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ugust 29, 2026

James Baldwin said on Palestine and Israel

ChatGPT - 동아시아의 평화와 화해

James Baldwin  said on Palestine and Israel: something like, The creation of Israel was possible due to the guilt that the West felt about what happened in the Third Reich. I do not think Palestinians have to pay for the Western guilt. ? 커멘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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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기억하신 문장은 거의 정확합니다. Baldwin은 1979년 <Open Letter to the Born Again>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The Palestinians have been paying for the British colonial policy of ‘divide and rule’ and for Europe’s guilty Christian conscience for more than thirty years.”

그리고 바로 앞에서 그는 “이스라엘 국가는 유대인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구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또 1979년의 다른 발언에서는 더 직접적으로, 이스라엘의 창설은 “Third Reich가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팔레스타인인이 “Europe’s crimes”의 대가를 치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발언에서 중요한 것은 역사적 인과관계에 대한 정확한 명제라기보다 <도덕적 책임의 전가>에 대한 Baldwin의 문제제기입니다.

1. Baldwin이 던지는 가장 강력한 질문

Baldwin의 논리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날카롭습니다.

<유럽이 유대인에게 저지른 범죄의 대가를 왜 팔레스타인인이 치러야 하는가?>

Holocaust는 독일에서 일어났고, 수세기에 걸친 기독교적 반유대주의와 박해 역시 대부분 유럽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집과 땅을 잃고 난민이 된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인이라면, 거기에는 도덕적 모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Baldwin이 말하는 “guilty Christian conscience”는 단순한 심리적 죄책감이라기보다,

<Europe commits the crime → Jews suffer → Palestinians pay the price>

라는 기묘한 역사적 삼각관계를 가리킵니다.

이것이 Baldwin 발언에서 지금도 가장 강력하게 남아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2. 특히 Baldwin다운 점이 있습니다

Baldwin은 흑인 미국인으로서 이런 구조를 매우 민감하게 보았습니다.

그는 늘 묻습니다.

<누가 범죄를 저질렀는가?>
<누가 그 범죄에 대한 도덕적 이야기를 만드는가?>
<그리고 실제 비용은 누가 부담하는가?>

미국에서 백인 사회가 노예제와 인종차별을 만들었지만 그 결과를 흑인에게 책임지게 만드는 것과 비슷한 구조를, 그는 팔레스타인 문제에서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단순한 “친팔레스타인 발언”이라기보다 Baldwin 평생의 주제인 <power, innocence, guilt, responsibility>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그는 서구가 자기 자신을 도덕적으로 무죄라고 생각하는 방식, 즉 <Western innocence>를 끊임없이 공격했습니다.

3.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한 가지 중요한 보정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은 Holocaust에 대한 유럽의 죄책감 때문에 만들어졌다”고만 말하면 너무 단순합니다.

정치적 시온주의는 Holocaust보다 훨씬 이전인 19세기 말부터 존재했습니다. 1917년 Balfour Declaration도 Third Reich 이전이고, 영국 위임통치기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이주와 유대 국가 건설운동 역시 이미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Holocaust → Western guilt → Israel>

이라는 단선적 설명은 역사적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오랫동안 존재하던 시온주의 운동 + 유럽의 반유대주의 + 영국 제국주의 정책 + Holocaust의 충격 + 전후 난민 문제 + 국제정치 + 유대인들의 적극적인 국가건설 운동 + 1947–48년 전쟁>

이 함께 이스라엘 건국을 만들어냈다고 봐야 합니다.

Holocaust가 결정적인 촉진제가 된 것은 맞지만 유일한 원인은 아닙니다.

4. Baldwin의 “Western interests” 주장도 절반은 통찰이고 절반은 과장입니다

Baldwin은 이스라엘이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Western interests를 구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여기서는 저는 Baldwin보다 조금 더 조심해야 한다고 봅니다.

영국·프랑스·미국이 중동을 자신들의 전략적 이해관계 속에서 바라본 것은 분명합니다. Baldwin이 1979년에 이 글을 썼기 때문에 냉전, 석유, 이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이스라엘의 관계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학계에서도 그의 후기 이스라엘 인식이 식민주의와 미국의 지정학적 권력이라는 틀로 발전했다고 분석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을 단순히 <Western pawn>으로 환원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서구가 움직인 수동적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유럽의 박해와 Holocaust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뿐 아니라 중동·북아프리카에서 온 유대인들도 있었고, 그들에게 유대 국가 건설은 매우 실제적인 생존과 자기결정의 문제였습니다.

이 부분을 빼면 Baldwin의 설명 역시 너무 구조결정론적이 됩니다.

5. 그래도 Baldwin의 핵심 문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구별이 생깁니다.

<유대인에게 국가가 필요했는가?>와
<그 국가 건설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는 서로 다른 질문입니다.

첫 번째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다고 해서 두 번째 질문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Holocaust 이후 유대인들이 안전한 국가를 원했던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1948년 전쟁을 전후하여 수십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이 고향을 떠나거나 쫓겨나 난민이 된 것 역시 역사적 현실입니다.

Baldwin이 집요하게 붙잡은 것은 바로 두 번째 문제였습니다.

<한 민족의 엄청난 역사적 피해가 다른 민족에게 무제한적인 비용을 부담시킬 권리를 만들어 주는가?>

그의 대답은 명백히 “아니다”였습니다.

6. 저는 여기에서 Baldwin의 가장 중요한 통찰을 봅니다

Baldwin은 유대인의 고통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글을 자세히 읽으면 반유대주의에 대해 매우 민감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이 경험한 유대인 이웃들과 유대인 상점 주인들을 회고하며, 자신을 억압한 권력이 “Jewish”가 아니라 “white”였다고 명시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말합니다.

<Holocaust의 기억이 팔레스타인인의 권리를 지워서는 안 된다.>

이 두 문장을 동시에 붙들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Baldwin의 주장을 단순히 “Israel was created because of Western guilt”라고 요약하는 것보다 저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고 봅니다.

<Europe persecuted the Jews. Europe eventually recognized the enormity of its crime. But Europe had no moral right to resolve its Jewish problem by making Palestinians bear the human cost.>

이것이 Baldwin이 하고 싶었던 말에 가장 가까워 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누가 죄를 지었으며, 누가 보상하고, 누가 그 비용을 부담하는가?>라는 화해와 과거사 문제의 보편적인 질문이기도 합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Baldwin이 이런 결론에 처음부터 도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의 초기 이스라엘 인식은 훨씬 우호적이었고, 1960년대 후반~1970년대를 거치면서 팔레스타인 문제와 식민주의를 중심으로 시각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이 <Baldwin의 이스라엘 인식 변화—1961 → 1970 → 1979>를 추적해 보면, 왜 흑인 민권운동의 일부가 점차 팔레스타인 연대로 이동했는지도 아주 잘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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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dwin의 이스라엘 인식 변화—1961 → 1970 → 1979>를 추적해주세요

네. 자료를 따라가 보니, Baldwin의 변화는 <1961년 친이스라엘 → 1979년 반이스라엘>이라는 단순한 전향이라기보다 훨씬 흥미롭습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누구를 역사의 주체로 보았는가>에 있습니다.

1961년에는 <유대인의 homeland>가 중심이고 팔레스타인인은 주로 “Arabs”로 보입니다. 1970년에는 이스라엘을 <서구 제국주의 체제> 속에서 보기 시작합니다. 1979년에는 마침내 <Palestinians>를 이름을 가진 정치적·도덕적 주체로 전면에 놓습니다.

1. 1961: <Israel and I seem to like each other>

1961년 9월 말 Baldwin은 이스라엘 정부의 초청으로 이스라엘을 방문합니다. 원래 목적은 이스라엘을 거쳐 아프리카로 가서 탈식민화된 아프리카에 관한 책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네게브 사막, 사해, 예루살렘 주변, 텔아비브, 하이파, 가자지구 가까이의 키부츠 등을 둘러보았습니다.

처음 반응은 꽤 따뜻했습니다.

“Israel and I seem to like each other.”

이스라엘 정부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고, Holocaust와 유럽의 반유대주의를 알고 있던 Baldwin에게 <박해받던 유대인들이 스스로 homeland를 세웠다>는 이야기는 상당한 매력이 있었습니다. 당시 아프리카 여러 나라가 식민지배에서 독립하던 시기였으므로, 이스라엘을 일종의 <억압받던 민족의 자결>이라는 틀에서 보는 것도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1961년 Baldwin도 결코 순진한 친시온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여행 중 이미 그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들이 보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서는 “5분을 걸어도 border를 만나고”, 사람과 이야기하면 영국 위임통치와 전쟁, 그리고 “the entire Arab situation”을 피할 수 없다고 썼습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 안의 아랍인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더 놀라운 대목이 있습니다. Baldwin은 아랍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I cannot blame them for feeling dispossessed; and in a literal way, they have been.”

즉,

<그들이 자신을 땅에서 쫓겨난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을 비난할 수 없다. 문자 그대로 그들은 dispossessed되었다>

고 이미 1961년에 썼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그는 당시 이스라엘인의 안보 논리도 인정합니다. 주변의 적대적인 아랍 국가들을 의식하면 이스라엘이 국내 아랍인의 이동을 통제하려 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1961년 Baldwin의 입장은 정확히 말하면

<Jewish security와 Arab dispossession 사이의 고통스러운 양가감정>

입니다.

그 자신이 “helplessly and painfully—most painfully—ambivalent”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이미 훗날의 Baldwin이 싹트고 있습니다.

그는 또 예멘계 유대인 등 비유럽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사회에서 차별받는 것도 관찰했습니다. 따라서 <박해받던 민족이 세운 국가가 내부에서 또 다른 인종적 위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도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1961년을 이렇게 정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상에는 공감했지만,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실제 작동 방식에는 벌써 불안감을 느꼈다.>

2. 재미있는 중간 지점: 1965

Baldwin은 이스라엘과 바로 절연하지 않았습니다.

1965년 자신의 희곡 <The Amen Corner>(아멘 코너)가 Israel Festival에서 공연되자 다시 이스라엘을 방문했고, 텔아비브 공연에서 무대 인사까지 했습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즉 Baldwin의 변화는 1961년 여행 직후 “이스라엘의 진실을 깨닫고 반시온주의자가 되었다”는 식의 갑작스러운 전향이 아닙니다.

<관계는 계속되었고 의문도 계속 커졌습니다.>

3. 1966–67: 결정적인 사상적 다리가 생깁니다

이스라엘과 직접 관계없는 한 글이 훗날 매우 중요해집니다.

1966년 Baldwin은 <A Report from Occupied Territory>(점령지로부터의 보고)라는 글을 씁니다.

그가 말한 “occupied territory”는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Harlem>입니다.

경찰이 흑인 주민들을 감시하고, 수색하고, 폭행하며 주민들의 저항을 진압하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Baldwin은 이렇게 썼습니다.

“Occupied territory is occupied territory.”

점령지는 어디에 있든 점령지라는 것입니다.

이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Baldwin의 사고방식이 바뀌고 있기 때문입니다.

1961년에는

<Jewish homeland 대 Arab security problem>

이라는 국가 간 분쟁의 언어로 보았다면, 이제는

<권력을 가진 국가와 그 국가에 의해 감시·통제되는 주민>

이라는 관점으로 세계를 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해인 1967년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서안지구, 동예루살렘, 가자지구, 시나이, 골란고원을 장악합니다.

따라서 Baldwin이 Harlem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occupation>이라는 개념이 실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와 놀랄 만큼 직접적으로 연결되게 됩니다.

Nadia Alahmed 등의 연구가 1967년을 Baldwin뿐 아니라 미국 흑인 급진주의자들의 이스라엘 인식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보는 이유입니다. SNCC와 Black Panther Party를 포함한 Black Power 진영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베트남, 아프리카 탈식민화, 미국 흑인 문제와 함께 <제국주의와 피억압 민족의 문제>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Baldwin 자신도 이 흐름 속으로 이동합니다.

4. 1970: 이제 공개적으로 “I am anti-Zionist”

1970년 <Essence>에 실린 Ida Lewis와의 인터뷰에서 전환은 완전히 명시적이 됩니다. 이 인터뷰는 뒤에 <Why I Left America>라는 제목으로 재수록되었습니다.

Baldwin은 먼저 중요한 구별을 합니다.

“I’m not anti-Semitic at all, but I am anti-Zionist.”

그리고 3천 년 전의 성서적 권리를 근거로 “Western bombs and guns”를 사용해 땅을 되찾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1961년과 근본적으로 달라집니다.

이스라엘을 더 이상 주로

<Holocaust 생존자와 박해받던 유대인의 homeland>

로 보지 않습니다.

대신

<Western geopolitical power의 일부>

로 보기 시작합니다.

그는 같은 인터뷰에서 서구가 중동에 “handle”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European pawn”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Baldwin은

<서구는 유대인에게도 관심이 없고 아랍인에게도 관심이 없다. 관심 있는 것은 oil과 세계 지배다>

라고 말합니다.

이 점 때문에 저는 Baldwin을 단순한 “반이스라엘 사상가”라고 부르는 것은 부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1970년 논리는

<Palestinians = victims, Jews = villains>

이 아닙니다.

오히려

<Palestinians는 서구 제국주의의 직접적인 희생자이며, Jews 역시 서구의 지정학적 목적에 이용되고 있다>

입니다.

즉 가해의 중심을 “Jews”가 아니라 <Western imperial power>에 둡니다.

5. 1970년의 Baldwin에게 Black experience와 Palestine이 겹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매우 Baldwin다운 변화입니다.

1961년 Baldwin은 아랍인을 관찰합니다.

1970년경에는 아랍인에게서 <자기 자신을 보기> 시작합니다.

1971년 Margaret Mead와의 대담 <A Rap on Race>에서는 극단적으로 이런 말까지 합니다.

“I have been, in America, the Arab…”

Mead는 그 비교를 “racist comment”라며 강하게 반박했습니다.

그 표현 자체에는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 유대인과 이스라엘 국가를 지나치게 겹쳐 놓는 위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Baldwin이 하려는 사고실험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Harlem에서 경찰과 백인 권력에 의해 관리되는 피점령자의 위치에 있었다. 그렇다면 팔레스타인인이 느끼는 국가 권력은 무엇인가?>

1966년의 <Harlem = occupied territory>가 이제 Palestine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6. 1979: <Palestinian>이 드디어 중심 주어가 됩니다

1979년에는 Baldwin의 사고가 완성됩니다.

여기서 저는 1961→1979의 가장 중요한 언어적 변화를 주목하고 싶습니다.

1961:
<Arabs>

1979:
<Palestinians>

입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명칭 변화가 아닙니다.

1961년의 “Arab problem”은 이스라엘 국가가 처리해야 하는 문제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1979년의 “Palestinians”는

<자기 역사, 자기 땅, 자기 권리, 자기 정치적 대표성을 가진 민족>

입니다.

그해 직접적인 계기는 Andrew Young 사건이었습니다.

Carter 정부의 UN대사였던 Young이 PLO의 UN 대표 Zehdi Terzi와 접촉한 사실이 드러났고, 당시 미국 정부의 PLO 접촉 금지 정책에 어긋났기 때문에 1979년 8월 사임했습니다. 미 국무부의 공식 외교문서도 이 경위를 확인합니다.

Baldwin은 이를 보고 <Open Letter to the Born Again>을 씁니다.

여기서 그의 18년간의 생각이 한꺼번에 터져 나옵니다.

그는 영국의 Balfour Declaration과 식민주의를 거론하고, Holocaust를 가능하게 한 유럽 기독교 문명의 반유대주의를 거론하고, 미국의 노예제와 원주민 정복까지 하나의 역사적 구조 속에 놓습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우리가 이야기한 유명한 문장이 나옵니다.

“The Palestinians have been paying for … Europe’s guilty Christian conscience…”

그리고 한 문장을 더 붙입니다.

“There is absolutely … no hope … without dealing with the Palestinians.”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변화입니다.

1961년에는 Baldwin 자신이 “Arab situation”을 두고 고통스럽게 양가적이었다면,

1979년에는

<팔레스타인인을 배제한 평화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고 단정합니다.

7. 그리고 처음 질문하신 <Third Reich> 발언

확인해 보니 처음 기억하신 것도 맞습니다.

UC Berkeley에는 Baldwin의 1979년 인터뷰 음성자료가 실제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 시기의 Baldwin은 이스라엘 건국이 “Third Reich가 없었다면” 그런 방식으로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따라서

<Palestinians should not have to pay for Europe’s crimes>

라는 논리를 폅니다.

같은 해 <The Nation>의 글에서는 그것을 더욱 정제하여

<Europe’s guilty Christian conscience>

라고 표현합니다.

즉 두 발언은 서로 다른 주장이 아니라 같은 생각입니다.

8. 그런데 1979년 Baldwin의 한 문장은 약간 수정해서 읽어야 합니다

1979년 그는 자신의 서구-이스라엘 분석에 대해

“it was always clear to me”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1961년 자료를 직접 읽어보면 이것은 조금 과장된 <회고적 자기서술>로 보입니다.

1961년에 이미 그는 영국 제국주의의 정치적 냉소, 아랍인의 dispossession, 이스라엘 내부의 인종적 차별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스라엘의 안보 필요성에도 상당히 공감했고 “Israel and I seem to like each other”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실제 궤적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간파했다>

가 아니라

<처음부터 의문은 있었고, 1960년대의 경험을 통하여 그 의문이 하나의 반식민주의 이론으로 발전했다>

에 더 가깝습니다.

이 차이는 꽤 중요합니다.

9. 세 시점을 압축하면

시기Baldwin이 보는 IsraelPalestinian/Arab의 위치핵심 개념
1961박해받은 유대인의 homeland, 그러나 심각한 모순이 있는 국가dispossessed “Arabs”homeland / homelessness
1966–70서구 권력과 결합한 국가피점령·피억압 집단과 흑인 경험이 연결됨occupation / imperialism
1979Western interests의 지정학적 전초기지독립적인 역사적·정치적 주체인 “Palestinians”colonialism / responsibility / Palestine

그래서 Baldwin의 변화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저는 이렇게 하겠습니다.

<1961년 Baldwin은 이스라엘에서 유대인의 집을 보면서 자신의 homelessness를 생각했다. 1979년 Baldwin은 그 집을 만드는 과정에서 집을 잃은 팔레스타인인을 보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의 가장 중요한 이동입니다.

그리고 더 깊은 층위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공감이 사라져 팔레스타인에 공감하게 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끝까지 Holocaust와 유럽의 반유대주의를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1962년 <The Fire Next Time>에서도 Third Reich와 Holocaust를 기독교 서구문명의 도덕적 파산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다룹니다.

그래서 후기 Baldwin의 논리는 역설적으로 이렇습니다.

<Holocaust가 너무나 심각한 범죄이기 때문에, 바로 그 범죄를 기억하는 방식이 또 다른 민족의 dispossession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저는 이것이 Baldwin의 팔레스타인론에서 가장 강력하면서도 오늘날까지 가장 논쟁적인 부분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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