 간단한 포격전 후 로마를 점령했다[370]. 교황은교황권의 폐기에 관여하는 모든 것을파문으로 한다고 선고했지만 주민 투표로 로마 병합이 통과되었고, 다음1871년5월 이탈리아 왕국은 교황 보장법을 제정하고 이탈리아 통일을 완성시켜 이에 따라교황령은 소멸했다[370].
로틸드가 이외의 유태인 은행가로는산 시몬주의의 페렐 형제가 있어,나폴레옹 3세의 금융 개혁과 식산 흥업 정책을 원조해,1852년에 페레르 형제는 아시유 푸르(Achille Fould)와 함께투자은행크레디모빌리에 를설립했다.1860년대에는 크레디 리요네와소시에테 제너럴이 창설되었다[372].
그러나 로스차일드가의 영화는 그 후 몇 세대에 걸쳐 반유대주의 선전 활동의 먹이가 되어 갔다[338].
알프레드 드 비니는 유대인을 금에 매달린 유물적인 인종으로 혐오했고, 1822년 '헬레나'에서는 “유다의 아들에게는 모든 것이 용서되고 그들의 보물 상자에는 모든 것이 받아들여진다”고 쓰고 1847년 유대인 알펜이 파리 2구 구장으로 임명되면 놀라움 등 세계가 '유대화'라는 것을 포념으로 바라보았다.373]. 1837년에는7월 혁명을 유대인은 금으로 사냈다고 쓰고 있다[373]. 1837년에 쓰여진 소설 '다프네'(생전 미발표)에서는 유대인 은행가에 대해 “현재 한 명의 유대인이 교황 위에서 기독교 위에 군림하고있다. 그러나 비니는 개종 유대인 루이 라티스본느와 친구가 되자 1856년에는 유대인은 원초의 빛, 원초의 조화로 가득 찼으며 예술 분야에서 정점을 다해 학업도 우수하다고 말하기에 있었다[373].
역사가 줄미슐레는 '프랑스사'(1833-1873)에서 자신은 유대인을 좋아하지만 '더러워진 유대인'은 '언젠가 세계의 왕좌에 취해 버렸다', 유대인은 지구상에서 '최고의 노예'였다고말했다[338].
1900년에는 독일 인구의 1%에 불과한 유태인이 대기업, 금융회사의 이사회의 25%를 차지하고 있어 이러한 유태인의 경제계에서의 활약이 유대인에 의한 침략이나 지배라는 인상을 깊게 했다[283]. 이러한 상황은 러시아에서도 유사했다[283]. 로스차일드가나 정계에 진출하는 유대인 등이 활약해 나가면서 '유대인에게 지배된 세계'라는 견해가 퍼져 프랑스와 독일 등에서는 '유대인으로부터의 해방'을 호소하는 주장이 다수 나오게 되었다.
인도와 '아리아인' 발견
계몽사상의 진전에 의해 유대교와 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인류와 문명의 발상의 토지로서인도가 부상해 갔다[375].
문화적 다원주의의헬더는 민족의 형성에는 지리적 조건이나 역사적 조건이 있기 때문에 어떠한 민족도 신으로 선택되었다고 할 수 없다고 유대 민족의선민사상을 부정하고, 또 '자칭신의 유일한 백성'도 독일인도 선민이 아니라고 하였다[376]. 그러나 헬더는 루터파이며 역사는 하나님에 의해 통제되었고 문명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전하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문명은 유럽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유럽은 우위에 있다고 했다[376]. 또시나인은 유대인처럼 다른 민족과의 혼합을 면했기 때문에 어린 채 정지하고 있다고 본다[376]. 또한 '인류사철학고'(1791)에서 '인종'이라는 말을 비판하고 유럽인이 니그로를 악으로 취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니그로는 유럽인을 흰 악마로 모욕할 권리를 갖고 있다면서 니그로는 유럽인을 위해 아무것도 발명하지 않았다고도 말했다[205]. 또한 인종적으로 독일인과 페르시아인은 가까이 있고, 인도인은 자연의 덕, 온화함, 예의정함, 우아함을 가지고 있지만, 지상의 모든 민족을 히브리인의 후예로 하는 이야기는 이미 많았고, 인류가 최초로 거주한 것은 아시아의 원초산이라고했다.한편 이 책 4부에서는 고대 유대가 붕괴되어 기독교 세계를 우위에 세우려고 결정한 것은 하나님의섭리라고 했다[376]. 헬더는 쇼펜하우어에 영향을 주었다[239].
브루멘바흐(1752-1840)는 백인을 가장 아름다운 인종이며, 가장 아름다운 인종인 그루지야인이 있는코카서스 산에 의해서코카소이드라는 이름을 백인에게 주고, 흰 색은 원래 인류의 피부색이지만, 쉽게 검게 퇴화한다고 했다[205]
사회주의자산=시몬은1803년, 니그로는 체질 때문에 평등하게 교육해도 유럽인의 높은 지성에 이르지 않는다고 했다[379]. 유럽인은아벨의 후손이고, 유색인종은가인의 후예라고 하며, 아프리카인은 잔인하고, 아시아인은 게으른 것으로 했다[379].
독일의 인도 취미는 슈레겔 형제의 영향이 컸다.아우구스트 빌헬름 슈레겔은1804년“동양이 인류의 재생이 일어난 지역이라면 독일은 유럽의 동양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썼다[239]. 아우구스트의 남동생프리드리히는 모제스 멘델스존의 딸 드로테어와 결혼해 유대인 해방을 위해 싸운 진보파였지만 “모두가 인도에 끝을 발하고 있다 이집트 문명은 인도의 사절에 의해 형성되었고, 이집트는 유대인 땅에 문명적인 식민지를 쌓았지만 유대인들은 인도의 진리를 불완전하게 흡수했다고 말했다.239]. 프리드리히는1808년의 저서 『인도인의 언어와 영지』에서 위대한 인도인이 어떻게 스칸디나비아에 이르렀는지 말하고, 게르만인과의 관련을 시사하고,1819년에는 「아리아인」을 종족의 의미로 사용해, 어근의 「아리」를 게르만어의 「에르」(2). 또한야콥 그림도 유럽인 모두는 태고하게 아시아에서 이주해왔다고 했지만 '아리아인'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다[380].
생물학자라마르크는1809년저작 '동물철학'에서 개량된 인종이 다른 인종을 지배하고 이 인종에 적합한 모든 땅을 점거한다고 말했다[379]. 여기에서는 백인종을 명지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프랑스의 팽창과 관련된 발언이었다[379]. 박물관학자큐비에는 '동물계'(1817년)[381]에서 니그로 인종은 원숭이에 가까이 야만이라고 하며 문명의 진보는 코카서스 인종의 특성이라고 했다[379].
JC 프리차드[386]는 '인류의 자연사'(1813-47)에서 인류 단일 기원설을 외치고, 아담과 이브는 흑인이었다고 했다[359]. 또한 햄 인종(이집트), 셈 인종(시리아, 아랍), 야페테=아리아 인종이라는 3가지 분류를 실시하였다[359]. 다만, 프리차드는 야페테 아리아 인종에게 탁월성을 부여한 것은 아니고, 셈 인종을 제일로 했다[359].1816년토마스 영이 '인도-유럽인'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239].
1823년동양학자크라프로트가 '인도게르만인'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곧바로 보급되었다[239]. 19세기 후반까지 독일에서는 '아리아인'보다 '게르만' '인도=게르만'이라는 용어가 자주 사용되었다[387].
1824년, 슈레겔에 영향을 받은 개종 유대인 엑슈타인 남작[388]이왕당파잡지 'Le Catholique'를 창간하고, 유럽은 피와 문화를 게르만인에게 지고 있으며, 인도와 동양의 신비에 대해 선전해, 유고, 라마르티누,라무네,9]등에 영향을 주고, 하이네는 엑슈타인을 '부다 남작'이라고 불렀다[380]. 유고는 독일을 하나의 인도라고 불렀다[380].
박물관학자보리 드 산반산은1827년'인류의 동물학적 연구'에서 최고의 인종은 야페테인종(백인종), 둘째는 아담 인종(아랍), 최저는 호주인종이라고 했다[379].
사회학자오귀스트 콘트는 백인종은 인류의 선량이며, 특권을 부여받고 있으며, 서유럽 백인의 역사의 연구만이 이익이 되기 때문에, 오리엔트 연구는 낭비라고 했다[379].
박물관학자 카토르파쥬[390]는 노예제 반대론자였지만1842년미국으로 여행 직후, 니그로는 지성의 형성이 도중에 멈춘 백인이며, 지적인 곡형이라고 하며, 흑인에게는 정신의 고귀한 산물이9이었다.
역사가 줄미슐레는 '로마사[391]'(1831)에서 셈인과 인도-게르만인과의 긴 싸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인도를 인종과 종교의 발상지라고 하고[380], '인류의 성경'(1864)[392]에서는 우리의 조상인 아리아인·인도인·페르시아인·그리스인은 태양 아래에서 태어난 빛의 아들이라고 하며, 다른멤피스(이집트)인·카르타고·틸과 유대인은 남부의 어두운 성격이며, 유대의 성경은 위대하지만 음란하다.359]. 또한, 미슐레는 유대인이 순수한 인종이었고 유대의 불행이이 순수함에 있다고 간주했다[358]. 반대로 독일은 스위스, 스웨덴에 즈에벤인을, 스페인에고트인을,롬바르디아에랑고바르드인을, 영국에 앵글로색슨인을 ,프랑스에프랭크인 을 준 것처럼 독일인은 빨리 자국에서 나와, 또 자신의 나라에 쾌적하게외국인을 받아들여 환대한다[39]독일인의 에고이즘을 버리는 자기 희생의 정신을 '남부의 사람들'은 비웃지만, 이것이 게르만 인종을 위대하게 했다고 미슐레는 논했다[393].
발작의 『루이 람베르』(1832)에서는 「모세의 책은 공포의 각인이 밀려있다」라고 하고, 파국 아래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피난한 것은 아시아의 고원이며, 성경의 백성은 히말라야와 코카서스에 매달려 있던 인간의 둥지 상자로부터의 1군에불과하다.
1843년인류학자 구스타프 크렘[395]은 인류를 능동적 인종과 수동적 인종으로 나누어 인류가 완전해지는 것은 이 두 인종의 혼합에 의했다[396]. 수동적 인종에는 슬라브인, 러시아인이 있고, 능동적 인종에는 라틴인이 들어가지만, 게르만인은 그 라틴인을 끊임없이 이기고 유럽의 왕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396].
프랑스는 인종 결정론의 발상지이며 기독교에서 해방된 과학법칙에 의해 인종의 연구가 진전되었다[358]. 프랑스계 영국인의 박물관학자 WF 에드워즈는 유태인을 인종으로 간주했다[358]. 바르텔미 듀노와이에는 인종의 불평등을 한탄하면서 튜턴인 게르만인은 우수한 인종이라고 했다[358].조셉 드 메스틀은 야만인을 개량 불가능한 태어난 범죄자라고 하며, 그 조상은 어떤 전대 미문의 죄를 범했다고 하여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지 않다고 했다[358]. 동양학자 에밀 뷔르누프[397]는 셈인이나 중국인은 기독교나 형이상학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342].
1850년대에는 유전학자프로스퍼 루카스나 '변질론'(1857)을 간행한베네딕트 모렐등의유전학이나모로 드 투르의 '병리 심리학'(1859) 등이 유행했지만 그 배경에는 혁명을 일으킨 부르주아지가 노동자를 억압하고 스스로의 보편성을 표방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유전학에 의해 부르주아지의 권력과 재산의 상속권을 정당화하는 경우가 있었다.398].
쿠르테 드 릴의 제자였다[359]아르투르 드 고비노백작은 '인종 불평등론'(1853-56)으로,흑인은 전 인종의 최하위에 있으며,황색 인종은 체력은 약하고 무기력의 경향에 있어 스스로 사회를 창조할 수 없다고 하고, 이 두 인종은 '역사의 잔해'이지만, 에 대해백인종만이 문명화 능력과 사려를 갖춘 에너지를 가진 역사적인 인종이라고 하며 인도·이집트·아시리아·중국·그리스 등 역사상의 문명은 모두 백인종의아리아 민족에 의한 이니셔티브에 의해서만 가능했다고 했다[400]. 아리아인의 피는 로마인, 그리스인, 셈인과 혼합하여 녹아 가고, 백인종은 혼교에 의해 세계의 표면에서 사라졌다고 했다[358][주 48]. 고비노에 따르면 백인종에는셈인,햄인, 야페테(아리아인)가 있지만, 이 가운데아리아 민족은 셈이나 햄과는 달리 순혈을 유지하고, 금발, 벽안,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어 탁월하다[400]. 그러나 고대 그리스는 셈화에 의해 단일화하고, 로마 제국도 셈의 피가 유입되었기 때문에, 중등으로 갈색의 피부를 한 「범용으로 취급이 없는 인간」 「가로 무늬, 비굴하고, 무지 그래서 버릇이 나쁘고 타락하고 언제든지 여동생, 딸, 아내, 나라, 주인을 팔아날 준비가 되어 있어 빈곤, 고통, 피로, 죽음을 함부로 두려워한다” 퇴폐적인 인간을 산출했다400]. 다만 이 '셈화'는 지금까지 반유대주의로서 혐의가 걸려왔지만, 이것은 백인의 피에 흑인의 피가 혼입하는 것을 가리키고 있어 유태인에 의한 세계 지배를 비판한 것은 아니었다[400]. 고비노는 유색인종을 경멸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흑인은 강력한 보편적인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고, 유대인은 자유롭고 강하고 지적인 백성이라고 했다[358]. 이것은 역사가미슐레가 「흑인인 것은 인종이라기보다는 병이다」라고 하는 것에 비하면 억제가 온 것이었다[400].바그너는 고비노와 단단한 우정으로 묶여 있었다[403]. 고비노는 동시대에는 영향력은 없었지만[359],1894년에 루트비히 셰먼이 독일과 프랑스에서 고비노협회를 설립해, 바그너파에 지원되었다[404]. 셰먼의 친구 루트비히 빌저는 '게르만인'(1914) 등에서 북방 게르만인은 태양의 아이라고 했다[405]
엘네스트 루난
영향력이 적은 고비노에 대해 종교사가 엘네스트 루난은 제3공화제의 공식 이데올로그가 되어 아리아주의의 선전자로서 큰 영향력을 자랑했다[359].1855년'셈계 언어의 일반사 및 비교체계'에서 루난은 아리아 인종이 수천년의 노력 끝에 자신이 사는 행성의 주인이 될 때 위대한 인종을 창시한 거룩한 이마유스 산을 탐험할 것이라고 쓴다[359]또 『근대사회의 종교의 미래』(1860)에서 「셈인에게는 더 이상 행해야 할 기본적인것은아무것도없다.루난에 의하면, 셈인과 아리아인 사이에는 깊은 그루브가 있어 '세계에서 가장 음기인 땅'인 유대의 땅은 극단적인 일신교를 낳고, 다른 쪽 기독교를 만든 북쪽의 갈릴리는 쾌활하고 관용으로 그다지 엄격하지 않다[406]. 기독교 인류애(아가페)는 자신의 병사의 아내 바테시바와 간음하고 그 남편을 전장에서 토사시킨다윗의 이기주의나 전왕 요람을 죽이고 이교신 바알을 폐한 학살자 이스라엘 왕 에히우(Jehu)가아닌이교도였다.예수의 사상은 유대교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완전히 예수의 위대한 영혼이 단독으로 창조한 것이며, 예수에게는 유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고, 기독교란 아리아인의 종교이며 '문명화된 민족의 종교'인 기독교만이 유럽 공통의 윤리와 미학을제공할수있다고 루난은 유해한 이슬람교가 유대교를 상속했다고 논의했다[406].1863년, 화학자마르스란 벨투로는 루난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의 조상인 아리아인”이라고 말하고,이포릿 텐은 “혈과 정신의 공동체”인 아리아의 백성을 찬양했다[387]. 한편, R.F. 그라우[407]는 루난을 비판하고, 학예·정치의 남성적인 능력을 가진 인도 게르만인에 대해, 셈인은 종교를 독점하는 여성적 존재이며, 하나님은 셈적 정신과 인도 게르만적 성질의 결혼을 결정하고 있으며, 이 부부는 세계를 지배한다고 논했다[408]. 또한이그넛 이서크 예프다 골트치하는 “셈인은 신화를 가지지 않는다”는 루난을 비판하고 히브리 신화도 있고, 히브리인도 아리아인과 마찬가지로 인류사의 건설자였다고 하여 유대인을 유럽문화로 동화시킬 것을 요구했다[409].
동양학자로 급진적 보수주의자인파울 드 라갈드는 1850년대부터 합리주의나 근대주의의 침입에 의해 독일 정신이 부식하고 있는 등으로 프로이센의윤커지배, 관료제, 자본주의화를 비판하고 독일인에 의한 독일 신앙을 주장했다[410]. '독일서'(1878)에서는 "독일성은 피 속이 아니라 기질 속에 있다"며 내면적·영적 태도에 의한 독일 국민의영적 재생과 독일 민족의 활성화에 의한 독일 통일을 목표로 했다[411]. 라갈드는 바울에 의해 기독교가 히브리의 율법에 갇혀 있었고, 루터파는 "썩은 유물"이며, 가톨릭은 "모든 국가와 모든 민족의 적"이라고 전통적인 기독교를 비판했다[410][411]. 라갈드는 "하나님의 왕국과는 민족에 있다"며 원시 그리스도의영성에 기초한 게르만적 기독교를 주장했다[411]. 라갈드는 초기 히브리인을 칭찬했지만 유대인은 율법과 교리에 의해 화석화되었고, 현대 유대인은 진정한 종교를 놓치고, 물질주의적인 욕망에 의해 음모를 둘러싼 악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하고[411], 유대교의 파괴를 주장했다[4]. 또한 유대인이 독일인이 되고 싶다면 왜 영적 가치가 없는 유대교를 버리지 않는가라고 말하고[411], 인간은바실러스균이나선모충과 담판하는 것이 아니라 근절한다고 하고, 유대인을마다가스카르섬으로의 추방을 주장하였다[410]. 이 라갈드의 제안은 나치의마다가스카르 계획에 영향을 미쳤다[410]. 다만, 라가르드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반유대이며, 인종적인 관점에서는 아니었다고 모세는 말한다[411]. 라갈드는 유대인 이외에도 슬라브인은 멸망해야 하고, 투란 인종인 헝가리인은 멸망할 것이라고 했다[410]. 라갈드는 세기 말 독일의 청년운동, 히틀러, 로젠베르그에 영향을 주었다[412],토마스만은라갈드를 '게르마니아의 교사'라고 칭찬하고,칼라일,쇼,나토르프,마사리크도 라갈드를 칭찬했다[410].
아리아주의가 높아지는 한편, 유대인의 인종적인 힘에 대해서도 논의되어 갔다. 장 그리스도인 부당은 '의학 지리학·의학 통계학'(1857)에서 유대인은 장수로 사망률이 낮고, 모든 기후에 적응할 수 있는 '유일한 코스모폴리탄 민족'이라고 했다[342][413]. 자연과학자 칼 포크트는 '인간학 강의'(1863)에서 부단을 참조해 유대인은 토착의 인종의 도움 없이 살 수 있는 유일한 인종이라고 했다[342][414]. 인류 기원 다계통설의 포크트는, 인간의 형태의 계열은 니그로로부터 시작되어 게르만인에 의해 절정에 이르렀다고 했다[342]. 한편, 필표는 게르만 인종은 열대에 적응할 수 없다고 확증하고 있었다[342]. 드류몬도 '유대의 프랑스'에서 유대인만이 모든 기후에서 사는 선천적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지 않고 스스로를 유지할 수 없다”고 했다[342]. 지리학자 리하르트 안드레는 유대인은 유전적으로 전해지는 오래된 유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외부의 혈액 주입이나 수혈을 이길 수 있었다고 했다[342][415].
스위스의 언어학자 아돌프 픽테[416]는1859년'언어고생물학'에서 원시 아리아인의 고지를 이란으로 하였고, 아리아인은 “혈통에서 오는 아름다움과 지성에 의해 다른 모든 인종에 우월하다”며 하나님의 기도를 담당한다고 했다[387]. 픽테에 따르면, 아리아인은 문명화 능력을 부여받았으며, 발전시킬 자유를 가지며, 전개하고 적응하는 수용성을 가지는 반면, 히브리인은 문명화 능력이 부족하고 보수와 불관용을 특징으로 한다[408].
아리아주의의 선전자로서 루난보다 영향력이 있었던 것이프리드리히 맥스 뮬러이다[417]. 뮐러는1860년, 자신은 아리아라는 용어를 인도=유럽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책임자라고 말하고[380], 뮐러는 인도인, 페르시아인, 그리스인, 로마인, 슬라브인, 켈트인, 게르만인은 동일한 조상이며, 그 가운데 아리아인은셈인이나투란359]. 그러나 1872년 뮐러는스트라스부르 대학강연에서 독일에 대한 애국심을 밝히고, 화폐의 지배와 민족주의의 비대화에 경계하면서 독일은 옛 소박한 미덕을 잃고 있다고 하는데, 아리아 인종설은 비화 과학적이라고 했다[359].
1862년해부학자폴 브로카는 아리아 이론은 확실한 것이 아니지만 '아리아 인종'이라는 용어는 완전히 과학적이라고 했다[387]. 셈인종이라는 용어는 큰 실수라고 하며 히브리 백성에 대해 '히브로이드'라는 신어를 제안했다[387]. 또한 브로카는두개골 측정기구를 많이 만들었다[387]. 당시의두개학에서는 유럽인의 두개는 복잡한 요철을 가지고 열등인종보다 우수하다고 여겨졌다[387]. 브로카의 제자 토피날[418]은 프랑스인은 순혈 아리아인이 아니라고 하면서 유색인종은 세는 것에 유전적 생리학적 부적성이 있고, 아리아인은 수학에의 적성을 가진다고 했다[387].1893년토피날은 갈리아인은 금발로 장두의 정복자와 갈색 머리로 키가 작은 단두의 피정복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서, 금발의 전사는 상인이나 사업가가 되었지만 단두인은 다산으로 장래 프랑스는 그들의 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38].
1867년, 성직자 덤버 히스경은 셈 인종은 그리스도를 악마로 보았지만, 아리아 인종은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했다[387]. 아리아 인종은 기독교의 교리를 만들었지만, 삼위일체는 셈인의 본능에 무연했다고 하여, 기독교는 모든 점에서 아리아적인 종교라고 했다[387].
미국의 노예제 지지자의 노트와 그리든[420]은 '인류의 유형'(1854)에서 유대인종과 흑인종은 별개로 만들어졌다고 했다[342]. 문화 인류학에드워드 타일러는 언어와 인종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고 경계하면서 "우리 아리아의 조상"에 대해 말했다[387]. 오스트리아의 문화사학자 율리우스 리펠트[421]는 아리아인을 농경민족으로 삼고, 셈인은 유목민족으로 농업 능력이 없고, 백인종의 「시든 나뭇가지」로 했다[342].
프랑스의 박물관학자 카톨르파지는보불전쟁(1870-71)에서 파리가 포위되었을 때,프로이센에의한 야만은 아리아인에 선행하는 원시주민의 것일뿐일수있다.422]. 카토르파주의 설에 대해 독일, 이탈리아, 영국의 학자는 비난했다[387]. 독일의 민족학자 아돌프 바스티안은, 프로이센에는 핀인도 슬라브인도 없고, 게르만인은 이들을 완전히 흡수해 해체해 버렸다고 하고, 동쪽으로 나아가는 독일인은 강자의 법칙, 생존 투쟁의 법칙에 따라 약한 인종을 가차없이 방축했고, 게르만인은 켈트-라틴의387].
해부학자루돌프 필표는1871년통일 독일 전역에서 병사의 두개골 측정을 시도했지만 군이 거부했기 때문에 머리카락, 눈, 안색 등 특징의 학생 조사로 변경하여 오스트리아, 벨기에, 스위스의 협력도 얻었다[387]. 조사에서는 유태인은 제외되었다[387]. 10년간의 조사에서는 학생 1500만이 대상이 되고, 또 필표는1885년에 핀란드도 조사했다[387]. 핀란드가 일반 의견과 반대로 압도적인 비중으로 금발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카토르파쥬의 설은 무로 돌아왔다[387]. 필표의 조사에서 서쪽으로 향한 고트인, 프랭크인, 불군도인 등의 게르만인은 토착의 주민 속에 묻혀 버렸지만, 동쪽으로 향한 게르만인은 「순수하게 독일적인 새로운 민족성」을 형성하고, 또 슬라브인의 침입도 확인되지 않았다[387]. 덧붙여 필표는 게르만 민족주의자가 아니고, 범 게르만주의나 반유대주의를 비판해 경고하고 있었다[387].
에른스트 폰 분젠[423]은1889년, 아담은 아리아인이고, 셈인은 뱀이라고 했다[410]. 철학자 후예는1895년프랑스인은 아리아적 요소가 감소하여 켈트-슬라브인 또는 투란인종이 되고 있어 유럽은 천천히 러시아화하고 있다고 경고했다[387].
19세기까지 독일의 학자, 페셰, 펜카, 헤인, 린덴슈미트 등은 원시 아리아인을 금발로 파란 눈을 한 장두 인종으로 했다[387]. 반면 프랑스 샤베, 드 모르티유, 위발피 등은 원시 아리아인을 갈리아인과 같은 단두인종으로 했다[387]. 이 대륙의 이론에 대해 영국의 언어학자 아이작 테일러는1890년에, 원시 아리아인은 우랄 알타이의 단두인종이라고 했다[387].
19세기 말이 되면 아리아설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가 나오게 되었고,1892년고고학자 살로몬 라이나하는 원시 아리아인에 대한 설은 근거가 없는 가설로, 그것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했다[387].
프리드리히 폰 헬발트는 '문화사'(1896-98)[424]에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모순은 셈인과 아리아인의 모순에 귀착된다고 했다[342].
찰스 다윈은 이인종 교배에 의한 퇴화의 원인은 교배에 의해 결정되는 격세유전 때문이라고 논하고[342][427], 또 '인간의 유래'(1871)에서는 인종의 우열을 전제하고 있었다[426]. 영국에서는 아리아주의가진화론에 의해 보급되어 갔지만, 프랑스나 독일과 같은 반유대 캠페인은 되지 않았다[359]. 다윈을 변호한헉슬리는 아리아인은 예술과 과학을 만들고,셈인은 유럽 종교의 기본을 만들었다고 했다[359]. 헉슬리는 여성과 니그로의 해방에 호의를 보이면서도 양쪽의 유전적 열등을 확신하고 있었다[342].
독일의 생물학자에른스트 헤켈은 '자연창세사'(1868)에서 병약한 유아를 살해한 고대 스파르타인에게 보여지는 것 같은인위 도태를 긍정했다[428].
다윈의 종형제 유전학자프란시스 골튼은 '유전적 천재'(1869)에서 지성은 혈통에 의한 유전적인 것으로, 백인종은 니그로나 호주인종보다 우수하고, 또한인위 선택에 의한 개량으로 고도의 인종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했다[426]. 골튼은 성직자에게 독신을 강요하거나 이단 재판으로 대담한 씨앗을 탄압해 온 가톨릭 교회와 신교도를 탄압한 루이 14세를 비난하는 한편 영국은이민 에 의해 이익을 얻었다고러시아에서 유태인 이민 을호의적으로 취급하는 등 반유태주의2.그러나 골튼은 공동체의 좋은 혈통을 남기기 위해 우리 인종의 능력을 약화시키는 습관과 편견에 대한 성전을 선언할 때가 올 것이라고 했다[426]. 골튼은1883년에우생학(Eugenics)을 조어했다[428]. 프랑스 해부학자 브로커도 잡종 현상은 생물학적으로 해로웠다[342].
진화론은적자 생존의 법칙에 의해 인류는 백인종 아래로 진화해 나간다고 하는 사회학자스펜서[주 49]나섬너, 헤켈에 의해사회진화론으로 발전했다. 스펜서, 월리스, 샘너도 우량 인종의 보유는 자연 도태에 의해 실현된다고 낙관하고 있었다[426]. 한편 사회주의자의 우생학자·통계학자피어슨은 아리아 인종과 기독교도는 노예로 내려다 온 사람들에 의해 밀려나와 깨어날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보았다[426]. 영국에서는 피어슨이나로널드 피셔등의네오더 위니즘으로 발전해 갔다.
1873년스위스의 식물학자칸돌은 유전의 절대적인 힘을 설명하는 가운데 ,유럽에 유대인만이 살고 있으면 전쟁도 도덕감각이 상처받는 것도 실업도 없어져 문예나 과학은 전진해 그러나 자연사의 법칙에 따라 유대인의 이상 도시는 그리스인, 라틴인, 칸타불인(고대 스페인), 켈트인, 게르만인, 슬라브인의 후예에 의해 약탈될 것이라고 논했다.342][429]. 칸돌은 다른 곳에서는 엄격한 구약성경에 대해 신약성경에는 상냥함, 배려, 겸손이 있고, 종교교육만으로 육성한 이스라엘인은 폭력적이라고 했다[342]. 철학자리보는 '유전-심리학적 연구'(1873)에서 유대인종은 문명에 대한 증오로 가득하고 악덕을 종교처럼 사랑하고 있으며, 그들의 가장 큰 야심은 기독교인으로부터 훔치는 것이라고 논했다[342][430]. 니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상국가'에게 무용한 자의 유기를 긍정했고, 고대 그리스에서는 불구의 신생아 유기는 보통이었기 때문에 '불구의 아이를 살려 두는 것이 더 잔인한 일'이라고 썼다[428][431].
진화론과 사회 다윈주의는 독일 제국과 앵글로 색슨 국가에서 힘의 복음이 설득될 때 권위가 되었다[426]. 트라이추케는 여러 민족은 생존경쟁에 의해서만 번영할 수 있다고 하고, 또 전쟁이 영구히 없어져 버리면 인간의 영혼의 최고 힘이 감퇴하고 에고이즘이 지배한다고 논했다[426]. 독일 언론인 베타는 '다윈, 독일 및 유대인, 또는 유대-예수회'(1876)에서 기생적인 셈인과 생산적인 게르만=아리아인 사이의 생존 경쟁에 대해 반유대법의 공포를 요구하고[426][432] ,게르만의 민족433]. 농업가 알렉산더 티레는 사회 진화를 위해 추악한 인간의 결혼을 금지해야 한다고 설교했다[428]. 미국 대통령세오도어 루즈벨트(임기 1901-9)는 끊임없이 생존투쟁을 말했다[426].
1899년유전학자·인류학자 바쉐 드 라푸즈[434]는 프랑스 혁명의 파산은 권력자가 금발의 장두인에서 단두인을 대신했기 때문이며, 민주주의의 진전에 의해 단두 인종의 하층계급에 권력이 집중되어 가서 프랑스의 위대함을 만들었다. 한 장두 인종의 아리아인은 소멸하고, 태어나는 노예인 단두 인종은 개처럼 자신의 주인을 찾기 위해 아리아인이 없는 곳에서는 중국인이나 유태인의 지배하에서 살아간다고387]. 그리고 20세기에는 머리지수가 높거나 낮았기 때문에 수백만의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대량 학살을 목격할 것이라고 예언했다[387]. 라푸지는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의그레샴의 법칙을원용하여 "나쁜 피는 좋은 피를 구축한다"고도 말했다[342]. 라푸지는 반유대주의자보다는 아리아주의자이며, 열등한 단두인종을 '알프스인'으로 하고, 장두인종 아리아인을 '유럽인'으로 정의하고, 단두인종과 장두인종의 혼혈을 피하기 위해우생학에 의한단종정책을 제창했다[398]. 법학자이기도 한 라푸지는 유산의 상속과 유전에 대해 고찰하고, 부권을 부정하면서 근친 교배가 유전의 힘을 끌어올리고, 뛰어난 인종이 죽으면 국가는 사멸한다고 하며, 자녀에게 거세를 강한 아버지인 신과 기독교를 부정하고 태양과남근을숭배하는종교를. 빌헬름 2세는 라푸즈를 "프랑스의 유일한 위인"이라고 칭찬했다[387].
인종위생학을 인류학자 오트아몬[435], 우생학자 알프레이트 플레이츠, 샤르마이어[436]등이 전개했다[428]. 1892년에는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오귀스트 포렐이 민족위생학의 관점에서 정신장애인 여성에 대해단종수술을 실시하고, 1897년에는 독일에서 부인과 의사 엘빈 켈러가 유전병 여성의 단종수술(난관절제)을 실시했다[428]. 법률가 아돌프 요스트는 '죽음에 대한 권리'(1895)로, 불치의 병인은 안락사에 대한 권리를 갖고, 불치의 정신병 환자의 살해는 본인의 의사표시가 없어도 의사의 판단에 의해 가능하게 했다[428].
우생학자 알프레이트 플레이츠는 카우츠키의 사회주의와 펠릭스 던의 인종주의를 융합한 '우리 인종의 능력과 약자의 보호 연구 (1895)에서 유전자 차원에서 부적절한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적자 생존과 사회주의의 조화를 도모하고 아리아 인종을 보호하기위한 인종 위생학을 제창했다.437]. 다만 유대인도 아리아 기원으로 했다[426]. 그는 인종의 감각을 둔화시킨 원인으로 기독교와 민주주의를 비판했다[426]. 1904년 플레이츠는 사회학자 A·노르덴홀츠나 동물학자 L·프라테 등과 세계 최초의 우생학 전문지 '인종사회 생물학'을 창간해[428], 제2차 세계대전 전후에는 공격적인 생물학 사상의 주요 기관지가 되었다[426]. 1905년, 플레이츠는 인종위생학회를 만들고, 헤켈,바이스만, 골튼이 더해졌다[426][주51]. 1907년에는 북방협회(Ring der Norda)를 창설했다[426][438]. 사회학자맥스 베버에 의해1910년의 제1회 사회학자 대회에 초대된 플레이츠는 강연 「인종 개념과 사회 개념」으로, 사회 발전의 둔화의 원인은 사회적 약자의 보호 정책이나 생존 투쟁에 근거하는 자연 도소 태아의 저감에 있다고 하여, 민족 위생적인 해결책으로서 성적 도태에 의한 열악한 유전자의 계승을 막는 것, 그리고 궁극적인 해결책으로서 생식 세포의 도태에 의한 열등 생식 세포의 소멸(후의유전자 조작)을 제창했다428]. 베버는 플레이츠의 인종 개념이 모호하고[439], 민족 생물학 고유의 문제의 실질적인 한계를 밟아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428]. 다만, 베버도 흑인이나 인디언에게도 지적인 상층부가 있지만 백인종과 혼혈이 많고, 또한 지적으로 미숙한 흑인을 '반원도'로 표현하는 것처럼 백인종의 우월을 인정하는 한편, 외모가 백인인데 흑인과의 혼혈을 중시하는 미국인을 비판했다[439]. 또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학문」(1917)에서는 중태의 환자나 정신장애인의 가족이 안락사를 탄원했을 경우에서도 의사는 환자의 생명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생명이 보유할 가치가 있는지는」는 의학의 질문이 아니다고 했다[428].
1908년에는 영국에서 우생교육위원회, 1910년에는 미국에서 우생기록국이 만들어졌다[426]. 미국에서는 우생학자대번포트가1911년에는 '인종개량학'을 발표했다[440]. 골튼의 우생학에서는 상습범의 격리나 정신장애인의 생식의 제한도 주장되었고, 미국에서는 1907년 이후 각 주에서단종법이제정되어 이민 배척법이나금주법등에도 영향을 보였다[428].
바그너
바그너
작곡가리하르트 바그너는 어린 시절에는청년 독일파의 영향을 받고, 새로운 음악은 이탈리아적이든 프랑스적이든 독일적이 아닌 곳에서 태어난다고 논하고 있었다[441].
1839년부터 파리로 옮긴 바그너는 유대인 작곡가마이아베아로부터 비호를 받았다[442]. 바그너도 마이어베어는 독일인으로서의 감정과 양심을 유지하고 있어 프랑스와 독일의 오페라를 아름답게 통일했다고 칭찬했다[442][443]. 마이어 베어는 많은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시대에 개종을 거부 한 유일한 예였습니다[444]. 한편 마이어베어는 청중의 대부분은 반유대주의라고 하이네에 대한 편지에서 말하고 있다[442].1840년바그너는 독일은 제왕국·선제후국·자유도시로 분단되어 있어국민이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음악가도 지역적인 것에 머무르고 있다고 한탄했고,그러나독일은 모차르트와 같이 외국의 것을 보편화하는 재능이 있다고 논했다.같은 해 프랑스가 라인강을 국경으로 삼아야 한다고 요구한 것에 반발한 독일 애국운동(라인 위기)이 퍼져 애국 가요가 만들어졌지만, 바그너는 이를 혐오했다[445].
그러나 성공하지 못한 바그너는 파리에 반감을 갖게 되어 1841년 독일인은 사교계에서 배제되고 있는데 유대계 독일인은 독일인의 국민성을 버리고 있어 은행가는 파리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썼다[443]. 유대인 은행가의 아들이었던 마이어베어는가짜(사쿠라)의 동원이나 저널리스트 인수 등도 하고 있어, 하이네도 비판하고 있었다[443].1842년에 워그너는슈만에게 편지로 마이어베어를 '계산하지 않는 페틴사'라고 불렀다[442]. 한편 워그너는 요즘하이네와 친해지고, 하이네를 소재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1842년)을 만들고, 또 하이네가 유대계의루트비히 베르네를에서 비판하자 바그너는 옹호했다[293].
1848년독일3월 혁명에서는 프랑스와 같은 '국민'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레켈이 '조국협회'를 조직하여 공직을 추방되었다[347]. 바그너는 5월에 궁정극장을 대신하는 '국민극장'을 장관에게 제안했지만 거절되었다[347]. 6월에 바그너는 조국협회에서의 연설에서 공화주의의 목표는 귀족정치의 소거, 계급의 철폐와 모든 성인과 여성에 대한 참정권 부여, 금권과 유대인으로부터의 해방[293]]라고 하며,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군주제가 붕괴된 뒤에 아름답고 자유로운 신독국을 건설하여 인류를 해방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공화주의자와 왕당주의자로부터도 비판되었다[353]. 바그너는 레켈을 통해 바쿠닌과 알게 되었고,1849년4월 8일'혁명' 논문에서는 혁명은 숭고한 여신이며 인간은 평등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가진 지배권을 분쇄한다고 주장했다[353][주52].
1849년 5월드레스덴 봉기에서 바그너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지명 수배를 받아스위스취리히에망명했다[353]. 거기서 바그너는 '예술과 혁명'(1849)을 저술하고, 고대 그리스 비극을 이상으로 했지만, 아테네도 이기적인 방향으로 공동체 정신이 분열했기 때문에 쇠퇴해, 잔인한 세계 정복자의 로마인은 실제적인 현실에만 쾌감을 기억해, 기독교는 생명 한 예술을 낳지 못했고, 게르만 제민족도 로마 교회에 대한 저항에 시종하고, 르네상스도 근대 예술도 돈벌이를 위한 산업이 되어 타락했다고 비판하고, 미래의 예술은 모든 국민성을 초월한 자유로운 인류의 정신을 포함한다고논했다448]. 또 같은 해 '미래의 예술작품'에서는 공통의 곤경을 아는 민중(Volk)과 진정한 곤경을 느끼지 않고 이기주의적인 '민중의 적'을 대비시켜 '인간을 기계로 사용하기 위해 인간을 죽이고 있는 현대의 산업'과 국가를 비판하며 미래 예술가는 음악가가 아니라4개이다.또한 헤겔의 역사 철학에 영향을받은 "비베른 겐 전설에서 도출된 세계사」(1849년)에서 전설은 역사보다 진실에 가깝다고 하며 독일 민족의 개조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지크프릿은 타민족에게서는 그리스도로 불리며, 지크플릿의 힘을 계승한 니베른겐은 전 민족을 대표하여 세계 지배를요구하는의무가있다.442][449].1848년 혁명의 실패에 의해, 각지의 코스모폴리탄적인 애국주의는 1850년대에는 배외적인 것으로 변용했지만, 바그너도 독일성을 추구해 갔다[449].
1850년, 바그너는 변명으로 책자 '음악에 있어서의 유태성'을 발표하고, 유대인은 모방하고 있는 것만으로 예술을 만들어낼 수 없고, 예술은 유태인에 의해 상품·기호품으로 타락했다고 주장했다[293][450]. 책자에서 유대인의 지배는 금이 권력인 한 언제까지나 계속된다고 말한다[293], 1847년에 사망한 유대계 작곡가멘델스존 바르톨디를 공격해(마이아베아를 명명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자유주의가 민중의 자유를 주창하면서 민중과 접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며, 유태화된 현대예술의 '유대주의의 중압으로부터의 해방'이 급무하다고 논했다.442]. 다만, 워그너는 멘델스존의 ‘히브리데스 ’서곡을 칭찬하고 완전한 예술가라고도 평가하고 있으며,멘델스존본인보다 멘델스존 일파를 대두시킨 가치 를창조하지 않고 단지 상품을 유통시키고 있을 뿐인 ‘음악은행가’를 비판하고있다.1851년, 워그너는리스트를 향해 이전부터 유태경제를 미워했다고 말했다[293].
1851년'오페라와 드라마'에서 바그너는 고대 그리스인의 예술을 재생할 수 있는 것은 독일인이며, 독일어만이 완벽한 극작품을 성취할 수 있다고 논했다[452].
바그너의 지인이기도 한 자유주의자의 작가프라이터크의 소설 「차변과 대변」(1855)에서는 독일인 상인이 낭비 버릇이 강한 독일인 귀족을 돕는 한편, 독일을 미워하는 유대 상인은 몰락해 강에서 익사하는 이야기가 쓰여져3베스트세.
1865년바그너는바이에른 국왕루트비히 2세를 위해 '팔지팔'을 쓰고 '게르만-기독교 세계의 신성한 무대 작품'이라고 불렀다[403]. 바그너는 '파르지팔' 창작에 있어서 대독주의자의 성서학자 구플레러의 '원시 기독교'에 영향을 받고 있어[454]“나는 가장 독일적인 인간이고 독일 정신이다”고 일기에 썼다[455].
1867년바그너는 프랑스 문명은 퇴폐적인 물질주의이며, 모든 것을 균일화시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지만, 앞으로 도망갈 수 있는 것이로마 제국을 멸망시켜 유럽을 만든 게르만 민족의 독일이라고 논했다[456].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 징거』(1868년)에서는 “비록 신성 로마 제국은 구름 산무를 지워도 마지막에 이 손에 신성한 독일의 예술이 남는다”(3막 5장)라고 말했다[457]. 그러나 이 작중에서 유대인은 나오지 않는다[450].
1869년에북독일 연방에서 종교동권법(종교의 차이에 관계 없는 독일시민동권법)이 승인되었고,1871년독일제국전역에서 시행되자 반유대주의 운동이 고조를 보였으나 바그너는 동시대의 반유태주의에는 동조하지 않았다[458]. 다른 한편으로 유대인 자본가, 궁정 유대인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 프로이센 정부를 경률로 비판했다[459]. 또한 바그너는 마르와 듀링의 반유대주의는 평가하지 않았지만, 유대인의 의식 살인을 취한 프라하 대학 교수의 아우구스트 롤링 신부의 '탈무드의 유대인'(1871년)[460]을 애독했다[461].
보불전쟁이 시작된1870년에 와그너는 독창성이 없는 프랑스 근대 예술은 예술을 팔아서 헤아릴 수 없는 이윤을 올리고 있지만 베토벤이 프랑스적인 유행(모드)의 지배에서 음악 을해방 한 것처럼독일음악의 정신은 인류를 해방한다.
1873년에는비스마르크의 반가톨릭 정책인문화투쟁을 지지하고, 한층 더 가톨릭뿐만 아니라 횡포한 프랑스정신과의 투쟁을 주장했다[463].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바그너의 계획과 요청을 거부하자 바그너는 프로이센에 실망하고 "미국과 러시아가 미래이다"라고 아내에게 말하고 미국으로의 이주를 계획했다[463].
바그너는1880년논문 '종교와 예술'로 음악은 세계를 구제하는 종교이며, 기독교에서 유대교적인 혼잡물을 제거하고 숭고한 종교인 인도의 바라몬교와 부처 교등을 참조하여 순수한 기독교를 복원해야 한다고 논하고, 잃어버린 낙원을채식주의와동물 애호와 절주에 의해 재발견하여 남미 대륙으로의 민족 이동해야 한다고 제안했다.458]. 바그너에 영향을 미친 쇼펜하우어는 기독교의 오함은 자연스럽게 거꾸로 동물과 인간을 분리한데있다.바그너의 채식주의는히틀러의 채식주의에도 영향을 미쳤다[464]. 또한1880년에는 철학자니체의 여동생엘리자벳의 남편펠스터에 의해 유대인의공직 추방이나 입국 금지를 호소하는 베를린 운동(Berliner Bewegung)의 서명을 요구받았지만, 바그너는 거부하고 있다[293][458].
만년의1881년2월의 논문 ‘여자 자신을 알라’에서 바그너는 현재의 반유대운동은 속받는 거칠다고 비판하고,고대 그리스의격언‘여자 자신을 알라’를 관철하면 유태인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고 논했다[458]. 바그너는 유대인의 현실 배척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유행과 문화산업과 일체화한 현대문명에서 유대성(Judenthum) 전반을 비판했다[458]. 바그너에게 유대인은 '인류의 퇴폐의 화신인 데몬'이며 '우리의 시대의 불모성'이며, 유대에 대한 비판은 기독교인에게 부과된 자기반성을 의미하며, 또한 유대교는 현세의 생활에만 관련된 신앙이었으며, 현세와 시간을 초월한종교가아니다.
같은 해 9월의 논문 '영웅정신과 기독교'에서는 인류의 구제자는 순혈 을유지한 인종에서 나타나며 독일인은 순혈종족이었지만 동유럽에서 유대인 의침입에 의해 쇠퇴되어 궁정 유대인에 의해독일인의 자부심이 만심과 탐욕으로 교환되었다고4유대인은 조국도 모어도 가지지 않고, 혼혈해도 그 절대적 특이성이 손상되지 않는 인종으로 「세계사에 나타난 가장 놀라운 종족 보존의 실례」인 것에 대해, 순혈인종의 독일인은 불리하다고 여겨졌다[465]. 워그너는 유대계의 장인 가이어가 친아버지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가지고 있었다[465]. 같은 해 워그너는 루드비히 2세에 대한 편지에서 유대인종은 "인류와 어쨌든 고귀한 것에 대한 원천적 적"이며, 독일인이 유대인에 의해 멸망되는 것은 확실하다고 말했다[403]. 그러나 이 무렵 반유대주의자에게 공격을 받은 유대인 가수 안게로 노이만을 옹호해 로잉글린과지크프리트역에 즐겨 기용하고 있다[403]. 이 밖에 후년의 바그너는 유대인 연주자 루빈슈타인이나 타우지히 등을 비호하여 기용했다[403].
1882년비엔나의 반지 극장에서 800명이 희생된 화재 사고에 대해 바그너는 “인간이 집단에서 멸망한다는 것은 악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극장에 인간의 쓰레기만 모아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라고 말해, 광산에서 노동자가 희생이 되었을 때야말로 가슴을 아프게했다고403][466]. 또한 바그너는 “인류가 멸망하는 것 자체는 그리 아쉬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인류가 유대인에 의해 멸하는 것만은 아무래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치욕이다”라고 말하고 있다[403].
1882년 여름, 바그너의 숭배자였던 유대인지휘자헤르만 레이비는 루트비히 2세의 생명에 의해 '파르지팔'의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초연을 지휘했다[403][465]. '파르지팔'에서 바그너는 인도의 불교와라마야나를 모티브로 했지만 '기독교 세계의 외부' 중세 스페인으로 설정되었다[458]. 종교와 예술의 일치를 목표로 한 바그너는 레이비에게 기독교로의 개종을 요구했지만 레이비는 거부했다[465]. 레이비는 바그너의 유대와의 싸움은 숭고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고, 저속한 유대인 증오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다[465]. 전년에 익명으로 코지마와 불의의 관계에 있는 유대인에게 지휘하지 말라는 편지가 도착했기 때문에 레이비는 사퇴를 제기했지만, 바그너는 신경쓰지 않고 지휘를 하라고 말했다[403]. 바그너의 딸 사위에서 반유대주의자체임벌렌은 레이비를 예외적 유대인으로 칭찬했다[403]. 바그너는1883년에 죽기 직전에 “우리는 모든 것을 유대인들로부터 빌려내고, 가방 안에 걷는 당나귀와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403].
워그너의 영향력은 강하고, 프랑스에서는썬-산스와 그노,드뷔시등[467],독일에서는브루크너등이 영향을 받고, 유대인말러는 워그너파로 자주 워그너를 지휘하고 있으며, 1898년에는 '니베르그의 지환 '작중의 밈은 유태인468]. 유대계 오스트리아인의 작곡가셰인베르크는 1933년 바그너의 '음악에 있어서의 유태성'에 반박하면서도 “나에게 있어 바그너는 영원한 현상이다”라고 칭찬하고 있다[469].
프랑스에서는 바그너로부터 초대된보드레일[467],마랄메,모리스 발레스가바그너에 열광했고, 카첼 만데스는 팔지팔에 거대하고 빛나는 아리아의 신들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410]. 1886년 볼조겐 남작[470]은 독일인과 프랑스인은 아리아 인종이며 아리아 예술을 칭찬했다[410]. 잡지 '루부 바그네리안'의 발행자로 작가의 에두아르 뒤잘단[471]은 바그너는 종교를 창시했고, 팔지팔은 세 번째 아담으로, 예수가 세계의 끝에 나타날 때 취하는 모습이라고 했다[410]. 바그너는신이교주의(파가니즘)에 큰 영향력을 가졌고, 히틀러도 바그너의 숭배자였다.
사회주의·무신론
푸리에, 투스넬
샤를 푸리에는 유대인 해방 정책은 돈벌이 정신에 의한 것으로, 이윽고 프랑스는 회당이 되어 로토실트(로스차일드) 왕조가 창시된다고 논했다[472]
프랑스의 반유대주의는 프랑스 혁명의 후유증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고 폴리아코프는 말한다[279]. 그 중에서도 프랑스의 사회주의자는산-시몬주의자를 유일한 예외로 반유대주의로 물들어갔다[279][주53].
1808년사회사상가샤를 푸리에는 사람들을 파산으로 몰아넣은 유대인에 대한 교훈화를 쓰고 유대인이 프랑스로 확산되면 프랑스는 거대한회당이된다고 논했다[472].1829년푸리에는 유대인 해방정책은 돈벌이 정신의 조장이자 악정으로 '고리대출의 민족'인 유대인은 문명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논했다[472]. 그러나 푸리에는 1838년에는 '거짓의 산업'에서로스차일드 가문을구약성경의에즈라,세르바벨에 비유하고,다윗,솔로몬의 왕을 부활시켜 롯시 루트(로스차일드) 왕조를 창시할 수 있다고 칭찬하고 있으며, 폴리아코프는 푸리에는 로스차일드가의 공감을 잡으려고 한 것이 아닐까 지적하고 있다[472]. 그러나 푸리에의 사상에 공명한 푸리에주의자는제2공화정시에유대인의원클레뮤 가사법성에있는 것은 위협이라고한다.
1845년프랑스에서샤를 푸리에의 제자 알폰스 투스넬이 『유대인, 시대의 왕-금융봉건제도의 연구』를 간행했다[473]. 투스넬은산업혁명하에서 생긴7월 왕정기의회의 부패나 사회불안에 대해 프랑스가 도덕적으로 무기력에 빠져 타락한 것은 유대 금융자본가를 중심으로 한 '금융적 봉건 지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장관들은 프랑스를 유대인에게 팔았다고 비난하며 '화폐의 귀족 지배'를 제거하기 위해 왕과 인민의 결합을 주장했다.474]. 투스넬은 '유대인'을 '타인의 자재와 노동을 먹이로 하고 있는 통화의 거래인 모두, 모두에서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기생자 모두'라고 하며 여기에개신교,신의 의사를 읽는데 유대인과 같은 책을 읽는 영국인, 네덜란드인,제네바인도투스넬의 이 책은 드류몬의 '유대인 프랑스'(1886)가 등장하기까지는 반유대주의의 고전이 되었다[475].
1846년,기독교 사회주의의피에르 루루는 투스넬과 같은 제목의 '유대인, 시대의 왕'을 갖고 '유대인'과는 고리 대여해, 욕심에 돈을 벌기에 열의를 나타내는 인간 모든 것을 의미하지만, 유대인의 병은 인류의 병이며, 투기 매매와 자본에 의해 예수님은 쇄형에 처하고 있다고 논하고, 적은 '유태적 정신'이며 개별 유대인이 아니라고[475].
프로이센의페르디난트 라사르는 유대인 사회주의자 노동운동 지도자였지만 노예로서 태어난 유대인에 대해 올바른 복수를 알지 못했다고 자기지탄해 “나는 유대인을 전혀 좋아할 수 없다”고 말했다[476].
헤겔 좌파
헤겔 좌파(헤겔 청년파)의 유대계 사회주의자모세스 헤스는 유대인은 영혼이 없는 미라, 방황하는 걷는 유령과 같은 존재이며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비가 유대·기독교인 상점주의 세계에 공개됐다”고 말했다.1862년'로마와 예루살렘' 등으로 유럽사회에 유대인은 동화할 수 없다며시온주의테오도르 헤르툴에 영향을 주었다[477]
1847년,이신론자인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다우머는 『기독교 고대의 비밀』에서성서 비판을실시해, 지난 수세기에 걸쳐 기독교인에 의한 의식 살인을 열거했다[478][479]. 의식 살인은 유대교도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되어 온 것으로,피의 상처라고도 불리지만, 다우머는하멜른의 피리 불어남자등의 중세의 유아 유괴 사건,이단 심문,마녀 재판,산 바르텔미의학살에 의한 유대인의 대량 학살 등479]. 이것은 엄격한 증거가 아니라 막연한 의심으로 쓰여진 것이었지만공산주의비밀 결사'의인 동맹'의 파리 대표 헤르만 에바베크(August Hermann) Ewerbec)은 다우머의 '기독교 고대의 비밀'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1848년에 런던에 있던칼 마르크스는 다우머에 의해 기독교 의식에서 인간의 고기와 피를 먹은 것이 입증되었으며, 이것은 '기독교에 가해진 마지막 일격'이라고 평가했다[479][489]. 다우머는 기독교 측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유대교에 가까워지고, 1855년에는 『유대인의 지혜』를 쓰고, 유대인 공동체에의 가입을 표명했지만, 유대 공동체측은 거절하고 있다[479]. 다우머의 제자 프리드리히 윌헬름 기라니는 다마스크스 사건 이후 유대인 식인 풍습을 고발했다[479].
무신론철학자포이엘 바흐는 다우머의 가장 친한 친구였으며 다우머의 영향을 받았다[479]. 포이엘바흐는 '기독교의 본질'에서 유대인의 원리는이기주의라고 말하고 있다[479].
레온 폴리아코프는 볼테르의 반종교 캠페인부터 소련의 반종교 정책에 이르기까지 반기독교를 내세우는 무신론의 십자군은 다우머와 동종의 사고양식이 공통적으로 찾아낼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481]. 하이네는 “무신론의 광신적인 수도사들”이라고 말하고 있다[482].
아르놀트 루게는 게르만주의 학생 운동의 활동가였지만,청년 헤겔파가되어 1838년에 기관지 '할레 연보'를 창간했다[483]. 루게는 1839년 '할레 연보'에서 '기독교 세계라는 치즈 속에 둥글게 된 우지벌레라고도 할 유대인'은 무신론적이라고 논했다[483][484]. 루게는 마르크스와 착착했을 때 '부끄럽지 않은 유대인'이라며 사회주의운동을 '기분 넘치는 유대영혼의 교제'라고 비난하고 있다[483]. 루게는 후년, 비스마르크 지지자가 되었다[483].
맥스 스티르너는 인류 역사의 첫 번째 시기에 니그로적인 성질이 버려졌고, 두 번째 몽골(중국)의 시기는 폭력에 의해 끝나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모든 기성의 믿음을 전복하고, 코카서스의 피를 몽골의 사태로부터 해방하고, 코카서스인만의 것으로 여겨지는 하늘을 정복하는 것을 제창했다[265].
브루노 바우어
브루노 바우어. 바우어의 저서 『유대인 문제』는 19세기의 가장 지적이고 날카로운 반유대주의의 저작으로 평가된다[485].
헤겔 좌파의 철학자로무신론을 근저로 정한브루노 바우어는 1841년 『무신론자·반기독교 헤겔에 대한 마지막 심판 래퍼』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보편적 자기 의식의 획득을 저해한다고 비판하고 또신성동맹하의독일에서의교회6그러나 프로이센 정부의 검열에 의해 바우어는1842년봄에 본 대학 강사직을 박탈당했다[486]. 바우어는 복음서를 '신화'로 한다윗 스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1835년)에 영향을 받고 복음서를 마태 마르코 루카의 창작으로 만들었다[487].
1843년의 '폭요된 기독교'에서 바우어는 하나님에 대한 숭배에 의한 사고상실을 비판하여 기독교로부터의 인간의 해방을 주장하여 발금처분이 되었다[485][486][488]. 같은 해 사회주의자로 무신론자인 빌헬름 마르가 '폭요된 기독교'의 축약판을 간행했다[489]. 후년 말은 '반셈주의(Antisemitismus)'를 조어했다[488].
같은 해1843년의 '유대인 문제'에서 바우어는 유대인에 대한 압박의 원인은 유대교의 편협한 민족 정신에 있으며, 율법의 명령하는 어리석은 의례가 유대인을 역사의 운동 밖에 두고 다른 민족들로부터 분리 그렇다고 해서 유대교도가 '공상상의 민족성'에 매달리려고 하는 한 유대교도의 해방은 있을 수 없고, 그것은 기독교가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려고 하는 한 해방되지 않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485][490][491]. 또 유대인은 시민사회의 틈새에 둥글게 되어 불안정 요소로부터 폭리를 쏘아 보편적 인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유대인은 금융이나 정치에서도 일대권력을 원하는 채로 하고 있다고 했다[485][488]. 바우어는 모든 인간이 종교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유대인만을 해방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에 반의를 표명하고 유대인 해방론에 반론했다[488]. 바르니콜은 바우어의 '유대인 문제'가 19세기의 가장 지적이고 날카로운 반유대주의 저작이라고 평가했다[485]. 또 1843년부터 1844년에 걸쳐 바우어는 방관자인 '대중'에 대해 게으르고 자기만족이며 '정신의 적'이라고 비판했다[486].
1848년 혁명 이듬해인 1849년에 발표한 『독일 시민혁명론』에서 바우어는 독일 3월 혁명에 대해 시민계급이 국왕과 타협해 노동자를 체결했고,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도 구 체제의 연방의회를 재생한 것으로 비판해 '독일 시민'을사고상실자.로마 교회를 비판하고 독일 카톨릭 운동을 일으킨실레지아사제 요하네스 롱게(Johannes Ronge)를 시민은이성을구하는 자로 환영했지만, 바우어는 이성은 자유로운 성경 해석을 한다고 독일 카톨릭 운동을 비판했다[486]. 또 바우어는 개신교의 자유게마인데운동에 대해서도 영방교회제도를 비판하지 않고 '사랑과 진리'라는 공언을 반복하는 것만으로 독일·가톨릭운동과 마찬가지로 성경의 자유연구를 허용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486]. 바우어는모제스 헤스들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범용한 종교'로서 사회주의자는 이미 한 노동자 조직에 추종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했다[486].
1853년'러시아와 게르만'에서 바우어는 1848년 혁명 이후 프랑스는 입헌주의에서 제정주의로 변화하고, 제정 러시아와 대립하며 독일은 통일에 실패하여 분립하고 있으며, 유럽은 분열과 대립 시대가 되었다고 해, 또, 영국의 유태인 총리 디즈레리, 프랑스의 유태인 은행가 후르드 등 유럽은 유태인에 지배되고 있어 유럽 제민족의 정신적 우주는 나락에 침몰했다고논했다485].
1863년바우어는 '이향의 유대'에서 유대인에 의한 독일의 지배는 '인도주의적으로 연화한 순간에 우리가 유대교도를 동등한 것으로 취급했다'에 있어 기독교인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했다[281][485]. “우리가 유대인에 대해 스스로를 방어해야 한다는 책임은 우리에게만, 특히 우리 독일인에게 있다. 그들이 그들에게 선물한 것이다. 그들이 아니라, 우리가야말로 현대에 그 유대적 성격을 각인한 것이다.”281][485].
또 1848년 독일혁명에서는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부의장 리사-, 치안위원회 회장 페쉬호프, 지몬 의원, 야코비 의원 등 유태인 정치가가 활약했다[485][492]. 바우어에 따르면, 페쉬호프는 황제위를 대신하여 서서 기독교를 농담으로 간주하고, 비엔나를 탈무드의 점령권에 의해 소유하고, 지몬을 혁명 대표자로 하는 현창운동의 독일 민족은 대표자를 낳지 않았고 역사의 표식을 독일인은 유태인에게 빌려야한다고주장했다.바우어는 “혁명은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낳지 않는다. 적어도, 그 분노의 폭발의 순간에는. 그것은 낡은 피의 끓는, 역사의 하층의 퇴적물의 노출, 새로운 시대 속에의 고대의 함입에 불과하다”라고혁명사상을비판했고, 유대인이 고대의].
바우어는 유대적인 모습(Judentum)은 단순히 종교적 교회뿐만 아니라 인종적 성질이기도 하고, 유대인은편평족으로 하반신은니그로처럼 약하기 때문에 확실히 세우지 않고, 두꺼운 피부와 염증성의 혈액으로부터 유태인은 「흰 니그로」라고 할 수 있지만, 힘에도 부족하고 “우리는 독일의 노고와 독일의 피로 만들어진 독일 국가 중 독일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독일 국가의 이름을 세계의 가장 불량화한 자들의 갱생 시설로 빌릴 생각은 절대로 없다”고 주장했다.485]. 바우어에 의하면, 유대적인 본연(Judentum)이란 「현대의 세계 위력」 「기독교 세계의 균일화」 「일당파의 수중에 있는 의회의 결정」을 가리키고, 기독교도의 정치가가 그 대표로 되었다[485].
만년의 바우어는 '그리스도와 황제들'(1877년)로, 기독교는 로마 제정기의스토어 철학의 정신으로부터 유대교를 골격으로서 탄생한 것으로 하고, 현대를 기원후 1-2세기의 로마 제정기에 유대인의 관신이아우구스 투스,티베리우스,칼리그라황제를 둘러싸고 유대교가 승리를 자랑했던 시대와 겹쳐 '디즐레리의 로망주의적 제국주의와 비스마르크의 사회주의적 제국주의' 등을 저술하고, 반유대 잡지의 창간에도 관여했다.485][493].
사회 사상가칼 마르크스는 라사르와 마찬가지로 유대계였지만, 라사르를 싫어하고 라사르는 흑인, 유대인, 독일인의 교배에서 태어난 '유대인의 니그로'와 엥겔스에 대한 서한으로 말하는 등, 반유태주의적이었다[476].1843년마르크스는 '유대인 문제에 의하여'에서 유대교의 기초는 실제적인 욕구와 이기주의라고 한다[494]. 그리고 유대교의 세속적 제사는 장사이며, 그 세속적인 신은 화폐인 것으로, 장사와 어색한 화폐로부터의 해방이 현실적인 유대교로부터의 해방이며, 자기 해방이 되어 「유대인의 해방은, 그 궁극적인 의미에서」유태교에서. 마르크스는 “화폐는 세계의 지배권력이 되어, 실제적인 유대 정신이 기독교적 국민의 실제적 정신이 되었다” “화폐는 이스라엘의 질투스러운 신”이며,어음은유태인의 현실적인 신인, 유태인의 민족성은 금전적 인간 의민족.마르크스는 평생을 통하여 무시로부터를 유대인으로 인식하는 것을 거부하고, 유대인에 의한 사회주의를 기쁘게 생각하지 않았다[494]. 마르크스는 '유대인'을 타인을 비판할 때 사용하고 있으며, 유대교학자슈타인터르, 비엔나의 저널리스트 프리트렌더(Max Friedländer)를 '저주받은 유대인', 은행가 루트비히 밤베르거(Ludwig Bamberger) 를 '파리의 증권 시나고그'의 일원이라고 부르거나, 또 '뉴욕 데일리 트리뷴'에서는 익명으로 금 상인은 대부분 유태인이라는 등을 썼다[494]. 마르크스에게 유대주의는 자본주의와 이기주의의 별명이었고, 유대인은 고리 대출의 별명이었다[495][496]. 또 마르크스는 러시아인은 몽골 기원이라는 두히니스키의 설에 의해 러시아인은 슬라브인이 아니고, 인도-게르만 인종에 속하지 않고 침입자라고 말했다[265].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셈인과 아리아인은 가장 진화한 인종이지만, 흑인은 수학을 선천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하등한 야만인은 동물의 상태에 상당히 가깝다고 했다[265].
사회주의·무정부주의자 프루돈은 금리에 통효한 유대인은사탄이라고 비난하고, 그 반유대주의는 평생 계속되었다[498].
프랑스의사회주의·무정부주의자프루돈은 유대인은 “떡볶이, 모방, 속임수로 일에 해당한다”, 유태인은 금리의 상승과 하강, 수요와 공급 의 변덕에 통칭하고 있어, 바로“ 나쁜 원칙, 사탄, 알리만”이라 비난했다.1858년에 출판한 프루돈의 주저 ' 혁명의 정의와 교회의 정의'에서는 근대세계의 퇴폐는 유대인이 원인이라고 논했다.프루돈은 카톨리시즘이라는 유해한 미신의 부모인 유대인은 완고하고 구원할 수 없고, 진보파의 행동 지침으로서는 유대인의 프랑스로부터의 추방, 회당의 폐지, 어떠한 직업 에 대한 종사도 인정하지 않고, 최종적으로 유대신앙을 폐기시키려고 한 데다 “유대인은 인류의적이다.498]. 프루돈은 유대인뿐만 아니라외국인 노동자들에게도 증오와 우려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국가의 주민이 아니다. 이렇게 오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정부 자체가 외국인을 우대함으로써 얻고 외국인종이 우리 인종을 보이지 않는 형태로 몰아내고 있는 것이다.498]. 프루돈은 벨기에인, 독일인, 영국인, 스위스인, 스페인인 등외국인 노동자가 프랑스에 침입하여 프랑스 노동자를 대신하는 것을 슬퍼하며 프랑스 혁명, 인권 선언,1848년 혁명의자유주의도 외국인에게 이익을 가져올 뿐이라며 “나는 내 민족에게 원초의 자연을 돌려주고 싶다”고 말하면서 프랑스 민족은 지금까지 그리스인, 로마인, 바바로이, 유태인, 영국인에 의해 지배되어 왔음을 슬픔[4]. 프루돈에게 유대인 작가하인리히 하이네, 알렉산드르 웨일은 밀정하고, 로토실트, 클레뮤,마르크스, 푸르드는 질투심이 많고 프랑스인을 증오하고 있다[498]. 또한 프루돈은여성 해방운동에 대해 격렬하게 공격하는 남성 지상주의자이기도 했다[498]. 폴리아코프는 이러한 프루돈에게는 20세기 파시스트의 원형으로서권위주의적 인격의 선구자를 보고 틀림없다고 한다[498].
19세기 노동자의 빈곤문제에 대해서는 1848년 혁명이나 마르크스주의보다 기독교 사회운동이 해결에 크게 공헌했다[351][500].1837년4월 25일국제법학자로 의원 요셉 부스[501]가 '공장연설'에서 근로시간 단축, 일요일 노동 금지 등 동의를 제출했다[351][주54]. 1840년대에는 쾰른의 아돌프 콜핑이 장인조합운동을 개시, 가톨릭노동자동맹이 조직되었다[351]. 1862년 베스트하렌 농민조합이 결성되었다.
1848년리히노프스키 후작과 아우아스발트 장군 암살 사건에 대해서 네, 입이 더럽고 욕하는 자, 혁명을 원리로 가정을 파괴하려고 하는 자, 사신 앞에 국민을 숭배하려고 하는 자야말로 진범인이라고 연설해 평판이되었다502]. '노동자의 주교'로 불린 마인츠 주교 케텔러[503]는1864년의 '근로자 문제와 기독교'에서 노동자 빈곤화의 원인을 노동에 대한 자본의 우위에 요구[504],1869년의 연설[주 55]에서 프랑스 혁명 이후 국민경제가 각국에 침투한 결과 노동자는 자유로워졌지만 고립되어 노동자가 육체밖에 가지지 않는 반면 금전은 큰 부자에 집중하고 자본은 적성에 배분되지 않고 로스차일드가와는 이러한 국민경제의 산물이며 노동자는두려워할, 노동시간 단축, 안식일 확보, 아동노동 금지, 여성·소녀 공장노동 금지를 요구했다[506].
당시 노동자운동은 기독교 사회운동이 주도했지만,마르크스가1875년독일사회주의 노동자당의고타 강령을 비판, 특히1891년에르푸르트 강령을 혁명적이지 않고 개량주의적이고 기회주의라고비판한 이후마르크스주의가3명의노동자운동507]. 케텔러는 미완의 원고로, 고타강령에 대해 노동자의 상황을 개선하는 실천적인 요구, 결사의 자유 등에 찬성하는 한편, 인공적이고 강제적인 설계에 의한 결사에서는 산주스트의 “입법의 임무는 이런 걸로 자신들이 바라는 대로 인간을 대체하는 것에 있다”고 말하듯이, 자신들을 이성의 화신으로 하고, 적은 무지창매의 반리성이며, 인간 개조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말살되어 버리기 때문에, 결사는 자생적인 것이어야 하고, 또 노동자의 결사는 정치 선동이나 꿈상이 아니라 경제적 개선을 목표로 해야한다508]. 케테라는 고타 강령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요구가 후퇴하고 있으며 노동자의 요구하지 않은 공상적인 제도 전복이나 유토피아의 몽상, 그리고 폭력은 폭력을불러부당하고 증오와 보복 위에 세워진 사회는 자기붕괴했다고 노사협조를 호소했다.또한 케테라는 사회주의는 모든 사람이 충분한 먹이를 주는 완전한 복지국가를 제창하지만, 그것은 노예국가이며 가축 오두막에는 정신적인 자유도 행동의 자유도 없다고 비판했다[508].
기독교 사회운동은 1880년에 노동자복지회, 1882년 전 독일적 농민조합, 1890년 독일·가톨릭 국민협회를 결성했고, 가톨릭 국민협회는 1913년에는 회원 87만명으로 독일 최대 규모의 단체가 되었다[351]. 한편 반유대주의를 내걸고 기독교 사회당을 결당한 아돌프 슈테커, 또 오스트리아 기독교 사회당을 이끈칼 루에이거도 기독교 사회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유대인으로부터의 해방' 이론
지금까지 보았듯이,마르크스의 '유태인 문제에 의하여'(1843),바그너의 '음악에 있어서의 유대성'(1850)이나프루돈등의 반유대 사상에서는 유대인이 일대 세력이 되고 있음을 위협에 느끼고 지배 세력인 유태인으로부터의 해 그리고,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걸쳐 「유대인으로부터의 해방」은 유대 음모론 등이 되어, 여러가지로 나타났다.세계대 불황 시대인1880년대에는 독일어권에서 '유대교도의 해방'을 낳은 '유대인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슬로건이유포되었다[281].
1861년- 익명으로 '유대인 박해와 유대인으로부터의 해방'이 간행되었다. 그 가운데 "화폐의 권력, 즉 스스로는 노동하지 않고 소위 영업의 자유의 이익을 독점"하고 있는 권력이 비판되어 금권 지배의 물질주의와 관료지 배의 기계주의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화폐권력은 대부분 유대교도의 수중에 있어, 유대인은 근대 자유주의의 모든 것을 독점하는 것에 성공했다고 주장되었다[281]. 여기서는 '로트실트가(로스차일드가)를 필두로 하여 유럽의 증권거래소를 지배하고 있는 유대인 금융가'를 논하는 한편, 유대교도 박해는 어리석게 물러나야 한다며 '유대인으로부터의 해방'이 주장되었다[281].
1861년 - 독일에서 익명(저자는 HG 노르트만으로 여겨진다[주 56])에서 '유대인과 독일 국가'가 발표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281][509]. 이 책은 전통적인 기독교적인 유대교도에 대한 혐오(Judenhaß)를 부활시키고,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으로부터 샤일록의 대사가 여러 번 인용되어 '유대인인 것(das Judenthum)은 극단적인 분리주의와 인종적 인상으로 특징지어지며, 자손을 넘지 않는다" "유대의 피와 유대의 의식은 분리 할 수 없다. Judenthum)를 종교나 교회로서 뿐만 아니라 인종적 특성의 표현으로 파악해야 한다. 더 나아가면 유대적 성격이 독일인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유대인을 인종(Race), 종족(Stamm)으로 논하고, 또 유대인이 공직에 취할 권리를 요구하고 있는 것을 비판했다.281][485]. 이 책에 따르면 기독교는 보편적 평등과 인간 사랑의 세계 종교인 반면, 유대교는 이스라엘 일족만이 여호와와 맹약하고 다른 인류와 적대하는 배타적 종교이며, 유대교는신 정제도를 기반으로 한국가교회이기 때문에 비유대적인 자를 무조건 동권자로 승인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결렬이 되므로 유대교도는 비유대교도를 동권자로 승인할 수 없다고 한다.485]. 이에 대해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은관용 사상에 의해 종교의 격벽을 폐기하려고 하고 있지만, 유대교를 오해하고 있다고 유럽의 유대 정책을 비판했다[485]. 다만 이 책 말미에서는 저자는 유대인에 대한 모욕이나 증오를 설득할 생각은 없고 유대의 본질의 인식을 목표로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485].
시민적 리얼리즘을대표하는 소설가빌헬름 라베의 '굶주림 목사'(1864)는 정직하고 가난하고 자비로운 목사가 되는 기독교인들에게 부정직하고 권력욕에 불타는 유대교도의 야심은 막힌다는 이야기로[235], 개종 유대인의 야심가가 "나는 기분이 좋게 독일인이 되거나 그 영예를 놓을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271]. 마찬가지로 시민적 리얼리즘의 작가테오도르 폰타네의 소설에서는 유대인은 일정한 호의를 가지고 그려져 있지만 유대인은 유대인끼리 기독교인과나뉘어살아가는것이좋다.271]. 헤르만 게드슈(필명 서 존 레트클리프)의 소설 '비아리츠'(1868)에서는 유대인 음모가가 프라하의 묘지에서 세계 지배를 계획했다고 그려져 인기를 얻었다[235].
엘네스트 루난은1861년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개강 첫날에 예수를 '하나님이라 부르면 좋을 정도로 위대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간'이라고 부르며 강의가 정지되어 다음 1863년 '예수의 생애'를 간행했다[510]. 루난은 포이엘바흐의 반기독교 입장이나 게르만주의에 비판적이며, 신약과 구약을 분리하는 반유대주의자가 아니라 1882년 헝가리의 틸츠랄 에투랄에서의 의식 살인사건에 항의하고 로스차일드가로부터 자금을 조달한반적이다.그러나 루난은 초기 예수는 유대교의 틀 안에 있었지만, 유대 공동체에서의 논쟁의 격렬함의 희생이 되었고, 예수는 유대교를 철저한 파괴자가 되어 편협한 유대성을 극복해 갔다고 논하고 유대교를 거절하였다[510]. 루난과다피트 스트라우스에 의해사적 예수의 연구가 전개되어 갔다.
다피트 스트라우스로부터 큰 자극을 받은유대교 개혁파랍비의아브라함 가이거는 '유대교와 그 역사'(1865-71)로 예수의 가르침은 오리 지널이 아니라바리새파윤리의 연장에 있으며, 예수교에서는 천국 숭배가 새로운 것만으로 예수는 갈릴리 출신의 바리새파 유대인이라고했다511]. 가이거는 리버럴 프로테스탄트의 시선으로 유대교의 역사를 그려 바리새파를 진보파, 사도카이파를 보수파로 보았다[511]. 가이거에 의한 바리새파의 사도카이파의 대립의 도식은, 엄젠에도 영향을 주었다[511]. 가이거는 당시 1870년대의문화투쟁등으로 가톨릭에 대항하는 독일의 개신교와 리버럴한 국민주의에 접근하여 랍비의 유대교를 개혁함으로써 유대 사회의 근대화를 목표로 했다[511].
율리우스 베르하우젠은 '바리새파와 사도카이파'(1874) '이스라엘 역사'(1878) 등으로모세다섯율법보다선지자 예레미야의 개인적 경건을 중시하고, '신명기'등의제사 법전은바빌론포로2베르하우젠은6세기무렵부터 유대교는 고대 이스라엘 종교를 압박하고 제사계층이 선지자를 머물러 율법이 고정되었다고 하여 이에 의해 바리새파는 권력을 파악한 반면 정신적 이스라엘로서의 기독교가성장했다고했다.베르하우젠은 니체,베버, 프로이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513].
케니히스베르크 역사학 교수 펠릭스 던은이탈리아 통일직후에 소설 '로마와의 투쟁'(1867)[514]을 이탈리아화로부터 티롤의 방어를 목적으로 썼다[515]. 이 소설에서는 중세의고트인에 의한 이탈리아 원정을 소재로, 성실하고 정결한 게르만인에 대해서, 비열하고 겁쟁이로 계산하지 않는 유태인의 비업의 마지막이 그려진다[453].
1869년, 교권파의 구주노 데 무소가 저서 『유대인, 유대교, 그리고 기독교 제민족의 유태화』에 있어서 세계 이슬라리엣 동맹, 의식 살인, 프리메이슨 유다 야인등의 해악을 논하고, 반기독교의 음모를 기획해, 각지에서 혁명의 씨를 뿌리고 있다고 하는 한편, 유대인의 피에는 가치가 있고, 고귀한 민족이며, 신비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칭찬했다[279][516][517]. 구주노는 야만적인 탈무드는 증오와 횡령의 가르침이며, 탈무드가 파기될 때까지 유대인은 비사회적인 존재로 남아 있지만, 그 전에는 지금까지 없었던 가혹한 시련 하지만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유대인은 '아버지의 집'에 다시 참가하여 '영원히 선택된 백성, 여러분의 백성 중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위엄이 가득한 백성'으로 축복된다고 논했다.279]. 구주노는 교황 피우스 9세로부터 칭찬받고 교황청 기사호를 받았다[518].
1871년보불전쟁에서프로이센과 남북 독일 제방이 프랑스 제국에 승리했고, 프로이센 왕빌헬름 1세가베르사유궁전에서 황제에 즉위하여독일 제국(정식명 독일국 Deutsches Reich)이 성립했다. 루터파 시민은 '독일 국민의 신성 로마 제국'의 비유로 '독일 국민의 신성 복음주의 제국'으로 환영했다[519]. 독일에서 게르만의 인종적 우월성이 주장되게 된 것은나폴레옹 전쟁에서 신성 로마 제국이 1806년에 붕괴했기 때문이었지만[358], 프랑스의 반유대주의는 보불전쟁에서의 패배로 높아졌다[342]. 르네 라그랑주는 '피가로'에서 프러시아 군의 파리 개선에 대해 군인 뒤를 넓은 후치 모자를 쓰고 안경을 쓴 긴 머리 집단이 행진했고, 이것은 확실히 독일군에 종군하는 유태인 금융업자였다고 했다[342]. 드류몬도 이 행진을 목격하고 있었다[342].
프라하 대학 교수 아우구스트 롤링 신부는 '탈무드의 유대인'(1871년)에서 유대인의 의식 살인에 대해 썼다[460]. 이것은 요한 안드레아스 아이젠 멩거의 '폭요된 유대교'(1700년)를 저본으로 한 것이었지만,1885년, 라비의 요제프 사무엘 브로흐로부터 명예훼손 재판을 일으켜 교직을 그만두었다[520][521]. 그러나 롤링의 저작은 유럽의 카톨릭계에서 지지되어 프랑스에서는1889년에 번역 3종이 출판되었다[520]. 또한 롤링 신부의 저서를 읽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유대인도 많았다[522].
독일어권에서는 1867년부터 1914년까지 의식 살인소송이 12건 반복되었다[520].1899년보헤미아의 의식 살인 소송에서는 레오포르트 힐스너가 유죄가 되었지만, 그 이외의 의식 살인 소송은 모두 피고는 무죄였다[520]. 힐스너 사건에서는 프라하 대학의 철학 교수마사리크[주 57]가 변호하여 의식 살인은 물러나지만, 힐스너는 19세의 딸을 살해했다고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은사되었다[520].
가정 잡지 『디 가르텐라우베(Die Gartenlaube)』
19세기 후반기 독일의 매스미디어에서는 자유주의자 에른스트 카일이1853년계몽적·진보주의적인 가정잡지 '가르텐라우베(Die Gartenlaube)'를 창간하고, 1848년 혁명으로 지향된 독일 통일을 주장하는 '국민자유주의'의 입장을 전개하고, 1848년 3월 혁명으로 실패한 시민이 정치나 사회로부터 눈을 돌려 가정에 마음의 피난장소를 요구했던 시대에 발행부수를 늘렸다[주58.이 잡지의 전속 작가 E. 말리트는1873년의 「황야의 공주」에서 유대인의 할머니를 배제하려고 한 개신교를 비판하고 관용을 주제로 했다[523]. 보불전쟁기에는 종군기사도 많이 게재해 “전 독일인의 일체감이 불러왔다”는 기사도 게재되었다[523]. 1873년문화투쟁으로 가톨릭과 예수회를 비판하고[523]1874년에는“유대인은 스스로 일하지 않고 타인의 지적, 육체노동에 의한 생산물을 착취하고있다.이미 카일 등 3월 혁명의 자유주의자는 엘리트층이 되어 기득권을 지키자는 의식이 일하고 있었다[523].
1870년대 당시는 개신교의 '십자가신문'과 가톨릭계의 '게르마니아'가 2대 신문이며[520],'게르마니아'는 유대인 박해와는 종교상의 것이 아니라 이민족의 침입에 대한 게르만 민족의 항의라고 주장했지만,반유대0또 비스마르크의 내정을 비판했다[520]. 한편, '십자가신문'은 반유대주의 기사의 게재를 계속하고, 동지에 게재된 헤르만 게이트슈의 환상소설은 '시온 현자의 의정서'에 영향을 주었다[520][524].
산업혁명에 의해 영국은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되었지만, 19세기 말이 되면 후발 자본주의 국가의 미국과 독일이 성장해 영국을 추월했다[525][526]. 독일이 통일되어독일 제국이성립하자 1871년부터 1872년에 걸쳐 투기 붐이 일어났다[주 59]. 그러나 이 투기 붐은1873년 공황으로부터의세계대 불황에 의해 종말을 맞아 많은 투자자들이 파산하고 기업의 도산이 이어졌다[520].1873년 공황의 진원지는 미국과 독일이었다[525]. 그 후 독일은1887년에 호황에 들어갔지만, 1890년의 공황은 독일에서 시작되었다[525].1873년부터1896년까지 전개한 세계대 불황시대에 유럽 각지에서 반유대주의가 높아져 갔다.
독일의 유대인이 전적으로 독일 국민이 되어 시민권이 인정된 것은독일 제국에 있어서였다[251]. 한때 고리대출 등 금융에 한정되어 있던 유대인들은 법적 신분을 보장하고 해방됨에 따라 산업경제에 진취적으로 진입하고, 더욱 국제 규모로 경제활동을 전개하고 산업자본주의를 발달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527]. 해방된 유대인들은 활발한 투자활동을 해 다양한 상공업 분야에서 성공했다. 진출한 업종은 금융, 섬유, 철강, 화학, 정유, 전기, 의류, 철도, 해운, 백화점, 무기탄약 등의 군수산업에 이르렀다[528]. 또한 유대인 자본가는 독일 제국주의를 지지해 아프리카의다이아몬드광산의 개발을 주도하고, 이러한 유대인의 국제적인 활약은 '국제 유대 자본' 이론을 만들어냈다[528]. 1880년에는 프랑크푸르트의 은행업 85%가 유태인 경영이 되었고, 1933년 나치 정권까지 전 독일 백화점의 80%가 유태인 경영이 되었다[528]. 1900년경 프랑크푸르트 유대인 시민의 납세액은 기독교 시민의 4배에서 7배나 되었다[528]. 유대인의 대학 입학률은 개신교의 10배, 카톨릭의 15배가 되었다[주 60]. 유대인은 근대화, 근대사회의 상징으로 되어 증오되었다[520]. 약진 유대인에 대한 사람들의 질투와 반감은 반유대주의의 조류를 높였다[529]. 유대인은 사회주의자로부터 보면 적의부르주아지이며, 반대로 자본가의 눈에는 사회주의자·혁명가와 우울한 존재이며, 유대인이 국제 네트워크 를 사용해 세계 지배의음모를 둘러싼다는 유대 음모론( 위협론)이 다양한 형태를 취해 번식하고 있었다.
19세기 말에 인종주의적 반유대주의가 강했던 것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프랑스, 러시아이며 독일 제국에서도 개인에 대한 국가의 우월, 질서와 권위의 중시, 국제주의와 평등에의 반발 등을 배경으로 유대에 대한 적의가 부풀어졌다[530].
프랑스에서도 사회주의자나 가톨릭으로부터의 반유대주의가 강하고, 독일과 같은 유대 음모론이 뛰어났다. 또드레퓨스 사건은 큰 분기점이 되어 수많은 반유대주의 단체가 결성되어 갔다.
독일
콘스탄틴 프란츠[531]는1874 년독일 제국과비스마르크의 군국주의를 비판하고 영구 평화를 보장하는 유럽 기독교 연방을 계획했다[532]. 프란츠는 한때 유럽의 기독교 공동체를 통제한신성 로마 제국이었던 독일이 그 담당자가 되었고, 비스마르크의 위제국을 대신하는 진정한 제국의 수립이 독일의 사명으로 했다[532][주61]. 프란츠는 이 기독교 제국에서 유대의 영향으로부터의 해방이 조건으로 했다[532]. 프란츠에 의하면, 인종을 넘어 보급된 기독교나 이슬람교와 달리 유대교는 하나의 인종에 근거하고, 유대 백성은 메시아를 죽음에 이르게 한 후, 하나님의 저주에 의해 방랑하고, 이것이 다른 백성을 벌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기독교인간의 전쟁은 유대의 지배를 강화하게 되었고, 비스마르크는 '유대 민족을 위한 독일 제국'의 수립을 향하고 있다고 하며 진정한 진보는 '유대적 진보'에 있어서 대신할 필요가 있다고 논했다.532].
대불황하의 제정독일에서는 사회주의운동이 높아지고,라살의 전독일노동자협회와베벨립크네히트의 독일사회민주노동당이 합병한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이1875년에 결성되었다[508]. 그러나 사민당이나 공산당에서도 유대지식인은 공격받았고,베벨도 유대인 사회주의자를 머리는 좋지만 눈길을 돌리고, 이 견해는 정통적 사회주의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특히 공산당에서는 반유태주의가 강했다[533]. 유대인은 노동운동 속에서도 고립되었다[533].1878년5월 11일과 6월 2일에 전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 당원에 의해 독일 황제빌헬름 1세암살 미수 사건이 두 번 일어나면 '사회민주주의의 공안을 해칠 우려가 있는 움직임에 대한 법률(사회주의자 진압법)'이 만들어졌지만 1890년에는2실효 했다.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1890년 제국의회 선거에서는 제1당이 되어 같은 해 9월독일 사회민주당으로 개칭했다.
근로자 기독교 사회당을 설립한 아돌프 슈테커(Adolf Stoecker) 사제빌헬름 마르 (Wilhelm Marr, 1819-1904). "반셈주의 Antisemitismus"라는 말을 만들었다[9][488].
1878년제궁 예배당 부사제 아돌프 슈테커는 사회주의를 온건한 기독교 사회주의와 파괴적인 유대 사회주의로 구별하여 유대인 시민권 제한, 공직 추방, 유대인 이민제한, 공장법, 이자제한법,누진과세와상속세,도제제도 등을 주장하여 근로자를 위한 기독교 사회당(Christlich-soziale Partei)를 베를린으로 결성하여베를린 운동을 전개,1879년에는 프로이센 의회 의원,1881년에는 제국 의회 의원이 되었다[520][534]. 경제학자아돌프 바그너도 당의 창설에 관여한 기독교 사회당은 반유대 선전을 했다[8].
1879년무신론자로사회주의자였던 저널리스트의 빌헬름 마르가 '반세미티스(Antisemitismus)'라는 단어를 이용했다[9][488]. 함부르크 출신인 마르는브루노 바우어등의 영향을 받아 무신론에 기울여 1844년 스위스에서 노동운동을 조직해 실패했고, 1848년 혁명에서는 함부르크에서 혁명에 참가한 후 스위스에 망명하여 무정부주의 그룹에 참가했다[536]. 마르는 1862년 '유대의 감'을 발표하고 1879년 '비종교적 관점에서 본 게르만주의에 대한 유대 세계의 승리'라는 브로셔를 출판했다[536][537]. 마루는 이 중에서 금융계의 관습은 유대적이라는 것에 의심하지 않고, 유대인은 박해를 견디고 살아남을 수 있게 한 인종적 소질에 의해 승리했다고 “유대인은 어떠한 비난을 받고 그들은 18세기의 오랫동안 서양 세계를 상대로 싸워 온 것이다. 에위크티스(패자에게 재앙이 있으니)를 외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독일인은 이미 유태화하고 있으며, 반유대감정이 폭발해도 유태화된 사회의 붕괴를 막는 것 는 할 수 없다고 논하고 “우리에게 있어서는 신들의 황혼의 시작이다. 당신(유대인)은 지배자이며, 우리(독일인)는농노가되었다. 게르만 세계는 종말을 맞았다”고 결론했다[520]. 마르는 독일의 자유주의가 독일 재정과 산업을 유대인이 지배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8]. 이 책은 출판으로부터 수년에 수십 번의 판을 거듭했다[520]. 마르는 같은 1879년에반셈주의자 연맹(Anti Semiten Liga)을 결성하여 반유대주의의 최초의 대중운동이 되어 프리치에 영향을 주었다[536]. 이러한 말의 활동은 독일 민족에 의한 유대적 본질의 멸종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고 한다[8].
마르크스와 라살을 비판한 사회주의 경제학자오이겐 듀링은엥겔스에 의해서도 비판되었지만, '인종, 풍속, 문화문제로서의 유대인'(1881)[538], '완전한 종교에 대한 대체와 현대민족정신에 의한 유태성 제거'(188]등에서 사실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에 관해서 재능이 없는 유대인은 형상이나 꿈에 사로잡혀 살고, 비수에 의해 사고하고 있는 공상가, 신화 형성자이기 때문에 “북쪽의 인간은 보다 엄격해 냉정한 하늘 아래, 한계를 모르는 이 민족을 논리적으로 박멸해야 한다”고 말하고 유대인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이외의 방법은 없다며 “유대인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했다.410][426][520][540].
루터파의 역사학자로국민자유당의원하인리히 폰 트라이추케는1879년발표한 논문 '우리들의 전망'에서 유대인은 주식 시세와 출판계를 지배하지만 유대인과 게르만적 인간 사이에는 깊은 홈이 있어 '유대인이야말로 우리가 불행'이며 관용적인 최상의 독일인이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러한 견해를공유하고있다."유대인은 우리의 불행하다"라는 문구는 나치 시대에도 잘 끌려 나왔다[541].
이 논문의 배경에는 유대교도의 역사가하인리히 그레이츠의 존재가 있었다. 시온주의에 가까운 유대 민족주의자였던 그레이츠는 대저 '유대인의 역사'에서 기독교를 '숙적' '불경계천의 적'으로 명확하게 적시하고 유대인 기독교에 대한 개종을 '배신자'로 엄격히 비판했다[287]. 그레이츠는 신약성경을 탈무드를 사용하여 다시 읽고 유대교와 기독교의 균열을 확대하였다[287]. 그레이츠에 의하면예수님은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고발하셨으며,복음서는메시아의 출현을 후지혜로 증명하려 했던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였다[287][주62]. 또,탈무드에서 예수는 요셉 판데라와 처녀 밀리엄과의 불륜의 아들이며, 유대 공동체로부터 쫓겨 신의 이름을 이용하여 기적의 힘을 배웠지만 라비단의 유다에 몰려 사형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레이츠는 이것도제작이야기로예수는유대교
트라이추케는 그레이츠의 책이 기독교에 대한 광신적인 분노, 게르만인에 대한 증오라고 비판했다[287]. 트라이추케는 유대인의 동화와 개종에 의한 편입을 희망했지만, 개종을 거부한 그레이츠에 대해 “우리(독일) 민족을 이해하는 것도, 또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오리엔트인”이라고 비난했다[287]. Trichuke는 인종주의자가 아니었지만 폴란드에서 유입되는 동유럽 유태인은 언젠가 독일 신문과 주식을 지배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287]. 실제로 폴란드 (포젠)의 동유럽 유대인에게는 "베르리나 타게 브라트"지 사장 신문 광고업에서 모세 콘체른을 쌓은 루돌프 모세 (동생 아돌프는 일본의 헌법 기초에 종사했다)[542],국민자유당지도자 에두아르트 라스카, 경제학자 알투르 루핀,게르쇼무 쇼렘의 소조부가 있고 역사가 그레이츠가 있었다[287].
역사가테오도르 뭄젠은 트라이추케에 의해 반유대주의는 품행방정이 되었지만, 반유대주의는 국민감정의 낙태이며, 광신적 애국주의라고 평가했다[520]. 몸젠은 '로마의 역사' 등에서 유대인은 역사를 움직이는 효모이며, 유대인이 여러 부족을 해체함으로써 로마 제국의 건설에 공헌했다고 평가하고, 또 테오도르 프리츄나 체임벌렌 등의 유태인을 국민 집단의 파괴자로 하는 반유대주의7에대해. 그러나 그 뮌젠도 기독교는 문명인끼리를 연결하는 유일한 유대이며 유대인에게 기독교로의 개종을 집요하게 삼아 트라이추케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의 독일에의 융합(동화)을바랐다[287][523][주.범젠은 유대인이 독일인에게 동화하기 위해서는 희생을 해야 하고, 독일 문화에 우호적으로 참여해야 하고, 공민의 의무를 완수하고, 유대인의 특수한 작법을 폐지해야 한다고 했다[287]. 몸젠도 유대 민족주의자의 그레이츠를 지지한 것은 아니고, 뮌젠은 그레이츠에 대해 문예계의 구석에 있는 '탈무드 학사의 편찬점'에 불과하며, 로마 제국에 있던 유대인 역사가요셉스나 철학자필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존재인데, 왜 그런 상대에게 논쟁을 도전하는가, 라고 트라이추케를 계명했다287]. 몸젠은 트라이추케와 마찬가지로 국민자유당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트라이추케가 비스마르크를 지지했지만, 뮌젠은 비스마르크를 국민통합의 파괴자로 했다[287]. 또한 뮌젠은 리버럴 프로테스탄트의 '반유대주의 방위연합'을 창립했지만, 동 연합은 유대민족주의(시오니즘)에 불쾌감을 표명하고 '유대신앙의 독일국가시민중앙연합'을 창설해 시오니즘에 대항했다[287]. 반유대주의 방위연합의 알프레히트 웨버는 유대인에게도 반유대주의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동화를 거부하는 유대인을 비판했다[287]. 시오니스트의 헤르툴은 반유대주의를 비판하면서 유대인에게 동화를 이루는 반유대주의 방위연합에 대해 자존감정을 가지고 마지막 피난소를 찾아내려고 하는 유대인을 포기하려고 한다고 비판했다[287].
트라이추케의 논문에 대한 유대인 지식인의 반응은 유대인은 이미 동화되어 독일에 대한 애국심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많았고, 동화를 거부하는 그레이츠는 헤르츠르의 시오니즘이 등장하기까지는 예외였다[520].신칸트파의 유대계 철학자헬만 코엔은 유대교를 신봉하면서도 동화를 권하고[543], 유대인은 모두 독일인의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면 얼마나 행복했을 것이라고 상상 느끼고 있다고 주장했다[520]. 유대인의 평등을 호소한 자유주의자인 유대인 벨트르트 아웰바흐[주 64]는 만년에 기독교 사회당의 스티커와 독일 보수당의 해머슈테인[544 ]]에 의한 유대인 비판에 대해 "나는 독일인이고, 독일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고, 평생 전체를 통해서 유일하게 독일인이라고 느꼈다" "사라지지 않게, 유대인, 너는 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편지에 썼다[545].
1880년대 독일의 다른 사상
1880년에 건설된뮌스터의 회당. 1938년 포글롬에서 파괴되었다.누디즘(자연복귀주의)을 나타낸 『야외』(1897)
베를린에서는1880년부터1881년에 걸쳐 폭도가 유대인을 습격하거나 유대인 상점이나 회당에 방화한다는 폭동이 이어졌다[520]. 19세기 말 독일의 반유대주의를 퍼뜨린 것은 학교 교원, 학생, 공무원, 사무원, 레벤스 레포름(Lebensreform 생활 개혁 운동),채식주의자,생체 해부 반대론자, 누체 운동이나 자연 복귀주의의내츄리스트등의 도시인이자 시골 농민이나귀민.나체 운동에서는 게르만 인종과 로맨스 인종, 슬라브 인종, 유대 입종과의 혼인이 금지되었다[546][547].
반유대주의가 높아지는 가운데 철학자니체는 유대인에 대해 반복적으로 칭찬과 감사를 표명하고 반유대주의자를 '절규자들'이라고 비판했다[271]. 다만 니체는 어린 시절에는 반유태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바그너에게 보낸 편지는 독일의 풍부한 세계관이 철학상의 늑대와 강요한 유대 기질에 의해 사라졌다고 한탄했기도 했고[주66],동유럽유태인의 독일 유입에는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1873년-1876년)에서다피트 스트라우스와 잡지 '그렌츠보텐'의 집필진을 교양속물로 비판하고, '그렌츠보텐'도 니체를 비판했다[549]. 잡지 '그렌츠 보텐'의 중심에 있던 작가 구스타프 프라이터크는 황태자프리드리히 3세의 브레인이었다[549]. 니체는1875년'조잡한 힘과 둔감한 지식인'에 의한 기독교가 '제민족에 있던 귀족주의적 천재' 에대해 승리했다고 비판했고, 또 기독교는 그 '유대적 성격' 때문에 그리스적인 것을 불가능하게 하고 고대 그리스의 범형이 소멸되었다고4했다.1878년'인간적, 너무 인간적인'에서는 “유럽을 아시아에 대해 수호한 것은 유대의 자유사상가, 학자, 의사였다”며 유대인이 그리스 로마의 고대와 유럽의 결합이 파괴되지 않고 헛된 것에 대해 유럽인은 크게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271].1881년『눈광:도덕적 선입관에 대한 감상』에서는 유대인의 미덕과 무작법, 반란 노예 특유의 억제가 가득한 원한에 대해 논한 후 「만약 이스라엘이 그 영원한 복수를 영원한 유럽의 축복으로 바꿔버리면 그때는 옛 유대 신이 자기 자신과 그 창조와 그 선택된 백성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제7일이 다시 올 것입니다.”라고 유대인에게 인류 재생의 희망을 보았다.271].
유럽주의자였던 니체는 '반셈주의'를 황제와 비스마르크의 독일 제국 아래에서 독일 통일운동이라고 하며 '국수주의의 망상', '축군', '노예의 일원'이라고 비판했다[548][550]. 게다가 유럽은 유대인에게 최선이고 동시에 최악의 것, 즉 “도덕에 있어서의 거괴한 양식, 무한한 욕구, 무한한 의의를 가지는 공포와 위엄,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것의 낭만성과 숭고성의 전체”를 지고 있고 “유대인이 그 신경이 쓰이면(…), 곧 유럽에 우세를 차지하고, 전혀 말 그대로 유럽을 지배하게 될 수 있을 것임은 확실하다”고 말하고, 유대 고대의 선지자는 부와 무신과 악과 폭행과 관능을 하나로 융합하고, 빈을 성과 친구의 동의어로 하는 등 가치를 역도하며 도덕상의노예271][551]유대인을 "루산 치만의 스님적 민족"이라고도 평가했다[552]. 니체는 유대교를 고대의 순수한 유대교와제2신전이후의 제사 유대교를 구별하고, 신약성경은 제사 유대교를 구현한 것이며, 기독교와 제사 유대교는 노예도덕을 낳았다고 비판하고고대의순수.
니체는 황제 빌헬름 2세가1888년에 루터파 교회를 파악함으로써 리버럴 프로테스탄트가 국민주의의 담당자가 되었다[549]결과, 반유대주의 가형성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바울의 출자인 유대인을 칭찬한 것은 이런배경이다.또한 니체는 바울과 사도에 의한 예수의 신학화를 거짓말쟁이로 이카사마사라고 비난했다[548].
1888년9월의 '안티 그리스도'에서는 “유대인들은 인류를 현저하게 흔들었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자신이 유대인의 마지막 귀결임을 깨닫지 않고 오늘날에도 반유대적인 감정을 안고 있다”고 썼다[271]. 폴리아코프는 이 부분에서 니체는 반유대적인 방향으로 굴절했다고 보고 있다[271]. 오버벡은 니체의 반기독교가 반유대주의에서 온다고 한다[548]. 또 니체의 여동생엘리자벳 펠스터 니체는 남편베른하르트 펠스터와 함께 반유대주의 운동을 전개하고 나중에나치당의 지원자가 되었다.
독일 내셔널리즘을 지지한 것은 프랑스, 영국, 슬라브에 대한 적의와 두려움, 국내에서는 사회민주주의의 위협, 독일은 타락했다는 의식 등이었다[530].보불전쟁(1870-71년)으로 패배한 프랑스가 부흥하자 독일은예방전쟁으로슈리펜 계획을 책정했다[556]. 게다가1894년에노불동맹이체결되면, 독일에 있어서 대프랑스·러시아의2정면 작전이현실의 과제가 되었기 때문에, 군의 증강을 도모했다[556]. 보호 관세와 함대 건설을 축으로 한 농본주의 및 전 독일주의적인 「결집 정책」이 전개되어, 점차 독일·내셔널리즘은제국주의에 경사해 갔다[557]. 요즘 독일 제국은 극동의 중국과 일본에도 간섭하게 되었다[주 68]. 또 독일 제국은 영국 해군에 대항할 수 있는 독일 해군의 확장을 목표로 하고, 정부는 독일 함대 협회를 결성해 제국주의를 고무했다[주69].
1890년 이후 비스마르크 숭배, 황제 숭배=호엔조렐른 숭배가 퍼졌다[530].1896년에 황제 빌헬름 2는 “독일 제국은 세계 제국이 되었다”고 연설했다[559]. 같은 해 바르바로사 신화에 근거해,빌헬름 1세를 기리며 키프호이저 기념비가 건조되었다[530]. 바르바로사 신화에서는제3회 십자군총사령관으로서 출정 중에 사망한 신성 로마 황제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제국이 재흥될 날까지 튀링겐의 키프호이저 근처의 산에 잠들었다고 한다[530]. 또,토이트부르크 숲의 전투에서 로마에 의한 게르마니아 정복을 저지한아르미니우스기념비도 건조되었다[530]. 히틀러는 1914년 플랑드르의 회전으로 향하는 도중에 방문하고 있다[530].
자본주의의 진전에 따라 농촌의 위기가 의식되자 유대인은 농민을 뿌리내리고 독일 민족의 가장 진정한 것을 파괴하는 근대 산업 문명과 동일시되었다[560]. 오토 베켈의 헤센 농촌운동, 1893년에 설립된 농업자 동맹(Bund der Landwirte)은 반유태적이고,페르키시에서 반유태적인 운동은 농촌지역에서도 침투해 갔다[560]. 빌헬름 폰 포렌츠의 소설 '뷰트너의 농민'(1895)에서는 농민이 유대인에게 빚을 지고 토지를 저당에 넣지만 유태인은 그 토지를 공장에 팔고 농민은 자살한다는 근거로 유대인에 대한 반감을선동했다[560].가톨릭 문학 개혁 운동의 컬 무트는 과학·통상·주식·저널리즘이 국제적(인터내셔널)인데 비해 문학·농경·수공업·예술은 국민적(내셔널)인 것으로 하여 “유대인은 어디에도 집이 없고, 그래서 또 어디에도 집을 갖고 있었기때문에범함2.
프랑스 제3공화정(1870년 - 1940년)이1881년에출판의 자유법을 성립시키면 프랑스 시민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의견을 자유롭게 표명할 수 있게 되어 반유대주의적인 의견의 공표도 그 권리를 보호받게 되었다[563]. 1881년 7월, 카톨릭의 기관지 '동시대인'은 러시아 포글롬, 그리고 독일과 루마니아에서도 반유대 캠페인이 맹위를 휘두르고 있지만, 카릭스트 드 월스키의 유태인의 이번 불행은 자신의 책임을 묻는다 그 외에는 어쩔 수 없는 것이며, 유대인은 태고의 옛날보다 지상의 지배권을 가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보도해, 그 전거는 게이트슈의 소설 「비아리츠」(1868)에 요구되어 이것은 「시온 현자의 의정서」로 받아들여졌다279]. 마찬가지로 1881년 파리에서 '반유대인(L'Anti-juif) 민족방위기관지'가 주간에 출판되었다[279][564][565].
1881년 말 프랑스 가톨릭 자본계의 대형 은행유니온 제너럴(Union générale)은행이파탄하면, 이 은행의 창시자 본투[566]는 파탄의 원인을 로스차일드에 의한 금융조작이라고 말했다[279]. 가톨릭 성모 피승천 수도회의 바이이 형제가 발간한 『크루아』지[주 70]나 잡지 '페를란(순례자)' 등에서 은행의 도산은 유대계 재벌의로스차일드가의 책모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유대 음모론이 펼쳐져 재산을 잃은 가톨릭 시민의 반유대 감정을 양성시켰다[563]. 이 소동은모파산의 '몬트리올'(1887),졸라의 '금'(1891), 폴 부르제의 '코스모폴리스'(1893) 등의 소설로 그려졌다[279]. 또 샤보티사에 의한 '우리의 지배자 유대인'[567]과 시라크의 '공화국의 왕' 등 유대 자본주의론이 등장했다[563].
좌익의 우젠느 제리온=단그랄은,1882년에 간행한 '셈인과 셈주의'에서 역사학자미슐레의 '인류의 성서'에서 낮의 민족과 밤의 민족의 구분을 끌어 아리아 민족 혹은 인도·유럽 민족만이 위대한 문명과 정의와 아름다움을 가지고 셈인은 퇴화와 퇴폐에 있다 그러면서 “셈의 피와 교리가 아리아를 본질로 하는 주민과 문명에 침투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라고 우려하고, 셈주의(유대주의)를 “진정한 국가내 국가.279][568].
1884년혁명가블랑키의 오른팔에서파리 코뮌정부의 코뮌 평의회 의원을 맡은 혁명적 사회주의자인 규스타브 트리돈[572]은 '유대의 모록주의'를 출판했다[573]. 트리돈은 이 책에서 열등인종셈족은 문명의 어둠, 지구의 악이며,페스트를가져온다고 셈족과의 전쟁은 귀종 아리아인의 사명이라고 했다. 고대 팔레스타인의모로크 신믿음에서의인신 봉사를 비판했다. 또한레위기에서는모로크 신에게 아이를 의식으로 바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574].
이와 같이 제3공화정에서는 반유대주의는반교권주의의좌익에 의해 지지되었다[279]. 그러나 1880년대가 되면 프랑스의 반유대주의를 주도하는 것은 사회주의에서 가톨릭 진영으로 이어졌다[279].
1879년부터 1881년에 걸쳐 샤보티 신부, 클로디오 자네, 다르존 신부 등이 반 프리메이슨과 반유대의 사상을 전개했다[279]. 에마뉘엘 샤보티 신부는 1880년에는 가명 산 탄드레에서 '프리메이슨과 유대인'을 발표하고 있었지만, 출판 자유법 시행 후인 1882년에는 본명으로 '우리가 주인, 유대인'을 간행했다[279][575].
1884년, 클로디오 자네와 루이 데스탬프는 공저 '프리메이슨과 프랑스 혁명'을 발표했다[576]. 자네는 1892년 '19세기의 자본, 투기, 금융'에서 반유대운동은 원래 종교운동이며 반자본주의 투쟁으로 반유대를 내세우는 사회주의는 기독교에서 본질을 빼앗으려는 선동이라고 논했다[577][578].
가톨릭 세력에 의한 반공화주의·반유대주의의 배경에는프랑스혁명 이래의 반기독교화운동과정교분리의 과정이 있었고,제3공화정정부와 프랑스·가톨릭교회와의 치열한 대립이 있었다[563]. 교회는 공교육으로부터 분리되었고, 가톨릭이 가정을 파괴한다고 반대하고 있던 이혼법도프리메이슨의줄 페리와 유대계의 알프레드 나케에 의해 성립되었다[563]. 1880년에는 정부무허가의 종교단체가 해산되어1886년에는 공립학교 교사를 비성직자로 한정하는 법률도 성립했다. 나케는 유대계였기 때문에 가톨릭 주교들이차별적인 언론을 받았다[563].
1880년대 당시 프랑스 유대인의 인구는 8만명 미만이며, 전체의 약 0.2%였지만, 실업이나 문학, 예술로 활약하는 유태인이 눈에 띄었다[579].
1880년대에 많은 저작으로콜레주 드 프랑스심리학 교수 줄 술리는 인간은 인종에서 유래하는 본능에 의해 움직였고, 아리아 인종의 용감함과 셈 인종의 무기력함은 본성에 의한 것으로 했다[474].
드류몬
에두아르 드류몬(1844-1917)드류몬 『유대의 프랑스(La France juive)』(1886년)
1886년, 저널리스트 에두아르 드류몬이 1200페이지의 대저 '유대 프랑스'를 출판했다[580]. 드류몬은푸리에파의 투스넬이나프루돈등사회주의적 반유대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474]. 드류몬은 이 책의 시작 부분에서 “프랑스 혁명으로 유일하게 얻은 것은 유대인이다. 이왕, 앙리 4세, 루이 14세의 프랑스에서는 유대인에게 문을 닫고 있었는데, 공화주의와 비종교성(라이시테)의 근대 프랑스는 「유대인의 프랑스」가 되었다고한다579]. 게다가 유대인은 '금 즈쿠메에서 강욕, 음모와 책모를 좋아하는 교활한셈인'이며, 그에 대해 '열정이 풍부하고 영웅적이며 사람을 의심하는 것을 모르는아리아인'과 대비해 요즘 기독교도 박해는 프랑스의 파멸을 눈 적을 삼은 음모의 서장에 불과하며, 권말에서는 1800년 전부터 변함없이 그리스도는 민중의 집의 창문에 매달려 가혹한 말에 노출되어 마을에는 신살의 집착에 쇠약해지지 않는 유대인이 넘쳐나고 있다고 했다.579]. 또한 유대인은 적국 독일인의 간첩이자 독일 유태인 로스차일드의 은행에 의해 프랑스 민중은 독일과 유태인에게 착취되고 있다고 논했다[581]. 이 책은 19세기 프랑스 최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프랑스의 반유대주의를 양성했다[582]. 드류몬은 전통적인 기독교 반유대교주의와 현대의과학적 인종 이론을결합하여 새로운 유형의 반유대주의로서의 반섬주의(antisémitisme)를 확산시켰다[582].
드류몬은 무명으로 출판사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유대인 싫어하고 유명한 유행작가알폰스 도데가 노력하여 출판이 실현되었다[582][주71].
드류몬의 '유대 프랑스'가 출판되면 도데는 '인종 계시자'로 비평가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인 줄 루미터(Jules Lemaître)는 '19세기 최대의 역사가', 베르나노스는 '천리안을 넘은 관찰자'로드류몬.이 책에 대해 유대계 언론은 비판했지만 성직자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반향을 불러 가톨릭계 『크루아』 종이는 반유대주의자의 조르드 드 파스칼 신부가 유대인에 대한 '전우'라고 지지하며[582]가톨릭계의젊은 저널 리스트에 영향을 주었다.게다가 고급 일간지 '피가로'에서 편집장 프란시스 마냐르가 드류몬이 주장하는 유대인 재산의 몰수는 공화주의자에 의한 가톨릭 교회의 재산 몰수와 같고, 드류몬은 공화주의자 부유층에 대한 '가톨릭 사회주의자'라고 소개한다.]와 당시 최대의 대중지 '쁘띠 줄날', '마탄', '쁘띠 파리장', 보나팔티스트, 리버럴파 가톨릭, 사회주의 급진파 등 우파와 좌파를 불문하고 다른 미디어도 드류몬을 다뤘다[584]. 다만 '쁘띠 파리장'은 '광신적인 증오의 책', '중상문서'라고 비판했다[563]. 드류몬의 『유대인의 프랑스』에는 3000명의 유대인명 일람이 게재되어 있었다[579]. 우파 올레아니스트의 '고로와' 편집장 메이엘이 드류몬의 책에서 '유대인'으로 중상당하고 있는데 분노하고결투를 신청했다[584]. 결투에서 메이엘이 규칙 위반을 했을 때, 드류몬은“더러운유대인!드류몬의 '유대 프랑스'는 프랑스의 반유태주의 양성에 큰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어로 번역되어[563]또한 카릭스트 드 월스키 '유대인 러시아'(1887), 조르주 메니에 '유대인 알제리'(1887), 프랑소 와 토르카스 '유대인의 오스트리아'(1900), 도에달스 '유대인의 영국'(1913) 등의 모방서가 잇달아 간행되어 갔다[579]. 드류몬은 그 후도 저작을 계속해서 간행했다[주 73].
같은1886년에 사회심리학자규스타브 르봉은유대인은 예술, 과학, 산업 등 문명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을 전혀 하지 않았고, 구약성서는 추잡한 이야기를 가득한 것으로 비난했다[579][585].
1888년파나마운하 의옥 사건에서는 사업가리셉스가수에즈 운하를 건설한 뒤파나마 운하건설에 착수했지만 기술적으로 공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발각되었기 때문에채권을발행하여 자금을 모았지만 파탄했다. 레낙 남작과 코르네리우스 엘츠, 알톤 등 인수공작인이 모두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반유대주의가 높아졌다[579].
혁명 100주년인1889년에 개종 유대인 조셉 레만 신부는 논문 '유대인의 우위'에서 유대인은 무고한 신의 아들을 죽게 했다고 말하고, 2년 후에 풍자 주간지에 '로스틸드가'를 발표했다[579][586]. 1889년 9월, 가톨릭계 저널리스트의 잭 드 비에와 육군사관학교의 마르키 드 모레스 후작[587]이「프랑스 반유대 동맹(Ligue antisémitique de France)」을 설립해, 드류몬은 회장이되었다[474][58.부회장 비에의 직함은 '민족사회주의자(National-Socialiste)'이며나치당(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의 선구자였다[588]. 마르키 드 모레스 후작은 북미다코타 준주에 목축 왕국을 세웠고, 파리에서는 반유대주의와샌디칼리즘(노동조합주의)을 융합시켜 도살업자에 의한 무투집단을 조직했다[589].
1890년, 파리 국립할인은행의 경영이 막혔을 때, 로스틸드가가 원인이 되었다[579]. 같은 해 가톨릭계 신문 '라 크루아'는 '프랑스에서 가장 반유태적인 신문이다'라고 자칭했지만, 이것은 반유대주의라는 것이 지지되었기 때문이다[579].1891년에는 유대인의 칭칭인 youtre(유다공)를 씌운 신문 '반유다공(L'Anti-youtre)'이 창간되어 지금까지의 반유대주의는 교권파에 의한 것이었다고 불만을 표명했다[579].
1892년드류몬이 반유대주의 일간지 '리블 파롤'을 창간하고[582], 1892년 5월부터 동지상에서 유대인 장교는 국방기밀을 거래한다고 비난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590]. 유대인 자매에는 군직에 종사하는 것이 많았고, 사관학교에서도 1%인 4만명 중 300명이 유태인이었다[590]. 덧붙여 『리블 파롤』의 출자자의 이권가게랑은 그 2년전에는 반유대주의에의 싸움이라고 칭해 유대인에게 자금 제공을 요구하고 있어 또 『리블 파롤』의 관재인 클레뮤는 개종 유태인이었다[579]. 또 유대계 장교 마이에르와 모레스의 1892년 6월 23일의 결투에서 마이에르가 죽으면, 드류몬은 이 정도의 용사의 피가 전장에서 조국을 위해 흘러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슬픔이라고 생각한다고 술 베루 등 유태인이라도 '피에 의하여 세례'를 거치면 '좋은 유대인'이 된다는 관념이 있고, 프랑스의 반유태주의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보다 느슨해졌다고 폴리아코프는말한다579].
가톨릭 사상가 레온 블로와는 1892년 드류몬 일파를 비판하고 '중세의 순수한 반유대주의'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유대인에 의한 구원'을 간행했다[591][592]. 블로어에 따르면, 드류몬들의 상업화된 '좌익적 반유대주의'는 유태인이 프랑스의 금을 훔쳤기 때문에 반환해야 한다는 돈벌이주의적 주장에 불과하며, 이는 중세의 반유태주의 유산을 망쳤다[593]. 블로어는 “유대인의 역사는 마치 제방이 강을 버리고 그 수위를 상승시키면서 인류의 역사를 깨고 있다”며 유대인과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친구, 초기 순교자 전원을 낳은 백성 "중세 유럽은 유대인을 "전용 개집에 밀어 넣어 특수한 초라한 옷을 입어 일반인에게 그들과의 만남을 미리 회피시킨다는 양식(봉상수)을 발휘했다"고 논했다.279]. 블로어의 이 책에서 유대인은 '세계의 추악한 것들 모두의 합류점'이며, 썩은 뻣뻣한 옷을 입은 유대인 고물상에 대해 '티푸스를 수출하기 위해서'라고 불쾌감을 쓰고 있다[593].
1892년, 랜스 교구 홍보에서는 로토실드가는 유태인종의 독일 국적이며, 프랑스인이 아니라고 쓰였다[579]. 클레르몬 교구 홍보에서는 독일인과 유태인은 프랑스인을 패자·노예로 취급해 왔다고 비판했다[579].
드레퓌스 사건부터 조국 동맹·액션 프랑세즈까지
드레푸스 대위의 불명예한 제대를 그린 삽화
1894년독일 대사관이 있는 무관 슈발츠코펜[594]의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군사기밀문서는 필적감정에서 유대인대위드레퓌스의 것으로 여겨지고, 게다가 드레퓌스는 이탈리아 대사관에서도 인수되었다고 고발되었다[590]. 군은 증거 불충분한 채 비공개 군법회의에서 드레푸스에 유죄 판결을 내리고 남미불령 기아나앞바다의악마섬에서 금고형으로 했다[590]. 이드레퓌스 사건은분죄사건이었지만, 그때까지 상궤를 벗어난 기습에 불과했던 프랑스의 반유대주의는 이 이후 결정적인 조류가 되었다[579].
1896년에 정보부장 피칼 중령은, 진범인은 헝가리 태생의에스테르 전갱이소령인 것을 밝혀냈지만, 군은 권위 실추를 두려워해도 소멸을 도모해, 피칼을 좌천, 에스테르 전갱이를 무죄 석방했다.
작가졸라는1898년1월 13일신문 '오롤'에서 '나는 탄핵한다'를 발표하고 드레퓌스의 불법투옥을 고발했다. 그러나 졸라는 고소되어 명예 훼손으로 유죄가 되었다. 1898년 1월과 2월에 프랑스 각지에서 69건의 반유대 폭동이 일어나 앤제와 마르세유에서 약 4000명, 낭트에서 약 3000명, 루앙에서 약 2000명의 군중이 유대 상점과 회당을 파괴했다[474]. 반유대주의의 시위와 폭력 사태가 잇따른 가운데, 드레페스파의 피갈로 편집장 로데는 경건되었다[590]. 알제리에서 반유대 폭동이 발생하면 맥스 레지는 드류몬에게 입후보를 타진했다. 1898년 5월총선에서 드류몬은 당선되었고, 알제리 선출의 3명의 의원과 의회 내에서 반유대 그룹이 생겼다[596].
1898년 여름, 드레페스 유죄의 증거로 여겨져 온 문서가 위서였음을 앙리 대령이 인정한 후, 자살했다[590]. 9월 6일 가제트 드 프랑스에서샤를 모러스는 앙리 대령은 “국가의 위대한 이익에 대한 영웅적 봉사자”라고 논했다[596]. 또한 모라스는 "유대교가 자란 진정한 개신교는 태어나면서 국가의 적"이라고 개신교도 적시하고 있었다[596]. 1898년 12월에 드류몬은 앙리 대령 미망인을 위한 모금 활동을 개시, 드류몬이나 모라스 등은 앙리 대령이 조국에 대한 순교자라고 주장하고, 앙리 대령 기념비를 위한 모금에 73명의 의원, 모리스 발레스, 시인 장 로랑,지프,피에르 루이스 , 프란소와 코페, 폴 발레리, 폴 레오토 등의 문인 시인이 이름을올렸다590][597].
졸라와 프랑스 인권동맹을 결성한 인권파가 드레페스를 옹호한 것에 맞서 1898년 10월 말 교사의 도세와 시브톤이 철학 교수 앙리 보조아[598]의조력을 얻어 반드레페스 문서를 작성하여리세를순회했다.1898년 12월 보조아와 저널리스트의 퓨조가 '액션 프랑세즈' 기사에서 프랑스 사회를 재건하여 강력한 국가가 된다고 주장했다[599]. 도세 등의 활동에 찬동한아카데미 프랑세즈회원 시인 프란소와 코페, 줄 루미터,모리스 발레스등은1898년연말부터 다음 해에 걸쳐프랑스 조국 동맹을 결성했다. 화가의도가나르누아르, 작가의프레드릭 미스트랄(노벨 문학상), SF소설의줄 베르누,콜레주 드 프랑스교수·수학자카미유·조르단, 물리학자피에르·듀엠등 다수의 학자·예술가가 가맹했다[597]. 발레스는 "드레페스 사건 그 자체는 무의미하다. 중대한 것은 반군국주의와 국제주의의 교리 때문에 드레페스가 날조되어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라고 선언했다[597]. 다만 조국동맹에서는 반유대주의와 내셔널리즘의 교리는 물러나면서 반유대주의자도 받아들인다고 했다[597].1899년1월 19일조국동맹 의장 루미터가 유대인, 개신교, 프리메이슨이 연대하여 과거의 복수를 보상하기 위해 지난 20년 프랑스의 권력을 쥐고 있다고 연설을 했다[597][주75]. 다만 동맹회원인아나톨 프랑스는 드레페스 옹호파였다[597].
그러나 조국동맹의 목적이 없는 불만을 가진 푸조와 보조와샤를 모라스는1899년 6월, 반유대주의-반의회주의-프랑스 전통주의를 명언한 우익조직액션 프랑세즈를 결성했다[599]. 액션 프랑세즈는 프리메이슨 정신, 개신교 정신, 유대 정신에 대해 가톨릭을 칭양했다[599]. 모라스는 완전한 내셔널리즘은군주제의 부흥에 있다고 왕정주의를 주장했다[599]. 액션 프랑세즈는 독일의국가 사회주의와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민족의 조상에 대해서는 기독교교파를 넘은 결속을 목표로 하는에큐메니즘의 입장을 취하고, 유대인은 고려외로, 게르만인뿐만 아니라, 켈트인, 리구리아인도 갈라티아인,그리스도인8,8순수한 아리아인의 혈통을 고민하지 않는 액션 프랑세즈에 대해, 후년 1940년대에 파리의 나치 지지의프랑스인민당원 의 인류학자 조르주 몬탄돈[601]은 「액션 마라노」라고 비판했다[387].
사회주의자 구스타브 테리는 반군국주의, 반교권주의, 반유대주의이며, 창간한 루블지에서는 '유대인은 적', '유대연', '권력이 조직하는 유대 침략', '어디서 유대인'이라는 정해 불평이 많이 사용되었다.[602]또 『시온 현자의 의정서』는 1897년부터 1899년 사이에 파리에서 반죽되었다[590]. '시온 현자의 의정서'는러시아 제국 내무성 경찰부 경비국 파리부장의 표토르 라티코프스키가 현재도 신원불명의 작자에게 의뢰하여 작성한 것이었다[590].
졸라의 「가탄 핵」을 게재한 「오롤」지주간으로 사회주의자의클레망소는 드레페스 옹호파였지만, 1898년의 「시나이의 기슭에서」에서는 유다 야인은 "손톱을 뾰족한 양손으로 어색한 물건에 매달린다", 활력이 가득한 인종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인간의 보물"이라고 칭찬하는 한편으로 " 너희로부터의 신들을 우리에게 밀어내려고 했기 때문에, 멸시, 미워, 박해를 계속해 온 그(셈인)는, 지상의 패자가 됨으로써 다시 일어나, 미즈카라를 완성으로 이끌려고 한다”고 말해 “아리아적 이상주의의 관점에서 나는 이 사실(유대인의 활력)을 하나의 불행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논했다.590][603]. 클레망소에 따르면, 기독교인은 유대인을 근절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지만, 그것은 기독교인의 소행을 바로잡는 것만으로 그 필요가 없어진다고 했다[590].
1889년잭 드 비에와 마르키 드 모레스가 프랑스 반유대 동맹(Ligue antisémitique de France)을 결성했다. 독일에서는 존넨베르크(Max Liebermann von Sonnenberg)가 독일 사회당(Deutschsoziale Partei)을 결성했다.
1896년드레퓌스사건에 충격을 받은테오도르 헤르츠르는 '유대인 국가'를 현저히시온주의운동을 일으켰다. 헤르쯔는 "프랑스 유대인은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이것은 프랑스 유태인의 동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며, 프랑스인으로의 동화를 주장하는 유대 장로 회의 (코 인시투아르)는 “프랑스 혁명으로 이미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됐다”고 주장했고, 또 많은 유대인 사상가들이 기독교인보다 프랑스인이 되고 싶다고 공언하고 있었다[579]. 다음1897년, 헤르츠르는바젤에서 제1회시오니스트 회의를 주최했다[590]. 유럽뿐만 아니라 러시아,팔레스타인, 북아프리카 등에서 200명 이상의 대표가 모여 백색과 파랑의 2색 깃발을 내걸었다.
1897년봄, 사업가 줄 겔랑이 '반유대 동맹'을 결성했다[474]. 모레스 후작이 국정선거 활동을 위해 만든 반유대 조직을 재건한 것으로 '국민의 노동'을 옹호하고 프랑스에서 은행이나 철도 등 기업을 소유하는 유태인의 굴곡에서 프랑스인과 국민을 해방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유대인의 공직추방을주장했다.
1902년시오니스트요셉 클라우스너는 '탄나이 시대의 유대 민족의 메시아적 이념'에서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며 선지자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했다[607].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1866년보전전쟁에서 프로이센에 패배한오스트리아 제국에서는프란츠 요제프 1세(재위 1848년 - 1916년) 치하인1867년,아우스그라이히(타협책)에서헝가리왕관령에 있어서의마자르인지도자에게 자치권을 인정받아오스트리아그러나 지배계급의 독일인들 사이에서는 독일 내셔널리즘이 높아졌고,오스트리아 제관령에서는 인구 3분의 1의 독일계 마이너리티의 지배가 계속되는 것에 대해 슬라브계 주민은 불만을 높였다[608]. 다민족 국가였던 오스트리아는 대유대인 융화책을 취해 1860년대자유주의적인 풍조 속에서 직업·결혼·거주 등에 대해 유대인에게 부과된 각종 제한을 철폐했다. 이것은 지난 세기의 요제프 2세의 '관용령'의 완성이었고, 미국 독립 선언이나 프랑스 인권 선언에서 주창된자유·평등의 실현이기도 했다. 토지 소유가 금지된 유대인들에게 거주의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에 그때까지 묶여 있던 토지에서 쉽게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에서도 반유대주의가 서서히 높아졌다.1880년아우스트리어크스 필명의 저작 '오스트리아 유대에 연계된 보석'은타페 백작이 조국을 유대인에게 팔았다고 비판되었다[609].
합스부르크 제국의 오스트리아에서 최초로 대대적인 반유대주의를 주장한 것은 게오르크 폰 셰넬러[610]이다. 셰넬러는 반교권주의적 사회주의와 게르만 민족주의를 주장하고[520], 또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관세동맹을 목표로 했다[609]. 셰넬러는 보습전쟁에서의 패배에 충격을 받고, 제국이북독일 연방으로부터 조임된 것을 굴욕이라고 느끼고, 비스마르크를 신봉하고, 오스트리아제국과독일제국의 통일(범게르만주의)을 주장했다[608]. 셰넬러는 초기의 국민사회주의자이며, 자유주의, 유대, 가톨릭, 합스부르크 다민족 국가를 적시하고, 독일 제국이나 독일 황제 빌헬름 1세를 숭배했다[608]. 셰넬러는 '하일'이라는 인사 '퓨러(총통)'를 칭호로 하며, 이것은 히틀러가 나중에 나치당에 반입했다[608].
1882년납세액에 기초한 제한선거가 개정되어 오스트리아는보통선거가되었다[520]. 이에 따라 중간층, 하층, 수공업자, 소지주까지 선거권이 확대되었고, 정치단체가 지지를 설치하기 위해 반유대주의적 정책을 내세워 나갔다[520].1882년드레스덴에서 반유대주의 국제회의가 열렸고,1883년에는 켐니츠에서 열렸다[520]. 당시 비엔나 사회주의자 크로나베터는 "반유대주의란 바보의 사회주의이다"라고[611]. 또 비엔나의 유대인 사회학자 루트비히 곰프로비츠는 '인종의 싸움'(1883)에서 유대인은 고대 페니키아인의 영향으로 상인이 되었지만 “유대인은 소멸하는 것을 몰랐다”고 했다[342][612].
합스부르크 제국에서는 자유주의가 범락하고, 내셔널리즘, 기독교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가 큰 세력이 되었다[608]. 히틀러는 사회민주주의 시위대의 조직력과 행동주의에 강한 인상을 갖고 대중은 어중간하고 약한 것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교훈을 배웠다[608]. 오스트리아 기독교 사회당을 이끌었던칼 루에이거는 반유대주의를 기표로 하여 오스트리아의 귀족과 성직자로부터 비판을 받았으나, 하층 중산계급이나 장인층, 도시 프롤레타리아층, 또 교황 레오 13세와 마리아노 람포라 추년의 지지를 받았다.520]. 루에이거는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를 그 정신상의 아버지로 삼고 계몽 합리주의를 주요한 적으로 하는 기독교 사회 운동(Christlichsoziale Bewegung)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613].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루에이거는 잡지 '알게마이네 룬트샤우'에 '조국을 구하기 위해 유대인에게 붙잡혀 있는 자유주의와 싸운다'는 논문을 게재했다[614][608]. 1890년 연설에서는 거대한 배에 유대인을 싣고 바다에 가라앉으면 유대인 문제는 해결된다고 말했다[608]. 1899년 연설에서는 유대인은 자본과 보도를 통제하고 흉악한 테러행위를 일으키고 있다며 '유대인 지배에서 기독교인의 해방'을 호소했다[608]. 또 늑대와 표범이나 호랑이 쪽이 「인간의 얼굴을 한 육식수」인 유대인보다 인간에 가깝다고 말해 「유대인의 마지막 1명이 사라질 때까지, 반유대주의는 사라지지 않는다」라고 했다[608]. 비엔나 시장이 되면 '누가 유대인인가는 내가 결정하는 것'으로 유대인을 공직 추방했지만, 지기의 유대인은 해고하지 않았고, 또 가난한 유대인에게는 관대하고 계피의 제식에도 참석했다[520]. 비엔나에서 미술을 배웠던아돌프 히틀러는 루에이거의 연설에 감동하고 칭찬했다[520]. 그러나 나중에 히틀러는 루에이거는 부모 합스부르크에서 가톨릭 색이 강하고 바닥이 얕다고 비판하기도 했다[608].
헤센 농촌운동을 전개한 민주화운동가·민속학자인 오토 베켈은1887년책자 '시대의 왕, 유대인'에서 반교권, 반자본주의를 논했다[520][615]. 유대인에게 착취된 부를 되찾으면 독일의 농민은 구제된다고 주장한 베켈은 반유태주의자로서 처음으로 제국의회의원이 되었다[235].1893년에는 베켈이 이끄는 반유대 국민당(Antisemitische Volkspartei)은 의석수가 16석이나 되었다[520]. 이 1893년은 오스트리아에서 반유대주의에서의 절정이었다[520].세기말 비엔나는 당시의 반유대주의 운동의 중심지이며,1897년의 보통선거에서는 반유대주의 진영이 제국의회에 보내지고 있었다[271].
반면 유대인 심리학자프로이트는 1882년 편지에서 노트너 겔[616]]교수의 외모에 대해 "게르만의 숲에 사는 야만인" "금발로 머리, 뺨, 목, 눈썹, 그들 모두 머리카락으로 덮여 피부와 머리카락과는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유대계 지식인에게도 인종적인 생각이 보였다[520].
오스트리아의 프란츠슈타인은 셰넬러의 영향을 받아1899년에 게르마니아·독일 노동자 연맹(Bund der deutschen Arbeiter Germania)을 창설하고, 그 범 게르만 노동자 계급운동은 사회민주주의와 붉은 테러를 공격해 히틀러에 영향을 주었다[608].
알렉산더 1세는유대인을 시민으로 해방하면 유대인의 기독교로의 개종을 앞당길 수 있다고 유대인 해방을 계획했다[217].
니콜라이 1세 시대 (1825-55)
니콜라이 1세(재위: 1825-1855년)는 유대인 대책을 강화하고, 교육상우바로프의 제안으로 유대인에 대해 러시아 학교에 통학, 러시아어 수업을 강요했다[217]. 그러나 제국공인의 학교에 다니는 유대인 학생수는 수천명에 그치고 유대인에 대한 불신감을 일으켜 황제는 밀수입이나 스파이 혐의를 받은 유대인은 정주지역의 경계선에서 50km 이내의 마을이나 마을에서의 강제퇴거를 명령했다[217]. 또한,디가브리스토의 난의 지도자 중 한 명인페스테리는 황제의 유대 정책에 동조하여 유대인은 강제적으로 러시아인으로 동화시키거나 팔레스타인 추방 중 하나라고 말했다[617].
1827년에 성립한 유대인 징병법[618]에서는 그때까지인두세로 병역 면제된 유태인 병역을 의무화하고, 프로이센의광저우 제도를모방하여 7세 이상의 유대인 자녀를 칸토니스트로서 군사교련에 보내, 기독교로 개종시켰다[2].
다마스크스 사건(1840)의 발생에 의해, 니콜라이 1세는 합병한 폴란드의 유태인의 조사를 명령해, 블라디미르 다리는 일부 광신적해시드파는의식 살인을 실시하고 있다고 보고했다[619].
작가알렉산드르 푸시킨은 소설로 유대인을 배신자나 스파이로 그려[617]미완의 '음각의 기사'에서는 기사가 유대인 고리 대출을 향해 '지독한 유다공, 아니, 경애하는 솔로몬군'이라고 말한다[620].
작가니콜라이 고고리는 소설 '타라스 부리바'(1835년)로 비겁한 착취자 유태인 양키엘이 코사크 영주에 의해 드니에풀 강에 가라앉는 모습과 '날개를 찔린 닭'과 같은 모습을원활하게그렸다.이 '날개를 찔린 닭'으로 유대인을 활기차게 그리는 수법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 기록',미하일 살티코프-시체드린의'페테르부르크가 있는 시골 일기',안톤 체호프의 '히로노',바베리의 '기병대'(192)
알렉산드르 2세(재위: 1855년 - 1881년)는 유대인 징병법을 폐지하고, 학교에서 종교 교육 을 자유선택으로 유대인에게서는 '해방 짜리'로 불리며 유대인 부유층에서는 러시아어 사용이 가까워져 유태인 신문이러시아어로출판된다.
러시아의 부유 유대인에게는 은행이나 금광개발과 철도사업에서 성공한 긴츠부르크가와 금융자본가에서 남러시아 탄광회사를 경영하여 러시아 귀족이 된 폴리야코프가가 있었다[621].니콜라이 네크라소프는 슬라브인 상인은 양심의 저책에 의해 창에서 금을 던져 버리는 반면, 부유 유대인은 태연하고 착취 횡령하고, 그 성과를 외국에서 저축 운용한다고 말했다[617].
1869년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한 유대인 야곱 브라프만은 '카할의 책' 등으로 유대인은 비유대교도를 상업·산업에서 쫓아내 모든 자본과 부동산을 자신의 회에 모아 러시아민 대중을 착취하고 복종시켜 러시아에 국가내 국가를 형성하려 했고, 유대인 국제조직은 전세계 유대공동체(카할)를 통솔해 '세계 이스라리엣 동맹'은 프랑스 혁명을 일으켰다고 논했다.[622][623], 도스토예프스키에 영향을 미쳤다[624].
작가교도르 도스토예프스키는 개종 유대인 브라프만의 '카할의 책'(1869)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624].1873년이후 사망할 때까지 평론 '작가의 일기'나 소설로 유대인에 대한 공격을 반복했다[617].
1873년에는 러시아 민중이 음주로 타락한 채로 남아 있으면 유대인은 민중의 피를 흩뜨리며 농촌은 유대인에게 예속된 거지의 무리가 된다고 경고했다[625].
1876년6월에는 유대재계인이 이익을 위해농노제의 부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617], 유태인이 러시아의 토지를 구입하고 원리를 되돌리려고 토지 자원이 고갈한다고 비판하면 쿠야가테는 백성도 소모되어 버리면 동권도 아무것도 있었던것이아니다.626]. 또 러시아가크리미아를 획득하지 않으면 유대인이 쇄도해 버리자 위협해[627]“최근의, 현명한 타락, 물질주의, 유대 기질”에 좌절하지 않는 러시아인을 칭찬했다[628]. 같은 해 10월에는 러시아에서는 농촌을 먹는 고리대여 유대인이 군림하고 있어 "돈이 있으면 뭐든 살 수 있다"는 왜곡된 부자연스러운 세계관의 소유자인 상인장자는 돈이 되면 유태인과 맺어 에서 누구나 배신, 애국심이 없고, 교육으로 무장한 러시아 지식인은 '더러운 거래소적 타락의 시대'에서 물질주의의 괴물을 격퇴할 수 있지만, 민중은 '이미 유대인에게 몰려들었다'고 진단했다629]. 같은 해 12월에는 러시아 지식인에게는 '유대화한 사람들'이 있어 경제면에서만 전쟁의 해를 밝혀 은행 파산이나 상업 정체로 사람을 협박했고 터키에 대해 러시아는 군사적으로 무력하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당면한 문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비판했다[630].
1877년3월의 '유대인 문제'에서는 유대인은 학대당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지금까지 유대인은 고리 대여업에 의해 러시아의 농민, 미국의 흑인을 착취해 왔다고 반론했다[631]. 무자비하고 비례한 유대인들은 러시아인을 경멸하고 미워하고 유럽 금융계에 군림해 국제정치를 조작해 “유대인의 완전한 왕국이 다가오고 있다”고 논했다[617][631][632].
1877년 4월에는, 유럽에서 2세기도 러시아를 미워하고 있는 유태인과, 유대인에 협력하는 기독교도는 러시아의 숙적이라고 했다[633].
노토전쟁에 대해 도스토예프스키는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그리스도교회를 해방하기 위해 십자군을 파견해야 하고[617][634]러시아가 슬라브적 이념을 포기하고 동방 기독교인을 던지는 것은 러시아의 해체 멸종이 된다고 논하고 유대인의 수중에 있는 러시아 국민은 자신의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고 전쟁을 지지했다[635]. 같은 해 11월에는 콘스탄티노플을 자유도시로 해 버리면 “전세계의 음모자의 은신처가 되어, 유대인이나 투기인의 질투가 된다”라고 하는 슬라브주의자 다닐레프스키의 견해를 옳다고 칭찬했다[636].
1879년여름에 독일의 보양지바트 엠스에 요양으로 방문했을 때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유치객의 절반은 유태인이며, 독일은 유태화되었다고 친구의종무원장포베드노스체프에 보고했다[637]. 포베도노스체프는 신문·잡지, 금융시장을 지배한 유대인은 “모든 것을 침략하고 먹고” 있어 사회민주주의운동이나 황제암살운동을 추진하고 있다고 답했다[638]. 포베도노스체프는 '기생충'인 유대인의 3분의 1을 국외로 이주시키고, 3분의 1을 기독교로 개종시켜 남은 3분의 1은 '죽음이 끊어지는' 것이 좋다고 정부에 제안하고 러시아에서는 유태인의 해외 이주가 추진되었다[622].
소설에서는 '악령'(1872)에서 개종 유대인이 공범자를 고발하고[620], '칼라마조프의 형제'(1880)에서는 육욕과 물욕의 권화인 푸들이오데사의 유태인에게 아래 돈을 벌어 모으는 재치를 닦았다., 또 의식 살인으로 쾌락을 끌어내는 유태인에 대해서 묘사했다[617][640].
1880년8월에는 아리아 인종의 전인류적 재결합이 러시아인의 사명이며, 전민족을 기독교에 따라 화합시켜 위대한 전체적 조화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617][641].
죽음 직전인1881년1월에는, 토지를 영유하는 것은 철도가나 사업가나 은행가나 유태인도 아니고, 누구보다도 농민이어야 한다고 하고, 농민은 국가의 핵심이라고 했다[642].
작가레프 톨스토이는 히브리어로 구약 성경을 읽었지만, 계율과 사랑과의 관계에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대립한다고 하고 있으며, 유대교의 선민 사상에 대해서는 '민족적 생각상'이라고 비판하는 한편 유대교는 우리의 비비 기독교 공동체의말645]. 그러나 사망할 때까지 편지나 일기에서는 반유대주의적인 발언을 반복했다.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토르스토이는 “나는 드레퓌스를 모른다. 그러면서 이 사건은 “프랑스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성밖에 가지지 않고, 하물며 다른 세계에는 전혀 말해도 좋을 정도로 지루한 문제”로 “러시아인이 드레퓌스라는 아무리 두드러진 곳도 없는 인간의 옹호에 걸려 있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했다[645].
소설 '안나 카레니나'(1877년)에서는 안나의 형의 귀족 오브론스키가 권한을 가진 유대인에게 '이기고 자듯' 취직을 거절하는 장면을 그렸다[617][646].
1903년의 포글롬에 대해, 자신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라도 출판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발언했다[617].러일전쟁때 그는 러시아의 패주가 아니라 '가짜 기독교 문명의 패주'였다고 해서 '예술·과학적 활동에서 금전을 얻고 성공하기 위한 싸움에서 오래전부터 붕괴는 시작됐다.617].
1906년, 톨스토이는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렌의 저서 19세기의 기초를 그리스도가 유대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칭찬했다[617].
황제암살과 포글롬
1881년3월 13일,알렉산드르 2세가테러 조직 '인민의 의지'의 폴란드인 멤버 이그나티 그리네비츠키에 의해 암살되었다. 암살 그룹에는 유대인 여성 하샤 헬프만도 있었다[618]. '노보에 브레미야'는 '고비를 한 동양풍의 남자'가 '빌뉴스 통신'은 유대인이 범인이라고 보도했다[622].
황제 암살 후 다음 4월,성주간에 우크라이나의엘리사베트그라드,키예프, 오데사에서 대규모포글롬(박해)이 발생해[622],1884년까지 농민이나 벌거래 노동자에 의한 포글롬이 발생했다[215][647]. 선동자 일단은 철도로 찾아와 “유대인은 황제를 살해했다”는빌라가 거리에 붙여져 폭행이 이뤄졌다[622]. 선동자 일단에는 황제파의 대공과 장교가 결성한 성종사단의 일부가 관련되어 있었다[622]. 포글롬에 대해 작가 시체드린과레스코프,고리키는 유대인에게 동정했다[617]. 한편 반유태주의가 칭찬되고 있던 1880년대 러시아의 좌익단체에서는 사회주의 잡지도 한 잡지를 들여 포글롬을 호의적으로 말했다[648].
계속되는알렉산드르 3세는1882년에 유대인의 착취로부터 기독교인을 보호하는 조례를 정하고,1883년에는 「유대인 법 재검토 위원회」를 설치해, 5년간의 토의의 끝, 위원회는 유태인과 기독교인과의 융화를 목표로, 반유대 법2]. 황제는 "유대인이 기독교인으로부터 계속 착취하는 한이 증오가 완화되지 않는다"고 말했다[622].1890년에 모스크바에서 유대인 상점에 히브리어 간판의 게시를 의무화,1891년에는유월절(페사하)에 맞추어 모스크바로부터 대부분의 유대인이 추방되었다[618]
1881년 포글롬 이후 1891년까지 미국으로 이주한 유태인은 13만5000명, 1891년부터 1910년 사이에는 거의 100만명의 유태인이 미국, 캐나다, 유럽, 호주, 남아프리카로 이주했다[618]. 러시아 포글롬에서 벗어난 동유럽 유대인 중 독일에 머물렀던 것은 10만명 이상으로, 7만명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528].
미국 대륙에 건너온청교도들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비유했다. 그러나 동시대의 유대교도를 받아들이지 못했다[649]. 청교도들은요한계시록에서 예언된천년왕국, 그리스도 재림을 대망했지만, 천년왕국의 새벽 전에 유대인이 기독교로 개종해야 한다고 했다[649]. 유대인 쥬다 모니스는1722년에 기독교로 개종하고 나서 하버드대의 히브리어 강사에 임용되었고,1776년제정의메릴랜드 주헌법에서는 기독교 선서가 요구되고 있어 유대교도의 권리를 인정받은 것은 1826년9였다.한편로드아일랜드 식민지를 열었던로저 윌리엄스는1647년유대교, 이슬람교, 반그리스도적인 신앙도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로드아일랜드 칼리지에서는 학생들에게 종교적 자유가 인정되었고,뉴포트는 유대인에게 인기가 되었고, 1770년대에는 뉴욕을 능가하는 번영을 자랑했다[649].
1654년포르투갈이당시 세계 최대의 제당 수출항이었던브라질의레시페 항구를 네덜란드에서 빼앗자 유대인은 이단 심문을 두려워 16척의 배로 사산해 그 중 한척이뉴암스테르담(나중에 뉴욕으로 개칭)에 상륙했다. 이것이 유대인 최초의 미국 상륙이 되었다[649].
1775년부터의미국 독립 전쟁에서는 재미 유태인의 대부분이 미국을 지지했다. 유대인은 각지에 이산하고 있는 동료와 연계하여 무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의항해 조례등에 반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649]. 전쟁 중에는 유대인은 독립파의 가발파로부터는 친영파의 토리로서, 토리로부터는 독립파로서 배척되기도 했다[650].뉴포트의 지도적인 유대 대상인 아이작 하트는 친영파였기 때문에 군중에게 살해되었다[649]. 폴란드 출신의 유태인 금융업자하임 살로몬은 미국 식민지군의 군자금을 마련해 재무장관로버트 모리스고문이 되었고,제퍼슨,랜돌프,매디슨등의 의원을 사재 에 의해 지원했으며, 그업적은미국에서 유태인의 사회적 지위 확립으로 이어졌다.
제6대 미국 대통령존 퀸시 아담스는 1780년 암스테르담의 유대인에 대해 “이런 낯선 풍체를 한 인간을 만났기 때문이 아니다.651]을 지원했다[650].
문학
'퀘이커의 도시' 표지
시인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는 1852년에 방문한 뉴포트의 유대인 묘지에 대한 시에서 유대인에게 동정하면서도 "죽을 수 있는 민족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652][653].
시인올리버 웬델 홈즈는 기독교도도 유대교도 같은 인간이라고 주장하고, 반유대주의에 대해 기독교도는 겸허해야 한다고 했다[652].
소설가 나사니엘 호손은 1856년 유대인 런던 시장 데이비드 살로몬스와 면회하면 시장의 여동생은 유태인으로는 아름답지만, 그 남편은 이스카리오테의 유다, 방황하는 유대인에게 전형적인 유형으로 '날카로울 정도로 유대적'652]. 1858년에는 로마의바르베리니궁에서듀러작 「박사와 논의하는 그리스도」에서의 유대인 묘사에 대해 「이만큼 추악하고, 악의로 가득하고, 황폐하고, 실리적이고, 교활한 사람은 없다」라고 평가해, 또 리볼노의회당을더럽고신성함'대리석의 목신'(1860)에서는 유대 게토를 부패한 치즈에 닿는 우지벌레처럼 비굴하고 불결했다[652].
남북전쟁(1861-65)에서는 종군 승려는 개신교와 가톨릭으로 한정되어 있어 유대교 랍비는 제외되었다[649]. 그러나 1862년 7월 유대인 종군 승려도 복무 가능하게 되었다. 또, 전시중에 귀신한 면화의 어둠 거래가 횡행해, 일부의 유대인도 가고 있었기 때문에,1862년12월 17일,율리시즈 그랜트장군은 유태인을테네시 군관구로부터 추방하는 일반 명령 11호를 포고했다[649]. 유대 상인이 링컨 대통령에 직소하면서 이 명령은 철회되었다. 전후 대통령이 된 그랜트는 많은 유대인을 공직에 붙였다[649]. 한편 남부에서는 패전 책임을 유대인에게 전가하여 비난받았다. 남부연방 국무장관주다 벤자민은 '불쾌한 유대인'이라 불리며 전시 중에 유대인이 상품을 매입했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유대인은 징병 거부와 통적행위로 달려가고 민중을 착취하여 축재했다고소문되었다.
헨리 아담스
존 퀸시 아담스의 손자로퓰리처상수상 작가헨리 아담스는이디시어를말하는 유대인을 보면 등근이 추워지면 혐오했고, 또 방일했을 때에는 '쟈프는 원숭이'라고 했다[650].1879년에는 스페인에서 유대인과 무어인이라고 싫다는 정도 만났기 때문에, 이단 심문에 대해서는 관대한 견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헨리는 중세 노르만인을 칭찬하는 한편 유대인을 금융자본과 동일시하고 기독교 문명에 적대하는 경제적 유형의 권화로 간주했다. 1896년에는 유대금융자본이 은화의 자유주조를 방해하고 있다며 “우리는 유태인의 손에 있다”고 했다[650]. 드류몬의 저작을 애독한 헨리는, 드레페스 사건에서의 드레페스 옹호파는 유태인의 금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하고, 드레페스를 옹호하는 졸라는 드레페스나 유태인 저널리스트, 연극인, 주식 브로커, 로스 차일드 등과 함께 악마섬에 보낸다. 또 “유대인이 사멸하는 것을 보고 싶은 일심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모든 돈 대출이 구인되어 처형되는 것을 보고 싶다”고도 썼다[650].
작가헨리 제임스는 "모든 桎梏에서 풀려난 유대인"의 아이가 넘치고 있는 것은 복수를 함께한 증식일까라고 말했다[655]. 1904-5년 미국의 게토를 방문한 제임스는 “거대하고 황반수족관 속에서 너무 큰 코를 한 무수한 물고기가 쌓인 바다의 먹이 속에서 언제까지나 부딪치고 있는 느낌이었다” 새겨지기 전과 같이 달자로 사는 것”이라고 비유하며, 또 호화로운 유대 상점에 대해 “유대인이 교묘한 상재를 발휘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유대인 이외가 상대의 때다”, 또 술집에서 이디시어를 들은 제임스는, 미국의 미래의 말이영어가 아니게 된다650].
마크 트웨인
마크 트웨인은1883년의 '미시시피 강 생활'에서는 유대 점주는 불필요한 것도 무지한 흑인 부부에게 붙여서 매도하고, 생활이 괴로워진 흑인은 떠난다는 유대 상인에게 손질하는 이야기를 썼다[656]. 1878년부터 1900년까지 유럽에 체재한 트웨인은 유대 지식인과도 교환했기 때문에 반유대 신문은 트웨인을 유태인 최선으로 비난했다[656]. 「하퍼즈」1899년 6월호에 발표한 「유대인에 관하여」에서 유대인의 가정은 모범적이고 폭력 범죄도 드물지만, 단, 사기, 고리 대출, 보험금 목표의 방화 등으로 신용을 떨어뜨리는 일면도 있어, 공무원으로서는 우수하지만, 병사로서 뛰어오르는 것을 주저하기 쉽고 애국심이 적다고 했다[656]. 트웨인은 유대인의 우수한 두뇌와 금에 대한 숭배가 타민족으로부터 증오되는 원인이라고 하며, 고대 이집트 재상의 유대인요셉이 기근에 있어서 국민의 재산을빵과 교환으로 매입한 경제적 손완이야말로반유태주의6
반가톨릭 "인종의 도가니"
청교도를 국민적 전통으로 하는미국에서는 증오의 헛구가 유대인보다가톨릭교도 에게 향하고 있었다[655].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는 로마교회의 선동으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간절히 고발되어, 1834년에는보스턴의 찰스타운에서의 개신교 폭도가세인트 울슬라 여자 수도회에 방화해(성 우르슬라 수도회 폭동 사건), 1836년의 '마리아 맨크의 폭로화'에서는몬트리올의 가톨릭 수도원에서의 사제에 의한 수도녀에의성적 학대와자살이고발되는 등[657], 반 가톨릭 운동이 고조되었다[655]. 1850년대에는 반가톨릭 정당노·내싱이 결성되어, 데고(Dago)라고 불린 이탈리아인 가톨릭 이민은 가인의 표시를 새겨진 생생한 범죄자로 되어, 1890년대에는린치를 받았다[655].
작가 존 헥터는 '미국 농민의 편지'(1782)에서 미국인을 '전 민족이 융합한 새로운 인종'으로 삼고, 이 신인종은 세계를 바꿀 것이라고 말했다[658]. 19세기 중반,민족의 도가니(멜팅 포트)가 미국의 원칙으로서 명확화되면, 사상가에머슨과 작가멜빌은 민족 혼합의 이점을 주장했다[655]. 다윈은 이민은 자연 도태에서 태어난 우수한 산물이라고 하며, 스펜서는 1882년에 이주와 혼합은 우수한 민족을 만들어낸다고 미국에서 말했다[655]. 체스타톤은 미국에서는 반유대주의가 금지되고 미국의 애국주의는 모든 사람의 동화를 자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655]. 그러나 독일계 유태인 철학자 홀레스 칼렌은1915년멜팅 포트에 의한 동화주의를 부정하고 “사람들은 의복, 정치, 아내, 종교, 철학을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할아버지를 바꿀 수없다”며사람들은[660]. 또한 카렌은 1928년 '반셈주의의 뿌리'에서 기독교 국가는 반셈주의를 보편적 준칙으로 삼겠다고 논했다[661][662].
1840년에 미국의 유태인구는 15000명 정도였지만, 독일의 유태인이 대량으로 이주해,1880년에는 30만명이 되었다[655].청바지의 창시자리바이 스트라우스도 독일계 유태인 이민이었다[655]. 독일계 유태인의 절반은 실업가로, 20명 중 1명이 지적 직업에 대해, 행상인은 100명 중 1명이었다[649]. 유대인은 아일랜드인이나 이탈리아인 이민과 비교하면 단기간에 부유해졌기 때문에 '완성자'라는 이미지가 현실미를 띠었다[655]. 또한 양키 행상인은 부지런한 선생님으로,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는 점에서는 유대인과 상통한다는 유럽에서의 상구도 보였다[655].
1876년, 뉴저지 연안 지방의 호텔에서 유태인 거절이라는 광고를 발표했다[655]. 1877년에는사라토가의 호텔업체 힐튼[663]이 '유대인과 개의 출입 금지'를 입구에 붙여 실제로 대부호 조제프 세리그만을 유태인이기 때문에 입관시키지 않았다[649].뉴욕 타임즈는 1877년 6월 19일 '사라토가 대사건'으로 보도했고, 유대인 부자는 사라토가의 호텔 을 몇 개나 인수하고, 그 상어의 결과, 뉴욕 인근의 여름 보양지가 '기독교인의 보양지'와'유대인의 보양지'로 5분되었다.
세기 말 동유럽 출신 유태인이 대량으로 이주해 오자 독일계 유태인이 동유럽 출신 신이민 유대인의 퇴거를 1882년 보스턴에서 요구하는 것도 일어났다[650].연방 상원의원헨리 캐봇 롯지는 동유럽 유태인은 열등하다고 했다[650]. 1890년부터 1914년까지 1651만6081명의 이민자가 미국에 입국했으며, 그 중 유태인은 169만명 4842명에 이르렀다[650].
1896년 대선에서민주당후보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은 '금의 십자가 연설'에서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배신한 것과 마찬가지로 대자본은 금으로 농민을 배신한다고 했다[650]. 또한 은화의 무제한 주조(프리 실버)를 주장한 1895년의 문서에서는 세계의 금의 절반은 로스차일드가가 소유하고, 나머지 절반의 대부분도 로스차일드가의 위성기관이 쥐고 있다고 했다[650].
한편,1896년공화당 대회에서는 개신교와 가톨릭의 긴장관계에 의해 유대교 랍비가 개회의 기도를 주창했지만, 이와 같이 삼종파가 동등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당시 유럽 국가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655].
20세기
영국
1880년대 이후 러시아 포글롬에서 피난한 250만명의 동유럽 유대인은 서유럽 국가에 쇄도했고, 런던만으로도1883년에 4만7천이었던 유대인 입은1905년에 15만으로 부풀어 오르고, 각 지방 도시에서도 유입이 진행되고, 1880년에 6만 5천명이었던 재영 유태인은 1905년까지 3배 이상이되었다173]. 런던의슬램화이트 채플스타니 지구에는 동유럽의 유태인 이민자가 10만명 이상 정착했고,스텝니지구의 사제는 유대 빈민 집단이 기독교인을 쫓아내려고 한다고 비난했다[664].제1차 세계대전때에는타임스지가 이 지구에 유대인이 국가내 국가를 형성하고 있다고 비판했다[664].
영국의 사회주의자로페비안 협회시드니 웨브는, 영국인은 다수의 가정이 산아 제한을 하고 있는 한편, 가톨릭계의 아일랜드인과 폴란드인, 러시아인, 독일계의 유태인들이 제약 없이 아이를 낳고 계속하고있다고이는영국65
제임스 말레이(1837년 - 1915년)가 편집한 '옥스포드 영어 사전'에서 '유대인'에서는 모멸의 의미가 있어 '강욕, 고리 대여, 교활한 장사'를 의미한다고 정의되었다[169].
영국 왕에드워드 7세(재위: 1901 - 1910년)는 독일 출신 유태인 은행가어니스트 카셀을 복심으로, 카셀은 독일 황제의 유태인 측근 알버트 발린(Albert Ballin)과핫라인을 세웠지만,영국 상류계에서는 반발을 샀다.청년 터키인 혁명이후1911년에오스만 제국재건을 위해 카셀이 초대되면, 터키 혁명은 유대인과 프리메이슨의 음모라고 청년 터키에 적대하는 이슬람교도가 주장하고,타임스지나 모닝 포스트지도 보도했다[664]. 다만, 덴메 등 유대교도가 청년 터키인 혁명에 가담한 것은 사실이다[664].
영국 외교관 세실 스프링-라이스(Cecil Spring Rice)는1914년11월의 보고서로, 미국에서는 대은행가존 모르간의 죽음 이래,워버그가의 폴·워버그가연방 준비 제도이사가 되는 등 유태인 은행가가 흩어져, 유태 사람은미국 재무부와 유력 신문을 장악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은행가베른하르트 델른부르크와제이콥 시프, 유태계 재벌쿤 로브등 유대-독일계 은행가를 경계해야 한다고 보고했다.664].1917년스프링-라이스는윌슨대통령 의동맹이었던시오니스트인 루이스 브랜다이스에 대해 국제유대 조직이 각지에서 혁명파를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했다[664]. 스프링=라이스는 1918년 러시아 혁명도 터키 혁명도 유대인의 음모로 보고 영국에 있는 독일계 유태인에 대한 경계를 호소했다[664].
1915년5월 7일에독일 해군잠수함에 의해루시타니아호가침몰해 승객 1,198명이 사망하면, 영국에서는 발렌타인 티롤이 이 전쟁 범죄를 독일계 유태인의 알 벨트 발린 개인의 책임으로서, 또 독일 출신의 유태인 은행가어니스트 카셀 로부터 영국 국적을박탈하는 반유대 캠페인도 행해져 폭도가 외국인 상점을 습격했다664]. 유대계 신문은타임스종이 유대인을 적국의 독일인이라고 불리고 있다고 비판했다[664]. 또한 외국적 주민은 영국군에 입대가 허락되지 않았지만, '데일리 메일' 종이는 '나라의 축적을 삼키는 러시아의 노란 유대인'은 군무기피하고 있다고 비판했고, 더 클라리온지는 프로이센인과 유태인은 불모 한 토지의 도적6과비난했다.1916년6월에 러시아로 향하는키치너 경을 태운 선함이 어뢰 공격으로 침몰하자 리우 맥시는 국제 유태인이 독일에 정보를 제공했다고 논했다[664].
러시아 내전을방해했을 때 러시아에서 배포된 영국의 프로파간다 포스터. "피에 굶주린 붉은 괴물"인 볼셰비즘과 싸우기 위해 무기와 필요한 물품을 제공한다고 쓰여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중1917년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영국의 반유대주의가 더욱 강해졌다.힐레아 벨록에 의하면 영국에서 새벽 반투명이 대두한 것은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하고 있으며, 볼리셰비즘은 본질적으로 유태적인 것으로, 출자를 숨기려고 하는 유태인은 입장을 나쁘게 할 뿐이라고 비판했다[666].
매스미디어는 반유대 보도를 반복했다. '타임스', '데일리 메일', '옵저버'의 사주햄스워스 노스클리프 자작은 반유대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부하의 각 신문에서는보르셰비키와 국제 유대인의 음모가 반복적으로 보도되었다[667].타임즈는러시아 혁명에서 유대인 학생이 에스토니아의 유리예프에서 의용군을 결성해 많은 재물이 파괴되었다고1917년 봄에 보도하고, 11월에는 레닌들은 독일에서 혁명 자금을얻고 있어 독일계 유태인의 피를 당기는 산사라고보도[669], 1919년에는 모스크바에서 볼셰비키가이스카리오테 유다기념비를 건립했다고 보도했다[666].칠월 봉기에서켈렌스키 정권의 성명에 대해 타임즈는 “페트로그라드의 소련은 국제 유태인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고 보도하고, 작가길버트 키스 체스타톤은 10월에 만약 페트로그라드처럼 런던에서도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한다면 유대인이 우리에게666]. 이 밖에 모닝포스트지에서도 마즈덴 기자가 러시아에서 사로잡혔을 때 유대인이 고문계였고, 러시아의 파괴자는 유대인이라고 증언하고 '시온의 현자의 의정서'라는 증거도 있다고 말했다[666].
1917년 12월에 레닌과 스탈린이 인도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선동하자 대영제국은 모든 수단을 이용하여 막았다[667]. 1918년 여름에 영국 정부는 보르쉐비키 정부 타도를 위해 러시아에서 반유대의 빌라를 비행기로 살포했다[667]. 정부 보고서에서는 러시아의 볼리셰비즘은 독일의 프로파간다의 산물이며, 국제 유태인에게 지휘되고 있으며, 유태인이 기업의 대부분을 수중에 담으면 기아가 일상화하고 1918년 10월에는 여성의 국유화가 거의 완성되었다는 러시아 주류 영국해수667][670].
1918년의 책자 '유대인에게 짓밟힌 영국'에서는 러시아와 루마니아를 배신한 독일 황제의 공작원 트로츠키와 레닌의 지시로 유대인이 영국을 오염하고 있다고 주장되었다[671].
1919년1월부터 9월까지파리 강의회의에서윌슨미 대통령과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가 터키의 프린키포 제도에서 백군과 적군을 초청하여 회의를 개최하겠다고 제안했다. 시아의 볼리셰비키 체제를 승인하는 자세를 보이면서타임즈종이는 뉴욕의 유태인 금융업체에 불어넣은 것으로 분개하고 시베리아에 있던 녹스 장군도 항의했다.667]. 타임스 종이 주간 위컴 스티드가 파리의 '데일리 메일' 종이에서 볼리셰비키는 서양 문명의 기초를 공개적으로 뒤집는 무법자라고 주장하면, 스티드는 윌슨 미국 대통령 복심의 하우스 대령으로부터 불려 미국이 볼리셰비키를 승인 하고 버리면 유럽에서 볼리셰비키의 대두를 막을 수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윌슨 미 대통령도 신용을 잃고, 국제 연맹도 기와해하겠다고 하고, 프린키포 제도 회의 계획은, 시프, 워버그들 국제 금융업자라고말했다667]. 이 대담이 영미 정상에 볼리셰비키 체제를 승인하는 것을 생각하게 머물렀다고 한다[667].노스클리프 경 햄스워스는 로이드 조지 총리가 시오니스트의 메르체트 경 알프레드 몬드(Alfred Moritz Mond)의 정책을 채용한 것을 공격하고 있었다[667]. 또 타임즈는 사설에서 선민의식을 가진 인종의 유대인은 모세의 갓에 충실했고, 사람에게 용서를 주려고 하지 않았고, 러시아에 대한 토벌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감미로운 기쁨이었다고 주장되었다[667][672]
윈스턴 처칠은1919년11월 5일러시아 백군에 대한 물자 원조 예산 심의 국회로, 레닌은 티후스균을 도시의 저수조에 흘려 보내도록 하여 러시아에 보내지고, 또 뉴욕, 글래스고, 베른 등에 숨어있는 혁명가를 지휘하는 등 악마적으로 기용이라고 말하고, 또1920년1월 3일에는 사회주의자는 모든 종교를 파괴하려고 하고 있어 러시아와 폴란드의 유태인이 만들어내는 국제 소련에 신을 들고 있다고 연설했다667]. 처칠은1920년2월 8일선데이 헤럴드 종이 위의 '시오니즘 대 보르쉐비즘: 유대 민족의 영혼을 위한 투쟁'에서 유대인에게는 조국을 재건하려고 하는 시오니스트가 있고 국제 유대인이 있다. 국제 유대인의 운동은 '스파탁스'로 불린 아담 바이스하우프트(Adam Weishaupt)는일루미나티를결성하여 프랑스 혁명의 비극을 가져온 것 외[673], 마르크스, 트로츠키, 헝가리의쿤베라, 독일의로자 룩셈부르크, 미국의엠마 골드만까지 전세계에서 공모하고 있으며, 테러리스트로 무신론의 유태인은 실제로 러시아 혁명을 실행하고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이나바이에른 등 공화국을 구축하는 공포도 영제 국신민인 유대인 국민은 다른 영국 신민처럼 러시아의 음모와 싸워야 하고, 보르쉐비즘은 유대인의 운동이 아니라고 밝혀야 하고, 또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국가를 조속히 건설하면 불행한 유럽으로부터의 피난소가 되어,유대교667][674]. 한편오스카 와일드의 연인이었던알프레드 더글라스경은 처칠을 시온 현자의 공작원으로 고발했다[667].
1920년모닝 포스트 종이 편집자 하웰 아서 그윈이 서문을 쓴 '세계의 불온의 원인'에서도 '시온 현자'와 '유대사'가 주장되었다[667][675].
1920년4월에는 로이드 조지 총리와 볼셰비키와의 협상이 시작되어 레오니드 클라신이 비공식적으로 런던에 초대되었다. 타임즈는 '시온 현자의 의정서'를 인용하여 다윗의 세계 제국을 수립하려고 하는 음모가와의 협상이라고 비판했다[주77]. 또한 스페이크테이터도 의정서를 인용하여 유대인 의원의 입각과 유대인에 대한 시민권 수여에는 신중해야 하며 유대인은 위험인자로 국제쟁란의 원천이며 '사회의 페스트'라고 반복 보도했다[주78].
1921년1월 16일, 재영 유대인 대표단(Board od deputies of British Jews)은 반유태주의 비판의 성명을 내렸다. 여기에는 윌슨, 하딩, 루즈벨트, 태프트 등 미국 역대 대통령, 은행가 모건 등 미국인의 유명인이 이름을 올렸다[676].
타임즈지는1921년8월 16·17·18일에 필립 그레이브스 기자에 의한 '의정서의 종말' 기사를 게재하고 타임즈지는 이후 '시온 현자의 의정서'를 정보원으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667].
문학
문학 작가들에게도 반유대주의적인 의식을 볼 수 있다. 1913년에는라도야드 키플링이 “이스라엘의사사, 눈 때 흰 검병자”라고 시로 썼다[664][677].
제1차 세계대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전간기에는, 영국으로 귀화한 시인T・S・엘리엇이 「게론천」(1920)에서 「내 집은 초라한 집입니다.게다가 주님은 창문의 문턱에 걷기 '유대인'이 '엎드린 도토리 눈의 눈빛이원생동물의 진흙 속에서카나렛의 투시화를 응시하고 있다'356]. 엘리엇은 가톨릭에 의한 문화통일을 주장하고 ‘이신을 쫓아’에서는 국민은 동종족이어야 하고 자유사상의 유대인이 섞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극단적인 관용은 배제해야 한다고 했다[356]. 1940년에도 엘리엇은 자신이 반유대주의자가 아니고 인종적인 편견은 없지만, 자신의 믿음에서 자유로운 유대인은 위험하고 무책임하다고 말했다[356].
존 골즈 워지는 희곡 '충의'(1922)에서 부자와 불편한 유대인의 실추를 그렸다[667][679]. 가톨릭 작가힐레아 벨록은 '유대인'(1922년)에서 유대인 문제는 무서운 결말을 맞이하려고 하고 있지만 문명의 미래를 위협에 노출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유대인이 격리 정책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논했다[667][680].성공회목사 윌리엄 랄프 잉은 영국에서 유대인 문제 등 견문한 기억은 없고, 영국은 세계 최고의 유대인을 획득한 것에 불과하고 한 사람을 개인 의 가치에 접하고 이민이기 때문에 처벌하는 것은 거절하지 않고, 또 체임벌렌은 예수를 독일인으로 하였지만 예수는 유대인이라고 베록을 비판했다667].
작가조지 오웰은 '파리 런던에서 떨어지고'(1933)에서 유대인 고물상을 불쾌한 남자로 그려 또 유대인 사기꾼에 대해서도 그렸다[681]. 1931년 8월의 「홉을 따기」에서는, 언제나 돼지처럼 뭉개져 있는 유대인 소년의 얼굴은 「부육에 걸리는 비극한 짐승을 생각하게 한다」라고 써 「공기를 요구해」(1939)에서는 강연회에 참가하고 있는 트로츠키스트를 「빠른 눈 쓰고,물론」. 1940년 10월 25일의 일기에서는,런던 공습시에 지하철에 피난한 유대인에 대해 「말도 없이 스스로 눈에 띄려고 한다」 「이런 얼굴을 한 유태인의 여자」가, 열차로부터 내리는데 방해인 사람을 누구 그 없이 타척하고 있다고 썼다[681].1942년1월 1일의 런던 통신에서는 영국의 반유대주의는 독일의 반유대주의만큼 폭력적이지 않다고 썼다[681].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오웰에 대해서는#영국을 참조.
제1차 세계대전 중1916년5월 9일에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사이크스 피코 협정을 체결하고, 오스만 제국령의 분할과 팔레스타인의 국제관리화를 정했다[682].5월 16일,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총리는팔레스타인의 위대함을 되찾기 위해팔레스타인을영국 위임 통치령으로 했다[664].사이크스 피코 협정의 원안을 작성한 마크 사이크스는 반유대주의였지만,시오니즘을 지지했다[664]. 그 후 러시아 제국은 혁명으로 해체하고 영국이 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요르단, 이라크를, 프랑스는 레바논과 시리아를 위임 통치했다. 영국의 팔레스타인 정책에 대해서는 각국에서 반발이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유대계 프랑스인 조제프 레낙이1917년4월 영국군이가자를 점령하자 가자 지구에서 프랑스의 권리를 강조함과 동시에 시오니즘을 '고고학적 몽상'이라고 칭했다[684]. 또1919년의파리 평화회의에서 세계 이스라리엣 연명 회장인 실반레비는 근동에 볼리셰비키적 아나키즘의 위험이 다가오고 있으며, 서양 국가에서는 유태인의 이중 국적 문제가 있는 것에 대해 팔레스타인 유대인에게만 특권과 예외적 상황을 요구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684].모러스는 팔레스타인을 유대인에게 준 것은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가 아니라브리안 프랑스 총리이며, 브리안 총리는10월 혁명을가져왔다고 1922년 1월에 말했다[684].
가톨릭 측도 반발했고, 교황베네딕토스 15세는선인 기독교인들이 이교도의 갈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해온 토지를 유대인에게 제공하는 것에 분노를 표명했다[684][685]. '치빌타 카톨리카' 종이는 성지가 '신살의 백성', '기독교 문명의 적'의 손에 빠지려고 한다고 보도했다[684]. 로마 카톨릭에게 시온주의 유대인과 개신교의 영국인은 종류가 다른 "이교도"였다[684]. 프랑스의 가톨릭 사제 엘네스트 주앙은 '시온 의정서'를 소개하고 팔레스타인이 프랑스에서 영국의 손으로 건너가 유대인의 손으로 건너려고 하는 것은 배신 행위라고 말했다[684][686]. 주안 사제의 협력자 오리코스트는 예루살렘은 유대인에 의한 세계 정복의 요새가 된다고 했다[684]. '다큐멘타시온 가톨릭' 종이는 유대인은 왕국을 재건하려 한다고 하고[687], 유대교의 정치적 지배에 대항하여 기독교인은 이슬람교도와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84][688]. 또 이 신문은 『시온 현자의 의정서』의 신빙성은 보증한다고 소개했다[689][690]. 폴리아코프는, 반시오니즘은 1948년중동전쟁이후의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지만, 이와 같이 제1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프랑스의 반시오니즘은 존재하고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684].
독일 황제 윌헬름 2세는 팔레스타인이 동방 진출의 발판이 되기 때문에 시온주의 운동 지원을 공언했지만, 뒤에서는 독일에서 유태인을 내보낼 의도도 있었다[691].1918년11월 27일에 '바이에른 급보'는 독일에 승리한 것은 프랑스도 영국도 미국도 아니고 유대인이라고 주장했다[684][주79].
제1차 세계대전의 배상을결정하는1921년2월의 런던 회의에서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프랑스의 줄 캄본은, 성지 예루살렘은 15세기 이래 프랑스의 수중에 있었고, 교황도 그것을 승인해 왔다고 말했다[684]. 프랑스 대표 필립 벨트로(Philippe Berthelot)는 시오니스트는 마치 자신들이 대국 대표단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시오니스트의 대다수는 자칭 유태인이며, 유태인의 피를 묵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684].
제1차 대전에서 패전한오스만 제국은 영국 불이 그리스 등의 점령하에 놓여 해체해,터키 혁명을 거쳐 1922년에터키 공화국이되었다. 1923년로잔 조약에서 터키는 전 오스만 제국령을 포기하고 영국과 프랑스에 의한 중동 분할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그 후, 아랍인·팔레스타인인에 의한 반유대인 폭동이 자주 발생해,1929년8월의한탄 벽 사건에서는 유대인·아랍인 쌍방이 100명 이상이 희생이 되었다.
1905년뉴욕 주지사 첨부 도서사서멜빌 듀이가 레이크 플라시드 클럽을 설립했지만 '전염병 환자, 장애인, 유태인'을 입회 거부했기 때문에 유대인 변호사 루이스 마샬과은행가제이콥시프,뉴욕타임스사주아돌프. 듀이는 해고되었고 마샬 변호사들은1906년미국유대인 위원회(AJC)를 결성했다[693]. AJC는 1907년에는 유대인 입점을 거절하는 호텔이나 오락장의 선전을 전미에서 금지하는 데 성공했다[693]. 러시아 정부에 의한 유대계 미국인의 입국 비자 거부에 대해 AJC는 러시아에 대한 보복을 요구하고1912년에는 러시아와 미국의 조약 철폐가 결의되었다[693]. 그러나 이로 인해 러시아 유대인의 처지는 개선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AJC 대표의제이콥 시프가 '유대 금융'의 상징으로 간주되게 되었다[693].
1916년, 변호사·인종 학자의 매디슨 그랜트 “위대한 인종의 소멸, 또는 유럽사의 인종적 기초”로,미서전쟁에서 본 미병 출정의 풍경에서는, 금발의북방 인종은 용사로서 전지에 가서, 용사를 보는 갈색의 단호. 이렇게 북방인종은 무관한 용사로서 '인종의 자살'을 향해 돌진하고, 전쟁의 승자가 되는 것은 갈색 머리카락의 몸집이 작은 인간이라고 했다[693][694]. 그랜트는노르딕(북방인종), 라틴, 슬라브의 유럽의 3민족 중 하나와 유대인이 합치면 유대인이 되기 위해서 인종간의 잡혼은 행해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650].
1917년6월 비전파 좌익 작가랜돌프 본은 “유대인은 자신들의 민족만이 우주의 신의 진정한 인민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에 경외심을 드러낸다. 전쟁 속에서 우리의 전쟁만이 일점의 섬세함도 없고, 흉약하게 하는 선을 달성할 것이라고 말하는 우리(미국)의 지식인”이라고 말해, 미국의 주전파를 유대 선민 사상에 비유해 비판했다[695].
반공주의
제1차 세계대전 중에러시아 혁명이일어나자 영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반보르셰비키·반공주의운동이 높아졌다.1918년9월에는 '반보르쉐비스트(The Anti-Boshevist)'가 발간되어 미국을 참전에 몰두한 것은 유대인이라고 여겨졌다[693].
페트로그라드에서 에브게니 세메노프가 미국인 외교관 에드거 시손에게 건네준 문서를 바탕으로,1918년9월, 미국 정부는 '독일 보르셰비키의 음모'를 간행하고, 트로츠키는 독일의 유태인 은행가맥스 바르부르크와라인 -베스트팔렌 노동조합으로부터 자금제공을 받고, 유태인은 독일과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서 유태공화국을 구축했다고 했다.이 문서는 1919년 9월 23일에 로스토프에서 출판되었고, 1920년에는 파리의 '옛 프랑스' 종이나 런던의더 모닝 포스트에서도 보도되었다[697].
1918년 11월 30일자의 국무성 내 보고서 '볼리셰비즘과 유대'에서는 유대인이 미국, 일본, 중국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고임(비유대인)의 반항을 억제한다고 결론을 내렸다[693]. 보고서는 러시아 망명자 보리스 브라솔에 의해 작성되었다[주 80].
1919년에는 파업이 피복공장에서 빈발하고 파업 참가자의 대부분이 유태인이었고, 1923년 시점에서미국 공산당의 45%가 구 러시아 제국령의핀란드인으로 러시아 인공 작원으로 여겨졌다[693]. 당시 유대인의 정치 활동에 대해 미국 유대 위원회의 사이러스 애들러는 우리 유대인은 시위 행진을 하고 너무 시끄러웠다. 여기까지 주목을 모아두고 그 주목이 호의적인 것이었으면 좋겠다고는 무리한 상담이라고 유대인으로서 자기 비판했다[662].
상원 특별위원회에서퀘이커케디는 러시아 신체제는 평화주의에서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증언하고, 또한 기자 윌리엄스는 러시아가 인류의 새로운 형제애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한편, 윌리엄 헌팅턴 영사와 내셔널 시티 뱅크러시아 지사장, 러시아 메소디스트교회시몬스 목사들은 러시아 혁명의 대다수가 유대인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증언했다.693]. 시몬스 목사는 자신이 반유대주의자가 아니고 포글롬을 혐오하지만, 트로츠키의 수백 명의 부하는 뉴욕의 이스트사이드 출신이며 러시아 신체제는 반기독교적이고 위험하다고 증언했다[693]. 시몬스 목사에 대한 정보 제공자의 군사 해리스 A. 호튼 박사는 '의정서'의 신봉자였다[693]. 다음날 각 종이는 미국 유대인들이 러시아에서 권력을 잡았다는 시몬스 목사의 증언을 보도했다[693]. 그러나 상원특별위원회에서는리투아니아쿠딜코스 나우미에스티스출신 유대인 저널리스트, 하만 반슈타인 진술 등에 의해 '뉴욕 유대인에 의한 음모'라는 견해는 채택되지 않았다[699]. 또한 역사학자A. 서튼은 보르쉐비키 체제에 대한 지원은 유대계 은행가보다 모건,록펠러, 톰슨[700]등 비유대계 은행가나 투자가가 하고 있었다고 논했다[701][702].
시카고 트리뷴지는1920년6월 19일기사로,영국 불로 삼국 협상의 비밀 첩보 기관의 정보 장교들의 보리셰비키 혁명 보고서에 의하면, 혁명 운동 국제 조직의 본부는 독일의 수도에 있으며, 실행부대의 최고 책임자는 트로츠키, 이 유대 급진당은 유대인의 해방과 동방 상업, 대영제국의 기저부를 장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703].
쿠크락스 클랜의 구성원이었던 저널리스트 인종학자 로스롭 스태다드는 1920년 저서 '유색인의 발흥'에서 레닌은중국인에게 둘러싸여 있어 볼리셰비즘에 의해 창조적인 개인이 퇴폐하고 무지하고 반사회적인 횡포가 '비우생적'][704]. 스태다드는 유대인을 백인의 일종으로 간주하고 '유색인'으로 간주하지 않았지만, 동유럽과 남유럽으로부터 유태인에 의해 미국은 손을 받지 못할 정도로 손상되었다고 생각했다[662].
저널리스트·소설가의 케니스·로버츠는 잡지새터데이·이브닝·포스트에서 연재된 르포르타주 “왜 유럽은 고향을 떠나는가”(1922년)에서 러시아 망명자가 아름답고 우수한 것은북방인종 이기 때문이라고 하며, 그에 대해 '지상 쓰레기'의 유대인은 폴란드인이나루마니아인의 외관 아래에 대량으로 미국에 유입하고 있지만, 유태인은 아시아인이며 유럽인이 아니라고했다[665].로버츠는 적어도 유대인은 '하잘인'과 섞여 있었고, 부분적으로는몽고인종이며, 이미 캘리포니아주는 백인지구 입구에서몽고인종을 차단했지만, 그들은 이번에는 수백만 단위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나올 것이라고 경고했다[662]. 또한 로버츠는 아무런 제한 없는 이주의 결과로고대 그리스에서 그리스의 인종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주장했다[662]. 그러나 로버츠는 유대인에 의한 세계 정복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662].
자동차 메이커포드 모터창업자인헨리 포드는 반유대주의자이며 '국제유대인'(1920-1922년, 4권)을 간행했다. 포드에 따르면 유대인을 적시하게 된 것은1915년 말 유대계 헝가리인 페미니스트평화주의자인 로지카 슈빈멜[706]과 저널 리스트 하만번스타인의 기획으로 포드 가출자하여 '평화 순항선'을 순항.포드는 슈빈멜과 번스타인을 '매우 존대한 유대인'이라고 하며, 두 사람은 유태인에 의한 금권 지배와 언론 지배에 대해 이야기하고 유대인만이 세계 대전을 중지할 수 있다고 말한 것에 혐오를 느끼며 동시에 세계 전쟁과 혁명의 원인이유태인에게있다는것을발견했다.
포드는 신문 '디어본 인디펜던트'를 인수해 포드 판매점에 정기 구독자를 의무화해 반유대 기사를 다수 게재했다[707]. 편집장은 앵글로 이스라엘리즘의 영향을 받은 종파 브리티시 이즈리아 라이츠(British Israelites)에 속하는 캐나다의 기자 윌리엄 카메론이었다[707]. 카메론은 유대인이고대 이스라엘 12 부족중 하나에 불과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지는 않았으며 유다족은 성경 시대부터 항상 불화의 씨앗을 뿌렸다고 논했다[707].1921년포드 명의 기사에서 "유대인은 2000년간 평화로운 생활을 보낼 수 없었고, 오늘도 충돌로 긁어내는 운명에 있지만,이스라엘의 잃어버린 10 지족(앵글로 색슨인)에 "반셈주의"라고 고발할 수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709][710].
1920년12월 1일,미국 유대인 위원회는부나이 블리스, 미국 유대회의,미국 시오니스트 회의, 미국 라비 중앙 협의회와 연명으로 책자 「의정서:보르쉐비즘과 유태인」을 발행했다[707]. 12월 4일, 개신교장로파 교회는 형제인 유대인에 대한 공격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유대인 시민 정신을 신뢰한다고 표명했다[707].12월 24일유대교, 가톨릭, 개신교 삼종파 연합에서 소수민족과 유대인에 대한 박해를 단죄하는 삼종파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유대인 가운데는 혁명운동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고 있다 것은 인정하고, 유대인에게는 선인도 악인도 있지만, 슬램, 탄광, 가축 처리장에서 유대인이 증오를 줄이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미국인은 부끄러움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707].1921년1월 16일윌슨 등 역대 대통령 외 저명인의 공동성명은 반유대주의는 반미국적이고 반기독교적이라고 항의했다[707]. '미국'지는 포드에 항의하는 유대인에 대해 유대인의 신속함은 칭찬해야 한다고 보도했다[707][711].
1921년'디어본 인디펜던트' 종이는 런던과 뉴욕에 대리 정부를 두고 있는 '올 주던(All) Judaan)은 독일에 대한 복수에 성공한 뒤 영국을 수중에 넣고 러시아도 유대인에게 패배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관용적인 미국은 유태인에게 있어서약속의 땅이라고 말했다[707]. 또한 포드는 뉴욕의 유태인이 러시아 마지막 황제를 대신하는 인물을 임명했다고도 말했다[697]. 이 기사에 대해 루이스 마샬 변호사는 항의했지만 포드는 반박했다[707].제이콥 시프는 포드와 비비면 대화사가 되어 버린다고 생각하고 항의를 포기했다[707]. 또한 '디어본 인디펜던트' 종이는 '시온 현자의 의정서'의 소개를 시작했다[707]. 1921년 8월에는 『시온 현자의 의정서』의 미국판이 출판되어 경제계 유력자나 국회의원의 손에 들어갔다[707]. 1921년 말 포드는남북전쟁을 유발한 것은 유태인이고, 링컨을 암살한 것도 유태인이라고 말했다[707].
작가체스타턴은 포드를 방문한 뒤 포드는 자선가이자 발명자이자 예술가이지만 “이런 인간이 유대인 문제의 존재를 깨달았다면 그것은 현실에 유대인 문제가 존재한다는증거이다.
테오도르 프리치(Theodor Fritsch)포드의 '국제 유대인'독일어판, 1922년
1922년에는 '디어본 인디펜던트' 종이가 유태인 변호사 아론 사피로로부터 호소되었다[707].
같은 해 포드의 '국제유대인' 독일어판이 출판자 테오도르 프리치에 의해 간행되었다. 독일어판 『국제유대인』에서는 주석이 엄청나고, 포드가 「유대인에게는 악옥도 좋은 것도 있다」라고 쓴 부분에 대해서는 「이것은 무서운 환상이며, 모든 유태인이 일체가 되어 인류를 멸시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포드를 비판한 주석도 있었다[7].
1922년6월하버드대학의 아봇 러셀 로웰[712]학장은 유대인 학생을 10%로 제한하는 방안을 제출했지만, 이를 보스턴 포스트지가 누설하면 아일랜드인, 흑인 조직과미국노동총동맹등이 비난하고 루이스마샬변호사3.
1922년 12월 10일자의 벨리너 타게브라트 종이와 12월 20일자뉴욕 타임즈종이는포드가 나치를 재정 지원하고 있다고 보도했다[707].
1924년이민제한법존슨법(일본에서는 배일이민법이라 부른다)에서 1890년을 기준으로 이민 국적별 할당을 3%에서 2%로 낮추면 1890년 이후 동유럽·남유럽이 제한돼[662]또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의 이민은 금지됐다. 폴리아코프는 이 이민 제한법의 목적은 유대인 이민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662]. 또한 이미1897년에롯지공화당의원은 이민자에게 문법검사를 의무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662].
1927년여름, 포드는 지금까지의 반유대 저작물로 유대인에 대한 부정이 있었다고 사죄하여, 이 간행물을 폐기했다[707]. 포드는 독일어판 '국제유대인'의 회수를 출판자 프리치에게 의뢰했지만, 프리치는 손해배상을 요구했기 때문에 회수를 포기했다[707]. 나중에 나치의 기관지 '펠키셔 베오바하타'는 포드의 사과에 대해 유대인 은행가가 영웅적인 노병을 나사로 썼다고 평했다[707]. 또한 포드는 바그너, 체임벌렌, 히틀러와 같이채식주의자이며 강한 술, 커피, 차, 담배를법도로 했지만, 이러한 '이물 거부'의 강박이 유대인에게 돌려주어졌다고 폴리아코프는 보고 있다[707]. 그러나 포드 이후에도 비행가찰스 린드버그와 가톨릭 사제찰스 코그린은 1930년대에 반유대주의 발언을 주장했다[707].
문학
스콧 피츠제럴드윌라 캐더
작가피츠제럴드의 1922년의 '아름답게 저주받은 자'에서는 뉴욕에 넘치는 유대인의 이름이나 'Jew Yoyk(쥬요크)'라는 표현이 보인다[662]. '위대한 개츠비'(1925)에서 주인공은 이디시 몹시 유대인 도박꾼 마이어 울프스하임에 의해 암흑가에 초대된다. 울프스하임은 스와스티카(鉤十字) 주식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년에는 가트루드 스타인이나 나사니엘 웨스트 등의 유대인 작가와의 교우나, 유대인 애인 실라를 가지는 등 해, 피츠제럴드는 반유태주의를 부정하게 되었다[656].
윌라 캐더는 보헤미아인, 스웨덴인, 프랑스인을 미화하고 그리는 것에 대해 유대인을 부정적으로 그렸다[656]. 소설 『교수의 집』(1925)은 미국인이 발명한 장치를 유대인이 특허를 취득하여 상업화에 성공한다는 얘기로, 창조적인 미국인과 타인의 창조한 것에 기생하여 착취하는 고상인 유대인이라는 구도를 그려 유대인을비판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날은 다시 떠오른다'(1926)에서 반유태적인 공기 속에서 권투를 시작한 유태인 콘이 찌르고 어지러운 남자로 그려진다[656].
토마스 울프'천사야 고향을 보라'(1929)에서는 유대인을 '아히루 기름 냄새'라고 외치는 아이 등 조롱하는 모습이나 또 '얕은 황색을 한 유태인'이 대량으로 재적하고 있는 대학이 그려져 유태인이암명714]. 또 “영국으로 가는 길” 원고에서는 반유대주의가 존재하는 이유는 유대인의 상업적 성공과 유대인이 사회적 고립을 유지하려고 하기 위한 것이고, 자신들의 세계에는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거부하면서 외부에서는 참정권을 주장하는 유대인을 비판했다[714]. 늑대는 사생활에서 유대인 유부녀와 애인 생활을 계속하고 있으며, 소설에서도 유대성을 둘러싼 싸움 등이 그려졌다. 울프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방문하자 나치 유대인 정책을 야만적인 것으로 간주했다[714].
토마스 딕슨 '더 클랜즈맨'은 백인 처녀를 강간하려고 했던 흑인이 린치되어 KKK단이 말에 타오르는 십자가를 끌어당긴다는 희곡으로 1908년까지 관객동원은 400만명에 달했다. 포크너도 관극했다[714].
윌리엄 포크너
윌리엄 포크너의 '표지탑'에서는 유대인 하수 국장인 파인만 대령이 환심을 사자며 결함 비행기에 무리하게 비행사를 탑승시켜 사고 죽여버리는 냉혹하고 속악한 인간으로 그려졌다[714]. '울림과 분노'(1929)에서는 녹지 않는 제이슨 4세가 동부 유대인을 바쁘다고 말한다[714]. '상처리'(1931)에서는 스노브스 의원이 이발사에서 유대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하열하고 싼 연중이라고 말하거나 유대인 변호사가 겁과 비정한 인간으로 그려졌다[714]. 단편 '죽음의 주행'에서는 굉장한 코를 한 상어면의 유대인 실업가가 파산한 뒤 곡예에 몰아넣고 약속 보상 부족분을 비행기에서 뛰어 내려 취급한다고 그려졌다[714]. '우화'(1954)에서는 유대인 소위를 비극적 영웅으로 묘사하는 반면, 반란의 책임을 받은 프랑스 군인을 냉혹하게 살해하는 브루클린 출신의 유태인을 그렸다[714].
체제 비판의 비평가 헨리 루이스 멘켄[715]은 유대인이 내거는 대의는 기분이 좋고, 그것은 포글롬을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논하고, 1934년에는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입식을 환영했다[662].
에즈라 파운드
시인에즈라 파운드는 고리 대출 관행(USURA)을 제거하는 경제 개혁이 필요하다고 무솔리니를 지지했다[678].1942년4월 3일, 파운드는 로마에서연합국을향한 방송에서 유대인 상층부 포글롬이 필요하다고 세계대전을 비롯한 60명의카이크(유대인)와 비유대적 유다공을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송환하려고 했다[678]. 1915년부터 새로 이어진 『시장』에서는 「로스차일드나 그 동류는 황금을 팔려고 하면, 반드시 그 가격을 올린다」(48편) 「로스차일드(Stinkshuld 죄의 냄새가 나는 남자)의 죄로 불쌍한 유대인(poor) yitts)가 보상을 하고 있다”(52편)와 유태인에 의한 국제금융지배(Usuracracy)를 비판했다[678]. 휴 케너는 이 부분은 분석을 시도한 것으로 반유대주의를 줄이는 것으로 했지만, 케이진은 로스차일드가가 전시 중에 다른 유대인보다 특권을 누리고 한 적은 없었고, 프랑스의기 드 로틸드 는 장교로서전선에 서서, 규의 사촌 형제는 포로가 되어, 모친의 친척의 대부분이 강제 수용소가 없어졌다고 반박했다678]. '시장' 52편에서는벤자민 프랭클린이되어 유대인과 국제금권의 추방을 썼다[678]. 프랭클린의 유태인 추방책은 WD 페리에 의해 유포했지만,1934년에 문학사가 칼 반 도렌은 이것을 날조로 했다[678]. 전후인1955년에 간행된 『시장』 91편에서는 민주세력은 하수구로 가는 길을 선택하고 배설물을 흘린 것은 유다공(Kikery)의 마르크스, 프로이트, 미국의 저급한 무리라고 썼다[678]. 반면 파운드는 유대인 제자 주코프스키를 평가했고, 1967년에는 유대인 시인인알렌 긴스버그에게 자신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반유태주의의 편견이었다고 말했다[678].
러시아 제국 내무성 경찰부 경비국파리 부장의 표토르 라티코프스키가 작성을 명령한 「시온 현자의 의정서」(1899년부터 1902년에 걸쳐 성립)에서는 시온의 현자들이 유대인전제 군주를 전세계의 교황으로 하기 위해 프랑스 혁명을 일으켜, 세계 모든 백성을 유대교 앞에 평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쓰여졌다[590]. 이러한음모론은 예수회, 프리메이슨을 악역으로 하는 음모론에서도 보였다[590]. 그러나 스트루이핀 장관이 헌병대에 조사를 명하자위서인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에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이 문서의 폐기를 명령했다[717]. 라티코프스키는 그 후, 반유대 단체흑백인조의 러시아 민족 동맹의 결성에 관여했다[718]. 또 당시의러시아궁정에는 파퓰스의제랄 앙코스(프랑스어판)등의 오컬티스트가 커넥션을 갖고 있어 「의정서」의 초고를 러시아에 반입하는데 관여한 율리아나 그린카도신지학에 경도하고 있었다[719].
러시아에서의 유대인 행정이 강경해지자 유대인은미국으로 이주하거나, 또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사랑과 시오니즘이 퍼져나갔지만,1903년에는 러시아 정부가 시오니즘을 금지했다[622].
러시아 혁명이 발생하면 '시온 현자의 의정서'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에서도 번역되어 유포해 갔다. 1921년 8월에 영국 『타임스』지가 의정서는 날조라고 보도하고[667], 이 문서는 침정화했지만, 반유대주의적 언동은 각지에서 계속했다.
1903년2월, 유대인이 주민의 절반을 차지하는 베사라비아의키시뇨프에서의 소년 살해 사건은 유대인이 범인으로 되어 크루셰반의 지방 신문은 반유대 보도를 계속했다[720]. 크시뇨프에서 유대인에 대한 복수를 선언하는 '진정한 기독교인 노동자당'이 결성되어 '기독교인의 피를 피우는 유대인이 민중을 반황제 운동으로 선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720].부활제의 일요일인1903년4월 6일, 포글롬이 발생했다[720]. 사망자는 49명, 부상자수는 500명, 마을의 3분의 1이 파괴되었다[720]. 군이 폭도를 진압한 것은 다음날 저녁이었다[720]. 이 키시뇨프 사건에 대해 서양 국가는 비난했고 러시아어 '포글롬'이 널리 인지되었다[720]. 우루소프 공작은 당시 러시아 경찰, 관우에게 반유대는 의무로 파악되었다고 하며, 한편으로 러시아 민중에게 유대인에 대한 적의는 보이지 않는다고 회상하고 있다[721]. 1903년 두보살리에서 의식 살인사건이 일어났다[722].
1905년오데사에서 포글롬에서 살해된 분도 당원.1905년 포글롬에서 희생된 유대인 아이들
1905년1월에피의 일요일 사건이일어나자, 봄에 걸쳐 각지에서 대규모 항의 파업이 일어나,러시아 제일혁명이 6월까지 계속되었다. 2월에는 모스크바 총독으로러시아 대공의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가 폭탄으로 암살되었다. 6월에는전함 포정킨의 수병이 반란했다. 여름에는 농민 일규와 비아 위스토크,브레스트=리토프스크,민스크, 크리미아 반도의 켈치에서 포글롬이 발생했다[724]. 8월에 니콜라이 2세는두마(의회)의 창설을 허가했다. 9월에 일본과의 강화조약포츠머스 조약이묶여 있었지만, 국내의 소란은 맞지 않았다.러시아 제일혁명을통해 유대인에 대한 의혹은 깊어졌고,세르게이 비테는 유대=프리메이슨의 음모에 가담했다고 고발됐다. 그러나 비테도 유대인의 횡포가 도를 넘었다고 보고 있었다[725]. 10월세르게이 비테는 '국가질서 개량에 관한 사서'에서입헌주의를 도입해 황제의 전제권력을 제한했지만 러시아 황제는 니콜라이 2세는 반발했다.10월 사서를 환영하는 데모가 일어나 황제파의 대항 데모가 일어났다[724]. 「유대인과 혁명파 타도」를 슬로건으로 하는 황제파는, 수백 개소의 마을에서 포글롬을 일으켰다[724]. 포글롬은 라티코프스키의 지시에 의해 행해졌고, 헌병대장 코미사로프(Kommissarov)는 포글롬은 언제든지 조직할 수 있다고 호언했다[724].오데사에서는 네이드 가르드 총독이 포글롬 희생자에 대해 “이것이야말로 유대적 자유다”고 말했다[724]. 1905년 10월의 마지막 10일간만으로 수백건의 포글롬이 발생했다[724]. 이 해 포글롬 전체의 희생자는 사망자 810명, 부상자 1770명이 되었다[724].
10월 사서직후, 황제니콜라이 2세는혁명운동의 90%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반유대의 포글롬이 일어났다고 어머니에게 편지로 보고하고, 2개월 후에는 유대인 국제적 공동행동에 대한 법안이 인가했다[726]. 러시아 정부는 "혁명가"를 "유대인"의동의어로했다[520]. 또한 니콜라이 2세는 유대인의 파괴 활동에 위협받고 있는 독일과 가톨릭 교회와의 협조 노선 외교를 지지했다[727]. 모스크바에 발한 폭동은 폴란드와 러시아 각지에서도 발발하고 있으며,비테나스트루이핀총리도 유태인 조직이 세계 규모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728]. 한편, 혁명운동에서 유대인의 활동에 대해서는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아버지로 불리는게오르기 프레하노프는 유태인 활동가를 '러시아 노동자군의 전위부대'로, 또 레닌도 유태인의 국제주의와 전위적인 운동에 대한 유태인의 민감함을 칭찬했다.[622]
1906년부터 1916년에 걸쳐, 반유대의 저작물이 2837권 출판되어 황제도 1200만 루블의 재정원조를 했다[724]. 크루셰반의 '군기(즈나미야)' 종이는 유대 문제는 종교 문제가 아니라 인종의 문제이며, 유대인은 '기생충적이고 탐욕스러운 본능'을 갖고 '그들의 침입을 용서해 버린 사회에는 확실히 죽음을 가져온다'고 보도했다[724]. 정치인 니콜라이 마르코프는 좌파 대의사를 향해 '러시아인 아이의 목을 찢어 그 피를 피우는 유대국의 후예의 정체'를 날릴 수 없게 되었을 때 정의도 사법 의지가 되지 않는다고 러시아 민중이 확신했을 때에는 최종 포그램이 발생해 유대인의 “혼자 남지 않고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목을 긁을 수 있다”고 연설했다.724].
1911년3월 20일, 13세의 소년의 시체가 키예프 교외에서 발견되면, 러시아 민족 동맹들이 의식 살인의 방향으로 조사해, 유태인의 벽돌 공장 직공장 멘델 베이리스가 체포되었다[730][731]. 작가블라디미르 콜로렌코는 베이리스 사건에 대한 특정 민족에 대한 편견이라고 항의했다[645]. 미국도 항의해 미로통상조약을 파기하고 내상 마카로프는 소추를 포기했다[730]. 그러나 법상 이반 그리고예비치 시체그로비토프는 재판을 재개하고, 베리스는 무죄로 여겨졌지만, 소년이 의식 살인으로 살해된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되었다[730]. 9월, 키예프에서 아나키스트의 유대인이 황제의 눈앞에서스트루이핀장관을 총격했다[720].
제1차 세계대전하의 러시아에서 유태인은 조국 러시아에 대한 애국심을 선언하고 있었다[669].1914년7월에는 유대인 의원 나프탈리 프리드먼이 유태인과 러시아에는 수백 년의 유대가 있어, 유대인은 깊은 조국 사랑을 가지고 있다고 하고, 또 유태계 신문 『노보 보스호드』는 유태인 동포는 조국을위해서지원병이었다.한편 반유대 조직흑백인조에 의한 인쇄물의 군내에서의 무료 배포도 이어져 유대인은 포로가 되면 러시아인 포로를 학대하더라도 보도되었다[669].
1915년에 러시아군이대나폴레옹 전래의 초토작전으로 전환해대퇴각을 시작하자 유대인이 독일의 스파이로 간주되게 되었다[732]. 1월에 '유대인, 기타 스파이의 의심이 있는 인물'의 강제 퇴거가 통달되어[669], 서부 지역에서 60만명의 유태인이 내륙부로 추방되었다[732]. 1915년 가을에는 유대인의 검거나 약식 재판에서의 교수형 등도 행해지게 되어, 회당에서의 관습이었던 마을을 둘러싸는 끈을 적과 통화하기 위한 전화선이라고 하여 피의자가 처형된 적도 있었다[669]. 1915년에 '젬시티나' 종이는 선전포고해온 것은 독일이 아니라 유대인이라고 보도했고,1916년에는 '그라주다닌' 종이는니콜라이 2세의 종형제인 영국 국왕조지 5세를 프리메이슨으로 혁명파라고 했다[669]. 1915년 8월 독일군이 러시아령 폴란드를 정복하고 리가로 진군하자 내상 니콜라이 보리소비치 시첼바토프는 니콜라이 니콜라에비치 야누시케비치 장군이 실패의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려 군 내부에서 포글롬이 추진되고있다고말했다.루프로프 통신 장관은 러시아인으로 전쟁에서 고통을 견디고 있는 동안 유대인 은행가는 국민으로부터 착취하고 있고, 1905년의 비상사태(혁명)에 유대인이 완수했다 역할을 기억해야 한다고 발언, 시첼바토프 내상은 유대인의 파괴 활동에 대해 루프로프 통신 장관의 지적은 정확하지만, 전쟁 자금은 유태인의 손에 있다고 말했다[669]. 러시아 국내 스파이에 대한 공포는 결국 제정 붕괴를 초래했다[669]. 한편, 작가골리키와콜로렌코,멜레슈코프스키와안드레예프는 부모 유대 발언을 하고 반유대주의에 항의했다[669].
2월 혁명후인 3, 4월에는 러시아군 탈주병에 의한 포글롬이 발생했다[669]. 3월에니콜라이 2세는퇴위했다. 반유대주의는 친황제파에 침투하고 있었지만, 혁명파에서도 우크라이나의 풀스타레프-노사리는 '반유대공화국'을 세우려고 했다[669].켈렌스키정부에 따르면, 1917년 7월, 보르쉐비키 총사령부의 쿠셰신스키가와 무정부주의자들의 두르노보장의 가택 수색에서 반유대 문헌이나 의식 살인의 그림엽서 등이 발견되었다[669]. 10월에 레닌은 켈렌스키 임시정부의 타도를 주장하고,10월봉기(그레고리오력11월)에서의 보르셰비키 정부 각료에서는 반유태주의에 배려해, 유대인은 트로츠키만이 되었다[669]. 그러나 이미 러시아 국내에서는 혁명은 유대인에 의한 견해가 침투하고 있어 '루프티쥬르날루'는 보르쉐비키와 유대인에 대한 포글롬을 호소했다[669].
또한 러시아 혁명과 유대인은 외국에서도 동일시되어 가고, 각국에서 반유태주의가 강해졌다[733][734].
1919년러시아 내전기인우크라이나의키예프현,포드리아현(포지야), 볼이니아현에서 포글롬이 625건 발생해, 포드리아현의 프로스크로프에서는 1650명・헬슨현의엘리자베트그라트에서는 1526 명의 유태인이5살되었다.포글롬에 참가한 것은우크라이나군,적군,백군(의용단), 농민이었다[215]. 우크라이나군은 '우크라이나를 구하기 위해 유대인을 죽여라'는 슬로건, 구 황제군의 의용단은 '러시아를 구하기 위해 유대인을 죽여라'는 슬로건에 의해 포글롬을 했다[215]. 우크라이나의녹군은 지도자아타만이 유대인 트로츠키는정교회를 파괴하자 선동했다[669]. 1918년부터 20년에 걸쳐 우크라이나에서 살해된 유태인은 6만명 이상이 되었다[669].
적군의 유대인 지휘관이 소지하고 있었다고 하는 툰더 문서(Zunder Document)도 1918년 5월경 이후의 러시아백군에서 유포해, 1922년에는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회에서 읽어졌다[697][736].
독일의 나치당에는발트해 연안지역 출신의 독일계 러시아인이 크게 기여했다[737]. 1917년의 혁명 이전에는러시아 제국령이었던리가출신의맥스폰 쇼이프너-리히터는 나치당 최대의 자금 조달자이며, 시케단츠, 크루젤, 만토이펠 등도 리가 출신이었다[737]. 1935년 '유대 제국주의'를 간행한 보스투니츠는SS에서 유대인 문제 담당 과학 전문가가 되었지만, 전 러시아 제국령 우크라이나 출신이었다[737].
1918년1월 러시아 정교의 보스토코프 총주교는 “우리는 짜리를 전복했지만 대신 유대인에게 예속되었다”고 발언했다[737]. 레닌에서 소련을 추방된 예카테리나 쿠스코바에 따르면 당시 소련에서는 기독교가 추방된 학교는 '유대적'이라고 미워하고, 보르셰비키의 종교 정책을 '유대에 의한 억압 정책'으로 간주하는 사람도 있었다[737].
바베리의 소설 '기병대'(1926년)에서는 여성밀매자가 군인을 향해 “너희들은 러시아를 생각하지않는다.이 부분은 검열에서 '레닌과 트로츠키'가 삭제되어 '유대만 도와주고 있다'로 변경되었다[737]. 또 '자모스티에'에서는 유대인은 누구로부터나 악자로 되어 전쟁 후에는 약간밖에 남지 않을 것이라고 백성이 말한다[737].
1926년모스크바에서의 유대인 주민은 15만명 이상이 되어 일반 러시아인에게 있어서는 '시온 의정서'의 유대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되었다[737].
1928년칼리닌 의장은 극동 지역빌로비장에 유대인 입식을 제안하고 유대민족구(현재유대자치주)가 설치되었다[738]. 국내에서의 시오니즘의 영향력을 경계했기 때문이었다[738]. 1928년에는 반유대주의를 죄장으로 하는 재판이 38건이 되었다[737].
1929년레다트의 저서 '반유대주의와 반유대주의자'에서는 러시아 공산당과 콤소몰(청년단)에서 반유대주의가 침투하고 있다고 하며 또 당 중앙위원회 104명 중 11명이 유태인이며 공무원에 있어서 유대인의 비율은모스크바였다.
스탈린
1931년에요시프 스탈린의 독재가 시작되면 부모 유대적인 문헌은 발간되지 않게 되었고 스탈린은 유태주의 등카니발리즘의 명잔에 불과하다고 말했다[737]. 스탈린은 "볼리셰비키는포글롬을 조직하여 당 내의 유대 분자를 정리한다"고 말하고대숙청속에서 히틀러와 비슷한 '유대인 세계 음모설'을 꺼내 소련과 그 위성 국가에서 유대인 박해를 했다[739][740]. 1934년부터 1938년 스탈린의대숙청에 의해 유대민족구의 유대인 지도자는 대량으로 처분되어[738]유태계 정치가카메네프,야킬,소코리니코프,라덱,트로츠키등도 희생되었다. 유대계 시인 만델리슈텀은 스탈린에 대해 "바퀴벌레 같은 큰 수염"이라고 도발했기 때문에 체포되어블라디보스토크의그라그로 이송되어 몰렸다[741]. 극빈이었던 스탈린의 아버지 페소는 부유한 유대인을 증오했고, 그 아들 요시프도 마찬가지로 유대인을 증오했다[742]. 요시프의 장남야코프도 포로가 되었을 때의 심문에서 “유대인은 일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장사뿐이다”라고 진술하고 있어 스탈린 일족에서는 반유태주의가 침투하고 있었다[742].
1904년아리아설을 비판하는 장피노[743]는 현대의 사회학, 정치학, 문학에서는 '아리아적'과 '비아리아적'이라는 대치가 공리처럼 되어 있다고 지적했다[342].
작가로만 로랑은 유대인을 옹호했지만,1908년'장 크리스토프'에서 모크라는 유태인 학자의 외모가 “너무 유대인적이었다. 낮은 머리의 대머리가 낀 무모호한 몸, 깔끔한 코, 큰 안경 뒤에서 사시나 부러워하는 큰 눈, 거친 검은 검은 쑥쑥 수염에 묻혀 있는 얼굴 , 털이 많은 손, 긴 팔, 짧은 구부러진 다리, 전혀 시리아의 작은 바르 신이었다. 라는 것은 더 불행하다”고 대답했다고 그려졌고, 또한 “셈 종족의 광대한 권태, 그것은 우리 아리안 종족의 권태와는 별종의 것”이라고도 썼다.744]. 또 이 소설에서는 반유대주의자인 올리비에가 유대신을 증오의 영웅으로 말하는 장면이 있다.
레온 도데는1913년'전쟁 전 : 독일 유대인 프랑스에서의 첩보 활동의 연구와 자료'를 간행하고 독일인은 드레페스 등 유태인 스파이를 사용하고 있다고 고발했다[745][746].
앙드레 지드
작가앙드레 지드는 '법왕청의 허점'(1914)과 '복구 만들기'(1925)에서 유대인을 불쾌한 등장 인물로 그려, 또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인1914년1월 24일의 일기에서는 '유 "다야 인종의 특질은 프랑스인의 특질이 아니다"며 "프랑스인이 말해야 할 것은 프랑스인에 의해서만 말할 수 있다."747].1948년에 사르트르의 '유대인'을 읽은 후 지드는 이 1914년 1월 일기에 대해 지금도 이 절은 정확한 것으로 믿는다고 썼다[747]. 사르트르의 책에 대해서는 자의적이고 혼란스럽다고 해서 “유대인은 인간 중에서 가장 온화한 사람들이다”는 문구에 대해 “진심으로찬동한다.
제1차 세계대전하
제1차 세계대전하 프랑스에서는 유태인이 전장에서 조국 프랑스를 위해 희생된 것으로 반유대주의가 저하되고, 또 유대인도 애국주의에 의해 독일인을 적시했다.1914년8월, 종군 랍비의 아브라암 블록이 빈사의 기독교인 프랑스 병사에게 십자가를 내민 순간에 총살되어 전쟁 미담으로 프랑스에서 반향을 불러, 스위스, 캐나다, 멕시코에서도 보도되었다[746].1914년12월 유대 장로파 기관 '이슬라리엣 고문서'는 유대인 병사의 애국주의 결과 반유대적 적의가 소멸한다고 1915년 6월에는 '유다 여인, 기독교인의 따로 없이, 모든 독일 놈(보쉬)이 무섭다”, 12월에는 “프랑스인의 신과 독일 놈의 신은 어떠한 공통점도 없다”고 했다[748].1915년여름,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랍비가 중립국의 미국의 유태인을 향해 독일의 대의를 호소했을 때, 프랑스의 랍비는 독일은 반유태주의적인 인종 이론을 만들어냈다고 대항해 미국의 유태인에게 호소했다[748]. 유대인 작가의스필 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에서 17만, 독일에서 6만, 불가리아에서는 5000명의 유대인이 병사 로 참가하고 있는것은 조국의 명예와 지금까지 규탄되어 온 유태인의 전사로서의명예를위해서다.유대인 작가 아르노 만델은 옛날부터 라비들은토러를 프랭크 왕국으로 귀화시키고, 지금 톨러는라 마르세이에스를 노래하고 독일 놈을 쓰러뜨리는 것이라고 말했다[748][750]. 반유대적 신문 '루브르' 편집장 귀스타브 테리는 전사자에게 유대인 병사가 많기 때문에 반유대주의를 물치에 두기로 했다고 말하기로 했다[748].
전시 중 프랑스 지식인은 독일을 야만인으로 비난했다. 프랑스의 유대계 철학자베르크슨은 독일과의 전쟁은 '야만성에 대한 문명의 투쟁'으로 '우리 아카데미는 독일의 흉포성과 파 황치 속에 일체의 정의와 진리를 모욕하는 태도 속에 야만상태로의 복귀를 살펴보면서 하나의 과학적 의무를 꾀한다"고 연설했다.751]. 작가메터링크는 “독일만은 나라의 끝에서 끝까지 육식수”라고 말했다[751]. 작가발레스는 독일이라는 야수에게 동봉이 되어 문명의 법칙에 복종할 때까지 발목을 강하다고 말하는 한편[751]유대인 병사의 전사자에 대해 무훈을 기리며 가톨릭·개신교·사회주의자·유대인이라는 분류를 그만두면 불특정 다수의 '프랑스인'이 출현한다고 왕당파도 사회주의자도 어머니 조국 프랑스에 연결되어 있어 유대교도 '프랑스교'의7이었다.
'액션 프랑세즈'의샤를 모러스는1914년8월 1일총동원령 다음날, 적의 타도만을 생각하자, 중요한 것은 시민의 동맹이라고 호소했다[746]. 또 모러스는1915년12월 유대인 언어학자로 드레페스 옹호파였던미셸 브레알의 죽음에 대해 브레알은 유태인이면서 프랑스에 애착을 갖고 그는 프랑스의 정수, 고전을 발견했다고 추모했다[746]. 1916년 6월 20일, '액션 프랑세즈'는 유대인 병사를 영웅이라고 칭찬하고, 우리는 유태인이 프랑스를 지배하는 것에 불만을 호소해 왔지만, 유태인이 프랑스에 봉사하는 것에 불만을 호소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746]. 한편, 모라스는 1916년 5월에 러시아에서 공화국 정부가 생겼다면, 그것은 독일계 유태인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753].
랜스 대성당이 독일군에 폭격되면 프랑스의 랍비와 기독교 사제가 애국의 계기를 맺고, 이렇게 제1차 세계대전하 프랑스에서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연합이 실현되었다[746].
한편, 반유대적인 언론도 계속되고 있으며, 드류몬의 '리블 파롤'은 1915년 11월, 대라비의 칙령으로 파리에 국적 불명의 유대인 1만명이 익숙해지고 있으며, 그들은 로시 아적, 루마니아 국적, 그리스 국적을 자칭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독일어와이디시어를말하고 있다고 고발하고, 또 사회학자듀르켐은 "붙여 코를 붙인 독일인"이라고했다746]. '루브르 프랑세즈' 종이에서 유르반 고예는 자저자 '우등인종의 권리'와 위조문서를 이용해 유대인을 공격했다[746]. 또한 유대인 육군 소위 엘츠는 새로 이주해 온 독일 유태인은 어쩐지 비합법적이기 때문에 이 전쟁에서 그러한 상황이 개선될 절호의 기회라고 보고 있다고 편지로 쓰는 등 독일계 유태인에게 의심이 가고 있다[754]
프랑스 국적을 가진 유대인은 징병되었지만, 외국적의 유태인 중에는 징병 사무소에 출두하지 않았던 것도 있었기 때문에, 1915년 7월에 러시아, 그리스, 루마니아, 폴란 드, 이탈리아, 스페인, 아르메니아 국적의 유대인에게 신원 확인 목적으로 경찰에의 출두를 요구하면, 프랑스 국적을 가지지 않는 유태인은 패닉이 되어 미국으로 퇴거해 갔다[746]. 또한 유대인 지원병은 외국인 부대에 통합되어 신병 학대를 받았기 때문에 1915년 11월에 외국인 의용병은 정규군에 통합되었다[746].
마르티니스트회의작가 조제판 페라단[755]은 1915년 독일에서 기독교가 파산한 것은 독일이 탈무드를 실천해 유태화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543].
러시아 혁명과 전간기
전시중 프랑스의 친유대주의와 달리전간기프랑스에서는 러시아 혁명의 반향으로 반유대주의가 높아졌다.1917년2월에러시아 혁명이 시작되면, '액션 프랜세즈'도 '리블 파롤'도 처음에는 호의적으로 해설했지만, 유르반 고예는 혁명은 러시아를 러시아 인민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유태인을 위해 인도할 것인가. 히브리인에 예속하는 프랑스와 히브리인에게 권력을 잡힌 러시아에 끼인 유럽에서 독일의 갈대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더 굴욕적인 예속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해석했다[753]. 7월에 볼리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려고 하면 프랑스에서는 경계감이 강해져 '리블 파롤'은 유대 요인이 혁명 뒤에 있다고 하며 주된 선동자들의 본명을 게재했다[690]. 줄날 데 데바[756]종이도 혁명의 선동자들은 본명조차 러시아적이 아니라고 유대인을 암시시켜 보도했다[690]. 또한클레망소도 '롬안셰네' 종이로 러시아 혁명 주도자 유태인의 본명 일람을 게재했다[690]. 4대 일간지의 종이 ‘르푸티 줄날’도 볼리셰비키의 본명을 게재했다[690]. 1917년 10월에 사회주의자 마르셀 삼바의 '룰' 종이는 영국에서 반유대 보도를 하고 있던 '모닝 포스트'로부터 정보를 얻고, 러시아에서 혁명을 실시한 유태인은 지나치게 많았고, 가명을 자칭하는 유태인을 비판했다[690].
11월에 볼리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자 프랑스 신문의 3분의 1은 유태인에 의한 범죄로 보도했다[690].클레망소는 애국주의 없이 고향은 없고, 고향 없는 민족이란 무엇일 수 있을까, 독일 유대인은 독일의 동포에게 시사되고, 러시아인의 가명을 자칭하고, 러시아를 비러시아화하려고 했기 때문에 포글롬이 일어났다고 10월 10일에 썼다[690]. 독불협조를 주장하고 있던 조제프 카이요도 러시아를 전복한 것은 유대인이며, 유대인은 스키타이인을 지배하에 거두고 반서양의 운동으로 달려간 유태인은 파괴를 선호하며 지배욕이강하다고썼다[690].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반유대 발언을 삼가해 온 발레스도 “러시아는 사라져 간다. 유태인이 흩어진 탓이다. 루마니아도 같은 이유로 사라져 간다” “유대인은 미국 및 영국의 주가 되었다”고 썼다[690]. 반면에 '르탄' 종이는 유태인이 신생 러시아를 괴롭히는 모든 악을 일신에 짊어지고 있다고 했다[690].
1918년11월 11일에 제1차 세계대전이 휴전하자 프랑스에서는 반유대주의의 싹이 불고, 바이에른, 헝가리에서의 공산주의 정권의 탄생과 프랑스에서의 파업의 노도에 의해 고무되어 갔다[690]
1920년5월에는 신문 각지가 반유대주의적으로는 보도를 반복했다. 파리의 '란트란시장[758]' 종이는 시오니스트가 우크라이나를 지배한다는 '동지 라포폴의 보고서'를 게재했다[697].5월 17일자 '렉셀시올' 종이에서 르포르타주 작가 런돌[759]은 모스크바를 통치하고 있는 것은 망명자, 시베리아인, 몽골인, 아르메니아인, 아시아인이며, 그 왕은 유태인이라고 주장했다[684]. '르푸티 파리지안'은 트로츠키와 이스라리엣의 브란슈테인은 셈인·동양인의 측근에 둘러싸여 동방의 나폴레옹이 되려고 한다고 보도했다[684][760]. 가톨릭지 '코레스폰단'은5월 25일에 '시온 의정서'를 소개하고, '란트란장'지는5월 27일'툰더 문서'를 게재했다[684].7월 2일에는 규스타브 테리가 '루브르' 종이로 '시온 의정서'를 소개하고, '액션 프랜세즈'도 9월 27일 모라스가 '유대인 문제'에서는 러시아, 미국 참전은 유태인의 영향력에 의한 것으로, 독일이 유태적인 정체 를 받아들이기위해서였다.1920년 말에는 '양세계 평론'에서 베르노와 타로 형제가 유대인을 비판했다[684]. 1920년 11월에는, 페스트 감염이 폴란드와 러시아로부터의 이민 유대인에 의해 초래되었다고 파리 시의회에서 다루어졌고, 좌파의 「라펠」지도 동방 유태인이 역병을 가져왔다고 보도했다[684]. 시인 파귄스[761]는 유대인은 반유대주의 선수를 치고 어딘가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말했다[684].폴 크로델은 1920년의 '욕을 받은 신부(Le Père humilié)'에서 “유대인에게 세례를 베풀기 위해서는 대량의 물이 필요하다”며 유대의 피를 당기는 기독교도 판세가 “물이 아니라 피로 세례를” 하는 장면을 그렸다[762].
모라스는1921년5월 12일'반유대의 보편정치'를 찾아 반유대 세력의 결집을 호소했다[684]. 1921년 당시 프랑스에서는 영국이 유대의 지배하에 있다는 견해가 추진력을 가지고 있었다[684]. 유대인 저널리스트 폴 레비는 '레클레일' 종이5월 21일프랑스 유태인은 영미 정상에 함정을 건 금융자본가의 악숙함을 물리쳐야 한다고 말했다[684]. 같은 해 모라스주의자인 로제 람블랑은 '앵글로 색슨인 아래 이스라엘의 지배'에서 영국은 유대의 지배하에 있다고 논했다[667].
1922년모라스의 지지자인 유태인 르네그로스가 '유대인 문제를 둘러싼 앙케이트 조사'를 출판했고, 우리 유대인은 프랑스라는 집에서 사람의 배를 봉사해야 하기 때문에 특별법을 제안했다[684]. 작가 잭 드 라클텔은 '실베르만'(1922)에서 유대인 실베르만의 불쾌한 아시아적인 얼굴을 하고 있으며, 속편의 '실베르만의 귀환'(1930)에서는 복수하는 악마 같은 남자로 그렸다[747][763].
극작가 장지 로두의 소설 '지크프리트와 리무전인'(1922)과 그 무대용 각본 '지크프리트'(1928)에서는 프랑스 깜짝 독일인 체르텐은 반공화주의자·반자본주의자이자 독일의 부흥을 목표로 유대인을 표적으로764]. 그러나 영미로부터의 제재로 체르텐은 추방된다[764]. 1922년의 책에서는오이겐 레비네를 모델로 한 유대인 리븐은 “독일은 우리(유대인)의 것” “독일의 독수리의 부리는 우리의 코의 형태를 하고 있다”고 한다[764]. 지크프리트는 와이마르 독일의 대립자로, 본모습은 프랑스인 저널리스트의 포레스티에이지만, 이 모델은 지로두의 친구로 액션 프랑세즈의 앙드레 드 프레노와였다[764]. 1922년에는 유대인 극작가 베른슈타인의 '유디트'가 대성공하고 있었다[764]. 지로도는 이에 대해 유대인들의 손에서 유디트를 탈회하려고 했고, '유디트'(1931)에서는 낡은 유대 딸이 유대인 제노사이드를 계획하고 있던 앗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살해한다[764]. 메일맨은 이 작품은 실패한 유대인 제노사이드를 회개하는 내용이라고 했다[764]. '에그란틴'(1927)에서는 유대인 은행가 모세의 애인 에그란틴이 십자군 병사의 후예의 귀족이 만드는 샐러드를 보고, 지금까지 자신이 '육식수'였다는 것을 깨닫고 모세를 버린다[765].
반면 언론인 안드레 쉐라담은 삼국협상 회원국은 유대-독일조합의 국제금융활동과 국제보리셰비키운동에 끼워져 있지만 유대인에 의한 세계정복이라는 음모는 잘못이고 유대인은범게르만주의에저항하는 조직을창출해야 한다.또 벨기에의 피에르 샤를르 신부는 1922년 4월에 『시온 의정서』는 황당무익하고 악의로 가득한 위서라고 논하고, 또 앙리 데 파사주 신부도 유대 음모론을 비판하고, 1927년경에는 프랑스의예수회는반다.
인종학자 라푸즈[767]는1923년에 "아직 정신생활의 시작 지점에 머무르는 이들 원숭이의 진화가 어려워진다"고 말하고 또 1926년에는 매디슨 그랜트의 '위대한 인종의 소멸'을 번역했다[747].
1931년카톨릭 작가조르주 베르나노스는 '양식파의 대공포'에서 반유대주의자로 유명한에두아르 드류몬을 '조국의 선지자'로 칭찬했다[582][770]. 또,클레망소는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사술에 의해 옛 좋은 프랑스를 해체하려는 악마라고 결정했다[589]. 같은 해 베르나노스는 “유대인이라는 작은 짐승이 미국이라는 거인, 무의식의 괴물의 연수를 탐내고, 이번에는 뇌가 빠진 러시아의 거귀에 습격된다”고 썼다[762].
1933년, 작가 제롬 장타로 형제는 '방황하는 암말'에서 유대인은 차리의 장소에 몸을 놓고 헝가리, 뮌헨, 그리고 비엔나에서 합스부르크 집을 추방했다고 썼다[762][771].
1934년작가 마르셀 주안도는 소설 '샤미나도르'에서 유다는 그리스도의 피를 돈벌이의 씨앗으로 한다고 썼고, 또1937년에는 '유대인 제사'를 발표했다[762][774].
1936년여름스페인 인민전선정부에 대한반공이시작되면 ‘크루아’ 종이는 “어느 날 모스크바에서 60명의 유대인들이 왔다”며 그들은 스페인인들에게 자신들이 매우 불행하다고 믿어 스페인을 러시아에 굴종시켰다고 보도했다[747].
액션 프랑세즈 필두의샤를모러스뒤를 이은 티에리 모네는1936년에 '콤바'를 창간해 문예 비평가모리스 브랜쇼가 정치주필을 담당했다.브란쇼는 1936년 '온건파들의 큰 열정'으로 유대인레온 브룸의인민전선과 두드려야 할 때 우익 엘리트는 무솔리니나 히틀러와 프랑코에게 기희작약하여 전선 피해를 비판했다[589]. 독일의라인란트 진주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프랑스 정부에 대해 브란쇼는 사로 총리는 “히틀러에 대해 즉시 모든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신학적 분노에 빠져 주장하는 사슬을 풀린 유대인들과 혁명파의 말에 귀를 빌렸다”며, 또 정부 내에서는 모스크바나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어려운 외국인들이 획책하고 있다”고 비난했다[775][776]. 또1934년 2월 6일 위기의 대중봉기를 재현해야 하고폭력혁명을 주장했다[776].
마르탄 뒤 걸의 '치보 가의 사람들'(1936)에서는 유대인 스카다의 얼굴이 추악하지만 눈빛에는 무한한 부드러움이 있다고 쓰였다[762][777]. 소설에 있어서의 유대인의 미화는듀아멜의 소설 「파스키에 가의 기록」(1933 - 1945)에서도 발견되어, 이 소설에서는 유대인 주스탄의 이름은 「정의의 사람」이라고 하는 의미에 유래해,마르누 회전에서 우리 프랑스인의 구제를위해서 전사하는 「구세주」로서7.
1939년당시다라디에 내각정보국장이었던 극작가 지로두는 정치문서 '전권'에서유대인은 은밀행동, 공금횡령, 부패를 뿌리고 프랑스 정신을 위협하고 있다고 말했다[747][782]. 지로두에 의하면, 파리의 오픈 스페이스는 투기가들에게 잇달아 수탈되어 “파리는 배타적이고 무책임한 과두 지배 체제에 의해 마음대로 조종되고”, 인종적으로 부적절한 분자인 유태인 이민을 제한하지 않는 프랑스는 “피침략국이 되어 버렸다”[764]. 동유럽 유대인은 프랑스 노동자의 전통을 파괴하고, 피복·신발·피혁 등의 수공업에서 프랑스 노동자를 구축했으며, 유대인은 비합법 활동, 공금 횡령, 부패를 반입하기 위해 “인종 성을 설립하고 프랑스를 구제해야 한다며 "정치는 인종적인 것이 아닌 한 그 최고 형태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히틀러와 완전히 의견을 같게 한다"고 주장했다.764]. '베레니스'(1943)에서는유대전쟁으로 유다왕국을 정복한티투스황제가 민중의 요구로 유대인 애인 베레니스를 부득이 추방한다[765]. 지로두의 희곡 '아가' '에그란틴' '소돔과 고몰' '베레니스' '샤이요의 광녀' '아탈리아'에서는 유대인은 추방되어 학살당하는 자로 그려졌다[783].
후년 철학자가 될 벨기에의폴 드 맨은 부모 나치 신문Le Soir1941년 3월 4일호에 「현대문학에 있어서의 유태인」을 발표해 「유럽인의 생활의 모든 국면에 유태적인 간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문명은 그 완전한 독자성과 특질을 유지하는 것으로, 그 근본 성질이 건전한 것임을 입증했다" "유럽에서 격리된 땅에 유대인 거류지를 설영한다는 유대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마다가스카르 계획)은 서양 문학생활에는 조금도 슬픈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말했다[785].
1944년에 작가조르주 베르나노스는 패전국 독일에 민주주의 국가를 확립시키려는리더스 다이제스트지에 대해 1918년 이후 독일을 재건한 것은 국제 자본주의이며, 국제 자본주의는 지금 다시 독일의 파탄을 우려하고 있지만, 수백만의 무죄의 유대인이 희생된 후에도, 유대 백성의 이해는오토뱅크(Haut Banque)의 이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반박했다[684][786].
히틀러 이전의 시대,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량 학살이 발각되기 이전, 프랑스에 있어서의 반유태주의는, 일류의 지식인에게 봉지된 「격식 높은 세계관」이었다[787].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의 유대계 철학자오토 바이닝거는1903년주저 '성과 성격'에서 남성적 정신과 여성적 자연을 대치해 가장 고상한 여성은 야비한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한다[543]그러나 여성은 남성을 신뢰하지만 유대인은 아무것도 믿지 않으므로 영원한 생명을 생각할 수없는 유대인은 유물주의적 퇴폐의 화신이었다[543]. 바이닝거는 유대인은 중국인이나 니그로와 근친성이 있지만, 진정한 아리아인은 반유대주의자일 수 없다고도 말했다[543], 선택해야 하는 것은 "유대교, 기독교, 장사 또는 문화, 여자 또는 남성, 무가치 또는 가치, 지상의 살 것인지 고차의 영원한 살 것인지, 아니면 신인가?"라고 논하고, 23 세에 자살했다[271][540][788][789]. 바이닝거의 책은 물리학자마하, 유태계 사회학자짐멜, 철학자버크슨과마우트너, 알로이스 헤플러[790]등도 읽고,히틀러는 바이닝거의 저작을 칭찬했다[271][540]. 유대계 철학자위트겐슈타인은 바이닝거를 좌우의 책으로 하고, 반유대주의에 대해 “실옥을 풀 수 없게 되었을 때, 제일 이구인 것은 풀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인정하는 것”이라고 썼다[791].
범 게르만주의 사회주의자 요제프 라이머는 '범 게르만주의 독일'(1905)에서유럽 대륙에서시베리아까지를 지배하는 독일에 대해 논하고 유대인과 슬라브인과 같은게르만화불가능한 것은 생식 공동체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하며 “유럽의 모든 민족의 게르만인프롤레타리아[792].
게오르크 폰 셰넬러(Georg von Schönerer, 1842-1921)
1903년에는 게오르크 폰 셰넬러의 범독일운동(Alldeutsche Vereinigung)을 지지한 독일 노동자당(Deutsche Arbeiterpartei)이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령체코에서 결성되어1918년에는독일 국가 사회주의 노동자당(Deutsche Nabe) 오스트리아의 독일 국가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제국 의회에서즈데텐 지방선출의 3 의석을 가졌다. (1920년 독일의독일 노동자당이개칭한국가 사회주의독일 노동자당(나치,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NSDAP)과 당명이 비슷하지만 다른 정당이다.)
1907년에는 합스부르크 제국에서의 독일계 주민은 민족 집단으로서 최대 세력이 아니게 되었고, 의회에서 내셔널리스트는 제국을 매도하고, 제국의 권위는 실추하고, 대의사가 때려 심의가 중단하는 등 제국 의회는 혼란을 다했다[608].
비엔나의 인도학자 레오포르트 폰 슈레더[793]는 '아리아 종교'( 1914)에서 유대인이 일신교를 아리아인에게 개명하러 왔을 때 명상적 철학이었던 원시 아리아인의 신앙은 정신적인 것이 되었다고했다.또한, 자연 숭배를 박해하는 유대적 일신교에 대해, 와그너는 팔지팔에서 아리아의 자연 숭배, 인도의 자비의 윤리, 기독교의 구속을 종합했다고 극찬했다[543].
제1차 세계대전때에는 헝가리가 부작으로 곡물공급을 정지했기 때문에 1918년에는 오스트리아에서 식량위기가 날카로워지고 “물가 상승이나 식량 부족의 원인은 유태인의 매입 탓 때문” “유태인에게는 병역 피해, 전시 이득자가 많다”는소문이2
프로이트
정신과 의사 지크문트프로이트는 1908년 "유대인의 탈무드적인 사고 양식이 곧 사라질 수 없다"고 유대인의 협력자칼 아브라함에 대해 유대인에 대한 "인종적 편애"를 경고했다[426]. 프로이트는 1926년에 자신은 정신적으로 독일인이지만, 높아지는 반유대주의에 직면한 이후 유대인이라고 자칭하는 것을 우선하고 있다고 말했다[794], 1935년에는 세계 시오니스트 조직의 금융수완에 대해 “나는 이 조직이 자신들의 조상의 토지에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기 위해서, 어떻게 거대한 규모로 사회 제도를 운용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유대인의 무적의 생존의지가 2천년간의 참을 수 없는 박해를 하지 않는다는 증거인 것이다.우리 젊은이도 이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795].
1939년프로이트는 망명처인 런던에서 '모세와 일신교'를 발표했다. 반유대주의의 해명을 집필 동기로 한 이 책에서 프로이트는 기독교인은 불완전한세례를 받았으며, 그리스도교 안에는 다신교를 믿은 조상과 변함없는 것이 있고, 기독교에 대한 증오가 유대교로의 증오로 옮겨가기로했다.또한 기독교인은 신살을 고백했기 때문에 그 죄가 깨끗해지고 있지만, 유대교는 모세 죽음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그 보상을 받았다고 논했다[796]. 바울은 유대 민족의 죄 의식을원죄라고 부르지만, 기독교에서의 원죄는 나중에 신격화되는 원부의 살해이며, 유대교에서도 모세 살해라는 죄 의식이 있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796][주82]. 프로이트에 의하면 기독교는 “내 고기를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고, 나는 그 사람을 마지막 날에 부활시킬 것”이라는 하나님의 고기와 피를 받는성찬식의 의례가 있지만[797]여기에는 아버지=하나님을 살해하고 먹는다는 토템 향연, 카니발리즘의 기억이 있다고 한다[796]. 한편 유대교는 중세부터 기독교인에 의해 의식 살인이나모렉숭배 등의 혐의로 공격받아 왔다[798]. 프로이트는 이러한 기독교인에 의한 반유대주의의 혐의는,성찬식을 교리에 의해 승화시킨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희생의 관념을 이어가면서, 유대교의 의례의 기원에 대해 혐오를 분노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 심층에 있다고 했다[796]. 즉, 기독교는 죄를 고백하고 정화되었지만, 유대교는 승화되지 않은 율법을 묵수하고 있다는 논리가 반유대주의 안쪽에 몰두한다고 했다[796].
프로이트는 종교가 인류의 집단적강박 신경증이라고 밝혔다[799]『모세와 일신교』에서는 종교는 단순한 환상이라기 보다 문화를 추진하는 힘으로 간주하고, 또한 기독교 이후의 유대교는 화석이지만, 또 바울 이후의 기독교도 퇴행이며, 이제 유대인만이 일신교의 활기를 유지하고 있어 기독교보다 유대교가[7], 유대인이 특수한 정신적 적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난을 견딜 수 있었다고기억 흔적설에 의해 논했다[426]. 프로이트는 칸트 이후의 리버럴 프로테스탄트에서 예수의 모세교에 대한 우위를 넘어뜨리고 모세의 예수에 대한 우위를 선포했다[796]. 그러나 '모세와 일신교'에 대해서는 전세계 유대인들로부터 이집트인 모세라는 포착 방법, 유대민족에 의한 모세 살해에 대해 항의가 쇄도했고, 유대계 종교 철학자부버는 비과학적이고 근거가 없는 추정이며 탄탄하다고 부정했다[800]. 덧붙여무솔리니는 프로이트를 정중하게 취급하도록 히틀러에게 의뢰하고 있었다고 한다[801].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융은프로이트가초자아라는 개념으로 심리학 속에 '여호와에 관한 낡은 어두운 이미지'를 도입했다고 1929년에 비판했다[426]. 융은1933년아리아적 무의식과 유대적 무의식을 대치해 유대인은 낡은 인종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자각적이지만, 아리아인의 무의식은 긴장과 창조적인 새싹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을 유치한 로망주의로서 가치를 낮추면 영혼을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고 하며 “아직 젊은 게르만의 백성은 문화의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논했다.802]. 방랑자의 유대인은 손님을 대접하는 문화적인 백성으로 발전하기 위해 그 본능을 보내기 위해 고유한 문화를 한 번도 만들지 않았다고 했다[802]. 융은 전세계가 놀란 국가 사회주의라는 장대한 현상의 에너지는 게르만의 영혼의 깊이에 숨겨져 있었지만 프로이트는 독일의 영혼을 몰랐던 것이라고 논했다[802][803].
독일 민족의 종파 대립은 진정한 기독교에 의해 통일된다고 생각한 평화주의자의 군인 모리츠 폰 에기디[805]는 고리 대여성과 물질주의 유태인이 독일에서 우위에 처한 것에는 독일인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하고 독일인이순화되면약하다.807].
마르크스주의 다윈주의 인류학자 루트비히 볼트만[808]는 칸트와 마르크스와 다윈의 종합을 목표로, 인류의 최전선에 서 있는 독일인=아리아인의 아름다움을 칭찬, 이탈리아르네상스의 지도자는 로마인이 아니라 게르만 민족의고트족이나랑고바르드족의 자손이며, 위대한 교황이나 프랑스 혁명도 프랑스에 있어서의아리아성의 발흥.볼트만은 또한 라푸즈의 신봉자이기도 하고, 북방인종에게 몽골인, 흑인, 알프스인, 셈인과의 혼혈은 유해하지만, 투쟁적인 게르만인은 서로 파괴하려고 비관했다[426][810]. 볼트만은 농촌 귀족의 재산을 나누고 뛰어난 인종의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것을 제창하고 노동계급의 보호를 호소했다[426]. 모세는 볼트만이 반유대주의가 아니었다고 한다[809].
동양학자 아돌프 바르문크는 자연을 약탈하는 사막의 백성 유대인은 셈인의 패권을 목표로 방랑하고 숲을 신성시하는 숲의 백성, 아리아인이라는 젊은 백성을 가지고 노는 것으로 했다[426].
1912년유대계 독일어 학자 모리츠 골트슈타인은 “유대인은 독일의 문화 활동을 장악하고 있다” “유대인은 어느 한 국민의 정신적 재산의 관리자가 되었다”며 “바보로 질투한 게르만계 기독교도”도 적으로 하지만 "최악의 적이라고 하면 보지 못하는 척 하고 있는 유대인이다.271][811]. 골트슈타인이 이것을 쓴 것은 독일 대학에서 유대인과의결투를 거부한다는 습관이 유대인이 명예 없는 피조물이라는 전제에 근거하고 있는 것에 자극받은 것이었다[271]. 고르트슈타인의 문장은, 1935년에게베르스의국민 계몽·선전성유태 문제 연구소 기관지 「독일의 유태인」에 「독일 문화의 관재인으로서의 유태인」이라고 개제되어 전재되었다[271][812].
1911년모로코 사건으로 프랑스의모로코지배가 확립되면 여론은 독일 해군에 실망하고호르베크 총리의 의향도 있어 해상패권보다 육 상패권이 목표가 되고, 1912년에 결성된 독일 국방협회는 육군 증강 프로파간다를 추진해, 1913년에 육군 증강 법안이 가결했다553]. 이 밖에 미래의 병사를 육성하기 위한 청년독일동맹은 회원 75만, 독일 재향군인협회[주83]는 회원 300만이 되었다[553]. 군비 확장의 결과, 1875년에독일 육군의 병력은 43만명이었던 것이1913년에는 80만 이상이 되어,독일 해군은 1897년에 17000명이었던 것이 1914년에는 약 8만명까지 증대했다[813]. 또한 독일 국내에서는 전쟁을 경제적 이익을 위한 전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독일의 전쟁을 윤리적으로도 정당한 '성전'이라고 파악할 수 있는 주장이 늘어났다[553].
1908년 전 독일 연맹 대표가 된 하인리히 클래스(클라스)는 체임벌린 명예훼손 재판으로 변호인을맡고유대인은 근대물질주의의 담당자, 게르만 정신의 적이며, 유태인 이민은 제한되어야 하며 또 독일에서 태어난 유태인 5의문화.수업은 유대인은 땅을 소유해서는 안되며 세금도 이중으로 징수되어야 하고 유대인의 문예활동은 금지해야 하며 유대인 기자를 고용하는 신문은 다윗의 별을 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55]. 클래스는 "(잡종 민족 등) 독일의 이름을 다치게 하는 존재가 가까이 계속되는 것보다 공포 속의 마지막, 명예 있는 마지막 쪽이 훨씬 좋다"며 인류를 정치적 도덕적 위생적으로 개혁해 인종의 순수 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정책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사회민주주의와 유대인과 싸우고 유대인들로부터 시민권을 박탈해야 하는 “어떠한 희생도 너무 크지는 않다”고 논했다.426][814]. 클래스는 외국에 있는 독일인을 조국으로 복귀시키고, 유대인을팔레스타인으로 추방하고,도니에플강 서쪽의 병합 등을 주장하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클래스는 독재 정부 수립을 계획했다[426]. 크러스는국가 인민당당목푸겐베르크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555]. 모든 독일주의자는 나치에 흡수 되었기 때문에 크라스는 히틀러를 완성자로 공격했다[426][555].
우생학자 오이겐 피셔(Eugen Fischer)는1913년일관된 인종정책이 없으면 유럽의 민족은 소멸한다고 말했다[426]. 또한 신경과학자·곤충학자 아우구스트 포렐[815]은 일본과 독일의 고아를 양국에서 키우는 것을 관찰하여 아리아인종과 몽골인종의 비교연구를 제창했다[426].
독일 민족자유당당원의 작가 아르투르 딘터는 소설 '피에 등장한 죄'(1917)로 유대인이라는 '악마적 인종을 멸망시키고 인민을 해방할 때까지 전투를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이 재앙으로 가득 찬 인종으로부터 최종적으로 해방될 때까지, 우리 독일 민족은 하나님으로부터 맡겨진 사명을 완수할 수 없을 것”이라고 썼다[816][816]. 또한, 아리아 여성이 부유한 유대인에 의해 능욕당하고 그 후 그 여성이 아리아 남자와 결혼해도 태어난 아이는 유태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그려[817], 딘터는 과거에 수태한 정자가 이후의 수태에도 나타난다고 하는감응유전설을바탕으로 잡종의 수컷과 섞인 순혈의 암컷은 영구적으로 섬광될 것으로 본다[342]. 이 소설은 100만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주84].
사회학자맥스 베버는 '고대 유대교'(1917)에서 유대인을 팔리아(Paria) 민족(호민) 즉인도에서와 같은 '의례적으로, 형식상 혹은 사실상 사회적 환경 세계에서 차단된 객인민족'이라며 유대 민족의 경제책819][820]. 팔리아라는 용어에는 게토 상황이라는 설하의 의미뿐만 아니라 선지자가 고난을 견디는 이스라엘의 고난의 신의론이 함의되어 있다[821][822]. 팔리아라는 용어에 반유대주의적인 경모의 의미를 잇는 일부 유대계 학자에 대해서는 신경과민의 과장으로 하는 비판도 있다[823][824]. 또 베버는베르하우젠의 영향으로, 포로 후의 「에스라기」 「네헤미야기」 이후의바리새파의라비유대교체제를 「후기 유대교」라고 파악해,제2 이사야서와예레미야서의선지자 의 정신과 같은고대 이스라엘 종교와를구.범게르만주의를 내거는 전독일연맹에 한때는 가입하던 베버였지만[426], 전독일연맹이나 독일조국당 등의 급진적 내셔널리즘을 비판하게 됨과 동시에 독일 국가를 적시하는 평화주의도 비판했다[439]. 또 베버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흑인과글루카족등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야만인과 도적, 여태자'를 병사로 징용한 것은 문화국가 독일을 황폐시키려는 비열한 행위라고 비판했다[439].
독일 역사학파의 경제학자·사회학자인베르나 좀발트는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아 초기에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있었지만, 이윽고 '자본주의의 정신' 중 모험적 기업가적 요소는 독일인으로, 타산적 부르주아 정신은 유태인에 속한다고 했다[826].1911년'유대인과 경제생활'에서 중세의 봉건제 기독교 공동체는 근대자본주의로 이행하여 유태적인 이익사회가 되었다고 하며, 인격적이고 자연스러운 독일경제 속에 유대인은 폭풍처럼 침입해 영리의 우위를 내걸었다고 했다[826]. 좀발트에 의하면,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가지는 유태인은 지역적인 전통보다 경제 합리성을 중시하고, 또 시민권이 박탈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가 아니라 경제에 주목해, 근대 자본주의의 중요한 담당자가 되었다[826]. 유대인은 지역적이지 않고 보편적이며, 국민적이지 않고 국제적이며, 구체적이지 않고 추상적이다[826]. 자본주의 제도의 창시자인 사막의 민족 유대인은 방랑적이고 저속하지 않은 반면, 숲의 민족 게르만인은 마음이 많다[426]. 유대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며 감성과 정감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연의 세계와 유기적인 세계와 대립하고 합리주의와 주지주의는 유대교와 자본주의의 특색이다[826]. 따라서 근대 합리주의를 추진한 것은 베버가 말하는 것과 같은 개신교가 아니라 유대교라고 했다[826]. 자본주의와 유대교의 본질은화폐에 의해 표현되고, 화폐와 유통은 사회관계를 추상화하고, 추상화의 정신은 유태인으로 구체화된다[826]. 그는 유대 세계와 자본주의를 동일시한다는브루노 바우어와마르크스 등의 사고방식을 재이용하여“태양처럼 이스라엘(유대인)은 유럽을비상했다.좀발트의 이 저서는 친구의 맥스 베버로부터 비판되었고 히틀러가 자료로 사용했다[426].
이듬해 1912년의 소책자 '유대인의 미래'에서는 사명과 민첩한 유대인은 독일의 예술과 신문을 지배하고 있지만, 이 유대의 우위성은 방치하면 회복할 수 없는 '인류 최대의 문제'라고 주장했다[271][827]. 또한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도 유태인 추방 후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유대인과 유럽인과의 동화와 융합도 자연의 법칙에 반하고 있으며 유태인종과 북방 민족의 혈액의 융합은 불길하다. 그러나 독일은유태인없이는할수없다고논했다.폴리아코프는 이러한 좀발트의 주장을아파르트헤이트정책이라고 한다[271].1915년'상인과 영웅'에서는 영웅의 나라 독일과 상인 국가 영국을 대치해 전쟁의 근대화에 있어서 기술의 의미는 의무, 희생, 공동체, 명예, 용기, 권위 등 숭고한 미덕으로부터 그 진가를 끌어내게 되었다고 했다[829]. 좀발트는 제1차 세계대전을 독일을 상업주의에 빠뜨리려는 영리적 에이토스에 대한 독일적 이상주의의 싸움이라고 칭찬했다[829]. 1927년의 「고도자본주의의 시대에 있어서의 경제생활」에서는 게르만 민족이 긍정적인 추진력, 파우스트적 의지, 인내력, 끈기에 공헌한 것에 대해, 유태인은 근면, 투기적 민감성, 계산력, 진보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대치해 상인과 금융업자에 의해 비합리주의적이고 정서적이고 자발적인 기업가가 소멸할 위험에 노출되었다고 논했다.829].
나치 정권 이후인1934년'독일적 사회주의'에서 좀발트는 유태적인 국제적 사회주의·국제적 자본주의에 대해 내셔널리즘과 사회주의가 융합된국민적 사회주의로서의 독일적 사회주의를 주장했다[829]. 이에 따르면 19세기에는 경제가 다른 영역(힘, 선함, 현명함, 예술, 가족, 전통, 인종)을 지배했기 때문에 지성화와 즉물화에 의해 영혼과 인격이 박탈되었고, 또한 마르크스주의도 영혼이 없는 근대공장을 진보로 환영했다[829]. 이에 대해 독일적 사회주의는 경제시대와 자본주의를 포기하고 현재의 '문명'상태를 없애고 이전과 같은 '문화'상태에 도달하고 독일 국민을 경제시대 사막에서 독일의 숲으로 되돌린다[829]. 그러나 유대 정신은 독일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하고 있어 “비록 마지막 유대인과 유대인 가족을 멸종했다 하더라도” 존속할 것이기 때문에 반자본주의 투쟁인 독일적 사회주의는 유태 정신과의 투쟁이라고 여겨졌다[829]. 같은 해 국민투표에서 좀발트는 철학자의하이데거나하르트만과 생화학자압델하르덴과 연명으로 히틀러 총통을 지지하는 학자 성명을 나치당 기관지펠키셔 베오바하터에 발표했다[830].
교육계·학생운동
반유대주의는 독일 교육계에도 침투하고 있었다. 1880년에는 베를린의 시전에서 교사 지케가 반유태적인 발언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이 화내고 때렸다[817]. 교육학자 헤르만 아르발트는 "아리아 민족과 유대와의 절망적인 투쟁"(1890)을 발표하고 유대에서 면한 민족은 자연스럽게 발전하여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 민족은 유대의 협박과 싸우기 위해 단호하게 행동해야 한다.817]. 1907년 포젠의 학교 교장은 유대인은 신성한 감각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유대인 학생은 향토학 수업을 받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817]. 또한 전 독일 연맹은 교사가 많았고, 36%가 교원이었다[404].
체조의 아버지 얀의 영향을 받아원더 포겔운동을 시작한 칼 피셔는, 향토의 자연에 대한 사랑은 게르만 민족과 조국 사랑을 불러일으킨다고 해, 게르만 기원의 의식을 실시하기도 했다[831]. 1913년 여성지부에서 유대인 소녀가 배제된 것으로, 원더포겔 내부에서 유대인 문제가 논의되었고, 피셔는 유태인에게는 민족으로서 경의를 나타내지만 독일 민족은 아니다고 했다[831].
1880년 독일 학생협회는 유대인을 교직이나 공직에서 배제하는 청원운동을 했다[832]. 1881년 독일 학생협회 키프호이저 동맹이 창설, 합리주의를 넓힌 유대인과의 투쟁을 사명으로 했다[832]. 1894년까지 독일 학생 조합으로부터 유대인은 배제되었고, 1919년 학생 조합은 개종에 따라서는 유대인의 인종성을 완화할 수 없다고 하는 아이제나하 결의에 서명했다[832].
독일에서는 신이교(네오파가니즘)가 공격적인 애국주의, 민족주의의 역할을 담당했다[410]. 망치동맹, 울다동맹, 버진기사단, 알탐동맹, 오스타라파 등의네오파가니즘적인 반유대주의단체(분트)가 결성되었다[520].
1889년, 오스트리아의 전시토회수도사·신비주의자예르크·란츠가신템플 기사단을결성했다[833]. 란츠는1904년저서 '신성동물학'에서아리아인을 신인으로 열등인종과의 격리를 주장했다. 1905년, 란츠는 게르만 민족의 봄의 여신으로부터 그 이름을 취한 기관지 「오스타라, 금발과 남성 권리를 위한 수첩」을 창간했다[834]. 란츠는 검은 피부의 인종은 야수의 본능으로 금발 여성을 덮치고, 인류의 문화를 파괴한다고 하고, 인종의 순화, 열등 인종의 멸종, 사회주의·민주주의·페미니즘의 분쇄, 아리아 여성의 남편에의 복종을 설득해 “만국의 금발색 눈의 사람들이야, 단결하라”고말했다또한 히틀러는 '우리 투쟁'에서 당시의 반유대주의 잡지를 '비과학적이고 얕은 논의'로 부당한 비난이 아닌가 느꼈다고 말하고 있어페르키시(민족 지상주의)인 섹트와 과격한 게르만 컬트를 경멸했다[608]. 나치는 란츠를 "인종 사상을 비틀어 굽혔다"고 비난했다[608].
비평가 율리우스 랑베인[835]는 '교육자 렘브란트'(1890년)에서스웨덴보르그와신지학등의 관점에서 게르만적영성을논하고, 자연스러운 한계를 넘어 불법침입해 독일 민족의 피의 순혈을 더럽힌 동화 유대인은 페스트 와 콜레라처럼'독일의 영원한 적 '이었다.랑베인에 따르면 독일 민족의 정신은 민주화, 평준화, 세분화에 의해 붕괴되고 있지만, 독일인은 가장 개성적이고 독자적인 민족이기 때문에 예술적으로 가장 중요하며, 독일 향토는 이상적인 것으로 '피와 흙'을 중시하고 하이마트 쿤스트(향토 예술)운동[83, 헨젤의 알탐 동맹, 나치 등에 영향을 미쳤다[838][839].
19세기 말에는 랑베인과 니체의 영향으로부터 자연보호운동, 독일청년운동,원더포겔, 집단생활과 지도 및 봉사를 중시한붕트조직이 전개되었다[838].1893년윤커에 의해 결성된 영농가동맹(Bund der Landwirte)은 농업보호를 호소하고 농산물의 관세 인하에 반발하고, 반근대 문명, 반자본주의, 반유대주의적 주장을 하고, 1913년에는 회원수 33만을 세는 영향력이큰단체.청년운동의 영향으로 결성된 나치의히틀러 청년단에서는 전 독일 청소년의 가맹이 의무화되었다.
에크하르트 등 독일 신비주의의 저작을 간행한 출판자 오이겐 디델리히스는 반유대주의를 비판하면서 유대인은 중근동으로부터의 외래인종이며 불모한 율법에 의해 내적 영성을 질식시켜 버렸다고 했다[840].
테오도르 프리치[841]는 '조명탄(로이히트 쿠게른)'(1881)에서 유대인은 인간과 유인원 사이의 중간 존재이며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하며[817],1887년'반유대주의의 카테키즘'을 출간842]"해머 동맹"을 결성했다[520]. 프리치는 포드의 '국제유대인'을 번역했다.
프리치의 가장 친한 친구인 빌리밴드 헨젤은 '바루나'(1907)에서 인종은 순화에 의해 유지되어야 한다고 하며 아리아인의 귀족과 전사를 도태와 선발적인 생식에 의해 형성하기 위한 게르만적 콜로니(식민지) '미트가르트'의 창설을주장했다.'미트가르트'는 일부 다처제 유토피아이며 지도자가 결혼 상대를 결정하고 아리아 인종의 영광을 위해 출산한다고 하며 금발로 아름다운 아리아 인종은 알몸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839]. 헨젤은 아리아인의 신인 알탐신에 연관된 알타마넨(알탐 동맹)[843]이라는 커뮤니티를 만들었다[839]. 알터마넨에서는 작센에서 농업을 하면서 동부 독일에의 이식과 동방으로의 영토확장이 주장되어 1928년에는 1500명의 회원이 있었다[839]. 알탐 동맹에는 독일의 향토와 민족에 뿌리를 둔 '피와 흙'의 사상을 주창해 나치당 농정 전국 지도자가 된리하르트 발터 다레와하인리히 힘라도 청년기에 가맹하고 있었다. 그 밖에 인종의 완전성은 농민 가운데 발견된다고 한 알터마넨의 지도자 홀펠더와 ‘하켄크로이츠 캘린더’를 출판하고 아리아적 농민을 칭찬한 브루노 탄츠만은 나치당에 입당, 그 후 알터마넨은 나치에 흡수되었다[839].
범 게르만주의에서 반유대주의의휴스턴 스튜어트 첸발렌은1899년의 저서 '19세기의 기초'에서 유럽인을아리아인이라고 부르고, 그 지배자는 게르만계의튜튼인과 노르드인으로, 아리아인을 고귀한 인종으로 했다[845]. 체임벌렌은 신비·비의(Mysterien)를 진정한 종교의 원천으로 보고 있으며, 유대교에는 신비와 신비주의가 부족하지만, 기독교에는아가페,성찬에서의실체 변화,부활등 현대에 사는 신비주의가 있다고 한다[846]. 그러나 개신교적 세계관을 받아들였던 체임벌렌은 가톨릭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비밀이 독일인의 심정으로 정신화된다는 것을 고안했다[846]. 체임벌렌은 카톨릭을 공격했고, 비아리아인의바스크인로욜라에 의해 만들어진예수회는 동물적인 본성으로 게르만 정신, 아리아 정신에 조직적인 공격을 했다고 했다[543]. 체임벌렌은 그리스도교의 성찬은 그리스 밀의와 헬레니즘 밀의를 이어 마법적·물질적인 요소가 배제되어 가고 있는 것이며 '진정한 헬레니즘인'의 심정이 아리아인에게 계승되었다고 했다[846].중세 게르만 신비주의의에크하르트,베메, 그리고 루터, 칸트, 괴테, 베토벤, 바그너,호엔조렐른가가 기독교의 살아 있는 진수이며, 게르만 민족을 수호하는 신성의 체현자라고 했다[846]. 또 예수에 대해서는 당시갈릴리가 아시리아에 의한 식민지화로 그리스인과 페니키아인이 이주하고 있어 바빌론 귀환 후 순혈사상이 강했던 유대인과의 통혼은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는 유대인이 아니라 아리아인의 혈통에있다고주장했다.예수-아리아 인설은 사회주의자의 듀링도 주창하고 있었다[846]. 체임벌렌은 셈계베두인,히타이트,시리아와 아리아계아모리인의 혼혈인종인 유대인은 수천년에 걸쳐 순수한 인종을 인공적으로 만들려고 계획하고, 그 힘을 만들어 켈트인, 슬라브인, 툰톤인을지배했다고한다.페르시아 왕 큐로스는새로운 바빌로니아를 쓰러뜨린 뒤 아리아인의 관대함으로 유대인을해방하고귀환시켰다.그리고 유대인에 의해 올림푸스와 발하라는 녹슬었고, 야하웨는 인도 유럽인의 신이 되었고, 현대 정부, 사법, 과학, 상업, 과학, 예술은 자발적으로 유대인의 노예가 되었지만, 그 중 아리아의 영혼을 구출하기에는 기독교를 비유태화하지않았다.'19세기의 기초'에서도 디즐레리의 유대주의적 인종 결정론이 그려졌다[364].
개종 유대인아시리아 학자프리드리히 데리치는 '바빌론과 성경'(1902)에서 구약성경의 일신교는바빌론이출자라고 하며 반발했다 유대교도 기독교인과 논쟁이 되었지만, 반유대 단체로부터는 열광적으로 맞이해 데이리치는 독일 황제빌헬름 2세에사적인속견을 허락받았다 846]. 당시 독일의 종교 정책에 고민하고 있던 황제 빌헬름 2세는 데이리치설에 흥미를 가졌지만, 데이리치가 기독교도 유대교도 신앙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고민이 깊어진 곳에, 체임벌렌으로부터 황제에게 편지가 도착했다[846]. 체임벌렌은아시리아도 셈족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이스라엘도 바빌론도 고대 페르시아에 기원을 가진 아리아 문화의 빌림에 불과하다고 데리치의 설을 비판했다[846]. 황제는자유주의 신학(문화 개신교)의하르낙을 루터파의 보수파의 반대를 밀어 베를린 대학 교수에 취임시키는 등,리버러리즘을 중시하고 있었지만, 첸 발렌은 리버럴리즘, 민족주의, 반유대주의,문화투쟁이라는 당시 독일에 적합한 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는 체임벌렌에 감화되어 아리아주의를 품게 되었다.846]. 황제는 체임벌렌에 대한 편지에서 “억압되어 있었던 우리의 청년기에는 당신과 같은 해방자가 부족했던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영혼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하라 게르만의 아리아주의는 끔찍한 싸움을 해왔다고 감사하며, 황제는 그 후 20년에 걸쳐서 문황해,황제의정책.1905년 1월,리가의 시위에 대해 빌헬름 2세는 “또한 유대인!”이라고 썼다[520]. 또 데이리치도 1921년 유대교에는 큰 기만이 있다고 비판했다[410].
극작가로 정치활동가인디트리히 에커트는 신비주의 시인 앙겔스 시레지우스, 쇼펜하우어, 니체의 영향을 받아헨릭 엡센 의 '페르 귄트'의 개작(1912년)에서는 귄트가트롤(유대인)과 싸우는4인]. 에커트는1919년7월의 논문 ‘루터와 이자’로, 루터는 고리로 끌리는 현대의 유럽을 예견하고 있었다며 ‘금의 저주로부터 인류의 해방’이라는 목적의 때문에 독일은 붕괴라는 수난을 받았지만, 파국 속에서 신세계가 태어나려고 하고 있으며, 독일 민족이야말로제3제국 을 실현해, 구제의때를 초대할 것이라고 말했다644]. 「제3제국」의 출현에 대해서는 입센이 「황제와 갈릴리인」(1873년)으로 그려져 있어, 에카트는 입센을 참고로 한 것으로 여겨진다[644]. 에커트의 시 "독일이야, 깨어라!"에서는 "유다가 제국을 박탈하지 못하게 나타난다. 리. 폭풍을 치고, 구원이 되는 복수의 뇌명 아래, 대지가 찾는 것처럼”라고 불리며, 유대인을 “요한의 묵시록”의7개의 머리를 가진 짐승으로간주했다853][854]. 요한계시록의 짐승은 머리에 하나님을 더럽히는 이름이 붙어 있었고, 용에 의해 모든 국민을 지배할 권위를 하지 않았다. 또한 에커트는 그리스도를 아리아 정신의 화신으로 보고 있었다[855].
툴레 협회에서 에커트그룹에 속한알프레이트 로젠베르크는독일 노동자당및 국민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당원이 되어, 1922년에 '펠키셔 베오바하타(민족의 관찰자)' 주필, 1934년에 나치 전체 정신적·세계관적 교육과 육성 감시1939년에는 유대인 문제연구소(Institut zur Erforschung der Judenfrage)를 설립했다[858]. 로젠베르크는 중세 독일의 신비주의자에크하르트를 신봉하고 진정한 종교를독일 신비주의로 하고,1934년에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종교'를 상척,1938년에'20세기 신화'를 출판했다[858]. 로젠베르크는 반유대뿐만 아니라 반기독교의 입장에도 있으며, 기독교아가페(사랑),겸손,헤세드(자비),헨(恩寵)보다도,영혼의 아름다움, 자유롭고 고귀한 영혼을 중시하고, 유대교에는 불사의 신앙이나 형이상학적인 종교가 없는 것으로 유대적=로마적 세계관을 대신하여 북방 종족의 게르만적 인간의 내적 측면을 칭양했다[858]. 로젠베르크의 사상은 히틀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독일 유태인은제1차 세계대전에서 조국 독일을 지지했다[859]. 1914년 8월에 '유대 전망지'는 '독일 유대인은 다른 독일 국민을 정확히 같은기분이다.독일 유대인 제국동맹과 독일 시온주의자 동맹은 동포에 대해 “전신, 전령, 전력으로 조국 독일의 군역에 봉사할 것”을 요구했다[691].
개전 당초 독일에서는 독일인과 유태인의 유연성이 주장되었다. 유대계 철학자헤르만 코헨은 독일어 사용자의 유태인은 정신의 조국 독일을 지지해야 하고, 유태 정신과 독일 정신은 형제 사랑으로 엎드려 있다고 했다[520][860]. 유대계 독일인으로하버드 대학심리학 교수푸고 뮌스터베르크도 조국 독일에 대한 사랑을 설교했다[860]. 반면에 반유대주의자인 오이겐 틴마만도 독일은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증오를 한 몸에 모으고 있다고 했다[860]. 독일인과 유대인의 유연성에 대해서는 유대계 작가야콥 바사만과토마스 맨,알프레이트 베버, 시오니스트의 나훔 골트만도 말하고 있다[860]. 한편 유대계 사회학자프란츠 오펜하이머는 “반유대주의를 “자국 예찬과 공격성을 특징으로 하는 내셔널리즘이 자국을 향해 보여주는 얼굴”이라고 했다[861].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한 독일의 유대인은 10만명에 이르고, 전사자는 1만2천명이었다[691].
유태인 실업가의 명문 해운기업HAPAG사장 알베르토 바린과 다국적 기업전기기업 메이커AEG회장발터 라테나우에 의한 '바린 라테나우 체제'는 반유대주의의 표적이 되었다. HAPAG는 황제의 신뢰 두꺼운 전시 운수를 지도했다.토마스 에디슨의 특허를 취득한 발터의 아버지 유태인 사업가 에밀 라테나우에 의해 창설된 AEG는 전기, 은행, 방적, 제지, 도자기, 철공, 항공, 자동차, 철도전화, 군사산업 등 대형 콘체른을 구축하고 있었다[691]. 라테나우는 세계 대전에 반대했지만, 프로이센 군사성 전시 원료 국장으로 취임하여 독일 전시 경제를 정돈했다[691]. 라테나우는 아리아 신화를 신봉하고 있으며, 유대인은 겁쟁이와 방어적인 반면, 북쪽 금발의 아리아민들은 남쪽을 정복하고 문명을 풍요롭게 하였고, 독일은 용기와 덕을 가진 게르만 인종의 피가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고 말했다[543]. 게다가 그는 유대교에 의해 근대 산업문명 속에 '공포와 지성과 술책의 권력'이 정착했다고 생각하며, 보이지 않는 게토 속에 중반 자신으로부터 흠뻑 살고 있는 유태인은악행도 모두 사람 탓에 버리지만, 유대인은 조롱 되지않도록 자기를 발언해야 한다7.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은 라테나우의 전시 중 조국에 대한 봉사는 반유대주의자에 의해 공격받고[691], 전후 암살되었다. 또 로스차일드가 이상의 부유를 자랑한 유대계 슈파이어가인 James Speyer는 군사생산에 투자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691]. 다른 한편으로 동유럽 유대인이 군사공장에서 가혹한 노동을 강요받았다[691]. 애국자이기도 하고 개종 유태인이었던 화학자플리츠 하버 는 마찬가지로 유대인이었던 제임스 프랭크, 리하르트 빌슈테터,맥스케르쉐바움 등과 독가스 무기 를 개발해 독일군은벨기에에서 사용해 전후에는 전쟁 범죄인으로 비난되었다.
군에서는 유대인이 병역을 쓰러뜨리고 한 번 벌려고 하고 싶어한다는 소문이 흘렀다[863].1915년 말 , 레벤트로 백작과발텔스등이 참가한 강연회에서는 책자 '독일군 내부의 유대인'을 장교와 학생에게 무료 배포가 결의되었다[864]. 이 모임에 참가한 화학자 한스 폰 리비히[865]는호르베크 재상의 평화 정책을 “유대인 재상에의한 썩은 타협”이라고 혹평하고[864], 대전은 독일의 유태인과독일의 게르만인과의 전쟁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그러나 리비히는 개종 유대인의 증손이었다는 것이 노출되어 전 독일 연맹에서 제명되었다[주 89]. 한편 1915년에는 유대계 언어학자 지크문트 파이스트[866]가 아리아 기원설은 기원전의 트로이아 신화와 같은 신화라고 하며, 아리아 신화가 곧 더 도리에 있던 과학적인 생각에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고 비판했다[387].
1916년3월 테오도르 프리치와 아돌프 로트는 국적 불명의 배금 정치는 독일 민족에게 반기를 휘두르며 국제 금융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고 황제 등에 의견서를 내놓았다[864]. 1916년 여름에는 독일 육군에서는 전시 동원을 피하고 있는 유대인을 고발하는 의견서가 넘쳤다[864]. 작가토마스 맨은1916년, 독일인은 초내셔널한 민족이며, 독일인에게는 내셔널한 틀을 넘은 책임이 있고, 유럽의 양심을 구현하는 사명이 부과되고 있다고 프랑스에서는 증오로 가득한 독일인 멸시가 있지만, 독일측에는 그러한 조응물은없다고했다.
1916년 8월베르단의 싸움에서 독일군이 프랑스군에 반격된다고 책임을 져 참모총장팔켄하인이 사임하고, 후임에힌덴부르크가 취임, 참모차장에는루덴도르프가 취임했다. 10월에 참모본부는 40만명의 벨기에 노동자를 강제 이주시키고, 또맥스 바우어대령의 발안으로 동원된 유태인의 조사를 개시했다[864]. 바우어 대령은 '시온 현인의 의정서' 독일 번역의 출판자로 '유대의 영안 불편에 저항하는 모임'의 뮐러 폰 하우젠을 루덴도르프에 소개하고 있다[주 90]. 같은 10월에가톨릭 중앙당도 유태인 관문의 조사를 정부에 요구했다[864].
1917년1월에는 함부르크의 '독일민족신문'이 표지에십자가를내걸고, 4월에는 하인리히 클래스와 체임벌렌이 '독일의 쇄신'을 창간했다[864]. 같은 해 초, 철학자 맥스 힐데벨트 베임이 '프로이센 연감'에서 동화 유대인을 고발하는 한편 시온주의에는 찬동한다고 표명하면 시온주의자 작가 아르놀트투바이크는 베임 유대인에 의한 세계 지배라는 것은 반유태주의의비평이다. 트바이크에 대해 베임은, 도스토예프스키는 유럽의 일대변사가 일어날 때 유대인의 권력이늘어나게 한다고 말했지만, 동화 유태인의 국제 네트워크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적은 유태 세계가 아니라 「유럽의, 그리고 게르만 세계의 보이지 않는 유태화 현상」8이라고반.
대전 당초부터 독일 정부는 러시아의 약체화를 노리고 혁명 세력을 지원하고 있어 유태계 혁명가팔브스와에스토니아인 케스큘라[주 91]외에레닌은1917년4월에 봉인열차로 귀국해러시아 혁명을 주도했다[864][869]. 3월 27일 페트로그라드 노병 소련은 “무병합·무상금· '민족자결에 의한 강화'를 내세우고 독일 사회민주당은 무병합강화를 지지, 또한 독일 각지에서 파업이 조직되어 러시아혁명을 모범으로 한 킬수병의 군무파업이 일어나자 독일체제파도 무병합강화를 지지하게 돼 7월 19일 무병합 평화결의를채택했다.이 이후 독일에서는 무병합 강화에 반대하는 격렬한 반동이 표면화되었다[864]. 1917년 여름 독일에서는 군무기피의 유대인은 혁명파 유대인을 의미하게 되었다[864]. 러시아 혁명에 유대인이 참가한 것도, 또 독일의 유대인의 일부에 혁명파가 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유대인이라고 하는 것만으로 공격 대상이 되는 것이 격렬해지면, 유대인 중에서 혁명파에 합류하는 것이 늘어나갔다[864].
1917년여름, 전 독일 연맹이 대전 발발 이래 앞두고 있던 유대 비난을 재개했다[863]. 의회의 평화결의에 대해서는 「유대강화」라고 부르고, 제국시민에게 거액의 부채를 안겨주고, 돈을 쥐고 있는 것은 유태인 「제3의 인터내셔널」이라고 했다[863]. 1917년 9월에 전 독일연맹은 독일 조국당을 결성해 “유대인에게는 살아가거나 죽을지의 투쟁의 개시다”고 선언해 지지자 120만을 세었다[863].1918년6월, 전 독일 연맹 회장 크라스, 체임벌렌, 디트리히 셰퍼, 게오르크 폰 벨로우 등과의 잡지 '독일국의 개혁'은 제1차 세계대전은 유태 세계 자본에 의한 세계 지배를 위한 음모라고 했다[863]
또한 프랑스가 식민지에서 아프리카인과 아시아인 55만을 동원한 것에 대해 독일은 비백인병의 배치를 유럽문명을 더럽히겠다고 항의했다[주92].
독일군의 마지막 공세인1918년 춘계공세가 7월 제2차 마르누 회전에서 실패했고, 빌레르-코투레에서도 독일군이 패하면8월 14일 루덴도르프는 군의 규율이완을 비난하고 또 유대인 청년을 빨리 전선 에보내야 한다고 연설했다.9월에는 동맹국의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불가리아가 항복했다[872]. 9월 전 독일 연맹 회장 하인리히 클래스와 폰게프 자텔 장군이 유대주의에 대한 항전조직 유대위원회를 결성했다[873]. 클래스는 1813년에 크라이스트가 프랑스인에 대해 말한 '놈들을 죽이고 세계의 법정은 당신에게 그 동기를 물어보지 않는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유대인 문제는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라 '세계관에 관련된 투쟁'이라고 포고했다[863]. 같은 시기에투레 협회가 설립되었다[873].
임시 정부
루덴도르프가 즉각 휴전조약 체결을 신청[873], 9월 29일 벨기에스파의 대본영은 강화협상의 개시를 결정했다.헬트링총리는 사임하고, 10월 3일에는 의회 다수파의독일 사회민주당의 지지를 받은 자유주의자의바덴변경백맥스 대공자를재상으로하는 사회민주당·중앙당·독일민주당의 임시정부가 성립했다[872].10월 23일미국 대통령우드로우 윌슨은강화 조건으로 독일 제국에서군국주의와 왕조적 전제주의의 제거를 요구했다[872]. 독립사회민주당들은 황제빌헬름 2세의퇴위를요구했고, 이에 반발한 루덴도르프가 일전해 전쟁 계속을 주장했지만, 맥스 재상은 루덴도르프를 해임하고 후임에빌헬름 그레이너가 취임했다[872]. 이 임시 정부를 유대인 지도자에게 굴복한 정부로 본 바우어 대령은 루덴도르프, 대기업 푸고 슈티네스와 함께 유대인 알베르트 발린을 맡았지만 발린은 12월 자살했다[873].
10월 29일, 휴전에 반대하는 독일 해군은 영국 함대에 결전을 도전하자대양 함대주력의 출격을 명했지만, 의혹을 가진 수병들 약 1000명이 출격 명령을 거절하고 반항했다[872]. 해군사령부는 작전 중지를 가져온 반항병사들을 체포해키르군항으로 보냈다.11월 1일, 킬군항에 주둔하고 있던 수병들이 석방을 요구했지만, 사령부는 거절했기 때문에, 병사와 노동자에 의한 시위가 행해졌다. 진압하려고 관헌이 발포한 것으로,11월 4일에는 노동자·병사레이테(평의회,소련의 독일어 번역)가 결성되어, 4만명의 병사·노동자가 시와 항만을 제압해, 함에적기를 내걸었다[872]. 정부는 사회민주당원구스타프 노스케를 파견해 수병들의 대우 개선을 약속해 평상화했다[872]. 독일 해군의 장교가 귀족·교양 시민층 출신자였던 것에 대해 일반 병원은 노동자로 차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계급 대립이 반영하기 쉬웠다고 한다[872]. 킬의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레이테 운동은뤼벡,함부르크,하노버등 각지에서 전개되었고, 장교는 체포되어 무장해제되었고, 각 군은 병사 노동자 평의회에 제압되었다[874].
11월 7일부터 시작된바이에른 왕국의 바이에른 혁명(뮌헨 혁명)에서는 바이에른 왕루트비히 3세가퇴위하고 레이테가 권력을 장악했다[875].독립사회민주당의 유대인 활동가쿠르트 아이스너가바이에른 공화국을 선언해 총리가 되었다[737][876]. 황제에 대한 풍자로 불경죄에 묻혀 수감되어 감옥을 떠난 지 얼마 안된 아이스너는 조용한 시위를 지도해 바이에른 왕국을 붕괴시켰지만, 바이에른 왕가의비텔스바흐가는프로이센 왕가의호 은조렐른가보다 오래되고 보수적인 가톨릭국이었던 바이에른에서 유태인 사회주의자가 총리가 된 것은 독일의 왕후 귀족에게 충격을 주는 동시에 독일 제국 붕괴의 전 단계가 되었다.734]. 프랑스의 '르탄' 종이는 아이스너를 '초라한 노인', '샤이록', '가리치아의 유대인'으로묘사했다.
그러나 서명한 것이 황제나 독일군의 대표가 아니었던 것, 전승국의 엄격한 요구를 용인한 것, 또 엘츠베르거가 호텔 내객장에 “해야 할 일을 하라(조약 승인). 그리고 마시고 유쾌하게 하자”에 쓴 것도 우익의 분노를 샀다[878]. 게다가 중앙징세를 권장했기 때문에 전통적인 영방국가 체제의 유지를 주장하는 지방보수층에서도 분노를 사서 “전승국을 위해 독일에서 돈을 짜내는 적의 손끝”이라 전후 독일에서 가장 미움받은 정치가가 되었다[878]. 엘츠베르거는 유대인이 아니었지만 '유대인의 동포'로 여겨져 전 군인으로콘슬의하인리히 슐츠와 하인리히 티레센에 의해 1921년 8월에 암살되어 범인은 갈채되었다[878]. 휴전교섭에 참여한 유대인 은행가 칼 멜히올도 비판됐다[879].
패전 후 베를린은 혁명파와 군부의 상호 대립과 학살이 횡행했기 때문에 정부는 와이마르에서 국민의회를 개최했다[879].1919년1월 19일국민선거에서제1당 사회민주당과 중앙당·독일민주당의 연립정부가 성립하고바이마르 공화국이성립했다[875]. 그러나 독일 국민은 '유대인들에게 낳았다'고 비난했다[879]. 사실 와이마르 체제는 독일 유대인에게 있어서 전례없는 정치 활동의 장이 되고, 유대인이 정부 중추에 참여하고, 의회를 운영하거나, 헌법 기초 등에 관여한다[880]또 독일혁명에 유대인이 크게 관여한 적도 있어 보수층은 와이마르 공화국을 '유대인 국가' '유대공화국(Judenrepublik)'으로 간주했다[734][881].
1919년부터1923년에 걸친 와이마르 시대는 패전과 빈곤과 사회 혼란을 배경으로 '유대인이야말로 우리가 불행하다'는 트라이추케의 말을 내건 반유대주의가 강해졌고, 그 규모는1933년 나치 정권 획득이후를 웃도는 것이었다[882]. 당시 그라이프스발트 대학의 철학 교수는 “반유대주의는 독일의 양심의 일부이다”고 했다[883].
독일 공화제 성립 직후 제정 시대의 정당독일 보수당이 개조되어독일 국가 인민당이결성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군은 3월 베를린 제네스트, 5월 뮌헨의 레이테 공화국을 진압했고, 독일 혁명은 종말을 맞았다[875].
바이에른 혁명의 실패
바이에른 공화국의 아이스너 총리는 중산계급을 레이테로 끌어들이려고 했기 때문에프롤레타리아 독재를실현할 수 없다고 공산주의자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또 사회민주당의 요구로 실시한 선거에서는 독립사회민주당은 3의석 밖에 획득할 수 없었다[876]. 게다가 아이스너가 세계대전의 단서가 된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에의 마지막 통철에 독일이 공모하고 있었다고 하는 공문서를 공개하면, 국가에의 배신인 것으로2월 21일에투레 협회회원의 유태계의아르코·파라이 백작 에 사정선언을실시 하는도중에 암살되고,
4월 6일부터 7일에 걸쳐 독립사회민주당에서 유대인 극작가인에른스트 트러와 시온주의 지도자 구스타프 랜다우어에 의해바이에른 레이테 공화국이수립했다[737]. 그러나 일주일 후인 1919년4월 13일러시아 출신 유태인독일 공산당원오이겐레비네에의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세웠다"며바이에른 레이테 공화국수립이 선언되었다[737][876]. 독일에 망명하고 있던 멘셰비키파의 유대인 지도자파벨 액셀리로드도 바이에른 혁명에 참가했다[737]. 이처럼 바이에른 혁명의 지도자 중 상당수가 유대인이었던 것은배후의 일투설설의 근거의 하나가 되었다[555]. 또한 혁명 중에 히틀러는 병사 평의회 관리하의 바이에른군에 소속되어 있어뮌헨 중앙역경비나 혁명 정부에 선전부문에 협력했다[888]. 혁명의 지도자에른스트 트러에 따르면 히틀러는 당시 사회민주주의자를 자칭하고 있으며, 또한 히틀러 자신도 “누구도 한 번은 사회민주주의자였던 적이 있다”고 1921년에 말했다[889].
4월 30일수병 에글호퍼가투레 협회회원을 포함한백군인질 8명과 정부군 병사 2명을 고문 끝에 처형한 것으로 에이버트 대통령은 노스케 국방상에 진압을 명령해바이마르 공화국군·의용군과 적군과의 시가전이 전개, 사망자 660명을 내, 바이에른-뮌헨 혁명은 종말했다737][876].
1919년 8월에바이마르 헌법이성립한다. 그러나, 기초한 것은 유태인 법학자로 내무성 차관의푸고 프라이스였던 것은 독일인의 반발을 초래하고, 또한 이 헌법은이상론을 담아내기 때문에 곧바로 실천상 곤란해져, 우익 좌익 쌍방으로부터 비판되었다[734].
9월 16일, 히틀러는 아돌프 겜리히에 대한 서한으로 유대와는 종교가 아니라 인종의 문제이며, 감정적인 반유태주의는 포글롬에 머물지 만이성적인 반유대주의는 유태인의 권리를 체계적으로박탈했다.9월 후반, 히틀러의 변론의 능숙함에 강한 인상을 받은안톤 드렉슬러는, 히틀러를독일 노동자당에 초대해, 히틀러는 입당했다[891].
독일 노동자당의 정책사상을 전개한고트플릿 페이더는 '화폐에 의한 이자노예제 타도선언'(1919)에서 유태적 금융자본과 국민적 자본을 구별하고 국제적 유태권력으로부터의 독일경제해방을 논한다[892][893]『국민적 사회적기초에 따른 독일국가』(1923)에서는 유태인은 생산적 노동으로부터 소원한 기생적 존재라고 하며, 『금융계에 대한 투쟁』(1933)에서 기생적 자본은 소수의 국제적 금융가의 이익을 위해 국민적 자원을고갈시키려고했다.
1920년 2월 독일 노동자당은 당명에 '국민사회주의'를 덧붙여국민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약칭 NSDAP, 통칭 나치)로 개칭했다. 동당의25개 조강령에서는 독일인의민족자결권에 의한대독일에의 합동,베르사유조약및생제르맹조약의 폐지, 독일의 피를 당기는 사람만이 민족동포(유대인은 제외), 비독일인의 이민의 저지,불로소득과기생지주의 타도, 지대징 기계의 제한, 기업의국유화에 의한 이익의 분배,중산계급의 육성, 고리대출, 암상인 등의 금지, 사회보장, 공교육의 확충, 독일적 보도기관의 창조, 종교적 신조의 자유도 챙겼지만 「유대적·유물론적 정신과 싸운다」적극적 기독교에 의해 독일 민족을 구제
유지 보수 혁명
제1차 세계대전 패전 후, 철학자오스발트 슈펜글러, 알투르 멜라 판 덴 브룩 등은 전통적인 프로이센 보수주의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내셔널리즘을 제창했다[894]. 이들은호프만 스탈의 용어[895]에서 '보수혁명'이라고 불리며, 와이말 공화국,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1923년의 인플레이션, 유태인, 세계시민적 문화, 정치적 자유주의를 적시하고 강력한 새로운 제국의 건설을 마음에 그린다[896],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아메리카니즘, 마르크스주의, 세계 시민적인 문명을 영혼이 박탈된 인공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독일 국민의 미덕과 독일 민족에 뿌리를 둔페르키시문화를 뛰어난 것으로 보고, 단편화된 이익 사회에 대해 민족 공동체를 대치하여 개인의 자기 희생과 권력894].
슈펜글러는 사회주의를 독일(프로이센)의 전통적인 덕성이라고 생각하며,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라는 프로이센적인 개념을 '프롤레타리아트'로, 더욱 자본주의라는 영국 적인 이념을 '부르주와지'에 귀속시킨 것으로 독일적 정신과 영국적 정신의 인종적 모순을 잘못 전사했다고 비판하고 영국의 산물인마르크스주의에서 독일을 해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897]. 또한 영국은 시장 경쟁에서 권력이 개인에게 뿌려지고 있는 반면, 프로이센에서는 권력은 전체에 소속되어 있고, 개인은 전체에 봉사한다고 하고 프랑스는 무정부 상태와 평등주의로 향하고 있다고 했다[897]. 슈펜글러에 따르면농촌은 피와 전통과 생산의 세계인 반면 도시는화폐와 지성에 의한 기생적 세계이다[898]. 고대 중세 유대인, 비잔츠인, 페르시아인, 아르메니아인과 같은 도시 상인은 독일의 특수성을 소멸시키고[898], 화폐는민주주의를 정치적 무기로 민중을 노예로 바꾸고 자연자원을 금융에너지로 바꾼다[899]. 그러나 '피의 공동체'에 의한 국민적 사회주의는 화폐와민주주의의 독재 및 자본주의를 깨고 '화폐는 피에 의해서만 극복된다'[898]. 또한 군대와 가족은 화폐관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전쟁은 위대한 일의 창조자이다[898]. 또한 현대는나폴레옹주의에서카이사르(황제)주의로 추이하고[900], 거기서는 헌법적 법식화는 불문하고, 카이사르의 개인적 권력만이 의미를 가지며, 혈액의 힘, 생명의 본원적 충동이 오래된 지배를 재개한다[901]. 카이사르는 통일적 활동의 흐름을 해방하고, 그리스 로마 세계가 하나님이라 부른 듯한 자가 되어 젊은 인종의 정신적 조상이 된다[901]. 슈펜글러는 나치당원이 아니었지만 유대적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국민적 사회주의와 황제주의와 같은 세계관을 제공하여 여론에 영향을 주었다[898].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 후, 전선의 병사가 공통의 정신으로 흩어져, 함께 피를 흘린붕트(결사)가 파국의 뒤에 유일 남은 것으로 간주되었다[555].철투단, 전선병사동맹인 프란츠 샤우베커는 200만명의 독일 피가 살아 있는 대지를 적시고, 우리는 '민족·국민'을 경험한 '파괴가 있는 곳에만 기적의 천계가 있다'고 논했다[555]. 사상가에른스트 윤가도 '강철의 폭풍 속에서'(1919)에서 불꽃의 세례를 겨냥하지 않은 병사들 국민을 진정한 귀족으로 만들었다[555]. 많은 젊은이가 휴전 직후에 73의 붕트를 결성, 그 가운데 가장 활발했던 것이플라이콜(義勇軍)이었다[555]. 베어울프분트(인랑동맹)는 사회주의, 자유주의, 금권정치와 투쟁했다[555].
1919년11월 13일, 뮌헨에서의 최초의 연설에서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 체결의 책임은 유대인에게 있고,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유태인에 지배되고 있다고 말한다[880].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은 독일군은 전쟁수행의 여력이 있었는데 공산주의자와 유태인에게 지지된 정부가 마음대로 항복했다고 주장했다[737][902]. 히틀러는 독일 혁명을 국제 유대 음모에 의한 "국가와 민족에 대한 범죄"로 하고 또 "전쟁 개시 시, 또 전쟁 중에 1만2천~1만5천의 독일 국민을 부패시키는 히브리인에게독가스를받고 있으면 전선의 100만 독일 병사는 구해졌다"고3자876].
1919년11월 18일의 패전책임자문위원회에서힌덴부르크원수는 “제국은 전쟁에 패한 것이 아니라 배후에서 날카로운 칼로 파고들었다”고 변명하여 공산주의나 독일혁명에 책임이 있다고 했다[737][880]. 맥스 파웰 대령, 폰 브리스베르크 장군, 루덴도르프도 목수 전설의 견해를 했다[863]. 각지에서 국수주의단체가 잇달아 결성, 회원 20만명의 「독일민족공수동맹」으로 발전해, 그들은 목수전설을 믿고, 패전은 유태인의 책임이라고 했다[880].
1919년, 화학자 한스 폰 리비히는 필명 누설로 책자 '독일 붕괴에 있어서의 유대의 역할'로, 유대인은 독일 혁명을 부수고, 독일 민족에게 불의타를 먹었다고 하고, 혁명이 없으면 휴전 조건의 수락도 필요 없었다고 논하고, 이 책자는13만6매
1918-19년 러시아 혁명으로 우크라이나에서 도망해 온 샤벨스키 볼크(Piotr Shabelsky-Bor)는 '시온 현자의 의정서'를 독일 복음 교회 신학자 뮐러 폰 하우젠[904]에 건네주고,1920년에 뮐러는]에서 독일어 번역 '시온 현자의 비밀'을 출판해 12만부를 팔았다[905][906][863][907].타임즈지가 1920년 5월에 호의적으로 뮐러의 책을 소개하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호엔초렐른 가문과 독일 황제빌헬름 2세는출판 비용을 조성했고, 황제는 저녁식사에서 책의 일부를 낭독했다[908].프리메이슨과 유대인이 결탁하여 음모를 둘러싼다는 속설이 퍼졌기 때문에 독일 프리메이슨 리는 뮐러의 책이 출판되면 유대인의 가입을 거절하게 되었다[909]. 뮐러는 1912년에 「유대인 지배에 대한 대항 협회」[주 95] 를 설립하고, 또 뮐러는 프랑스 혁명은 프리메이슨과 유태인의 음모로, 대전 단서의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은 유태인과 세르비아의 프리메이슨의 음모라고비판,863]. 뮐러는 유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포글롬이나 국외 추방으로는 부족하고 유대인을 갇힐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외국적 유대인의 독일 입국 금지, 독일인 학교 입학 금지, 금융업의 국유화, 유대인이 경영하는 상점에 다윗의 별 게시 의무화, 독일 이름 자칭 금지, 유대인 단체 금지 등 후속 나치 유대법과 같은 유대인 조례(Juden Ordnung)을 제안하고[863], 위반한 유태인은 사형이라고 주장했다[555]. 전 독일 연맹의 크라스는 뮐러의 유태인 조례안을 지지했다[555].
시인 파울 에른스트[910]는 1919년 '이상주의의 붕괴'에서 노동의 분업형태와 기계적인 심성을 비판하고[911], '마르크스주의의 붕괴'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했다.
1919년에는 유대계의 물리학자아인슈타인에게 강의의 자숙이 요구되고[912], 1920년에는 실업가 바이란트에 의한 반대상대성 이론캠페인이 걸려,노벨 물리학상수상자의필립 레널트나요하네스·슈탈크등의 물리학자도8.레널트는 나치당원이 되어 ‘일본물리학’, ‘아랍물리학’, ‘흑인물리학’, ‘영국물리학’에 비해 ‘독일·아리아 물리학’이 유일한 진짜이며 ‘유대 물리학’은 가장 유해하다고 했다[913][914]. 1933년나치당의 권력 장악이후 반상대성 이론 캠페인의 규모는 확대되었다[주96].
와이마르 체제를 비판하는 유태인도 있어 좌익인쿠르트 투홀스키등이 비판했다[862]한편, 중류계급 유태인은 유태인이 독일에서 달성한 것을 망치게 한다고 좌익 유대인을 공격했다[533]. 유대계 작가야콥 바사만은 독일인의 유태인 혐오를 공격하는 한편, 유대인은 현대의 자코반파라고 해 뿌리 없는 '교양 유대인'을 싫어하고, 유태인 혐오의 비난은 물질 지상주의로 어긋나는 유대인이 짊어져야한다고했다[1].유태인 작가 게오르크 헬만도 '예트헨 게베르트'에서 안정된 독일 중류 생활을 찬양했다[533][916]. 독일 교양문화에 대한 유대인의 동화는 깊고, 개혁파 랍비의 아들 루트비히 가이거는 괴테 협회에서 지도적 역할을 했고, 1920년대 베를린 괴테 협회는 유태인이 과반수를 차지했다[533].
1920년3월 13일에 군의 축소와독일 의용군의 해산에 반발한 쿠데타컵 일규가베를린에서 발생하여 국가인민당, 독일 국민당, 경제계는 신정부를 지지했다[918]. 베를린을 제압한에어하르트 해병 여단은 유대인에게포글롬을 시작하려 했으나 지도자컵은 제지했다[555]. 일쏘에 참가한 루터파 목사 고트프리트 트라우프[919]는 유태 문제에 대한 폭력적인 해결에는 반대했지만, 유대인의 물질주의를 비판했다[920]. 그러나 사회민주당, 독립사회민주당, 공산당, 독일노동총동맹은 컵 일규에 대항하여총파업을하고, 또 좌익복원의룰 적군에 의한룰봉기가 발생했기 때문에 컵은 퇴진했다[918]. 룰 봉기도 바이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918].
1921년1월 배상액 협상에서 총액 2260억마르크라는 막대한 배상금이 부과되었기 때문에 독일 전토는 격렬한 분노로 가득했다[주97]. 독일 정부는 수정을 요구했지만 연합국은 거부하고 라인 지방을 점령하고 압력을 가했다[918]. 1921년 5월 런던 회의에서 총액 1320억 마르크로 수정되었으며 독일이 거부할 경우에는 룰 지방을 점령한다는마지막 통틀을 통달했다[918]. 중앙당의페렌바흐총리는 퇴진했고, 중앙당 좌파인요제프 빌트가 총리가 되어 배상 지불에 응했지만, 우파는 비판했다[918]. 1921년 10월에 연합국은 오버슈레지엔의 4분의 1을 폴란드 귀속이라고 단정했지만, 거기는 광공업이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은 반발했다[918]. 1921년은 물가가 급격히 상승하고 식료품은 대전 말기의 8배, 1922년에는 130배가 되었고, 1923년에는하이퍼 인플레이션이되었다[921].
1922년1월, 빌트 총리는 배상 지불 불가능을 선언했다[879]. 같은 해 2월 1일 유태인발터라테나우가 외무대신 취임을 요청받았고 주위는 취임은 위험하다고 설득했으나 그는 승낙했다[879]. 4월 독일이 러시아의 보르쉐비키 정권을 국제적으로 처음 승인하는 한편 러시아가 배상권을 포기한다는라팔로 조약 을 체결하면 전승국 측에서도독일보수층에서도 분노를 사, 독일 민족 방위 동맹(슈츠 툴룽의 분트)은 라테나우를7조6월 24일에 라테나우 외상은콘슬에게 암살되었다[879]. 암살의 수모자 엘빈 쾰른은 "라테나우의 피는 영구적으로 분리되어야 하는 것을 더 이상 화해할 수 없을 때까지 분리해야 한다"고 말했다[922]. 암살 다음날 대학에서의 라테나우 추모 집회는 반대 시위로 중지되었고, 1922년 9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의 집회에서 공화파 독일인은 충성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결의되었다[923].
1923년1월 11일, 프랑스와 벨기에가 목재배상의 지불이 지연되고 있다는 이유로규칙을 점령했다[926]. 독일 국민은 사민당에서 국가인민당까지 분노가 퍼지고, 반프랑스 '국민통일전선'이 성립했다[918][926]. 히틀러는 이날 프랑스에 점령된 책임은 마르크스주의, 민주주의, 의회주의, 국제주의 뒤에 있는 유대인에게 있다고 연설했다[926]. 3월 31일에는 프랑스군의 총격으로크루프사의 13명의 노동자가 사망해, 41명이 부상했다[926]. 프랑스와 독일의 협상이 교착됨으로써 룰 지방을 사실상 잃은 독일은 석탄을 외국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게 되고, 또 룰 지방의 기업 지원을 위해서 통화를 무제한으로 발행해, 5월 에는 1달러=15000마르크, 11월에는 1달러=4조2000억 마르크로 하락해,하이퍼 인플레이션이 진행해, 화폐 마르크는파피에르마르크(종이 쓰레기 마르크)라고 불렸다[921][927].
바이에른 뮌헨 일소
1923년 여름 바이에른 주정부는 중앙정부가 룰에서의 '소극적 저항'을 중지한 것을 독일에 배신으로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계엄령이 깔려 폰칼을 주총감에 임명하여 전권을 위임했다[927][928].스트레이제만중앙정부도 대통령 긴급령으로 대항했지만, 바이에른은 바이에른 주재군을 주군으로 편성하고, 주 사령관 롯수를 바이에른 군사령관으로 임명했고, 바이에른은 독립 국가의 양상을 나타냈다[927]. 다만 칼은 나치당을 억제하려고 했기 때문에 나치당은 반발을 강화했다[928]. 또한 라인 지방도 중앙정부에서 분리운동을 시작했고, 공산당 코민테른도 중앙정부를 파시즘으로 비판했다[927].
코민테른은 독일 공산당에 무장혁명을 지시하고 공산당은 1923년 10월 23일함부르크에서 무장봉기해 당원 24명과 경관 17명이 사망,작센에서는 군과 시위대의 충돌로 23명의 죽은 자, 31명의 부상자가나와합법7928]. 공산당에 의한 반란에 대해 나치당은 자신들도 행동하지 않으면 나치당 지지자가 공산당으로 전향하는 것을 두려워했다[928].
바이에른 총리 칼 경찰 장관 자이서 바이에른 군사령관 로소우의 삼거두는 나치당과 루덴도르프를 제외하고 베를린에서 내셔널리스트 독재정부를 수립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928]. 1923년 11월 초, 자이서가 베를린에서 육군 최고 사령관 제크트와 쿠데타 계획의 협상을 하지만, 제트는 거절했다[928]. 이에 대해 나치당과 루덴도르프를 중심으로 한 투쟁연맹(Kampfbund)도 베를린으로의 진군을 계획했다[928]. 히틀러는 칼이 회의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쿠데타를 결심, 11월 8일 칼의 집회에 무장한 나치당이 난입하고, 히틀러는 청중을 향해 로소는 국방부 장관, 자이서는 경찰 장관, 칼은 주 섭정에 임명해 '베를린의 유태인정부'를 표적928]. 히틀러는 “오늘 밤 독일 혁명이 시작된다”고 선언했고, 군중은 찬동의 목소리에 휩싸였다[928]. 그러나 바이에른군도 주경찰도 일쏘에 협력은 하지 않고, 다음 9일 히틀러들의행진에 대해 총격전이 시작되어, 일탄 세력 14명, 경관 4명이 사망하고, 이렇게뮌헨 일규는 하루에 진압되었다[927][928]. 나치당은 금지되었지만, 삼거두도 다음 해에 실각했다[928].
빌헬름·마르크스내각에서는수권법(전권 위임법)이 주어져 공무원 40만명을 해고하는 등 대폭적인 예산 삭감을 실시했다[927].
1920년대 사조
1923년에는알프레이트 로젠베르크가 '시온 현자의 의정서'를 번역하고[929][908],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본질, 원칙 및 목적'도 출판했다. 1924년 1월, 로젠베르크는 “대독민족 공동체[930]”를 창설했다.
멜러 판 덴 브룩은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의 독일어 번역을 감수하고, 패전 후 독일인에게 충격적인 영향을 주었다[931][932]. 도스토예프스키의제3제국론에 영향을 받아 쓰여진 저서 '제3제국'(1923년)에서 멜라 판 덴 브룩은 '독일적 사회주의'에 의한 자유주의의 제거를 주장했다[838][894][933][934]. 황 덴 브룩은베르사유 조약에 의한 강화[주 98]는 평화가 아니라 독일의 노예화를 가져왔다고 하며, 작가토마스 맨도 같은 견해를 하고 있었다[934]. 황 덴 브룩은 독일에 밀려있는 영국과 프랑스의자유주의는 강자의 논리이며, 자유주의에서의 개인의 강조는 독일의 전통적인 공동체를 붕괴시키고, 또한의회제나정당 정치는 국민의 의지를 반영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934]독일과 러시아의 '동방'의 청년과 자본주의적이고 유물주의적인 '서방'의 청년을 대치해 마르크스주의의 종말 후에 출발하는 독일적 사회주의의 과제는 자유주의의 흔적을 모두 제거하는 것이라고 했다[894][주99]. 멜러 팬 덴 브룩의 서클에는 나치의오토 슈트라서도 가입했다.
게베르스
당시 문학연구자였던요셉 게베르 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고, 게베르스에 의하면도스토예프스키는 “서유럽에 대한 증오가 그의 영혼을 태워버리기 때문에 쓴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뒤를 따라 간다”고도스토예프스키의 제자를 자명했다.게베르스는 극작가 빌헬름 폰 슈츠에 관한 박사 논문(1921년)의 문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악령'에서 이지와 과학은 제2의적인 것에 지나지 않고, 국민은 “생명 영하거나 주재하거나 하는 힘”에 의해 생장하고 있어 “이 힘이야말로 마지막 끝까지 다가가려고 하는, 갈망의 힘이며, 동시에 마지막 끝을 부정하는 힘이다”라는 문장을 인용하고 있었다[932]. 괴벨스는 유대인 교수 프리드리히 군돌프를 존경하고 그룹에 가입하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또 소설 '미하엘 포어맨'을 유대계 출판사 울슈타인이나 모세에게 보냈지만 거부됐다[932]. 괴벨스의 소설 '미하엘 '(1924-29)에서는 “정치적 기적은 내셔널한 것 가운데서만일어난다.1925년 나치에 입당한 게베르스는 히틀러를 그리스도로 간주했다[932].
1919년에뮌헨으로 귀국한 루덴도르프는 유대인은 전시 중에는 독일을 배신한 전쟁 수혜자이며 독일은 유대 민족에 의해 팔렸다고 주장했다[871]. 루덴도르프는 오버런트단, 국기단, 나치당과1923년에뮌헨 일안을일으켰지만, 정신 상태가 심한 피폐 상태에 있다고 무죄 방면이 된 뒤,1924년에국가 사회주의 자유 운동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루덴도르프의 아내 마틸데는 신비주의자이며, 그 영향으로 루덴도르프는 공산주의로 장식한 유대인과프리메이슨의비교주의에 뿌리를 둔 로마 카톨릭의 "초 =민족적인 비밀권력'에 대해 말하게 되었고, 프리메이슨에 의해 기독교인이 '인공적인 유대인'으로 바꾸어지고 있다고 주간지 '민족감시소'도 창간했다.871]. 루덴도르프는1925년 독일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득표수 최저로 낙선했고,1926년에는 초국가적 권력과 싸우기 위해 탄넨베르크단을 결성하여 대통령이 된힌덴부르크와히틀러를 독일에 배신자로 했다[871]. 만년의 루덴도르프는 유대인이 기독교를 통해 독일 민족을 파괴하고 있다고 논하거나 나치의 입법은 유대인과 로마의 선전에 갇힌다고 비판했다[871].
문학자아돌프 바르텔스는 독일 문학사 중 독일인과 유태인을 구별하고, 제3제국기에 독일적 저작물의 「정화」를 위한 지도자로 간주되었다[838]. 발텔스는 '유대인과 독일 문학'(1912) '왜 내가 유대인과 싸우는가'(1919) 등으로 유태화된 독일 문학을 구제한다고 논하고 주저 '독일 문학사'(1924-28년, 3권)는 독일의 교양서가 되었다[83].1926년히틀러는 발텔스를 방문했고, 1937년 5월에는 독일 제국의 최고 훈장이었던 독수리의 문장이 수여되어 80세의 생일에는 최전위의 투사에게만 주어지는황금 문장이수여 되어 나치당 명예회원이 되지만 입당은하지않았다.
1924년1월, 독일 경제의 파괴 없이 배상 지불을 원활하게 하는 도즈안이 내려져 8월에 연합국과 독일은 승낙했다[927]. 국제환경의 호전에 따라12월 총선에서는 나치당도 공산당도 후퇴했다[927]. 그러나 국내에서는 우익, 좌익 준군사 조직의 결성이 잇따랐다. 1924년 2월, 사민당계의 ‘흑적금 국기단’이 310만을 옹호하고, 여름에는 공산당계의 적색전선투사동맹이 결성되어 10만의 세력이 되었다[927]. 나치당의 돌격대, 철투단, 독일 민주당계의 청년 독일 기사단 등이 전개되었다[927]. 1924년 4월의 바이에른 주 선거, 및 5월의 국회 선거에서 민족 블록이 제1당이 되었다[928].
『우리 투쟁』
뮌헨 일서에서 수감된 히틀러는 지지자들의 선물과 찬사로 넘쳐나고, 손님도 끊임없이 찾아와 법정에서 연설하자 환성이 끓었다[928]. 1924년 4월의 판결에서는 금고 5년과 200금 마르크의 벌금에 머물러 경찰의 희생이나 사민당 사무소의 파괴, 14조6050억 마르크의 강탈 등의 책임은 묻지 않았다[928]. 히틀러는 옥중에서 '내 투쟁'을 집필,1925년부터1926년에 걸쳐 출판하여 “전능의 조물주의 정신에서” “나는 유대인을 막고 주님의 사업을 위해 싸운다”고 선언했다[935]. 히틀러에 의하면, 기생적 존재인 유태인은 유해한바실러스균과 같이 어디까지나 퍼져 나가, 정착한 앞에서 숙주의 민족을 소멸시킨다[936]. 유대인은 평등과 노동자의 조건 개선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 목적은 유대인 이외의 모든 민족을 노예로 멸종시키는 것에 있으며, 흑발의 유대인은 젊은 딸을 빼앗거나라인강에 니그로를 데려오는등 모든 수단을 이용하여 혼혈에 의한 퇴화 를가져오고6인종.인류의 프로메테우스이며, 빛나는 이마에서 신성한 천재의 번쩍임으로 문화를 창조한 아리아인이 멸종되면 지상은 깊은 어둠에 얽혀 인류의 문화는 사라지고 세계는 황폐할 것이라고 말했다[936]. 또 아리아 문화를 「그리스 정신과 게르만적 테크놀로지」의 종합이라고 하고, 독일 국민경제로부터 주식거래소 자본을 배제하는 것으로 독일 경제는 유태의 국제 지배에 저항할 수 있다고 했다[893]. 830년경에바이에른 방언으로 필사된 『무스피리』에서는마지막 심판전에엘리야와반그리스도가싸우고 양자가 일으키는 피 에의해 세계가 업화에 싸여 파괴되는 모습이 그려지지만, 히틀러는 『무스피리』나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이라는묵시록적.
1925년2월, 금지처분이 해제되었기 때문에 나치당이 재결성되어 신규약에서는 “독일 국민의 최대의 적은 유대인과 마르크스주의”로 여겨졌다[937]. 2월 27일 당 집회는 성회가 되었다[937]. 27년까지 나치는 공공장에서의 의견표명은 금지되었지만, 1926년 7월 바이멀당 대회에서는 연설이 허락되었고,친위대(SS)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으며, 추정 8000명의 참가자들은 열렬히 히틀러를 환영했다[937].
에이버트 대통령이 사망했기 때문에 행해진1925년 대선에서 여당 바이마르 연합(사민당·중앙당·민주당)은 중앙당의빌헬름 마르크스를, 한편 국가인민당 등 우파는 전시 영웅힌덴부르크를맡아힌덴부르크가 승리했다.힌덴부르크는 온건한 통치를 진행하고 우익 과격파로부터 비판받을 정도였다[927]. 힌덴부르크는 1925년 말로카르노 조약을 체결하고, 국제연맹에의 가맹을 실현시켜, 이로써 유럽의 국제정치는 안정되었지만, 소련은 로카르노 체제를 경계했다[927].
1927년제4차 마르크스 내각은 실업보험제도 등 실업정책을 실현시켰다[927]. 1927년 3월, 나치는 바이에른에서 연설 금지가 풀렸지만, 청중의 수는 감소해 가고, 세력은 성장하지 않았다[938][주 100]. 독일 경제도 회복해 미국문화가 침투하는 가운데1928년 5월 국회선거에서 나치당 득표율은 불과 2.6%에 그쳐[937]사민당이 제1당으로 약진하고 국가국민당도 후퇴했다[927]. 선거에서 참패한 나치당은 결속을 강화했다[937].
괴벨스 1929년 1월 21일 당지 '공격'에서 '부정적인 유대인은 독일 민족의 책임에서 지워야 한다'고 주장했다[816].
한편 와이마르 시대에는 국내 시오니즘 운동도 활발해지고, 밴더링, 청년 스포츠 단체 발코프바, 시오니스트 연합이 결성되어 동유럽 유태인 미국, 팔레스타인 이주에 대한 원조를 했다[880]. 이들은 유대인의 국제적 결탁으로서 우익으로부터 증오되었다[880]. 유대인 청년단체 '청과 백연맹'(1907 설립)은 1920년대에 4만명 이상의 회원을 가졌다[816]. 또한 유대인은 언론에서도 활약하며 신문프랑크푸르트 신문, 베를리너 타게브라트, 포시셰 신문, 비엔나 일간지, 베를린 시민지, 남독일간지 등은 모두 유대인에 의한 것으로, 잡지의 베르트뷰네, 파켈, 노에메르쿠아, 노이에룬2]. 독일 유대인은 세계 유대인을 이끌고 시온주의와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건국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859].
세계 공황과 나치의 상승
1929년10월 미국 시장이 폭락해세계공황이일어났다.독일 국가인민당은 1929년 유대인의 입당을 취소한다[920]. 덧붙여 당의 원내 총무 RG 크바츠는 반유태인이었다[920]. 1929년 12월의 투링겐 주 선거에서 나치당은 11.3%를 획득해 6의석을 얻어 연립정권에 가입, 내상과 문상에 취임했다[939]
1929년에른스트 윤가는독일 민족에 내재하는 형태와 아름다움의 이상은 유대적 모양을 배제하려 했다[894]. 철학자 루트비히 클라게스는 '영혼의 대항자로서의 정신'(1929)에서보수혁명의 입장에서 과학적 합리성에 대해 정교한 공격을 했다. 기계는 생을 파괴하지만, 생을 창조할 수 없다고 기계 문명이나 기술을 비판했다[911][940].독일 사회민주당에 있던 에른스트 니키시(Ernst Niekisch)는내셔널 보르쉐비즘을 주장하고 생에 적대적인 기술을 비판했다[911]
1930년3월,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배상을 완화하는영안에 서명했지만, 국가인민당, 철토단과 전국농촌연맹, 나치당은 영안은 「독일 국민의 노예화」라고 반발하고 , 나치당은 과격한 행동으로일거 에2명을 올렸다.1930년 5월 프랑스의브리안총리가 유럽을 통일할 계획을 발표하자 독일은 현재 고정화가 된다고 반발했다[941].9월의 국회 선거에서 나치당은 650만표를 획득해 107의석의 제2당이 되었다[942]. 제1당 사회민주당은 후퇴하고 독일국가인민당, 독일인민당은 표를 줄이고 공산당은 지지를 늘렸다[942]. 선거 기간 동안 나치당 지지의 국군 울름 주둔지 사관 3명이 군사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혐의로 국가반역죄에 묻힌 재판에서 히틀러는 나치즘은 합법 적으로 권력을 탈취하고 나치 정권하의 헌법재판에서는 '1918년 11월의 죄'(독일혁명)가 묻는다고 법정에서 말하며 방청인으로부터 환호가 올랐다.942]. 1930년 10월 5일브루닝총리와의 회담에서 히틀러는 “공산당, 사민당, 프랑스, 러시아를 멸종시킨다”고 말했다[942].
1931년3월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에서 금지된 오스트리아와의 관세동맹을 발표했다[941]. 그러나 1931년 5월에 오스트리아 최대의 은행크레디트 안슈탈트(로스차일드가창립)가 파탄하면 금융위기가 시작되었다[941]. 독일-오스트리아 관세동맹을 비난하고 있던 프랑스는 크레디트 안슈탈트에 대한 차관을 거부하고 동맹의 성립을 저지했다[943]. 미국 등 각종 외국의 자본은 독일에서 철수하고, 이어 대형 방적회사가 도산하자 주력은행 중 하나인 다너트은행이 파산했기 때문에 독일 정부는 7월 금융기관에 휴업을 명령했다[941]. 그러나 공황은 가속화되었고,1931년 말 에는 실업자는 600만명 가까이에 이르렀고,1932년에는 노숙자가 40만명,실업률은 약 30%가 되었다[941]. 노동조합의 행동력은 떨어지고 취업자와 실업자의 홈이 깊어져철투단은 국수정부 수립을 이끌었다[941].
라인하르트 브레 『북방인의 사명』(1931)에서 「죄의 더러움이 없는 독일인은 귀족이며, 그 조상은 농민이다」라고 했다[555][944].
1932년 4월 대통령 선거에서 브루닝과 히틀러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속투를 목표로 협상했고, 브루닝은 나치당을 약화시키려고 히틀러는 브루닝의 파면을 조건으로 지지한다고 협상했으나 힌덴부르크는 거부했다[945]. 히틀러는 출마하지 않으면 지지자를 잃을 우려 입후보했다[945]. 힌덴부르크는 사민당과 중앙당의 지지를 얻어 53%의 표를 획득했고, 히틀러도 37%의 1300만 이상의 표를 획득했다[945]. 같은 시기인 1932년 4월 주 의회 선거에서는 브루닝 총리와 국방상 그레이너에 의해 나치 돌격대와 친위대의 활동이 금지되었지만, 좌익의 준군사 조직이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치는 당국은 치우치고 있다고 비판했다[945]. 주 의회 선거에서는 프로이센과 안할트 주에서 나치당이 제1당이 되었다[945].
힌덴부르크 대통령 측근의쿠르트 폰 슈라이하장군은 군과 나치당에 의한 정권을 계획하고 있어, 브루닝 도각 운동을 전개했다[945]. 1932년 5월, 국방상 그레이너의국회 연설중에 소란이 일어나, 슈라이탓 장군이 군의 지지는 잃었다고 말하자 그레이너는 사임했다[945]. 5월 29일, 힌덴부르크가 사임을 요구하자마자 브루닝은 사임했다[945]. 이날 오후 힌덴부르크는 히틀러와 회담했고, 돌격대 금령의 철회 등이 약속되었다[945]. 이어 슈라이탓 장군은 옛 친구프란츠 폰 파펜에 타진해 파펜을총리로 한 ‘남작 내각’이 6월 1일에 성립했다[945].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해 총선거가 7월 31일에 행해지게 되었다[945].
5월부터 6월에 걸쳐 나치당은 올덴부르크주, 맥클렌부르크-슈베린주, 헤센주에서 44~49%의 득표율을 기록했으며, 돌격대와 친위대 금령도 해제됐다[945]. 6월부터 7월에 걸쳐 독일 각지에서 나치당원과 공산당원에 의한 충돌과 살인사건이 다발하여 서로 희생자를 내놓았다[945]. 7월 17일 프로이센주 알토나에서피의 일요일 사건에서는 돌격대의 퍼레이드에 대해 공산당원이 발포해 17명이 사망, 64명이 부상했다[945]. 사회민주당의 아성인 프로이센 주에서는 사민당의오토 브라운이 주 총리를 맡고 있었지만, 파펜 내각은 피의 일요일 사건의 책임 등을 이유로 브라운 주 총리를 해임하고, 파펜이 프로이센 총독이 되었다[945]. 사민당은 저항할 수 없었다[945].
1932년 7월 독일 국회 선거에서는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제1당이 되어 의석수 230이 되었다. 히틀러는 자신을 총리로 하는 내각 개조안을 슈라이하 장군에게 타진했지만,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거절했다[945]. 또한 히틀러도 부총리로서의 입각 제안을 거절했다[945]. 회담에서 힌덴부르크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자에 대해 그다지 관용이 아닌 당”에 정권을 넘길 수 없고, 테러 행위에는 엄격히 대응한다고 응답하고, 히틀러는 분노로 폭발 직전이었다[945]. 때때로 파펜 내각이 8월 9일에 발효시킨 대테러투쟁 긴급령에 의해, 슈레지엔의 포텐파 마을에서의 돌격대에 의한 공산당원의 살해 사건에 대해 사형 판결이 나왔다[946]. 나치당은 '피의 판결'이라고 비난했기 때문에 파펜은 정치적 판단으로 감형에 응했다[946]. 나치당은 대테러투쟁 긴급령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것으로 생각해 환영하고 있으며, 펠키셔 베오바하타지는 나치 정권에서의 긴급령에서는 공산당과 사민당 간부가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 수용된다고 논하고 있었다[946].
9월 12일 본회의에서 공산당 의원 톨글러가 파펜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했다[946]. 찬성 512, 반대 42의 압도적 다수로 불신임안이 가결돼 파펜내각을 신임한 것은 독일국가인민당과 독일인민당뿐이었다[946]. 다음 선거는 11월 6일에 정해졌다[946]. 지난 선거에서 자금을 소진한 나치당에게는 엄격한 선거전이 되었고, 대다수의 미디어는 나치당에 적대적이었고, 나치당은 라디오의 이용도 허용되지 않았다[946]. 선거 기간 중 나치당은 보수주의자 파펜을 공격하고 또 베를린교통노동성의 파업을 공산당과 함께 지지한 것 등에서 나치당을 공산주의·사회주의로 간주하는 이미지가 중산계급 사이에서 퍼졌다[946].
1932년프로이센 보건국은 경제악화에 의한 복지 삭감을 위해단종법안을 제출했다[428]. 법안에 앞서 형법학자빈딩과 정신과 의사호헤(독일판)는 '살아날 만한 생명의 근절의 허용'(1920)에서 불치의 자나 불치의 치매자의안락사의 합법화를 주장하고 유전학자 바우어, 피셔, 렌츠는 1923년에 민족위생을 위해 안락사나 단종에 의해 열등 유전자를 배제할 것을 주장했다[428]. 렌츠는 장애아를 양육하는 것이 고대 스파르타에서의 장애아 유기보다 비인간적이었다. 프로이센 단종법안은히틀러 내각성립에 의해 폐안이 되었으나 나치 정권하의1933년7월 14일유전병자손 예방법이 성립되어정신지체등의 '유전병'자와 중증알코올 중독자의단종이합법화되었다[428]. 또한 프로이센 사법부 장관 한스 켈룰은 나치즘 형법 초안(1933)에서 안락사의 합법화를 주장했지만, 1935년 제국 사법부 장관 프란츠 굴트너 는 교회로부터의 반발, 민의의 미숙, 또 '민족공동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는 것, 이미 성립하고 있는 유전병자손예방법에 의한 단종정책 등을 이유에 반대했다[428].
1932년 11월 독일 국회 선거에서 나치당은 제1당은 확보했지만, 전회 대비 200만표를 줄이고 의석수도 230에서 196으로 줄었다[946]. 지지를 늘린 것은 공산당과 독일 국가인민당이었다[946].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변함없이 히틀러를 싫어했다[946].
1932년12월 1일, 힌덴부르크 슈라이허 파펜의 삼자회담에서 슈라이탓은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내각을 제안하고, 한편 힌덴부르크는 마음에 드는 파펜에 조각을 의뢰했지만, 슈라이하는 비상사 태를 선언하고 헌법 위반을 저지르는 계획이 이루어져 버리면 내전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고, 파업과 혼란이 일어나면 군은 국경을 방어할 수 없다고 대통령에게 충고했기 때문에, 대통령은 불승불승하면서 슈라이차를 총리로 임명했다946]. 슈라이허는 히틀러에게 협력을 요구했지만 거절되었기 때문에 히틀러의 오른팔에서 현실적 온건파였던그레고르 슈트라서에게 부총리로 입각을 타진했다[947]. 그러나 히틀러들이 슈트라서를 비난하자 슈트라서는 당의 전직직을 사임하고 나치당은 결당 이후 최대 분열의 위기를 맞았다[947]. 히틀러, 게베르스, 렘, 히므라 등은 슈트라서가 만든 조직을 폐지하고,오오타카구 지도자를 히틀러가 직접 지도하는 체제를 만들어, 당내에서는 히틀러 지지의 캠페인이 실시되었다[947]. 슈트라서는 1934년긴 칼의 밤에 렘과 함께 살해되었다[947]. 12월 초의 튀링겐 주정촌 의회 선거에서 나치당은 괴멸적인 결과로 끝났다[947].
퍼펜은 슈라이하에 정권을 쫓기기 때문에 자신을 부총리로 하면 히틀러의 총리 취임에 일할 것이라고 히틀러에게 제안하고 합의했다[948]. 슈라이탓 총리는 수입관세에 소극적이라 농촌동맹으로부터 투쟁을 선언받았고, 또한 독일국가인민당으로부터도 저항을 선언받았기 때문에 1933년1월 28일내각총사직했다[949]. 파펜에 의한 각료 리스트에서는 외상 노이라트, 재무상 클로지크, 운수 우정상 류베나하는 슈라이하 내각으로부터의 계승으로, 프로이센 내상에 게링, 경제상에 국가 인민당 알프레이트 푸겐베르크였다[949]. 히틀러는 파펜을 부총리로 삼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힌덴부르크도 히틀러 내각을 승인했다[949]. 우려에 대해 파펜은 “우리는 히틀러를 고용한 것”이라고 말하고, 또 히틀러의 취임에 반대한 철투단에 대해 푸겐베르크는 히틀러의 봉쇄는 가능하다고 반론했다[949]. 히틀러는 선거 이후 대통령의 동의에 의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전권위임법을 통과하자 파펜에게 전하고, 빈번한 국회 선거를 원하지 않는 파펜과 힌덴부르크도 승낙했다[949].
이렇게1933년1월 30일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나치당),독일국가인민당,철투단의 연립내각히틀러 내각이 탄생했다. 부총리에 독일 국가인민당 파펜이 취임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국민적 우익세력이 결국 결속한 것을 환영했다[949]. 히틀러는 그날 저녁 각료에 대해 공산당을 금지하면 총파업이 되어 군의 동원이 되지만 그것은 피하고 싶다. 최선의 방법은 국회를 해산하고 다음 선거에서 정부가 과반수를 취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950]. 파펜과 힌덴부르크는 국민에 의한 승인의 필요성이라는 점에서 선거를 승인했다[950]. 선거에 있어서 히틀러는 파펜 내각이 준비하고 있던 '독일 국민을 방어하기 위한 대통령 긴급령'을 발효시키고 언론과 집회를 억누르기 위해 활용되었다[950]. 2월 1일, 히틀러는 라디오 연설에서 1919년독일 혁명이래 14년간 공산주의에 의해 독일 국민이 오염되어 이대로는 독일은 붕괴한다고 경고하고 경제 정책에 의해 곤경을 극복한다고 말했다[950].
2월 27일, 전 네덜란드 공산당의 루베가 국회의사당에 방화하는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발생했다[951]. 방화는 단독범이었지만 나치당은 공산당에 의한 조직적 폭동으로 간주 대탄압을 시작, 4월까지 프로이센만으로 약 2만 5000명이 구금됐다[951]. 2월 28일 '국민과 국가의 보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령'을 내놓고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제한하고 질서회복을 위해서는 주 자치권보다 정부 간섭권이 우선한다고 했다[951]. 이러한 히틀러 내각의 강경책은 각지에서 '독일의 천적인 볼리셰비즘에 대한 대결'로 환영받았고,1933년 3월 독일 국회 선거에서 나치당은 288의석을 획득했다[951]. 다만 한편으로 사민당과 공산당도 의석을 늘리고 있다[951].
반유대주의는나치 독일의 국책의 하나가 되었다. 히틀러는 독일의 싸움은파스퇴르와코흐에 의한 박테리아와의 싸움과 같은 성질이라고 했다[410]. 또제3제국에서는 「아리아성」이나 「게르만성」보다도, 금발의 장두인종의 「북방성」이 인기가 되었다[953].
1933년3월 유대인이 소유한 백화점을 적시하는 '영업중간층 투쟁동맹'이 독일 각지에서 유대인에 대한 습격과 강도 등의 폭행을 반복했다[951]. 이에 대해 유대인 지식층은 미국 등 해외에서 반독일 여론을 환기해 독일 상품 보이콧 운동을 시작했고, 이에 반발하여 독일에서 유대인 상점이나 백화점에의 보이콧이 전개되었다[951]. 히틀러는 '외국에 의한 선동'을 기획한 자에 대해 대처하기로 3월 28일에는 총리명에 의한 유대인 기업, 상점, 의사, 변호사에 대한 보이콧을 실현하기 위한 당 성명이 나왔다[951]. 영국, 프랑스, 미국 정부와 독일 정부와의 협상으로 유태인에 의한 반독일 보이콧 운동도 억제되었고, 4월 5일 보이콧에서는 나치당원의 플래카드를 무시하고 쇼핑하는 시민도 많았다[951].
1933년 4월 7일, 유대인과 정치적 적대자를 관우에서 배제하는 '직업관고 재건법(독일어판)'이 제정되었다[954][955]. 같은 시기에 법조계, 병원, 학교에서 유대인을 제한하는 반유대법이 제정되었다[954].1933년4월부터 5월에 걸쳐 독일학생협회(독일학생회[954])가 루터에 의한 12조 논제를 내고,1817년의 발트부르크 축제에 맞추어비독일적인 서적이 焚書되었다[956]. 지난 5월 10일의 焚書은 겟베르스의 발안으로 여겨져 왔지만, 라이발의 국민사회주의 독일학생연맹을 내놓기 위해 독일학생회가 발안한 것이다[954]. 괴벨스는 5월 10일의 焚書연설에서 유대인이 지배해 온 지성편중의 시대는 끝나 독일의 혁명에 의해 독일의 자유가 획득된다고 말했다[854].
5월 1일은사회주의인터내셔널의 제전의 날이었지만, 겟벨스는 이를 '국민노동의 날'이라는 이벤트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히틀러는 50만 명의 청중을 앞서 계급분단을 그만두고 민족공동체로 단결할 필요성을 호소하고 나치에 공감하지 않은 자조차도감동했다.그 다음날 돌격대와 나치기업세포조직은 노동조합의 재산을 접수하고 간부는 체포되었다[954]. 5월 10일에는 새로운 노조로서로베르토 라이가이끄는 '독일노동전선'이 성립했다[954]. 5월 26일에는 공산주의자의 재산을 몰수하는 법률이 정해졌다. 사회민주당의 지지도 급속히 상실되어 가고, 3월부터 4월에 걸쳐 준군사조직의국기단은해산해 당지부도 폐쇄되었다[954]. 일부 망명자가 6월 18일에 프라하에서 기관지를 발행하자 독일에서의 사회민주당의 활동은 금지되고 당의 자금도 몰수되었다[954]. 6월 26일, 푸겐베르크는 런던 회의에서 총리나 각료에 대한 상담 없이 독일 식민지 반환과 동유럽 식민지 획득을 주장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954]. 제정당은 나치당에 흡수되거나 해산해 갔다. 6월 27일 독일 국민전선(독일국가인민당), 6월28일 국가당(구 독일민주당), 6월29일 독일인민당, 7월 4일 바이에른 인민당 해산, 철투단도 돌격대에 편입됐다[954]. 7월 5일 나치당 이외의 마지막 정당이었던 중앙당도 해산했다[954]. 일주일 후 정당신설금지법으로 나치당에 의한일당독재체제가 확립되었다[954].
한편 1933년 5월 유대문화를 지키기 위해 유대인문화동맹이 창립하여 회원은 5만명 이상이 되어 1938년 해산될 때까지 미술전, 콘서트, 연극, 오페라, 강연회를 실시했다[957].
시인고트 플리트 벤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자유와는 '타락의 자유'였다고 해서 나치즘을 지지하고 '우리 민족의 길이 닦는다'고 말했다[954]. 하이데거와 칼 슈미트, 율리우스 페타젠은 나치를 지지하고, 에른스트 벨트램은 “생에 적대하는 합리성, 파괴적인 계몽주의”에 대한 투쟁에 패배하면 백인세계는 종말하고 해충의 뛰어난 세계가 된다고 했다[954]. 히틀러를 싫어한 작가토마스 맨도 4월 1일 보이콧 이후 4월 10일 “법조계에서 유대인 추방은 불행한 사건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일기에 썼다[954].
나치당은 문화창조력을 가진 아리아 인종도 혼혈에 의해 '열등한 피'가 섞이면 퇴화하기 때문에 아리아의 '피'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958][주101].
1934년 7월오스트리아 나치스 당원이 쿠데타를 계획하고엥겔베르트 돌후스총리를 암살했지만 쿠데타는 미수로 끝났다[959].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경영자가 유대계인 비율은 은행, 출판계, 광고업, 백화점은 75%, 철강유통은 100%, 셀프서비스 식당은 94%였다[959].
1935년 여름 뮌헨에서 반유대 데모대가 폭도화한 것에 시민이 화를 내며 은밀하게 시위를 선동하고 있던 바이에른 내상 아돌프 버그너는 '테러'의 책임을 엄격히 비난할 수밖에 없었다[960]. 베를린에서는 유대인이 반유대 영화에 항의한 것에 반발한 나치의 폭도가 유대인을 습격한 것에 시민이 화를 내며 경찰 장관 마그누스 폰 레베초는 면직이 되었다[960나치당은 반유대 정책을 취하고 있었으나 비합법적인 수단으로의 습격을 계명하고 있으며, 8월 8일 히틀러는 '개별행동'의 금지를 명하고, 20일에는 반유대 범죄행위를 한 자를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명언했다[960].나치당 내에서 폭행을 하는 급진파와 법치주의를 우선해야 하는 보수파와의 사이에 대립이 있어 '인종오염'에 대한 엄격한 반유대법의 제정을 보수파는 원했다[960]. 급진파의 스트라이탤은 유대인과 성교섭한 아리아인 여성은 다시 한번 순수 아리아인을 낳지 않게 되기 때문에, 유대인과 아리아인과의 통혼은 인종 오염으로 금지하도록 기관지에서 주장하고 있었다[960].
1935년9월 15일, 국기법, 독일인의 피와 명예를 지키는 법, 공민법(제국시민법)의 3법안(뉘른베르크법)이 가결되었다[961]. 국회 연설에서 히틀러는 총리 취임 이후 처음으로 '유대인 문제'를 접했다[961]. 독일에서 반유대 보이콧이 행해지는 책임은 국외 유대인에게 있다고 하며, 보르시에비키의 선동도 뉴욕에서 항만 노동자가 기선브레멘호에서 독일 국기를 인하한 것도 모두 유대 분자의 책임이다[961]. 이러한 국제적 혼란이 독일 내 유대인을 선동하여 조직적인 도발동을 취하고 있으며 (돌격대 등 나치급진파의) '화난 사람들'에 의한 통어불능한 '방위행동' 문제 등도 해결시키기 위해서는 법적으로 규제할 수밖에 없다[961]. 정부는 한 번에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 독일 국민과 유대인이 상호 허용할 수 있는 관계를 구축하는 기반으로 이 법을 제안한다[961]. 그러나 여전히 국제적 선동이 계속되는 것으로 보이면 최종 해결 단계로 넘어갈 것이라고 밝혔다[961]. 동시에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한 야만적인 공격인 "개별 행동"을 억제하라고 명령했다[961]. 이러한 외교상의 배려로 구성된 '타협책'에 대해 나치급진파는 법안에 불만이었다[961]. 독일국공민법(제국시민법)에서는 유태인과 '독일의 피를 품는 아리아인'과의 혼인 및 성교섭이 금지되었다[956]. 그러나 순수한 유대인 이외의 혼혈에 관한 「유대인」의 정의에 시간이 걸리고, 11월이 되어, 조부모 중 2명이 유대인으로 2명이 아리아인의 「2분의 1 유태인」에 대해서 는 유대교인이거나 유대교도와 결혼한 경우 유대교도의 배우자와의 자녀인 경우 유대인과 아리아인의 혼외자인 경우 '유대인'으로 간주된다고 여겨졌다.961]. 또한 1935년에는친위대 보안부(SD)의 유태인 문제를 전문으로 하는 제4부 B4국장에아돌프아이히만이취임했다.뉘른베르크법에 의해 유대인 문제가 "합법적으로 해결"함에 따라 그 후 2년간은 유태인 문제는 정치의 중심에서 벗어났다[961]. 예를 들어 1936년 2월 스위스 나치당 간부빌헬름 구스트르프가 유대인 청년에게 암살되었을 때도 '개별 행동'은 금지되었기 때문에 보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961].
Duration: 41 seconds.0:41자막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CC1938년 비엔나 동영상. ‘유대’와 가게 앞에 표식이 달려 있는 모습이 촬영됐다.
1938년3월 13일, 독일에 의해오스트리아가 병합되었다. 병합을 비엔나 시민은 열광적으로 환영했고, 가톨릭 교회 회의는 독일군의 실력 행사를 희망의 실현으로 축하했고, 개신교 교회는 기적의 도래로 축하했다[959].나치 통치하의 오스트리아에서도 유대인은 탄압되어3월 28일유태교단체는 공법단체로 취소되었다[963]. 1938년 10월,친위대에 의해 폴란드계 유태인을 폴란드와의 국경지대로 이송했다.
11월 7일, 파리에서 폴란드계 유태인의남녀그룻슈판이독일인 외교관랏을 암살했다[956][주102]. 범행동기는 랏이동성애의 상대를 하는 보답으로 독일 재입국을 허락한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났지만, 나치는 이것을 공표하지 않았다[935]. 이틀 후인11월 9일에 반유대 폭동 ‘수정의 밤’이 독일 각지에서 발생해 수십 곳의 회당이 태워져 유대인 상점 수 100채가 약탈 파괴되었다[956]. 나치 당국은 유대인 공동체에 외교관 암살의 배상금으로 10억 마르크를 부과했다[956]. 동시에 2만 이상의 유대인이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956]. 또한 경제계에서 유대인 자본의 배제, 경영의 해체도 진행되었다[주 103](아리아화).
1939년1월 30일, 히틀러 총통은 국회에서 “국제적인 금융자본의 유대인이 다시 한번 제국민을 새로운 세계대전에 던졌다면 지구의 보리셰비키화와 유태인의 승리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유럽에서 유대인종의 멸종이라는 결과를 가져올것”9.
1940년6월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했다.독일 점령하의 프랑스에서 독일 당국은 프랑스가 자발적으로 반유대주의 정책을 개시하고자 했다[956]. 점령하 프랑스에서는 유태인의 판별작업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비아리아인(유대인)」등록은 자기신고로 부과되었다[962]. 점령 초기에는 유대인을 노리고 강청이나 사기가 빈발했다[962]. 1940년 여름, 외국적 유대인이규루스 강제 수용소, 리브잘트, 레세베두 수용소에 연행되었다(프랑스의 강제 수용소)[956].1941년5월부터 8월에 걸쳐, SD 제4부 B4국 지휘하의 파리 경찰은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국적의 유태인을 구속해, 로와레현의 프랑스 헌병대가 수용소에 연행했다[962]. 25000명의 대상자 중 절반이 몇 명의 관우나 레지스탕스에 의해 위기를 피했지만, 9000명이 인도되었다[962]. 1941년 12월, 파리 SD 제4부 B4국은 프랑스적 유태인을 구속해, 로와류류 수용소에 이송했다[962]. 1943년 봄에스털링그라드에서 독일군이 패퇴하자프랑스 행정·경찰은 비협력적인 태도가 일반화되었다[962].
독일 점령하의 네덜란드에서는, 1941년 2월에 최초의 유태인 검거가 행해졌지만, 항만 노동자의 파업이 항의의 의미로 행해졌다[962]. 그러나 네덜란드 유대인은 그 4분의 3이 살해되었다[962].
6월 독일은바바로사 작전으로소련 침공을 시작했다. SS 장관힘라는 공산주의자와 유대인의 제거를 목적으로아인자츠그루펜을 편성했다[956]. 아인자츠그루펜은 군사제압이 완료되면 인종별 주민등록을 하고 유대인은 외연부에서 총살당했다[956]. 그러나 대량 총살은 병사에게 정신적 중압을 가져오고, 또 레이슬러 소령과 제국 변무관 로제는 유태인의 대량 총살에 항의했다[956]. 이윽고 독일 점령화의 러시아나 유고슬라비아에서는, 트럭의 배기구로부터의일산화탄소를 차내에 보내는 가스 트럭이 도입되었다[956].
또한 히므라는 6월에 SS중령루돌프 페르디난트 헤스에게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의 건설을 명령했다[967]. 헤스는 육군의 소독제티크론 B의 사용을 고안하고 시체 소각로도 건설했다[967]. 헤스는 '인간적인 배려'에서 수용자에게 해충 구제의 처치를 받을 것으로 보이도록카포에게 탈의장에서 자신의 의복의 번호를 기억해 두라고 말하고, 또 사석으로 만든 비누를 수용자에게 건네주었다[967]. 프랑스, 헝가리, 폴란드의 유태인, 집시가 수용된 아우슈비츠에서는, 유태인 의사, 화학자, 음악가는 보호되고 오케스트라도 조직되었다[967].1944년10월 6일시체 소각로의 유태인 작업부대가 유니온 탄약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여성 유태인이 가지고 돌아온 폭약을 모아 만든 작은 다이너마이트에 의해 시체 소각로 3호기를 폭파해 4명의 SS대원을살해했다.집시는 인종적으로는 '아리아인'이었지만 '비사회적 존재'였기 때문에 2만명이 수용되었다[967]. 헤스는 집시를 좋아하고 '가족 수용소'를 특설했지만, 1944년 여름에 힘라가 집시 전원의 처분을 명령했다[967].
1941년 10월-11월, 독일 유태인 7만명이 동방이송되지만 수송의 고장으로 수개월 휴지되었다[962]. 유대인들은 우치, 리가, 벨로루시의민스크 게토에 수용되었다[962]. 민스크에서는 벨로루시 총 변무관인 빌헬름 쿠베가 수용자에게는 아리아인이 포함되어 있다고 친구 로제에게 분개하고 있지만, 1942년 7월 28·29일에 약 1만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다[962].
1941년 12월,폴란드에서 최초의 멸종 수용소헴노 강제 수용소가작동했다[967]. 헴노의 가스실은 가동식 화물칸으로, 한 번에 40명씩 가스살해하고, 시체는 인근의 숲에 처분되어 희생자는 15만에서 25만으로 된다[967].
1942년1월 20일반제 회의에서라인하르트 히드리히경찰 대장은 “유럽의 독일 세력권에서 유대인 문제의 전면적 해결을 위해 조직적, 실무적 및 물질적 관점에서 보고 필요한 모든 준비를 실시”하고 “유대인문제의 최종 해결을 수행하기 위한 조직적·실제적·물질적 준비조치에 관한 전체적인 계획”을 위임되었다고 선언하고,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보호령을포함해 제국령으로부터 유대인은 청소되고, 동방에서 노동봉사를 하지만자연 도태될 것이며, 생존에 대해서는 어떠한 처리라고 말했다[962]. 또 「아리아의 피」혼입 비율에 대해서는, 프로이센 귀족이 부유 유대인과 혼인 관계를 맺어 온 역사도 있어, 독일 유력자 중에도 유태인의 조부모를 가지는 자가 다수 존재했기 때문에, 회의에 참석하고 있던빌헬 무슈투카트내무성 차관은 셈화 50% 이상의 혼혈자도 살려 피임처치를 한다는 방안을 내놓고,요제프 뷰러폴란드 총독부 대표는 폴란드는 '감염의 중심원'이므로 우선해주었으면 한다고962].
1942년 3월에 베우제츠강제수용소, 같은 5월에소비볼 강제수용소, 같은 7월에트레블링카 강제수용소의 3대 멸종수용소가 작동 개시했다[967]. 3대 멸종 수용소는 폴란드 지구친위대 및 경찰 지도자 오디 로그로보츠니크가 관할하고 우크라이나의 보좌역 집단 아래 대량 살해가 수행되었다[967]. 수용자는 건전상 '노동수용소' 또 '유대자치령'으로 이송되게 되어 있으며, 수용소에는 '자치구 입구' '시나고그'라는 표지판이 내려져 있었다[967]. 유대인 의류는 독일인의 빈민층에 배포되기 위해 회수되었다[967]. 베우제츠에는 가스실이 6개 있어 하루에 5천명을 처리할 수 있었다[967]. 소비볼에서는 유대인이 반란을 일으켜 몇 명의 간수를 살해했다[967]. 유대인, 러시아인 전쟁 포로를 포함해 희생자는 25만명으로 된다[967]. 트레블링카에는 가스실이 10여 개 있고 유대인 희생자는 70만명으로 된다[967].
마이다넥 수용소는 노동캠프였지만, 1942년 여름에 가스실이 설치되었고,지크론 B도 사용되었고, 희생자는 12만 5천명으로 되어 있었다[967]최근의 조사에서는 마이다넥의 사망자는 상당히 적은 것으로 판명되어 있어 (뉘른베르크 재판시는 마이다넥만으로 150만명이 살해되었다고 검찰측은 주장하고 있었다.)2023 년 12월 현재 시점에서 7만8천명정도]. 마이다넥은 뉘른베르크 재판 때부터 약 95% 줄었다.테레지엔슈타트 강제수용소에는과거의 공적이 인정된 유대인이 수용되어 국제적십자사의 시찰단에 공개하여 인도적인 취급을 하고 있다고 인상하기 위해 사용되었다[962]. 힘라는 1943년 10월에 SS 지도자를 앞두고, 여러분은 시체의 산적을 보고 왔지만, 몇 가지 약한 예외를 제외하고 “모두, 괜찮은 인간이었다” “이것에 의해 우리는 굴강한 인간이 되었다”고 말했다[967].
독일과 동맹한불가리아는 총 인구 5만명 중 2만명을 독일에 인도했지만, 정치가나 성직자에 의해 항의되어 일부 밖에 실행되지 않았다[962]. 독일 점령하의 그리스에서도 유대인은 수용소에 보내졌다[962].루마니아에는 70만명의 유태인이 있었지만, 구 루마니아 왕국령 내의 유태인은 보호된 반면, 1918년에 병합된 베사라비아주와 부코비나주의 유태인 30만명은 점령하 소련 내의 트랜스니스트리아로 이동되어 포글롬의희생과.헝가리에서는 1938년, 엄격한 반유대법이 도입되었지만, 호르티 제독은 독일의 내정 교섭을 싫어했다[962]. 1944년 3월, 독일의 헝가리 통치가 시작되어 아이히만이 현지에 들어갔다[962]. 1944년 4월부터 6월에 걸쳐 45만명의 유태인이 이송되었고, 7월에는 부다페스트의 유태인 20만명이 이송 예정이었지만,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에의해 실현되지 않았다[962].
오토말 폰 페어슈어는1943년'독일 인종 제국 최고 지도자'의 히틀러에 대해 '유전 생물학 및 우생학의 데이터로부터 국가 행동의 지도 원리를 만든 최초의 정치가'라고 칭찬했다[426].
신학자칼 발트는 나치를 비판했지만,1944년7월에 “우리는 일반적으로 유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류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을 그들에게 기울이기는 쉽지 않다”고강연에서말했다.
계획되었지만 실현되지 않은 것으로는슬라브인정책이나 유대인을마다가스카르 섬으로 이송하는마다가스카르 계획등이 있다. 슬라브인 정책에 대해서는 폴란드 점령 직후인 1939년 11월에 동부 점령 담당관 알퍼트 베첼 박사는 폴란드의 비독일인을게르만화하기 위해 노조, 클럽, 폴란드 요리점, 카페, 극장, 영화관을 폐쇄하고, 폴란드어 신문과 서적, 라디오 금지를 계획하고, 1942년 4월 러시아에는 '원시적인 유럽 변종'밖에 받아들이지 않고, 독일인과는 격리해 지배하기로 했다[967]. 사법상 오토 티락은 게르만적 유형을 나타내는 인간 이외의 폴란드인과 러시아인은 순수 단순하게 멸종시키려고 했다[967]. 또 17세부터 45세까지의 영국인 남성을 전원 대륙에 이주시킬 계획이나 프랑스에 대해서는 부르고뉴와 브르타뉴를 보호국으로서 분리해 나머지를 「갈리아」로서 「15세기의 국경선」을 재현한다고 계획했다[967]. 이것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증오로 인한 것이다[967].
1945년 3월 19일, 히틀러는 독일의 군사시설의 파괴를 명하고,슈페어에 “좋은 것은 멸망하는 운명에 있다”고 말했다[935].
전후
제2차 세계대전 종결 직전인 1945년 4월 30일에 히틀러가 자살했다. 그 직후 '유언'에 의해마르틴 볼만이'당 담당 장관'으로 임명되었지만 곧 볼만은 소식을 끊고 5월 2일 복독 자살했다. 히틀러 없는 나치는 통제 능력을 잃고, 사실상 해산 상태가 된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8일 독일 국방군이 연합국군에 항복했고 독일은 패전을 맞았다. 패전 후 10월 10일 나치는 폐지됐다.
1946년 9월 30일, 런던 헌장에 근거한 '뉘른베르크 재판'에 의해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나치가 실시한 유대인에 대한 차별 정책에는 이런 이유는 없고,우연히 유대인이 차별 정책의 대상으로 선택되었을 뿐이었던 것이밝혀진 것이다. 즉, 독일인 이외의 민족이라면 어떤 민족이라도 좋았고, 유대인이어야 하는 이유나 필요성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나치와 히틀러는 유대인을 멸종시키는 사상이나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사법 판단이 내려지고 있지만, 그러한 유태인 멸종을 위한 히틀러의 명령서나 계획서는 발견되지 않고, 멸종을 위한 국가 예산도 붙지 않고, 일원적인 관리를 실시하는 조직 현재(2024년)에 있어도, 히틀러의 유태인 멸종 명령을 나타내는 문서는 발견되지 않고, 명령 그 자체가 아마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는 설이 유력해지고 있다.[요출전]
하지만 이 반유대 정책이 당시 독일 국민에게 절대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던 것은 부정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며,전후 보상에 의해 동서독 국내 거주 유대인은 물론이스라엘이나 나치 점령 지역에 해당하는 유럽 국가의 유대인에 대해 보상이나 배상이 이루어진다.
이탈리아
무솔리니는1936년에는 히틀러의 유대 정책을 코로 다루고 있었다[962]. 그러나 1938년이 되면, 나치와 연계를 깊게 한 이탈리아에서는 과학자 그룹이, 유대인은 아리아 인종에 속하지 않는다고 성명[971]. 당시파시스트당이속한 유대인은 약 7000명 있었지만, 이 성명 이후 입당도 금지되어 공직추방, 재산몰수, 외국적 유대인의 국외퇴거 등의 정책이 취해졌다[971].1939년강철협약이후 반유대 법제가 도입되었으나, 무솔리니 정권 하에서 유대인이 수용소로 보내지지는 않았다[962]. 또한, 그리스 남부, 크로아티아, 프랑스 남동부를 이탈리아가 점령했을 때에는 유대인을 조직적으로 구제했다[962]. 그러나, 1943년 7월에 이탈리아 패전이 결정적이 되어 무솔리니는 실각,피에트로 바드리오가이탈리아 왕국총리가 되었다. 무솔리니를 구출한 독일군은 9월 23일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을 선언하고 무솔리니를 원수로 삼았다.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에서 SD 제4부 B4국은 유태인 검거를 실시했다[962].
네덜란드
1907년네덜란드의 민족학자 스테인메츠는 “전쟁이 없으면 모든 사람이 유대인처럼 악현하고 냉혹하고 비열해진다”고 말했다[426][972].
그러나 1937년 12월에 제1회 극동 유태인 대회가 만주국에서 개최되었을 때, 이 자리에서 일본 육군의히구치 계이치로육군 소장은, 전년에 일독방공 협정을 체결한 바보 의 동맹국인 독일의 반유대 정책을 격렬하게 비판하는 축사를 하고 “유대인 추방 전에 그들에게 땅을 주라”고 말해 열석한 유대인들의 갈채를 받았다. 이를 알게 된 독일의 리벤트롭 외상은 주일 독일 특명 전권대사를 통해 곧바로 항의했지만, 상사에 해당하는 관동군 참모장동조영기가 히구치를 옹호해 독일 측도 더 강경한 태도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사건을 얻었다.
게다가 1938년에는 오상회의에서 유대 난민의 이주 계획인 ‘돼지 계획’이 일본 정부의 방침으로 정해져 ‘외무성 유대 난민 취급 규칙’이 발행되었다. 또한 같은 해 일어난오토폴 사건에서는히구치 시이치로육군 소장에 의한 수천명의 유태인의 망명이 실현되었다. 같은 해에 재카우나스영사대리스기하라 센고쿠가 많은 유대 난민에게 비자를 발급했다. 12월에는유태인 대책 요강이나오고, 일만지의 유태인을 공정하게 취급하기로 했다.
유대인이기도 한 컬럼비아 대 교수의 역사가 마크 마조워는 유대인에 대한 편견 자체는 옛부터 있었고 나치의 행위도 있어서 그것이 나쁜 것으로 퍼진 것은 전후이지만 '반유대주의' 자체는 정치운동으로 로 등장한 말이며, 19세기 서구 해방운동 속에서 영국 비국교회의 가톨릭교도 해방운동의 파급으로 유대인 해방도 진행된 결과 거기에 반발하는 운동도 일어나 그것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1879년에 태어났다고 한다.980]. 제1차 세계대전 전에는 약해졌지만, 그 후 다시 강해져 나치에도 영향을 주었지만, 그 홀로코스트의 노출과 함께 이것은 완전히 신용을 잃었다[980]. 또 오늘날 세계 유대인의 4/5가 미국과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이스라엘에서는 다수파를 하고 미국에서는 공공장소에서 박해받지도 않는다. 그런데 유대인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시오니즘 운동에 의해 이스라엘 국가가 수립되어 이스라엘 정부의 원주민족의 토지와 권리를 빼앗아 자위의 필요를 이유로 영토를 점령 확장하는 식민제국주의적 성격이 비판됨에 따라 1970년대부터 미국의 유대인 단체가 이스라엘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 활동에 '반유대주의'의 말을 왜곡해 레텔을 붙이는 움직임이 시작되어 중동 평화 프로세스가 파탄한 2000~2001년부터는 미국, 이스라엘 모두 이 경향이 강해졌다고한다980]. 마조워는 '반유대주의'의 선인이 이스라엘의 정책방침에 대한 찬반으로 바뀌어 이루어지고 있는 것, 구미에서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극우세력에 본래 의미에서의 반유대인주의자도 많이 포함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980].
1980년대 이스라엘은고란 고원병합,레바논 침공,1987년제1차 인티퍼더탄압 등을 실시해 갔지만, 이러한 군사행동에 대한 국제적인 비판 에 대해 이스라엘은 “시온주의 비판은반유대 주의”라고 반론해 내외의 언론인을 위협했다.
이스라엘인과팔레스타인과의 분쟁은 이어2000년2차 인티퍼더,2006년가자침공,2008년가자분쟁,2014년가자침공이일어났다. 2014년 가자 침공 시에는학교등도 공격대상으로 하여 시민을 끌어들이는 작전도 실행하는 이스라엘에 대해 미국 정부도 비난했다[982]. 또 구미에서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시위 등이 발생해 프랑스에서는2014년7월 13일시위에서 이스라엘 지지파와 반이스라엘파가 충돌하고 있으며, 7월 20일 시위에서는 파리의 유대인 지구에서 반유태주의적인 주장이 일어났다[983]. 독일에서는 7월 후반에 유대인에 대한 경멸이나 계피 비판이 발생해 화염병의 던져도 일어나고 있어 7월 말의 네덜란드에서도 반유태주의를 부추기는 데모가 일어났다[984]. 또한페넬로페 크루즈와하비에르 발뎀등 배우와 영화 감독 등 수십 명은이스라엘군의팔레스타인대량 학살을 비판, 정전을 요구하는 서한에서명했다. 이때존 보이트는 “이번과 같은 행동은 전세계에서 반유대주의를 두고 갈 수 있다”고 댓글을 달며중동 문제에 관해 행동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다[985]. 이 보이트의 발언에 서명한 발뎀은 “우리는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전쟁을 진심으로 미워하는 것과 같이 반유대주의를 혐오하고 있다”고 반박했다.[986]
2016년12월 24일에는 유엔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자치구 내 입식 활동을 비난하는 결의를 채택했다[987]. 이스라엘의 다논 유엔 대표는 유대인의 마음인 수도 예루살렘에서의 주거의 건설을 비난하는 행위이며, 프랑스인이 파리에, 미국인이 워싱턴에 주거를 건설하는 것은 금지할 것이라고 반발했다[988].
1952년독일의 여론조사에서는 히틀러에 대해 국민의 24%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990]. 나치당에서 가장 평가가 높았던 것은칼 데니츠에서 46%, 그 다음에 게링이 국민의 37%가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히틀러는 3위의 인기가 있었다[990]. 또 국민의 44%가 독일 국민의 전계급과 전이익을 대표하는 강력한 단일정당을 원한다고 응답했다[990].
1960년에 역사가인 고로만은 제2차 세계대전 후독일 연방공화국에서 독일인의 대다수가 바이마르 공화제의 시대보다 안심하고 있는 것은 현실로서 유대인이 적어진 것에 어떠한 관계가 있다고 말했다[881].1962년에 철학자쇼렘은 독일인과 유대인의 대화는 역사로서 존재하지 않았고, 멘델존의 제자들이 말하는 '공생'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991].
기독교 사회 동맹당 목프란츠 요제프 스트라우스 는1969년에 경제에서 위업을 거둔 독일 국민은 더 이상 아우슈비츠에서 어쨌든 말하지 않고 끝낼 권리가 있다고발언했다.1977년에는 독일의 과거를 무언가에 붙여 끌어당기는 일을 멈추게 하고 싶었고, 이스라엘을 포함해 이웃 나라에서 뭔가 말해지는 근거는 없다고 발언했다[990].
1991년1월남독신문의 조사에서는 호감을 가진 나라로서 이스라엘은 최하위였다[990].1992년1월데어 슈피겔엠니트 여론연구소의 여론조사에서는 국민의 62%가 전시 중 유대인 박해를 화제로 하는 것은 이제 멈추어야 한다고 대답했다[990]. 1992-93년에는구동독 의네오나치의 젊은이가 터키인 이민자와 유대인 묘지를 습격했다[989].
2008년 당시 메르켈 총리가 국내 논란 없이 이스라엘 국회에서 이스라엘 안보를 국시와 연설한 것으로 흐름이 바뀌어 이스라엘 출신의 홀로코스트 연구가 미국 브라운 대학의 오멜 발토프 교수에 의하면 이스라엘 측의 비전도 있어일체이스라엘정부.2024년에는 시민권 취득의 요건으로서 이스라엘의 존재권의 승인을 요구하는 조치가 강화되는 등 이스라엘 옹호와 반유대주의의 억제가 보다 엄격화되고 있다[993]. 한편, 이러한 정책이 팔레스타인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언론도 제약하고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그리스 경제위기와유럽채무위기를 배경으로 2013년독일을 위한 선택사항(얼터너티브 퓨어 도이츄런트, AfD)이 창설되어 반 EU,반 이슬람,난민정책 비판 등을 주장했다[994]. AfD당원에게는 반유태주의적 발언을 하는 자도 있어, AfD당 투링겐주 대표 병른헤케 주 의회 의원은 홀로코스트 위령비를 '수치의 기념비'라고 비판하고, 또한 히틀러는 절대 악이 아니라고 발언했다[995]. 이에 대해세계유대인 회의회장로널드 로더는 AfD당을 '독일의 수치'라고 비판했다[995].프라우케 페트리AfD 당수(당시)는 홀로코스트 위령비에는 찬반양론이 있다고 말하고 유대인 중앙평의회 전 대표인 크노블로흐는 반유태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995]. AfD당은2016년전날발생한 난민집단에 의한쾰른집단성폭행사건을 계기로 지지받았으며, 2017년 9월연방의회 선거에서는 94의석을 획득하여 제3당이 되었다[994]. 2018년에는독일 그리스도교민주동맹의 안네그레이트 클램프 칼렘바우어가 AfD당의 반유대주의를 비판했다[996].
2018년에는 유대교도의 모자키파를 입은 두 명이 습격되었고, 유대인 중앙 평의회는 키파를 착용하지 말라고 부르면서 유대인 포럼은 착용하고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997].메르켈총리는 우익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도의 난민에도 반유대주의가 있다고 말했다[997]. 독일에서는 이슬람계로부터의 반유대주의도 높아지고 있으며 특히 난민의 증가한 2015년경부터 공격이 늘고 있다[998][999].
2019년에는 유대계 연구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보이콧 활동을 반유대주의로 간주하는 결의가 독일연방의회에서 채택되었다[992].
1989년 이후 독일에서는 구소비에트 연방에서 유태인 이민이 증가하고, 그때까지 3만명이었던 유태인 인구는 2018년에는 20만명을 넘어서었다[997].
'장 크리스토프'와 '치보 가의 사람들' 등에서 유대인의 외모에 대한 문신형 이미지는사르트르의 반유대주의를 비판한 '유대인'(1946년)에서도 계승되어 '독콧' , '입술이 두꺼운'등 으로묘사되었다.또 사르트르의 동서에서는 「유대인은, 인간 중에서, 가장 온화한 사람들이다」라고 되었다[1003]. 폴리아코프는 이 책이 쓰여진 1946년에서는 "유대인에 대해, 좋게 나쁘게 하고 과장을 말하지 않고 끝내는 것은 곤란했다"고 말하고 있다[1003].
정신분석가잭 라칸은 '정신분석의 4기본 개념'(1963-4)에서 레온 블로어의 '유대인에 의한 구원'을 인용하고 프로이트를 '득체의 모르는 머리 봉투 를 둘러싸고 고물 매매라는 그 유태적 직업'에서의 선별 작업에 비유했다.메일맨에 의하면, 블로어에 영향을 받은 라칸이 정신 분석에서 완수한 역할은, 블로어가 반유대주의의 전통에서 완수한 역할과 유사하다[593].
1979년3월, 파리의 유대인 기숙사 식당에서 폭탄 테러가 있어 부상자 30명에 이르렀다[1004]. 같은 해 9월, 유대계 극좌 활동가에서 무장 강도를 반복하고 있던 피에르·골드만이 거리에서 사살되었다[1004][1005].1980년10월 3일에도 코페르니쿠 거리의 회당에서 폭탄 테러가 있어 사망자 4명, 부상자 20명의 희생자를 냈다[1004].레이몬 바르총리는 희생자를 '죄없는 프랑스인'과 '시나고그에 다니는 이스라리엣'으로 나누어 실언으로 비판됐다[1004].
1987년에 체포된 극좌 조직 액시온디렉트의 맥스 플레로(Max Frérot)는 재판에서 유대에 점령된 팔레스타인과 유태인의 로비 활동을 비판했다[990]. 또 좌익적 가톨릭 사상가로 잡지 '에스프리' 편집장의장마리 돔낙은 유태인 작가엘리 비젤에 대해 “아우슈비츠의 배당금을 세우는 것 같은 거”라며 “일부 유태인이 제노사이드의 유일한 절대성을 독점하고자 한다 ”고0했다.
1990년5월 10일, 칼판트라의 유태인 묘지 능욕 사건에서는 시신이 파고 일어나 꼬치가 되었다[1004]. 전날에는 텔레비전에서 국민전선의 르펜이 유태인을 비판하고 있었다[1004].
작가조지 오웰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보도된 이후 1945년 2월 '영국에서의 반유대주의'에서는 '반유대적 감정을 자인하는 정도라면 차라리 죽는 편이 좋다고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반비대적 유대주의에 대해 쓰여진 것의 대부분이 안되는 것은, 필자가 자신은 오염되지 않았다고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며, 필자 내면의 조사를 할 수 없게 되고 있다고 논해, 퍼블릭 스쿨에서 유대인 학생은 반드시 끔찍한 눈을 만났고, 유태인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신체장애681]. 또한 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학문을 담당하고 있는 비엔나 출신의 유태인 안내역이 전 친위대 장교를 '돼지노로'라고 외치며 걷어차는 것을 목격한 오웰 복수는 '어린 시절 백일몽'이며 잔학 행위를 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사디스트의 소수파만이 전쟁 범죄인이나 반역자를 몰아내는 데 열중한다고 논했다.681].
사르트르'유대인'(1946)에 대한 서평에서 오웰은 '반유대주의자'는 각 계급에 분산되어 다종다양한데, 사르트르는 겉보기에 구별되는 육체적 외모를 갖춘 인물로 그려 하지만, 이것은 유대인도 겉보기에 구분이 된다고 말하기만 하고, 또 유대인의 동화 지향을 부정하고 유대인은 민족 출자를 중시해야 한다고 하는 개소는 반유태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681].
오웰의 소설 『1984년』(1949)에서는 유대인으로 인민의 적의 골드 스타인을 얼굴도 목소리도 양 똑같이 '태어나는 괴로운 얼굴'이라며, 또 유대인에 의한 지하 음모 조직을 그리고 유태인을 위험한 것으로 그렸다[681]. 오웰은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을 비판했지만, 유대 민족주의 운동의 시오니즘도 비판하고, 특히 모인경이나 베르나도테 백의 암살 사건이나킹데이비드 호텔 폭파 사건, 베르나도테 백암 살 등의 과격파 시오니스트에의한테러리즘.유대인 작가아서 케스트러와 저널리스트의 매거리지에 따르면, 오웰은 내심에서 반유태적이었다[681].
노동당좌파에는 반시오니즘의 경향이 있다고 한다[1008], 동당원 나즈샤 하원 의원은 이스라엘을 미국으로 이동시키면 문제 해결한다고 말해, 전 런던 시장에서 동당원 켄 리빙스턴은 1932년의 히틀러는 유태인은 이스라엘로 이사해야 한다고 말하는 시오니스트였다고 발언해, 노동당은2명의당원자격을0.제레미 코빈노동당 당수는 옛 반유태주의는 19세기 독일 사회주의자아우그스트 베이벨등에서 볼 수 있듯 유대인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다고 종류의 것이지만 현대의 반유대주의는 이스라엘 정부 비판과 일체가 되고 있다고 밝혔고, 노동당에서는 반유대주의에는제로 토레란스(비관용)로 처한다고 2018년에 말했다.1008].
미국
소설가윌리엄 스타일론은 '소피의 선택'(1979)에서 나치의 가스실에서 처형된 것은 유대인 이외에도 100만명의 비유대인이 있고 '홀로코스트에 관한 유대인의 전혀 독점적인 사고방식'을 약점으로 하는 대화가 있어 아우슈비츠를 이해할수있다..엘리 비젤은 스타일론이 “아우슈비츠의 의미를 아는 것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뿐이다”며 희생자보다 박해자를 “인간”으로 그린 것을 비판했지만, 스타일론은 박해자도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무서운 일이 생겼다고 반론했다[714]. '소피의 선택' 영화화에 있어서는 비젤의 '상상 불가능한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라는 비판을 들여다보면 유대인들로부터도 절찬되었다[714].
미국 정부 주변에는 이스라엘 로비가 활약하고 있다고 하며, 부모 이스라엘 외교를 미국은 하고 있다고 지적되고 있지만, 최근에는 그러한 로비 활동은 미국과 이스라엘 모두에게 유익하지 않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1011][1012].
범행 현장이 된 생명의 나무 회당(Tree of Life – Or L'Simcha synagogue)에서 위령을 하는 사람들. 2018년 11월 4일
흑인 작가제임스 볼드윈은 할렘에서 유대인 주인과 유대인 상인을 비판하고 “유대인은 오래 전에 기독교인으로부터 맡겨진 역할을 할렘에서 완수하고 있다”고 논하고, 할렘에서 유대인이 눈의 원수로 여겨지는 것은백인과같다.
유대계 작가버나드 마라마드는 '천사 레빈'(1958)에서 흑인과 유대인의 융화를 그렸지만, '차이인'(1971)에서는 블랙 내셔널리즘의 흑인 작가 지망자와 유대인 작가가 죽이고 함께 어울린다[981]. 마찬가지로 유대계의솔 벨로의 '사무라 씨의 행성'(1974)에서는 지식인의 유대인과 페니스를 과시하는 수성이 가득한 흑인 스리가 대치되었다[981].
유대인과 대립한 미국의 흑인운동에서는 이스라엘 탄핵과 아랍지원 노선이 강화되었다[981]. 블랙 내셔널리즘의네이션 오브 이슬람을 지도하는 루이스 파라칸(Louis Farrakhan)은 반유대적 발언을 반복했고, 1985년에는 “유대인을오븐에 넣은 것은 하나님”이라고 말하며명예훼손 방지 동맹으로부터 비판되었다[1014]. 또신블랙팬서당도 반유대주의적인 발언을 반복하고 있다.
트럼프 정권하의 상황
컬럼비아 대학의 마크 마조워 교수는 특히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에 의한 참상에 대한 학생의 비판 활동을 둘러싼 바이덴 정권과 민주당도 이스라엘 정부 옹호 반 유대주의의 레텔 붙여넣었지만, 트럼프 정권은 정권에 비판적인 대학이나 학생의 활동을 억압하고 통제를 강화하는 구실에 반유대주의의 말을 이용하고있다고980].
소련·러시아
제2차 세계대전 후 스탈린 정권
유대인은 혁명이나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반유대주의를 첨예화시켜 가는스탈린정권하의 1940-50년대 초반에는 책임 있는 포스트에 한 명의 유대인도 임명되지 않았다[1015].
제2차 세계대전 후인1946년, 유대계의 작가에렌부르크와그로스만은 전중의 유태인의 비극을 '흑서'로서 인쇄했지만, 간행을 금지되었다[1016].
1953년1월 13일미국의 유대인 조직 조인트의 지시로 정치가 지다노프와 시첼바코프 장군을 암살한 것으로 유대인 의사들이 체포되어 언론에서는 '시오니스트의 범죄'로 캠페인이 펼쳐진다는의사단음모 사건이발생했다.역사가 게렐은, 이 사건은 스탈린에 의한 유태인 정책의 제1막이며, 최종적으로는 유태인을 동방지역으로 강제 이송하는 것이 계획되고 있었지만, 스탈린의 죽음에 의해 실현되지 않았다[1015].
스탈린에 이어후르시초프서기장도 반유대주의자였다. 흐루시초프는 유대인이 높은 지위에 붙으면 주민들로부터 나쁘게 보이는 것으로 유대인의 승진을 멀리하는 등 반유대주의적인 정책을 취했다. 소련에서는 비유대 민족은 적성을 가지고 있지만, 유대인의 부정적인 정신에는 붙이는 약이 없고, 유대 공동체의 존속에는 회의적이라고 발언했다[1015].
유대계 작가파스텔 나크는 당국으로부터 '개인주의적'으로 출판이 막혀1958년노벨상을 수상하자소련 작가 동맹에서 제명되어 파스텔 나크에서 소련 국적을 박탈하는 운동이 일어났다[1015].
1962년영국의 철학자러셀이모리야크와 유태인 철학자부버의 지지를 얻어 풀시초프 체제 하의 유태인 박해에 항의했다[1015]. 훌시초프 체제 하에서는 '경제적 범죄' '사회적 기생죄'라는 죄장으로 많은 유대인이 고발되고 있었다[1015]. 그 되튐으로서 소련에서는 반이스라엘의 캠페인이 펼쳐졌고,아이히만 재판은 이스라엘과 독일의 공동모의였으며 시온주의는 나치즘에 비유되었다[1015].
1963년유대계 시인브로츠키는 조국을 배신했다고 고발되어 5년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브레즈네프에 의해 대사를 얻고 나중에 미국으로 이주했다[1015]. 후루시초프는 반유대주의를 학문으로 밀어 올리려고 1963년에 출판된트로피무 키체코의 저서 '맨얼굴의 유대교'를 지원했다[1015]. 키체코의 저서에는 “이스라엘 병사가 나치의 십자가와 프로이센의 철토를 쓴 칼리카츄어가 게재되어 유대 부족은 자신들이 동물의 자손이라고 생각하고, 또한 카난에 침입한 후 카난의 주민을 모두 죽였다”고 썼다[1015].
소련 붕괴까지
브레즈네프서기장(임기 1964년 – 1982년)의 시대가 되더라도 반유대주의는 계속되었다.1966년유대계 작가유리 다니엘리는글래그에 5년간 강제 수용되었고, 안드레이 시냐프스키는 '아브람 텔츠'라는 유태풍 필명으로 에세이를 간행했기 때문에 7년 글래그 수용이 전해졌다[1017].
1967년6일 전쟁후, 소련에서는 반시오니즘 캠페인이 전개되었고, 유리 이바노프는 저서 『시오니즘에 대한 조심』에서 시오니스트와 나치의 연계에 대해 논했다[1017].
1961년에 반체제적이라고 수감된 유대계 작가 에두아르도 쿠즈네초프는 석방되면1970년에항공기하이재킹을 일으켜 사형을 넘겨주지만 국제 여론에 의해 형은 경감되었다[1018]. 쿠즈네초프는 옥중에서 죄수들이브레즈네프서기장이나안드로포프KGB의장을 유대인으로 보고 있었다고 보고하고 있다[1018]. 쿠즈네초프는 1972년 이스라엘로 망명했다[1018].
청년단콤소몰의 선전부서기였지만 한 번 공산당에서 추방된 발레리 스쿨라토프는 1975년 학위논문 '시오니즘과 아파르트헤이트'를 간행하고1976년가짜 '벨레스의 책'에서 그리스인과 유태인에 의해원1017].
레프 코르네예프는 쇼어의 희생자는 시오니스트에 의해 2배 3배로 물 늘어났다고 하고, 로베르 포리슨[1019]의 후계자를 자처했다[1018].
1970년대에 러시아에서의 수학계에서 유대계 학자가 추방되어 열광적인 반유대주의자인 이반 마트레비치 비노그라도프와폰트리아긴이 지배하게 되었고, 프랑스의 유대계 수학자로랑 슈발츠는 항의했다[1018].
IHRA 정의는 '유대인의 집단으로 포착된 이스라엘국가(state of Israel)를 표적으로 하는 행위'를 반유대주의로 하는 한편, '다른 나라에 대한 비판과 유사한' 이스라엘 비판은 반유대주의로 하지 않았다[12][1028].
그러나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가 인종차별적인 기획이라는 주장은 유대민족의 자결권을 부정을 의미한다” “현대 이스라엘 정책과 나치 정책을 비교 '등의 정의는이스라엘에 의한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비난이나가자 학살을제노사이드로 하는 비난 등도 '반유대주의'로 문 선불할 수 있다고 지적되고 있다[1029][1030].
2021년 3월 25일, IHRA 정의의 수정을 의도한 「반유대주의에 관한 예루살렘 선언(JDA)」이밴 레일 예루살렘 연구소(영어판)의 후원으로 발표되었다. IHRA 기준과의 주요 차이점은 이스라엘에 대한 증거에 근거한 비판이나 국제법에 근거한 팔레스타인 옹호,보이콧, 투자철수, 제재등의 사회운동은 반유대주의가 아니라고 한 점에 있다. 그러나 JDA 정의는 IHRA 정의와 같은 지원을 얻지 못했습니다.
유대인의 박해에 대해서도 시대와 지역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세팔디무의엘리어스 카네티는오스만 제국령이었던불가리아에서독일어권으로 이주해 처음으로 유럽의 유태인 차별의 실태를 알고 놀랐다고 말했다. 이슬람교국에서도 유대인은 이등 시민으로서 엄격히 차별되는 존재였지만, 유럽에 비하면 비교적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고 있었다[1033][1034].
남프랑스에서는 역사적으로 유대교도 추방은 있었지만프랑스 혁명전까지 남프랑스 문화의 일부로 수많은 아름다운회당이건설되어 수많은랍비가 탄생했다.비시 정권아래 마을 구루미에서 유대인을 익힌 역사도 알려진 곳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남프랑스랑그독은 어느 시기까지일 드 프랑스의 중앙정부의 정치와는 무관하고, 중세에알비파발드파가 탄압된 지역이기도 하고, 유대교도를 박해의 표적으로 할 필요 등이 없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지만, 중세에는 남프랑스에서도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있었다. 14세기 프랑스에서 우물과 샘에 독이 들어갔다는 소문이 흘러 많은한센병자와 유태인이 범인으로 되어 화형에 처해졌으나 이는카르카손에서도 발생한 사건이다[1035].
^루난은 '셈계 언어의 일반사 및 비교체계'(초판 1855)에서 셈족과 아리아족을 인류의 결정적 구분으로 하고, PMMassing은 반셈주의를 최초로 이용한 것은 루난으로 한다[6]. 또한 빌헬름 마르(Wilhelm Marr)에 의한1879년의 사용이 초출로도 된다[6][9][10]
^단, 알비조아 십자군은카페가등 북프랑스 제후에 의한 남프랑스 정압전이라는 성격도 있었고, 단순한 이단 사냥 전쟁이 아니었다[71]
↑이 금지는 1254년 알비 공회의, 1267년 비엔나 공회, 1301년 파리 대학 의견서 등에서도 반복 채택되었다[73]
^슈바벤 법서는 '슈바벤 법감(Schwabenspiegel)'이라고도 한다[63].1225년의 '작센 법감'의 유대인의 자유와 대조적이다.
^생장 앙 그레브 교회(Église Saint-Jean-en-Grève)는프랑스 혁명으로 교구가 소멸되어1800년에 해체되었다. 나중에 San Jean San Francisco 교회로 재건되었습니다.파리 유대인의 거주지역인말레 지구의카르멜 교회(비엣 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에 이 비엣가 사건은 그려졌다[79]. 또한 세계 역사대계에서도 올해 파리에서 의식 살인을 했다고 유대인이 고발되었다고 한다[54]. )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 비호의 보상으로 유대인에게 과세했지만, 공동체를 과세 단위로 했기 때문에 독일에서는 유대 공동체 조직은 견고한 것이 되었다[63].
↑폴리아코프는14세기는 유럽 사상 빈번히 위기와 재앙에 습격당한 시대이며,20세기에 비교할 수 있는 시대였다고 한다[76]
^유대교에서는아브라함이 혼자 아들이삭을 제물로 바치도록 하느님께 명령받는이삭의 쇼제가 신앙되고 있으며, 아케다라고 불린다[91]
^『세계역사대계』에서는1359년에 프랑스는 유대인을 되찾고 다소 유대인이 돌아왔다고 한다[54].
^장세니스트란 네덜란드 신학자얀센이 '아우구스티누스'(1640)에서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보다 하나님의 혜택을 중시하고 인간의 무력함을 강조했다고 논했다. 얀센의 설을 신봉한 산실란 수도원장 장 듀베르지에 드 오란느(1581-1643)와폴 로얄 수도원에서 잔세니즘이 가르쳐졌지만,예수회와교황청은 얀센을 이단으로 공격했다[149].1711년폴로얄 수도원은 루이 14세 왕명에 의해 파괴되었다[149]
^흰 유럽인은 "Europæus albus", 빨간 미국인은 "Americanus rubescens", 갈색 아시아인은 "Asiaticus fuscus", 검은 아프리카인은 "Africanus Niger"로, "자연의 체계" 초판에서 아시아인은 갈색으로 되어, 10판 이후는 노란색으로 되었다. 또 유럽인과 호텐토트인은 같은 기원을 가진다고 믿기 어렵다고 했다[199]
↑프로이센은 브란덴부르크, 동서 프로이센, 포메른, 슈레지엔의 4개 주로 축소되었다[277].
↑요즈음,반도전쟁(스페인 독립전쟁)에서 프랑스가 스페인에 고전하자 오스트리아는 회전 준비를 시작했다[277]
^1809년 3월, 오스트리아는스페인 독립 전쟁에서 스페인 국민의 반프랑스 전쟁처럼 독일 국민이 결기할 것을 기대하고, 단독으로 프랑스와 개전했다[277]. 그러나 기대했던 민중봉기는 티롤을 제외하고 일어나지 않았고, 7월의바그램의 싸움에서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에 패하고, 10월 14일의쇤브룬의 화약을맺었다[277]
↑노먼 콘은 서구사회에 있어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창설한 유대인은 '아버지'이며 '나쁜 아버지'였다고 지적하고 있다[398]
^폴리아코프는'반유대주의의 역사' 5권, p395-6에서 플레이츠가 반유대주의자인 테오도르 프리치와 오스트리아의란츠를 칭찬해 1908년에는 프리치와 독일 재생을 위한 협회를 창설했다고 하지만 해부학자 Gustav Theo 1927)과 반대로 유대주의자 Emil Theodor Fritsche (1852 - 1933)를 잘못했을 수 있다.
↑사회주의의 반유대주의에 대해 Marc Crapez, L'antisémitisme de gauche au XIXème siècle에서는 푸리에 (1772-1837), Alphonse Toussenel (1803-1885), 프루돈 (1809-1865), Gustave (1838-1871), Gustave Tridon (1841-1871), Eugène Gellion-Danglar (1829-1882), Auguste Chirac (1838-?), Francis Laur (1844-1934), Charles-Ange Laisant (1851-1907), Augustin Hamon (1862-1945), Albert Regnard (1836-?), Paul Renaud (1838-?), Georges Vacher de Lapouge (1854-1936), Maurice Allard (1860-1942) Louzon (1882-1976), André Colomer (1886-1931)에 대해 논의했다.
^부스는 1840년대 바덴에서 피우스 협회를 설립했다[351]. 1848년 10월, 마인츠에서 제1회 카톨릭교도 대회가 개최, 부스는 회장이 되었다[351]
^고고리의 '죽을 수 있는 영혼'도 하나님의 전지 전능을 언급하지 않고 자연의 여러 힘을 다룬 것으로 압류했다[217]
^1920년 5월 8일 타임즈 "유태사" 기사[667]. 타임즈 기사에서는 '시온 의정서'가 위서라면, 이 무서운까지의 예언의 재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영국이 팩스 게르마니카(게르만의 평화)를 막은 것은 팍스 이우다이카(유대 평화) 때문이었는가?라고썼다.덧붙여 5월 31일에 클라신과 로이드·조지 총리의 면회가 실현되었다[667]
↑스페이크테이터 종이는 1920년5월 15일에 의정서는 반광란의 유대인 음모가가 작자이지만, 유태인은 견경을 잃은 명상을 하는 오리엔트의 민족이기 때문에 다른 유대인도 비밀리에 의정서의 견해를 가질 수 있다고 하며, 7월 17일에는 참된 유태연이란 유대에 의한 세계 일극 지배의 음모 와는 무관하며, 보통 유대인이 내각에 참가하고 있는 것이 좋은 정부의 원칙에 등장하는, 10월 9일에는 유태인은 위험인자로 국제쟁란의 원천과 10월 16일에는 유대인에 대한 시민권 수여에는 신중해야 하고 '사회의 페스트'인 유대인 음모가의 추악한 가면을 벗겨내려고 호소했다.667]
^둘째 이사야서에서 “주님의 종”에 대해서는 53장, 42:1-4, 49:1-6, 50:4-9, 52:13-15.
^프로이트의 모세 살해설은 모세 일행이 시티무에서 바르 신 숭배에 타락하고 그에 반대한 모세가 살해되어 그 후 의례에 대한 도덕의 우위를 주장하는 모세 일신교가 탄생했다는 E. 제린의 『모세와 이스라엘』에서의 설을 도입한 것이었다[7]. 제린은제2이사야서53장의 종(모모)이 모세였고, 모세의 순교가 메시아 사상을 낳았다고 했다[796][주81]. 젤린의 설은 논박되고, 젤린은 자설을 철회했지만 프로이트는 이 설을 계속 지지했다[796]
↑독일 재향 군인 협회(Kyffhäuser-Bund der deutschen Landes-Kriegerverbände)
^덧붙여 히틀러는 1923년에 바이로이트에서 만난 체임벌렌에게 루터의 재래를 느꼈다고 하지만, 히틀러는 제2제 정기의 독일 교양층에 의한페르키시민족주의를 비판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향은 작았다고도 한다[846][849]. 프랑스에서는 1913년 가을에 번역이 나왔지만,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 비난 속에서 소개되었기 때문에 영향력은 없었다[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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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Arnold Künzli,Karl Marx. Eine Psychographie. Wien/Frankfurt am Main/Zürich 1966.후루타 경작과 폴리아코프는 아르놀트 쿤츠리 '칼 마르크스 - 심리적 속성'(1966)의 연구를 참조한다(폴리아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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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olish-Soviet Extraordinary Commission has ascertained that during the 4 years' existence of the extermination camp at Maidanek the Hitlerite hangmen, following the direct order of their criminal government, exterminated by mass shooting and mass killing in gas .Nuremberg Trial Proceedings
^Among an estimated 130,000 prisoners who entered Majdanek, 80,000 people were killed according to the most recent research. Among them, the greatest number of those who died or were murdered were Jews (about 60, Ukrainians and Russians. In order to remove the traces of the crimes, the corpses of those who died and the murdered were burnt on pyres or in the crematorium.GENERAL INFOR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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