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생존의 역사> (The Jewish People: A Story of Survival) 요약 및 평론
요약: 4,000년 고난과 끈기의 기록
이 다큐멘터리는 유대 민족이 겪어온 4,000년의 역사를 추적하며, 반복되는 박해와 추방 속에서도 어떻게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남았는지를 탐구한다. 서사는 성서 시대의 기원으로부터 시작하여 로마 제국에 의한 디아스포라(유리방랑), 중세 유럽의 박해, 그리고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인 홀로코스트를 거쳐 이스라엘 국가 건설에 이른다.
작품은 유대인의 생존 동력을 단순히 물리적인 저항이 아닌,
- <책의 민족>으로서 공유해온 신앙, 전통, 그리고 교육에 대한 집착에서 찾는다.
- 나라를 잃고 세계 전역으로 흩어진 상황에서도 토라(Torah)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의식이 어떻게 세대 간의 단절을 막았는지 분석한다.
- 또한, 20세기 중반의 참혹한 학살 이후에도 무너지지 않고 재건을 이뤄낸 유대인들의 회복 탄력성을 조명하며 마무리된다.
평론: 비극을 극복한 문화적 유전자(DNA)에 대한 고찰
이 다큐멘터리는 한 민족의 역사를 단순한 연대기적 나열을 넘어 <생존의 기술>이라는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흔히 유대인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만 치부하기 쉽지만, 본작은 그 고난이 오히려 유대 정체성을 강화하는 용광로 역할을 했음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유대인의 생존 기반이 영토나 군사력이 아닌 <기록과 기억>에 있었다는 통찰이다. 보편적인 국가들이 영토를 잃으면 소멸하는 것과 달리, 유대인은 언어와 경전을 보존함으로써 <움직이는 조국>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이는 현대의 다문화 사회나 세계 시민주의 관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만, 2008년 제작된 작품인 만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과 같은 현대의 복잡한 정치적 역학 관계보다는 민족적 자긍심과 종교적 생존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척박한 환경에서 지적·정신적 가치를 통해 존재를 증명해 온 그들의 궤적은 인간의 의지가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인문학적 보고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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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
아래 평론은 <공개 시놉시스와 배급 정보>를 바탕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이 다큐는 2008년 PBS 계열로 소개되었고, Andrew Goldberg 연출, 약 58분 분량으로 유대 민족의 4천 년 역사를 “생존의 역사”라는 틀에서 압축해 서술하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핵심 질문은 “이집트의 노예 상태, 왕국의 상실, 디아스포라, 반유대주의, 포그롬, 홀로코스트를 거치고도 왜 유대인은 사라지지 않았는가”입니다.
<요약>
이 다큐의 기본 구조는 매우 전통적인 문명사 서사로 보입니다. 즉, 유대인의 기원을 고대 근동의 유목·부족 세계에서 찾고, 성서적 기억과 역사적 재난을 연결하면서, 민족적 정체성이 어떻게 해체되지 않고 이어졌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작품은 보통 다음과 같은 흐름을 따를 가능성이 큽니다. 먼저 고대 이스라엘의 형성과 왕국, 성전, 그리고 바빌론 유수나 로마 지배 같은 결정적 단절을 제시합니다. 이어서 “국가를 잃었는데도 공동체는 사라지지 않았다”는 역설이 강조됩니다. 이때 핵심은 영토보다 더 오래 살아남은 것, 곧 율법, 기억, 의례, 가족, 교육, 공동체 제도였다는 점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디아스포라의 역사입니다. 다큐는 유대인의 삶을 단순한 추방의 역사로만 보지 않고, 여러 제국과 문명 속에서 적응과 창조를 반복한 역사로 제시하는 듯합니다. 바빌로니아, 중세 이슬람권, 기독교 유럽, 동유럽, 근대 서유럽과 러시아 등 각 공간에서 유대인은 소수자로 존재했지만, 동시에 상업, 해석 전통, 학문, 법, 종교, 가족 네트워크를 통해 공동체를 재생산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의 제목에 있는 “survival”은 단지 죽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흩어짐 속에서도 정체성을 유지하고 재구성해 왔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또한 다큐는 반유대주의의 장기 역사를 중요한 축으로 다룰 가능성이 큽니다. 중세의 종교적 배제, 근대 민족주의 시대의 인종주의, 러시아 제국권의 포그롬, 그리고 결국 홀로코스트로 이어지는 파국이 “유대인의 생존”을 가장 극적으로 부각시키는 역사로 제시될 것입니다. 홀로코스트는 이 다큐에서 단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유대인의 집단적 기억과 현대적 자기이해를 결정적으로 재구성한 분기점으로 놓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다음 현대 이스라엘 국가의 형성과 현대 유대 정체성, 그리고 세계 각지 유대 공동체의 지속이 마무리 부분을 이룰 것입니다.
<평론>
이 다큐의 강점은 분명합니다. 첫째, 짧은 시간 안에 유대인의 역사를 “국가의 역사”가 아니라 “기억과 제도의 역사”로 보여주려 한다는 점입니다. 이 접근은 왜 유대인이 단순히 한 민족국가의 흥망으로 설명되지 않는지를 직관적으로 전달합니다. 둘째, 생존의 원인을 외부 박해만이 아니라 내부의 문화적 응집력, 학습 전통, 의례, 가족 구조와 연결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교육적으로 유익합니다. 셋째, 입문용 다큐로서는 매우 효율적입니다. 유대사를 처음 접하는 시청자에게 큰 줄기를 빠르게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PBS 소개와 여러 배급처 설명도 이 작품을 “수천 년에 걸친 개관”으로 규정하고 있어, 본래 목적이 깊이 있는 논쟁보다 넓은 개요 제시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한계도 분명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생존>이라는 틀이 지나치게 강하면, 유대인의 역사가 너무 일관된 피해-극복 서사로 정리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부의 다양성, 즉 미즈라히·세파르디·아슈케나지의 차이, 종교적 유대인과 세속적 유대인의 긴장, 계급 차이, 지역별 정치적 입장 차이 등이 희미해질 수 있습니다. 또 “유대 민족”을 4천 년 동안 거의 동일한 집단처럼 그리면, 현대 역사학이 강조하는 정체성의 역사적 재구성과 변형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다큐는 생존의 연속성을 잘 보여줄 수 있지만, 그 연속성이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변형과 단절, 재발명을 포함하는지도 함께 보여줘야 균형이 잡힙니다.
둘째, 2008년 제작이라는 점도 중요합니다. 이 시기 서구 대중 다큐는 홀로코스트 이후의 유대 생존과 이스라엘 건국을 비교적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그 연결이 더 비판적으로 검토됩니다. 특히 현대 이스라엘 국가와 세계 유대인의 관계, 팔레스타인 문제, 시온주의 내부의 스펙트럼, 그리고 반유대주의 비판과 이스라엘 국가 비판의 구분 등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더 정교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 다큐가 “생존”을 강조할수록, 현대 중동 문제를 역사적 보상이나 귀결처럼 읽게 만들 위험도 있습니다. 그 지점에서는 별도의 비판적 보완이 필요합니다.
결론적으로, <The Jewish People: A Story of Survival>은 유대사의 핵심 줄기를 빠르게 이해하기에는 유용한 입문 다큐로 보입니다. 다만 그것을 최종 해석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유대인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라는 질문을 여는 출발점으로 보는 편이 맞습니다. 좋은 개론이지만, 유대인의 역사를 둘러싼 복수의 정체성, 현대 정치, 내부 차이를 함께 공부해야 비로소 전체 그림이 보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강한 입문용 작품이지만, 후속 독서와 비판적 시청이 꼭 필요한 다큐>입니다.
원하시면 이어서 <이 다큐의 역사관 vs Shlomo Sand, Simon Schama, Paul Johnson의 유대사 서술 비교>도 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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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생존의 역사> (The Jewish People: A Story of Survival) 내용 요약
1. 기원과 성서 시대의 태동
유대 민족의 역사는 약 4,000년 전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다. 다큐멘터리는 유대교의 핵심인 일신교 신앙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조명한다. 다신교가 지배하던 고대 근동에서 오직 하나의 신만을 섬긴다는 개념은 혁명적이었으며, 이는 유대 민족을 결속시키는 최초의 강력한 고리가 된다. 이후 모세의 출애굽 사건을 통해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는 여정은 유대인들에게 <자유>와 <선민의식>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준다. 다윗 왕과 솔로몬 왕 시기에 예루살렘 성전을 건립하며 민족적 전성기를 맞이하지만, 이 영광은 오래가지 못하고 바빌로니아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고 첫 번째 유배 생활이 시작된다.
2. 로마의 정복과 대확산(디아스포라)
기원후 70년, 로마 제국은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며 제2성전을 파괴한다. 이는 유대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분기점이 된다. 영토를 잃은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흩어지는 <디아스포라>의 시대를 맞이한다. 땅을 소유할 수 없고 한곳에 정착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유대인들은 생존을 위해 독특한 전략을 취한다. 그들은 물리적인 성전 대신 <책의 성전>인 토라(Torah)와 탈무드(Talmud)를 정신적 지주로 삼는다. 어디에 있든 경전을 공부하고 토론하는 전통은 유대인들이 각기 다른 문화권에 흡수되지 않고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만든 핵심 동력이 된다.
3. 중세 유럽의 박해와 고립
중세 유럽에서 기독교가 국교화되면서 유대인들은 사회적 타자로 전락한다.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오명 속에 그들은 거주 지역이 제한되는 <게토(Ghetto)>에 갇히게 되고, 토지 소유나 공직 진출이 금지된다. 다큐멘터리는 이 시기 유대인들이 생존을 위해 금융업, 무역, 의학 등 당시 기독교인들이 기피하거나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에 집중했음을 설명한다. 십자군 전쟁 당시의 학살과 14세기 흑사병의 원흉으로 몰려 겪은 박해는 유대 민족에게 끊임없는 위협이었으나, 역설적으로 공동체 내부의 결속력은 더욱 단단해지는 결과를 낳는다.
4. 계몽주의와 근대화의 파도
18세기 계몽주의가 등장하며 유대인들에게도 변화의 바람이 분다. 서유럽을 중심으로 유대인 해방(Emancipation)이 이루어지며 그들은 게토 밖으로 나와 주류 사회의 시민권을 얻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많은 유대 지식인이 배출되었으며 예술, 과학, 철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그러나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에서는 여전히 <포그롬(Pogrom)>이라 불리는 조직적인 유대인 학살과 차별이 자행된다. 이러한 이중적인 상황 속에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시오니즘(Zionism) 운동을 본격화하기 시작한다.
5. 홀로코스트: 멸절의 위기와 생존
20세기 중반, 나치 독일에 의한 홀로코스트는 유대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심연이었다. 다큐멘터리는 체계적이고 산업적인 방식으로 자행된 600만 명의 학살 과정을 담담히 추적한다.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이 비극은 유대 민족의 존립 자체를 위협했다. 하지만 수용소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 했던 이들의 증언과 기록은 생존에 대한 유대인들의 집념이 단순히 육체적 보존을 넘어 정신적 계승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전쟁이 끝난 후, 살아남은 자들은 폐허 위에서 다시 일어선다.
6. 이스라엘 건국과 현대의 유대인
1948년 이스라엘 국가의 건국은 2,000년 넘게 이어진 방랑의 종지부를 찍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다큐멘터리는 고대 언어인 히브리어를 현대어로 부활시키고, 사막을 옥토로 바꾸며 국가를 재건한 유대인들의 노력을 조명한다. 현대 유대인들은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물리적 국가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디아스포라 공동체라는 두 축으로 존재한다. 작품은 유대인이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은 이유가 끊임없는 외부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을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에 완벽하게 전수했기 때문임을 강조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세진님, 요청하신 분량에 맞춰 내용을 정리해 드렸습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언급된 시대 중 특히 관심이 가는 시기가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관련 도서나 심화 자료를 더 찾아봐 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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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샨 제5대 국왕 | |
아케메네스 제국 초대 샤한샤 키루스 2세 𐎤𐎢𐎽𐎢𐏁 | Cyrus the Grea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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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즉위 | |
사망 | |
능묘 | 파사르가다에 키루스 대제 영묘 |
재위기간 | 안샨 제후왕 |
아케메네스 왕조 샤한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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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루스 원통 中
메디아, 리디아, 신바빌로니아 등을 비롯한 중동 및 소아시아 지역의 강대국들을 차례로 정복하여 페르시아 제국의 기틀을 다진 업적으로 유명하다. 키루스 2세의 등장을 전후로 메디아의 속국에 불과했던 페르시아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통일한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거듭났다. 단순히 영토를 넓혔을 뿐 아니라 피지배 민족에 대한 비교적 관대한 통치를 펼쳐 제국의 다민족 통치기법에 있어 하나의 거대한 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후 유대민족을 바빌론 유수에서 해방시키고 성전 재건을 도운 덕분에 그리스도교에도 친숙한 인물이다. 개신교의《개역개정 성경》에서 '고레스'로 표기된다.
현존하는 기록 중 키루스 2세의 생애를 묘사한 가장 상세하고 믿을 만한 것은 헤로도토스의 저술인《히스토리아》로 여겨지고 있기에 본문의 내용도 대체로 이를 기반으로 한다. 마찬가지로 키루스 2세의 일대기를 상세하게 묘사한 크세노폰의 《키로파에디아》는 내용이 보다 상세하고 극적인 부분도 많지만《히스토리아》에 비해 민속적, 지적 가치는 크더라도 사료적 가치는 낮다는 것이 정설인지라 참고하기 어렵다.
이란 고원을 중심지로 발흥한 국가인 메디아의 왕 아스티아게스는 어느 날 자신의 딸인 만다네의 소변으로 온 세상이 잠기는 꿈을 꾸었다. 이에 사제들을 불러 해몽해보니 만다네의 아이가 왕이 되어 아시아를 지배한다는 해석이 나왔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아스티아게스는 이란 남부 파르스(페르시아) 지방 안샨 왕국의 왕자였던 캄비세스[7]에게 시집보냈던 딸을 다시 수도 엑바타나로 불러들여 그녀가 아들을 낳는 즉시 그를 죽이려고 했다. 만다네는 얼마 후 임신했는데, 어느 날 음부에서 포도나무가 자라 온 세상으로 뻗어 나가는 꿈을 꾸었다. 이 또한 일전의 해몽과 같은 해석이었다. 이에 아스티아게스는 결국 하르파고스라는 신하에게 만다네의 아이를 데려가 죽일 것을 명령했다.
그런데 당시 아스티아게스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외손자가 차기 왕이 되는 것이 순리였다. 이 때문인지 하르파고스는 키루스를 직접 죽이지 않은채, 소치기 미트리다테스에게 주어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소치기도 차마 아이를 죽이지 못해 아내의 제안으로 사산한 자신의 아들의 시신과 바꿔치기 해서 키루스를 아들처럼 길렀다.[8] 이를 미처 몰랐던 하르파고스는 소치기 아이의 시신을 가져가 아스티아게스에게 임무를 끝냈다고 보고했고 소치기의 죽은 아이는 하르파고스가 보는 앞에서 땅에 묻혔다.
세월이 흘러 소치기의 아들로 자란 키루스는 동네 아이들과 놀던 중 왕으로 뽑혔다. 그런데 어느 고위 관리의 아들이 고집을 부리면서 내가 왜 소치기 자식의 말을 들어야 하냐는 투로 키루스의 말을 듣지 않고 훼방을 놓았다. 이에 화가 난 키루스는 그 아이를 흠씬 두들겨 패줬고, 관리의 아들은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일러 바쳤다. 그렇게 고발당한 키루스는 아스티아게스 앞으로 불려나갔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놀이라지만 왕인 저의 명령을 어긴 것은 죄가 아닙니까?"
"놀이라고는 해도 일단 왕이 된 것이니 액땜을 한 셈 치고, 죽이지 않아도 됩니다"
문제는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아스티아게스는 '일단 액땜한 셈 치자'며 자신의 외손자를 용서했지만 아이를 죽이라는 자신의 명령을 저버린 하르파고스는 용서하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 뒤 왕은 하르파고스를 연회에 초대하여 맛좋은 고기 요리를 대접했다. 맛있게 요리를 먹은 하르파고스에게 아스티아게스는 남은 고기가 있으니 가져가라며 광주리를 내주었다. 그 광주리 안에는 하르파고스의 13살 된 아들의 머리와 사지가 담겨 있었다. 하르파고스는 왕의 연회에 아들을 먼저 보냈는데, 하필 아들이 왕이 보낸 자객들의 손에 살해당하고, 몸은 요리가 되어 임무에 실패한 대가로 어린 아들의 고기를 먹어야 했던 매우 잔혹한 처벌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하르파고스는 당황하지 않고, 얼굴색도 바꾸지 않은채 담담하게
"모든 것은 당신의 뜻에 있습니다. 어찌 죄인으로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이 사건으로 아들을 잃은 하르파고스는 겉으로는 얼굴 색도 바꾸지 않고 충성을 맹세했지만, 집에 돌아오자마자 얼굴색을 바꾸고 속을 게워낸 후, 아내와 다른 아들들과 함께 죽은 아들의 장례를 치르게 한 후, 아스티아게스를 증오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리 왕의 명령을 어긴 벌이라 할 지라도 소년을 죽여 요리로 만든 후 그 아비에게 먹인 건 너무나도 심한 처사이자 악행이었기에 이 일이 메디아 전역에 알려지자 메디아 백성들도 크게 분노하면서 하르파고스를 동정하고 아스티아게스로부터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 때마침 남쪽의 파르스 지역에서 반란을 계획하고 있었다.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 칼을 갈고 있었던 하르파고스는 겉으로는 아스티아게스에게 충성하는 척하여 왕의 의심을 피하고, 뒤로는 키루스를 계속해서 충동질해 반란을 모의하게 하면서, 여러 조언과 계략을 전수했다.
키루스가 성인이 되자 하르파고스는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뒤, 자신의 부하를 사냥꾼으로 변장시킨 후 죽은 토끼의 뱃속에 그 날의 진실을 쓴 밀약서를 넣어 몰래 키루스에게 전달했다. 이를 받아들인 키루스는 안샨인들을 소집시켜 첫 번째 날에는 미개간지를 개간하게 하고, 다음날이 되자 고기와 술을 푸짐하게 준비해서 사람들을 접대한 후
"어제와 오늘 중 어떤 날이 좋습니까?"
"말해 무엇하겠소? 당연히 오늘처럼 먹고 마시는 거지요!"
"그렇지요. 전자는 메디아에서 일하는 우리와 같은 타민족과 메디아의 피지배자들이고 후자는 우리의 피와 땀, 눈물을 먹고 노는 메디아의 지배자들입니다! 이제 우리의 힘을 보여줄 때가 왔습니다! 무기를 들고 일어섭시다!!"
전승에 따르면 하르파고스는 남은 아들들과 함께 아스티아게스의 가슴을 창자루로 찌르며
"그 옛날, 내 아들에게 행한 짓을 잊지 않았겠지? 난 그 시간 동안 피눈물을 흘리며 지내왔어."
"어리석은 놈! 차라리 같은 종실인 네가 왕이 되었다면 오히려 더 나았을 것이다! 너의 그 작은 원한으로 아무 죄 없는 메디아인들은 이제 미개한 파르스 놈들의 노예가 되었구나!"
이렇게 키루스 2세는 광활한 메디아 제국을 정복했다.[10] 사실 이 이야기 자체가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 이야기와 거의 같다. 또한 인도의 전설적인 영웅인 크리슈나도 이와 동일한 내용의 탄생 설화를 가지고 있다. 즉 여기저기 퍼져 있었던 설화를 키루스 2세에게 갖다붙였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시골 귀족 자식을 두들겨 팬 것에 불과한 소년이 메디아 정도나 되는 거대 제국의 왕에게 끌려가 직접 심문받는다는 것이 개연성이 없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고전 영웅이나 위인과 같이 묘사하고자 그 행적을 베끼는 행위는 고대에 빈번했다. 단, 오이디푸스 신화는 키루스 2세 사후 약 50년 뒤에 창작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이러한 일대기가 오이디푸스 신화를 참조하여 창작되었을 가능성은 없다. 오히려 키루스 2세의 설화가 어떻게든 그리스에 전해져서 오이디푸스 신화가 탄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를 공격했을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될까 궁금하여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 신전에서 신탁을 받았다. 여제관 피티아가 답신을 주었다. "(크로이소스가 페르시아를 치면) 강력한 제국이 무너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강력한 제국'이라면 누가 봐도 페르시아가 아니겠는가? 크로이소스는 바로 전쟁을 선포했고,[12] 낙타 부대를 동원한 키루스의 우회 기동 전술[13]에 보기 좋게 패배했다. 리디아도 페르시아 못지않은 강국이었음을 그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14][15]
다행히 크로이소스 본인은 키루스의 아량으로 목숨을 건지고 왕의 조언자로 살 수 있었다.[16][17][18]
이 이야기는 래리 고닉의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 1권에서도 소개되며, 김광수의 《논리와 비판적 사고》에서도 주어의 모호함을 지적하면서 언급되는, 즉 델포이 신탁의 모호함이 나타나는 대표적인 이야기이다. 'Delphic'이라는 단어의 뜻은 '애매모호'가 되었으며, 델파이 기법 역시 여기에서 이름을 따왔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양군은 캅파도키아의 프테리아에서 처음 맞붙었는데, 치열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승부가 나지 않았지만 크로이소스는 자신의 군대가 숫적으로 불리해 승리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뒤 수도인 사르데스로의 퇴각을 결정했다. 그리고 리디아의 동맹인 이집트와 스파르타, 신바빌로니아의 지원을 받아 4개월 뒤에 다시 페르시아를 공격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키루스 2세는 리디아군이 물러난 것을 알게 되자 곧바로 사르데스로 군대를 진격시켰고,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 역시 프테리아 전투에서 유의미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기에 키루스 2세가 자신을 쫓아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적이 코앞까지 진격해오자 어쩔 수 없이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고 한다.
키루스 2세는 군대를 모은 후, 고지대에서 크로이소스의 리디아 군대를 맞이했다. 리디아와 페르시아 양측에는 모두 기병이 있었으며, 그들은 병거 앞에 도열해 있었다. 크로이소스는 밀집 대형으로 유명한 이집트군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키루스 2세도 비밀 병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페르시아군의 사령관을 맡은 하르파고스는 키루스 2세에게
"리디아의 말들은 낙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니, 낙타 향기가 적의 말들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살아 있는 한, 그 끝을 알 수 없는 법."
"즉, 모든 것을 마무리짓는 결말을 봐야 마지막을 평가하는 법..."
"아! 솔론이여!!"
"저... 그 솔론이란 분이 누구입니까?"
이로써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은 지중해 동부와 오리엔트 전역의 신흥 패자로 떠올랐고, 그 적극적인 공세의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으며, 주변 국가들은 벌벌 떨면서 이 무적의 정복자가 펼치는 위세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540년까지, 키루스 2세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남부 킬리키아와 이란 남부 엘람의 수도였던 수사를 정복했다. 그러나 아직도 서아시아에는 큰 세력이 남아 있었으니 바로 셈계 칼데아인의 제국 신바빌로니아였다.
메네 메네 테켈 우파르신
유대인 예언자였던 다니엘은 이 낙서를 신바빌로니아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해석했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메네'는 '수를 셌다', '테켈'은 '저울에 달았다', '파르신'은 '나눠진다'라는 뜻이었다.[20] 다니엘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냈다.
'하느님이 날짜를 세보니 바빌론의 통치기간이 끝나가고 있으며, 왕을 하느님의 저울에 매달아보니 기준에 미치지 않아, 이 나라를 쪼개서 다른 나라에 나누어준다.'
그리고 이 내용과 관련이 있는지는 몰라도 오래지 않아 기원전 539년, 오피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키루스 2세가 유프라테스 강의 물줄기를 막고, 우회해 바빌론 정복에 나섰다.《성경》의 내용에 따르면 저녁의 어둠 속에서 페르시아군의 특공대가 그 유명한 이슈타르의 문을 통과했고, 페르시아군이 쳐들어오고 있는 것도 모른채 연회를 벌이고 있었던 벨사자르의 만찬이 끝남과 동시에 바빌론은 페르시아군에게 함락당했다고 한다.
바빌론을 정복한 뒤, 키루스 2세는 자신에 누구인지 선포했다.
나는 키루스.
I am Cyrus.
Adam aʰmiy Kūruš''
𐎤𐎢𐎽𐎢𐏁
세상의 왕이요,
king of the universe,
šarru kiššat māti/šar-kiššati/šar kiššatim
위대한 왕이며,
the great king,
Xšāyaθiya vazạrka/Xšāyaθiya xšāyaθiyanām
강력한 왕이고,
the powerful king,
바빌론의 왕이면서,
king of Babylon,
šakkanakki Bābili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이자,
king of Sumer and Akkad,
šar māt Šumeri u Akkadi
세계 사면의 왕이다.
king of the four quarters of the world.
šarru kibrat 'arbaim/šar kibrāti arba'i/šar kibrāt erbetti
이후 전쟁이 시작되었고, 초반에는 페르시아군이 선전하여 마사게타이 여왕 토미리스[22]의 아들까지 포로로 잡게 되었다. 이에 분노에 찬 여왕이 절규했다.
"피에 굶주린 키루스여! ...... 내가 이제 좋은 충고의 말을 해 줄 테니 그것을 받아들이시오. 그대는 이미 마사게타이 군대의 3분의 1에 대해 못된 짓을 했지만, 나에게 아들을 돌려주고서 아무 탈 없이 이 나라에서 떠나도록 하시오. 그러나 만약 그대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마사게타이의 주님Despotēs이신 태양Hēlios에게 진실로 맹세하노니, 피를 탐하는 그대를 피에 물리게 해 주겠소."
그러나 키루스 2세는 끝끝내 풀어주지 않았고 결국 마사게타이의 왕자는 자살하고 말았다.[23] 키루스 2세로 인해 아들을 비참하게 잃은 마사게타이의 여왕은 분노했고, 그 다음 전투에서 매복 끝에 키루스 2세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난세의 영웅이었던 키루스 2세가 전사했다. 이에 토미리스 여왕은 키루스 2세의 시체를 난도질하고, 베어낸 키루스 2세의 머리를 핏물에 담가두었다고 한다.루벤스의 그림
그러나 헤로도토스 자신도 이 기록에 대해 키루스 2세의 죽음에 관한 세 가지 설 중 '그나마 믿을 만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어 신빙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만일 키루스 2세가 정말로 헤로도토스의 기록처럼 마사게타이 원정 중에 대패하여 군대는 거의 궤멸당하고 그 자신까지 전사했다면 그 여파가 아케메네스 제국 전체에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에서는 그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으며, 키루스 2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들 캄비세스 2세는 부친의 원수를 갚으려 시도한 정황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대군을 동원해 서남쪽의 이집트에 대한 정복전쟁을 개시하는 등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24]
키루스 2세의 말년과 죽음에 대해서는 헤로도토스의 기록 외에도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예컨대 크테시아스[25]는 키루스 2세가 데르비케스족과 싸우던 중 코끼리 부대의 급습을 받고 낙마하여 허벅지를 창으로 찔리는 등의 치명상을 입었고, 결국 데르비케스족의 왕을 패사시켰으나 부상이 악화되어 3일 만에 죽었다고 했다. 반면, 크세노폰은 키루스 2세가 수도인 페르세폴리스에서 노년기를 보내며 아들인 캄비세스 2세에게 통치에 대한 가르침을 전수한 후 평화롭게 자연사했다고 기록했다. 헬레니즘 시대 바빌론 출신의 역사가였던 베로수스의 경우, 키루스 2세가 북동쪽 국경지대에 사는 유목민인 다하이(Dahae)족[26]의 세력에 대해 근심하다가 죽었다고 기록했다.
이렇게 여러 이설이 제기되는데, 가장 정확하다고 볼 수 있는 당사국 아케메네스 왕조의 기록이 알렉산드로스 3세가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우면서 대부분 소실된 것이 그 이유로 추측된다.
비길 자가 없는 가장 위대한 세계 정복자
세계 역사상 최초로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은 군주로서 그 칭호에 걸맞은 대업을 이루었다. 세상을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면 더 이상의 전쟁은 없다는 이념 아래, 메디아, 리디아, 신바빌로니아 등 페르시아보다 강대한 왕국들을 정복하여 당시 서아시아 세계를 통일했다. 또한 모든 종교들을 존중하고 노예제도를 폐지했으며, 군인이 점령지의 백성들을 약탈하는 걸 금지하고, 남자든 여자든 빚 때문에 노예가 되는 것에 반대했으며, 인간들을 억압하지 말고 노동자들에게 적절한 급여를 지불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현재 뉴욕 UN 본부 청사에 복사본으로 전시되어 있는 키루스 원통[27]을 만들어 자신의 업적을 과시했다.[28] 전문 한국어 번역 한편 키루스 2세를 전후로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전몰자의 장례를 치르고, 상이군인에게 의족을 다는 등 피통치인의 복지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이는 페르시아 이전에 번성했던 대국인 신아시리아 제국이 잔혹한 피정복민 정책 때문에 틈만 나면 반란이 일어나 결국은 피지배 민족들에 의해 멸망해버린 것에 대한 반면교사였던 것으로 보인다.[29]
사실 아케메네스 왕조의 영역은 키루스 2세의 후계자인 캄비세스 2세가 정복한 이집트나[31] 다리우스 1세가 정복한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펀자브, 인더스 강 유역 등을 제외하면 전부 키루스 2세가 정복한 것이었다. 그것도 조그마한 파르스 일대를 기반으로 봉기하여 서아시아의 4대 왕국[32] 중 3개를 잇달아 무너뜨린 것이었다.
물론 정복이 너무 빨랐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제국이 어수선했고, 이는 키루스 2세와 캄비세스 2세가 붕어한 뒤 각지에서 반란이 빈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반란들을 모두 진압하고 본격적인 교통 정리를 시작하며 대제국의 기틀을 다진 것은 다리우스 1세의 공이었다. 다리우스 1세는 캄비세스 2세의 6촌으로 키루스 2세의 5촌 조카였지만 키루스 2세의 딸 아토사가 다리우스 1세와 결혼하여 사위이기도 했고, 이에 따라 뒤를 이은 크세르크세스 1세는 키루스 2세의 외손자가 되었다.
한편, 키루스 2세의 왕묘는 이란 남부 파르스 지방의 파사르가다에에 남아 있다. 키루스 2세가 왕묘를 검소하게 만들라고 유언해서였는지 당대 여러 왕들의 무덤에 견주면 정말 작다. 오죽하면 키루스 2세가 죽고 약 200년 뒤에 쳐들어온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게 그 전설의 키루스 2세의 무덤이란 말인가? 이리도 초라한 무덤이?"
O man, whoever you are and wherever you come from, for I know you will come, I am Cyrus who won the Persians their empire. Do not therefore begrudge me this bit of earth that covers my bones.
"여보시게, 자네가 누구든 그리고 자네가 어디서 왔든, 나는 자네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네, 나는 페르시아인의 제국을 건국한 키루스라네. 나의 뼈를 감싸고 있는 이 한 줌의 흙을 비웃지 마시오."
이 글귀를 본 알렉산드로스 3세는 일절 왕묘를 건드리지 않은채 그냥 가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왕묘는 작았지만 내부에는 많은 보물들과 사치품으로 치장되어 있었다고 하며, 알렉산드로스 3세가 멀리 원정을 간 사이에 도굴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21세기 현재에도 키루스 대제를 기리고자 이란 민족주의자들이 키루스 대제의 날을 제정하고 그의 왕묘에서 업적을 기리는 행사를 열고 있다. 이슬람 혁명 이후 젊은 세대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이란의 군주다. 신정에 반대하는 차원에서 '위대하고 관용적인 페르시아'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 인물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의 정의와 관용에 대한 이야기가 SNS에서 퍼지기도 한다. 강경 보수층조차 대놓고 그를 반대하지는 못하고 반정부 움직임과 연결되는 것을 차단하려는 정도다. 소수민족도 강경 민족주의자가 아닌 이상 그가 다민족의 풍습을 존중한 다원주의자였다며 높게 평가한다.
나는 고레스에게 명령한다. '너는 내 양을 쳐라.' 그는 내 뜻을 받들어 이루리라. '너는 예루살렘을 재건하여라. 성전의 기초를 놓아라.'<이사야서> 44장 28절(공동번역)
개신교와 《공동번역 성서》 속 고레스가 바로 키루스 2세다. <이사야서>는 전통적으로 기원전 8세기경의 저작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 때문에 기원전 6세기경에 태어난 키루스 2세를 이미 기원전 8세기에 이사야가 히브리어로 쿠루쉬, 즉 고레스로 예언한 것은《성경》속 예언의 성취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성서비평학의 발흥 이후 독일의 신학자였던 베른하르트 둠은 이른바 <3구분설>을 제시했는데, 40장에서 55장까지를 <제2 이사야>, 56장 이후를 <제3 이사야>로 구분하여 무명의 다른 저자가 이사야의 이름을 빌려 후대, 즉 키루스 2세의 등극 이후인 기원전 5세기 이후에 저술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둠은 사용된 어휘와, 심판 이후의 회복의 메시지가 <제2 이사야> 및 <제3 이사야>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점을 제시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사야 문서 참조.
물론 <이사야서>의 예언이 사후 예언이냐 아니냐는 것과는 별개로, <이사야서>는 전반적으로 키루스 2세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다.
<이사야서>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키루스를 일으키시고(이사 41,2.25) 부르셨다(42,6 등). 그는 목자(44,28), 기름부음 받은 이(45,1), 하느님께서 오른손을 붙잡아 주신 이(42,6; 45,1)라고 일컬어진다. 고대 근동에서 이러한 표현들은 신이 선택한 임금에게 적용되는데, 페르시아의 임금을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선택하셨다는 점이 보통의 경우와 다르다.도미니코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29-2: 이사야서 40-66장》, 바오로딸, 2017, 145쪽
유대인에게 있어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바빌론 제10왕조 신바빌로니아 제국은 사르곤 왕조 신아시리아 제국을 계승한 공포의 압제자였다. 유대인들의 왕국을 무너뜨리고 백성들을 노예로 삼아 자국으로 끌고간 철천치 원수였던 것이다. 하지만 키루스 2세는 그런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즉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민족을 해방시킨 구원자였다. 뿐만 아니라 신바빌로니아에 잡혀 있었던 유대인들을 해방시킴과 동시에 고향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고,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돕기까지 했다. 그러한 키루스 2세의 관대한 처우에 유대인들은 감격하여 그를 '기름 부음을 받은 자'(메시아)라고 칭송했을 정도였다.(이사야 45,1)[33]
야훼께서 당신이 기름 부어 세우신 고레스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오른손을 잡아주어 만백성을 네 앞에 굴복시키고 제왕들을 무장해제시키리라. 네 앞에 성문을 활짝 열어 젖혀 다시는 닫히지 않게 하리라."
크로이소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아르고스와 스파르타 두 폴리스 중 스파르타를 선택해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동맹은 체결했으나, 외국으로 원정을 나갈 여력이 안되었기에[35] 키루스 2세에게 사신을 통해 경고장을 보냈다.[36]
"만일 이오니아로 진출을 시도할 시, 스파르타가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이는 세상 그 누구든 간에 '스파르타'라는 이름 하나면 두려워할 것이라는 오만한 생각에서 나온 경고였다. 물론 스파르타가 오늘날에도 무용으로써 이름이 높지만, 당시 대제국을 다스리고 있었던 키루스 2세의 입장에선 서쪽 저 멀리 있는 조그마한 반도의 도시 이름 따위 알 턱이 없었다. 오히려 이오니아 출신의 시종을 불러 스파르타가 대체 무엇이냐?라며 물었다고 한다.
- 키루스 2세의 이야기는 일본 만화《히스토리에》 1권에서도 등장한다. 여기서는 일본에서 불리는 명칭인 '큐로스'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원래 역사물 자체가 역사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번역하기 쉽지 않은 장르라 생긴 오역이다. 당장 다른 작품도 아니고《히스토리에》내에서도 '카르디아'를 '칼데아'라고 번역한 사례[37]가 있음을 감안한다면, 일본식 발음으로 번역한 정도는 오역이라고 깔 정도는 아니다. 또한 키루스 2세가 생전에 불린 정확한 발음은 불명이나, 현재 복원한 고대 페르시아어로 Kūruš로 표기됨을 감안하면 오히려 일본식 독음이 더 가까울 수도 있다. 참고로 이때 키루스 2세에게 붙어 메디아 제국의 정복을 도운 하르파고스 장군의 일화도 같이 나온다. 왕이 시킨 한 가지 일을 끝까지 완수하지 못해서 자신과 이름이 똑같은 친자식의 고기 요리를 먹어야만 했다고 나오는데,《히스토리에》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그 한 가지 일이라는 것이 키루스 2세의 신탁과 관련된 것이었다. 즉 태어나자마자 데려다가 죽이라고 했는데 살려보내서 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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