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vs 페르샤 전쟁, 미국 vs 이란 대결은 피할 수 없었나입력 2026.01.24
임명묵
- 2026년의 참극: 테헤란의 시신 가방과 '자비드 샤'의 환영
- 어긋난 운명: 네오콘은 왜 이란의 '빅 딜'을 걷어찼나
- 승자의 저주: 아랍의 봄, 그리고 솔레이마니가 판 함정
- 폭풍 전의 봄날: 핵 협상 타결과 위태로운 희망
그리스-로마-유럽-미국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서양문명, 그리고 중국과 한국, 일본 등 아시아 문명. 그 사이에도 여러 문명이 있지만 그중 서양문명과 가장 대결 구도를 유지해 온 건, 페르샤로 대표되는 중근동(오리엔트) 문명, 기원 7세기 이후로는 이슬람 문명이 있다. 이란은 혈통 상 그리스, 로마와 겨루던 민족이고, 종교적으로는 기독교 vs 이슬람 대립 구도에서 절반의 이슬람(시아파) 대표 격이다.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타인의 관계다.
1기 트럼프와 2기 트럼프 정부의 공통점 중 하나는 이란에 대한 강압적, 대결적 태도다. 이번 칼럼은 두 민족, 두 종교, 두 문명의 2천 5백년 간에 걸친 대결 관계를 제목에 담았지만, 그 내용은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 이후 47년간의 역사다. 매우 압축적인 시기의 역사다. 임명묵 필자는 이란 현대사를 악당과 선인이 싸우는 활극이 아닌, 운명에 맞서다 끝내 좌절하는 '그리스 비극'으로 읽어낸다.
1부에서는 네오콘의 등장과 아랍의 봄이 꼬아버린 이란의 운명을, 2부에서는 트럼프의 합의 파기 이후 희망이 사라진 이란 사회가 어떻게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는지를 조망한다. 필자는 올해 33세의 신예 작가로서 중국, 한국, 러시아를 다룬 묵직한 책들을 잇달아 출간했다. 이번 칼럼은 맥락 없이 쏟아지는 이란발 뉴스를 역사적, 비극적 맥락에서 그 본류를 추적하는 글이라 할 수 있겠다. [편집자 주]
지난 9일 테헤란에서 불을 피운 시위대 // 사진=연합뉴스2026년 1월 8일 세계의 이목이 이란으로 쏠렸다. 2025년 12월 말에 경제난에 항의하는 시장 상인들의 시위가 시작되었고, 날이 갈수록 격해지는 상황이었다. 어느새 시위 군중 사이에서는 ‘자비드 샤(의역하면 폐하 만세)’라는 구호도 등장했다. ‘샤’는 전통적으로 이란의 군주를 일컫는 호칭으로, 현대 맥락에서는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이 몰아낸 팔레비 왕가를 상징한다. 팔레비 왕가의 가주로 1979년 혁명 이래로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레자 샤 팔레비는 이러한 움직임에 고무되었고, 급기야 1월 8일에 전국적인 봉기를 호소하게 되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정부는 인터넷 차단 이후 신속하게 진압 작전을 개시했다. 인터넷이 차단되고 조사가 어려워 얼마나 희생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시민들이 사망한 것은 분명하다. 인터넷 통제를 뚫고 유출된 영상 중에는 테헤란 남부 카흐리자크 법의학 센터에 놓인 수많은 시신 가방을 담은 영상도 있었다.
이 충격적인 뉴스에 서방 사회에서는 다시금 이란 이슬람 공화국 정부를 향한 규탄의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에 어떤 방식으로든 개입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다시금 이란을 중심으로 중동의 정세가 일촉즉발로 치닫는 것이다.
이런 정국 속에서 한국에서도 이란 사태에 대한 각종 논평이 활발히 등장하고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의 여론부터 정당이나 시민단체의 공식 논평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런데 대중적인 차원에서 기본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전제가 있어 보인다.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 체제가 철거되면 미국의 제재도 해제되고, 그 후 신생 이란은 세속주의적인 민주 공화국으로 무난히 재탄생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다.
물론 그 방식은 한국 및 세계 전역에 거주하는 재외 이란인을 포함하여, 이번 시위 과정에서 거리에 나온 많은 이란 시민이 지지하는 모델이기도 하다. 실제로 교육률이 높고 풍부한 역사와 문화를 지닌 이 나라가 국제적으로 고립, 봉쇄되어 잠재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움의 여론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전망은 이란 및 중동 현대사에 대한 피상적인 관찰, 예컨대 팔레비 시절 테헤란 일부에 국한된 현대화된 풍경에 근거하고 있을 때가 많다. 게다가 그 논지에는 오직 1979년 이슬람 혁명이라는 하나의 사건만을 기준으로 이란 현대사 전체를 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 팔레비 시절만 해도 건국자 레자 샤와 아들인 모하마드 레자 샤의 치세가 다르다. 이슬람 혁명으로 쫓겨나서 세계인에게 잘 알려진 모하마드 레자 샤 시기 또한, 연합군 점령기, 모사데크 시기, 백색혁명 시기, 부활당 시기 등 여러 국면으로 나뉜다. 하물며 이슬람 공화국 역시 혁명기,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 호메이니 사후 각 대통령 정권으로 무수히 많은 우여곡절과 변동성을 거친 복잡한 시대였다.
사실 현재 이란이 처한 상황은 이 기나긴 시대를 거치면서 이란 내부에서의, 또 이란을 둘러싼 외부 행위자 간의 무수한 상호작용이 의도치 않게 빚어낸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구조적 비극이 감당하기 어려운 파국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상황 파악이 선결될 필요가 있다.
현재 이란이 겪고 있는 곤경의 핵심 원인은 핵 개발 시도를 계기로 더욱 무겁게 가해진 미국의 경제 제재다. 이란 국가의 경제적 기회가 박탈되는 것은 물론이고, 내부에서도 중산층의 삶이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그 가운데 제재 우회 경로를 장악한 국가 엘리트의 힘만 계속 커진다. 여기서 국민의 불만이 생긴다. 이란은 포위되어 있으니 어떻게든 이 국면을 버텨야 한다고 믿는, 그래서 혁명을 지켜야 한다는 지도부는 더욱 완고한 입장을 고수하게 된다.
이건 1979년 이슬람 혁명 이래로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을까?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모습 // 사진=Unspalsh비극의 첫째 뿌리: 네오콘의 등장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분명히 1979년 이슬람 혁명 이래로 미국, 이스라엘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를 드러냈다. 444일 간의 인질극으로 미국을 충격에 빠트린 주 테헤란 미국 대사관 인질극, 미국을 대(大) 사탄, 이스라엘을 소(小) 사탄이라고 부르는 호메이니의 거침없는 비난만 보아도 그러했다.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 남부에 진군하자, 레바논 남부 시아파 주민들에게 호메이니 혁명 사상을 전파하여 헤즈볼라를 결성하도록 도운 것도, 미국과 관계가 악화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도 이 시기에 이란-미국 관계가 현재와 같이 양국 간 전쟁이 상시 거론될 정도로 최악은 아니었다. 물론 1983년 레바논 헤즈볼라가 감행한 베이루트 미 해병대 막사 폭탄 테러, 1988년 290명의 이란 민간인이 미국의 오인 사격으로 사망한 이란 항공 655편 격추 사건과 같은 굵직한 유혈 갈등이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 미국의 주적은 소련이 이끄는 국제 공산주의였기에, 이란이 미국 정계와 민간의 차지하는 관심 정도는 오늘날보다 낮았다.
1989년 동유럽 공산주의 붕괴로 탈냉전 시대가 도래했을 때도 이란은 미국 대전략에서 최우선 순위를 차지하는 핵심 적대국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1990년 쿠웨이트 침공으로 미국과 다국적 연합군의 징벌을 받은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반이스라엘 정책을 수십 년 동안 이어오고 있는 시리아의 하페즈 알아사드 대통령과 리비아의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살아있었고, 이란은 아무리 높게 쳐줘도 시리아, 리비아와 비슷한 정도의 위협으로 미국에 인식되었을 따름이다.
게다가 미국은 1990년대에는 이런 국가급 행위자뿐 아니라 소련군 철수 이후 아프가니스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탈레반이나, 전 세계 도시와 농촌으로 확산하고 있던 알카에다를 비롯한 지하디스트 무장 단체를 시급한 안보 위협으로 보고 있었다.
호메이니에게서 최고 지도자 직위를 승계받은 알리 호세인 하메네이와 민선 대통령이 이끄는 이란 지도부는, 이러한 미국의 안보 관념에 맞추어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고자 하였다. 이란 이슬람 혁명은 공산주의 혁명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사회주의 국제주의와 제3 세계 운동의 계보 위에서 만들어진 혁명이었다.
동구권 붕괴는 이란 지도부에게도 거대한 충격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상황에서 이란은 초강대국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상당한 압박감을 받았을 것이다. 이란은 1990년대부터 IMF와 세계은행의 권고라고 해도 믿을 법한 자체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으며, 1997년 적극적 개혁파 대통령인 모하마드 하타미 정부가 출범하자 본격적으로 대서방 유화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하타미 정부 재임 시기인 2001년, 미국에서 9.11 테러가 발생하자 이란은 즉각 조의를 표명하고, 미국 정부가 주도하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탈레반 토벌과 부족 질서 안정화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하타미 대통령은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의 테제인 ‘문명의 충돌’을 반박하며 ‘문명 간 대화의 시대’를 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때만 해도 미-이란 관계에 훈풍이 부는 듯 보였다.
하지만 조지 부시 대통령과 딕 체니 부통령 체제, 즉 미국 주도로 전 세계의 ‘자유민주화’를 무력을 써서라도 달성하겠다는 급진적인 네오콘(신보수주의)은 이란이 내민 손을 매몰차게 걷어찼다. 2002년 연두 교서에서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이란,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지정하며 테러와의 전쟁을 개시할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발언을 쏟아냈다.
당시 이란은 핵무기 개발이 확인된 상태도 아니었고, 과거 이라크처럼 대외 정복 전쟁을 추구하지도 않았음에도 이들과 동일 선상에 놓였다는 점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2003년 미국이 사담 후세인을 축출하고자 벌인 이라크 전쟁은 이란에 실존적 공포를 안겨주었다. 이란이 8년간 대적해도 밀어낼 수 없었던 이라크군을 미군은 3주 만에 분쇄하고 승리를 선언한 것이다.
지난 22일 다보스 포럼에 참여한 트럼프 대통령 // 사진=연합뉴스거절당한 ‘빅 딜’: 생존을 위한 마지막 제안
생존의 위협을 느낀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주 테헤란 스위스 대사를 통해 미국 국무부에 일종의 비공식적인 ‘빅 딜’을 제안했다. 서한에는 이란에 대한 제재를 모두 해제하고, 평화적인 원자력 개발 접근권을 보장하고, 이라크의 시아파 성지에 대한 특수관계를 인정해 준다면, 이란은 IAEA(국제원자력기구)에 전적으로 협력하고, 핵무기 개발을 시도조차 하지 않겠다는 보증을 철저히 지킬 것이며, 미국의 이라크 점령 정책에 협조하고, 하마스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에 물질적 지원을 중단할 것이라는 약조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부통령 딕 체니와 국무부 차관 존 볼턴은 이라크가 무너지는 것을 보며 이란이 겁에 질렸다는 증거라며 이란의 제안을 일축했다.
자신들이 제안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한 이란 지도부 내에서는, 미국의 임박한 군사적 위협에 맞서야 한다는 혁명수비대를 주축으로 하는 보수파의 목소리가 빠르게 주류의 위치로 올라오게 되었다.
네오콘이 주도한 이라크 전쟁과 대(對) 이란 강경책은 중동을 거대한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갔다. 여전히 혁명과 이란-이라크 전쟁 세대가 주류를 차지하는 이란에서는, 미국의 일방적인 중동 군사 개입을 제국주의의 산물이자 이란에 대한 위협이라는 여론이 크게 확산했다.
이후 이러한 여론은 극보수파 대통령인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의 당선에 상당 부분 이바지했다. 2005년부터 2013년까지 재임한 아흐마디네자드는 본격적으로 우라늄 농축을 가속하며, 이란인들이 지금까지도 고통받게 될 가혹한 경제 제재의 시작을 알렸다.
한편 사담 후세인이 사라진 이라크에서는, 수니파와 시아파 간 종파 갈등이 극심해지고 있었다. 시아파 맹주로서 이란은 이라크에서 거대한 활동 공간을 얻을 수 있었는데, 솔레이마니로 대표되는 혁명수비대 쿠드스군(대외 작전부대)이 이라크에 파견되어 카타이브 헤즈볼라를 비롯한 각종 시아파 민병대의 결성, 조직, 훈련을 지원했다. 이들은 수니파 무장 세력 및 미군 점령 세력과 쟁투를 벌이며, 다수 시아파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이라크 민선 정부와 복잡한 관계를 형성했고, 이라크는 점차 친이란 세력으로 기울게 된다.
이란의 이라크 내 영향력 확대는 사우디아라비아가 걸프 지역의 세력 균형이 바뀌고 있다는 위협을 체감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서로 대규모 육군력을 마주하며 대치하던 이란과 이라크의 균형이 붕괴하고 이란이 걸프의 유일한 육군 강국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란 시위대의 모습 // 사진=Unspalsh비극의 두 번째 뿌리: 아랍의 봄
아흐마디네자드 시기(2005-2013)에 이란은 미국과 이스라엘에 본격적인 강 대 강 공세에 나섰다. 전술했듯 적극적인 우라늄 농축 추진, 북한과 협력 강화, 이라크에서 대(對) 미국 항전, 2006년 레바논 전쟁 당시 헤즈볼라 군사 지원 등 지정학적 갈등의 수위를 높였다. 국내적으로는 자유화되고 세속주의적 성향이 두드러지는 혁명 이후 세대인 청년층들에 대한 억압도 거세졌다.
모하마드 하타미 정권 시기에 불어왔던 국내 자유화와 대미 유화책의 시대가 저물었다. 보수적 국민과 정권 강경파들의 지지 속에서 아흐마디네자드가 하타미 시절의 정책들을 되돌리자, 청년층들의 반발도 뒤따라 나왔다. 이들은 자신들이 태어날 무렵에 벌어진 혁명과 전쟁보다는, 청소년기부터 접한 위성통신과 인터넷을 통해 서방 문화에 익숙해진 세대였다. 하지만 시아파 최대 성지인 나자프와 카르발라가 자리한 이라크에서 들려오는 끝없는 포성은 청년층의 반발을 억누를 좋은 명분이 되어주었다.
전환점은 2009년에 나타났다. 아흐마디네자드가 재선에 도전하는 해, 개혁파의 경쟁 후보로는 고참 혁명 세대이자 1980년대에 총리를 지냈던 미르 호세인 무사비가 출마했다. 이슬람 공화국이 농촌까지 보급한 보건소 인프라 덕택에 폭발적으로 늘어난 청년 인구는 아흐마디네자드가 하타미 노선을 폐기하는 것을 막자며 투표장으로 몰려나왔고, 무사비가 이끄는 개혁파가 정권을 다시 탈환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아흐마디네자드의 승리였는데, 개혁파 지지 대중 사이에서는 빠르게 부정선거를 향한 의혹이 퍼져나갔다. 어쩌면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를 중심으로 한 정권 최고 엘리트들이 현재 민의를 따르는 것보다는 강경책을 견지하는 것이 더 전략적으로, 또 이념적으로 타당하다 판단하고 이를 행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들의 표가 강탈당했다고 여긴, 주로 중산층으로 구성된 청년 인구는 전국 각지에서 “내 표는 어디로 갔는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와 광장으로 나왔다. 무사비를 비롯한 개혁파 엘리트들은 시위대의 의견을 경청해야 한다며 최고 지도자와 보수파 정치인들을 압박했는데, 이 과정에서 경찰과 바시지(이란의 준군사조직) 대원이 출동해 시위를 폭력으로 진압하는 등 갈등이 폭발했다.
무사비가 채택한 상징색인 녹색을 따서 ‘녹색 운동’이라고 알려진 2009년의 시위는, 그럼에도 선거 결과를 뒤집거나 가시적인 정책 변화를 당장 도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녹색 운동을 전적인 실패라고 할 수는 없었다. 다수 청년층이 공유하는 대중 집회 경험은 이슬람 공화국 정부를 불신하는 독립적인 청년 문화가 본격적으로 탄생하는 시발점이 되었으며, 정권 내부에서도 혁명을 기억하지 못하는 새로운 청년 인구에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에 관한 무수한 논쟁이 점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 선거마저도 무리해서 개혁파의 승리를 막는다면 사회의 저항은 더욱 거세질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미국에서는 네오콘 부시 행정부가 물러나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종식을 내건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등장한 참이었다. 그렇게 좌절된 미국-이란 대화의 순간이 다시 열리는 듯했다.
하지만 2010년 12월, 테헤란에서 서쪽으로 5천km 떨어진 튀니지에서, 모하메드 부아지지라는 한 과일 행상인이 실업과 빈곤, 폭력적 경찰의 모욕적 행태에 분개하며 분신을 한 이후 모든 흐름이 뒤집혔다. 부아지지의 목소리는 발원지인 튀니지를 넘어서, 알자지라와 페이스북을 타고 아랍 세계 전역을 뒤흔들었다. 이 여파로 튀니지와 이집트의 권위주의 정부가 무너졌고, 사람들은 이를 “아랍의 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란 역시 아랍의 봄을 내심 반기는 눈치였다. 아랍의 봄 이후 오랜 기간 아랍의 세속주의 군부에 억압된 이슬람주의 정당이 선거로 집권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노선은 다르지만 이념적으로 유사한 정부들이 아랍, 특히 이집트에 들어설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슈레크(아랍 세계 동부)에서 상황은 완전히 다르게 흘러갔다.
부패와 독재에 항거하는 저항 운동은 독재 정부가 봉합하고 있던 각종 사회 분열 단층선과 맞물리자 그야말로 폭발했다. 시리아에서는 알라위파와 기독교 동맹이 아사드를 중심으로 뭉쳤고, 수니파 지하드주의 반군이 거센 도전에 나서며 14년 이상 시리아를 찢어놓은 시리아 내전이 펼쳐졌다.
예멘에서도 하디 정부가 물러선 이후에 기존 남북예멘의 갈등에 시아파 종파 분쟁과 부족 분쟁이 겹치면서 내전이 발생했다. 바레인 왕국에서도 수니파 왕실과 시아파 국민 간의 갈등은 대규모 시위로 번졌다. 바야흐로 아랍 세계에 국가 붕괴가 파도처럼 밀어닥치고 있었다.
작년 12월 29일 이란 시위대의 모습 // 사진=연합뉴스혼돈의 도가니: 아랍의 봄과 ‘솔레이마니’의 시간
중동 지정학의 아슬아슬한 균형이 깨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각국은 경쟁국이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막고, 혼란을 자국의 기회로 삼고자 개입에 나섰다. 섬나라 바레인 왕국에서 벌어진 시위가 그 예이다. 이란은 바레인 왕국의 시아파 국민의 목소리를 들으라 선전했고, 사우디는 바레인 왕실이 시위대를 진압할 수 있게끔 정치,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수니파 칼리파 왕실이 시위대를 억누르고 권위를 회복하면서 바레인 위기는 종식되었다.
하지만 섬에 국한된 도시국가나 다름없는 바레인과 달리 영토 국가인 예멘과 시리아에서 상황은 간단치 않게 흘러갔다. 사우디아라비아, 튀르키예, 카타르, 이란, 이스라엘 등 역내 세력이 제각기 대리 군을 물색하여 자금과 무기를 지원했다. 중동에 군사 기지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과 러시아도 역시 발을 걸쳤다. 이란 역시 이 혼란에서 위협과 기회를 동시에 포착했다. 예멘에서 이란은 시아파 계열 후티(안사르 알라)를 지원했고, 자국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홍해에 세력권을 구축할 수 있었다.
시리아는 훨씬 더 문제가 오래갔다. 1982년 시리아의 바트당 정권과 하페즈 알아사드 대통령은 무슬림 형제단 시위에 격분하며 하마 시를 포격으로 쓸어버린 초유의 학살을 저지른 바가 있었다. 시리아 대통령직을 승계한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 역시 시위 초기부터 잔혹한 무력 진압으로 사태에 대응했으나, 종파 갈등이 뚜렷한 시리아에서 유혈 진압은 반대로 내전으로 흘렀다.
바트당 정부를 혐오하는 수니파 군인들이 이탈하며 병영에서 무기가 풀려나왔고, 국제사회의 지지, 사우디아라비아와 튀르키예의 직간접적 지원, ‘이교도와 이단’을 척결하겠다는 지하드 전사들의 유입으로 아사드 정부는 빠르게 열세에 몰렸다.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부터 이란과 우호 관계를 구축한 아사드 정부를 상실하는 것은 이란으로서는 쉽사리 용납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란 혁명 국제주의의 상징인 헤즈볼라를 향한 육로 연결의 중추가 시리아였기 때문이다. 이에 솔레이마니 장군이 이끄는 혁명수비대 쿠드스군이 파견되었고, 이란 정부는 “시아파 성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개입해야 한다”라며 아사드 정부 지지를 정당화했다.
이미 헤즈볼라 지원 경험으로 시아파 지역에서 이념적, 군사적으로 현지인들을 훈련해 이란의 동맹으로 삼는 데 능수능란했던 이란은, 아랍의 봄 정국에서 신속한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솔레이마니의 전술과 지휘에 힘입어 이란은 이라크-시리아-레바논을 거쳐 지중해까지 뻗어 나가는 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고, 예멘을 통해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까지 점유했다.
이란은 순식간에 중동에서 가장 빠르게 세력을 확대한 위협적인 강국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지도만 본다면 호메이니가 간절히 바랐던 ‘시아파 반제국주의 세계 혁명’이 목전에 도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혼란기에 당면한 위협을 막아내고 기회를 기민하게 포착한 이란은, 전술적으로는 큰 승리를 거두었을지 몰라도 전략적으로는 오히려 수렁에 빠지게 된다.
이스라엘 국기 // 사진=Freepik역습의 서막: 사우디와 이스라엘의 ‘반(反)이란 포위망’
가장 큰 문제는 중동의 인접 국가들이 이란을 최대 위협으로 인식하게 되면서 전천후 견제가 시작된 것이었다. 사실상 이란을 막아주던 방파제인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가 무너진 뒤에 이란의 정치적 영향력이 시리아에서도 압도적으로 자리 잡자, 이스라엘은 사실상 육상에서 홀로 이란과 마주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2009년부터 임기를 다시 시작한, 강경 우익 성향의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가시화되는 이란의 위협에 맞서 가용 수단을 총동원하여 이란을 견제하기로 고심했다.
사우디아라비아도 이란에 마찬가지의 공포를 느꼈다. 이란의 종파가 자신들과 다른 시아파라는 문제도 문제이지만, 그들이 왕정을 전복하고 등장한 민중 혁명 정권이라는 사실도 불편했다. 사우디 정부는 왕가의 존속을 절대시하기 때문이다.
사우디는 이란이 북쪽 이라크와 남쪽 예멘을 발판으로 자국을 포위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품게 되었으며, 이란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지역 질서에서 더 적극적으로 활동해야 한다는 결심을 굳혔다. 2015년에 국방장관에 오르며 차기 지도자로 부상한 사우디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후티를 몰아내고자 예멘 내전에 개입을 시작했고, 2016년에는 이란과 단교하며 본격적인 ‘중동 냉전’을 시작했다. 사우디는 중동 어디서든 이란 및 이란의 대리 세력과 맞선다면 적극적으로 자금을 지원했다.
이스라엘과 사우디라는 역내 주요 국가의 공동 견제를 받게 되자 이란 지도부에서는 향후 노선을 둘러싼 격론이 벌어졌다. 후티, 헤즈볼라, 시리아, 이라크까지 뻗친 이 ‘저항의 축’을 더 확장하며 이란의 안보를 공고히 해야만 할까? 아니면 아랍의 봄 이후 얻은 이 성과를 최대한 보전하며 미국과 관계 개선에 나서야만 할까? 솔레이마니를 비롯한 혁명수비대 고위 지휘관은 전자의 강경론을 추구했지만, 외교 및 경제 당국자들은 반대로 이제야말로 후자의 유화책이 작동할 수 있는 시기라고 주장했다.
유화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데는 세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로는 사우디와 이스라엘까지 참여하는 대(對) 이란 포위망을 견뎌내기에는 이란 경제가 제재로 인하여 취약해져 있으므로, 지정학 프로젝트에 추가적인 자금을 지출하기보다는 무역 확대를 통해 현대화를 위한 자본 축적과 개발에 힘을 써야 할 때라는 점이 있었다.
둘째로는 이란 및 수니파 지하드 전사들과의 투쟁에 지칠 대로 지친, 그래서 중동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전략적 무게추를 옮기려는 미국과 오바마 행정부와는 대화가 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란은 ISIS 토벌에 미국과 비공식적으로 협력하면서 이면에서 신뢰를 구축하기도 했다.
마지막 셋째 이유는 국내 정치였다. 2009년 녹색 운동 이후 정부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청년층은 ‘저항의 축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냉소적으로 나왔고, 이란이 가난한데 왜 이란과 관련도 없는 아랍에 그렇게 자원을 쏟아부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2013년 선거에서 청년층의 지지에 힘입어 당선된 이란의 중도 개혁파 하산 로하니는 자신을 지지해 준 국민 여론에 보답하겠다며 핵 협상에 나설 것을 공언했다. 막후 조정자인 알리 하메네이도 핵 협상에 동의했다. 그는 한쪽에서는 솔레이마니 장군을 통해 저항의 축을 가동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자바드 자리프 외무장관을 파견해 핵 협상에 나서게 하는 이중전략을 구사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공화당의 막대한 반발을 뿌리치고 협상장에 나왔다.
이 결정에는 이란을 미국의 중동 지역 질서에 끌어들이면, 함부로 미국과 그 우방에 적대하는 군사 행동에 나서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작용했다. 그렇다면 미국은 제한된 전략 자산들을 동아시아로 배치하여 중국 견제에 더 집중할 수 있을 것이었다. 결국에 지난한 협상 끝에, 마침내 포괄적 공동 행동계획(JCPOA)이라고 알려진 이란 핵 협상이 이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P5+1)가 모두 동의하는 가운데 성사되었다.
이는 로하니가 당선된 지 2년 만인 2015년의 일이었다. 제재가 해제되자 이란은 천연자원 수출액을 바탕으로 국내 인프라 현대화에 나서고, 그동안 접근할 수 없었던 고급 자본재와 중간재를 구매하고, 낡은 국내 여객기를 교체하기 위해 보잉과 에어버스 앞에서 ‘큰 손’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 한국산 자동차와 가전제품도 이란 중산층의 차고지와 집 안으로 본격적으로 유입되어 사랑받을 수 있었다. 미국에서 세계사적인 이변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필자 임명묵은 서울대학교 아시아언어문명학부에서 서아시아 지역을 전공했다. 동대학원에서 '아제르바이잔에서의 러시아 혁명'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는 이란 현대사를 주제로 한 책을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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